특별강좌/성령은사

(방언은사3) 방언과 성령세례와의 관계

이요나 2007. 2. 14. 12:01

(방언은사3) 방언과 성령세례와의 관계

*서론*

오늘은 방언의 세 번째 목적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방언의 세 번 째 목적은 "교회와 성도의 덕을 세우는 일"입니다. 여기서 덕을 세우다라는 말은 '집을 세우다' '집을 짓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영적 의미로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집을 세운다, 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집을 짓는다는 뜻입니다.

 

성경에는 자주 너희는 사랑 안에서 덕을 세우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게 덕을 세우는 것인지를 잘 이해 못할 때가 있습니다. 오늘 바울은 본문에서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고전14:4)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방언을 하는 것은 덕을 세우는 일의 체험이기도 합니다. 22절을 보면 바울은 방언을 말하는 4번째의 목적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좀 어려운 부분이기 때문에 문맥을 따라 잘 살펴 볼 필요성이 있습니다. 바울은 14장 22절에서 말하는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다"(고전14:22)라고 한 부분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왜냐하면 23절에서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무식한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말하였기 때문입니다. 22절과 23절은 어떻게 보면 모순같이 느껴집니다. 22절에서는 방언은 불신자들을 위한 표적이라 하였고 23절에는 교회에서 모두 방언으로 말하면 불신자들이 교인들을 미쳤다 하지 않겠느냐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한마디로 말하면 "방언은 불신자를 위한 표적이며 당신들은 미치광이다 라는 표적이 됩니다.

* 번역의 잘못인가? *
이것에 대한 변증은 많이 제출되어 있습니다. 이제부터 몇 가지 논증들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J. B. 필립스가 회화체로 읽기 쉽게 번역한 현대 영어 신약 성경을 보면 "그러므로 방언은 불신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믿는 자들을 위한 하나님의 표입니다"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읽는 성경구절과 아주 상반된 내용입니다. 이에 대한 빌립스의 의견은 그의 주석에서 "이곳은 공인 본문에서 번역한 사람이 잘못한 유일한 곳으로서 그 본문의 3절의 문맥을 볼 때 바울의 글씨가 잘 알아 볼 수 없었던지 아니면 번역자의 잘못일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의 주석이 옳은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만 그의 주장은 이사야의 예언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다른 방언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지라도 저희가 오히려 듣지 아니하리라"(고전14:22)의 "저희가 오히려 듣지 않았다"라는 부분을 불신자들이라고 해석하고 있는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 전체의 흐름을 살펴볼 때 이 예언은 이사야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에게 임할 심판의 예언이지만 불신자들을 향한 표적은 아닙니다.

*심판의 표적인가? *
이사야가 말한 징표는 시리아의 침략을 예언한 것으로 신명기 28장 49절에는 "곧 여호와께서 원방에서 땅 끝에서 한 민족을 독수리의 날음같이 너를 치러 오게 하시리니 이는 네가 그 언어를 알지 못하는 민족이요 그 용모가 흉악한 민족이라 노인을 돌아보지 아니하며 유아를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며 네 육축의 새끼와 네 토지의 소산을 먹어서 필경은 너를 멸망시키며 또 곡식이나 포도주나 기름이나 소의 새끼나 양의 새끼를 너를 위하여 남기지 아니하고 필경은 너를 멸절시키리라 그들이 전국에서 네 모든 성읍을 에워싸고 네가 의뢰하는 바 높고 견고한 성벽을 다 헐며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의 모든 성읍에서 너를 에워싸리니"(신28:49-52)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을 살펴보면 포위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자들에게 내려지는 심판의 증거이지 믿지 않는 자들을 믿게 하기 위한 표적은 아닙니다. 이와 같은 이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앞에서 살펴본 바 있는 방언에는 기도의 방언과 외국어의 방언이 있다고 하는 사람들과 같이 어느 한 부분의 말씀을 자기들의 주장에 귀착시키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세례 받은 증거? *
그러나 사도행전 2장을 살펴보면 성령이 교회 위에 임할 때에 제자들은 각 나라말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할 때 그들이 모두 갈릴리 사람인 것과 외국어의 능력이 없는 것을 알던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믿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때 베드로가 일어나 성령에 의하여 그들의 죄를 지적하였을 때 그 날 3천명의 사람들이 교회로 들어 왔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던 유대인에게 방언이 징표가 되어 오순절 날 그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한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방언은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한 표적이라고 기록된 부분은 이해하기 매우 어렵다고 전제한 것입니다. 이에 대한 또 다른 주장을 하나 살펴보겠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방언을 말하는 것은 성령의 세례를 받은 첫 번째 증거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이론은 많은 교회에서 가르치고 있어서 방언을 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이 성령세례를 받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풍조까지 생겼습니다. 이들의 주장을 따르면 방언을 하지 못하면 성령세례를 받지 못한 증거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성령세례는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 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선물이다 라고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방언을 말하지 못하면 성령세례를 받지 못한 증거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방언을 하는 성도들은 방언을 받은 것이 무슨 벼슬이나 한 것처럼 야단들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교회내의 성도들을 차별하는 기준이 되며 분열을 일으키는 원인까지 되었습니다.

*무당 굿하는 것이 아니지! *
우리는 고린도전서 12장에서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나심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하심이라는 말씀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은사가 교회를 나누고 분열시키는 원인이 된다면 그것은 잘못된 가르침입니다.

 

그들의 주장을 따르면 방언이 성령세례를 받은 증거이며 성령이 충만하다는 증거가 됩니다만 나는 그러한 교회 속에서 진정으로 성령의 충만한 모습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의 열매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마치 전쟁터에 나온 사람들 같아서 자기들의 주장을 따르지 않으면 모두 공산당 취급을 하기 일쑤입니다.

 

어제 어느 분께서 우리교회는 모두 방언을 한다고 하여서 그 분의 교회 홈페이지를 따라 들어가 보았습니다. 그들은 중국에서 시작된 또 하나의 교파로서 안식일을 주장하는 교파였습니다. 물론 침례와 성찬 등을 나누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성령세례의 근거로 어린아이부터 전 교인이 방언을 한다고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은 성경의 기록과 모순이 많이 있습니다.

나는 그들의 주장을 무시하거나 반박하려는 것은 아닙니다만 자기의 주장을 납득시키려면 다른 사람의 말을 귀담아 듣는 예의와 질서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성경의 명령입니다.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요 화평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내 것은 옳고 남의 것은 그르다하는 것은 공산당식입니다. 그들의 교리처럼 무엇을 한다, 무엇을 지킨다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경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지키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랑을 실천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으로써 성도의 삶 속에서 열매로 나타나야 합니다. 무당 굿해먹는 것처럼 요란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이며 그 사랑은 평안과 기쁨으로 나타납니다. 또 인내하며 자비롭고 선한 일을 하며, 충성되고 온유하고 절제합니다. 이와 같이 방언은사의 표적에 대한 논쟁은 해석이 분분합니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몇 가지 주장들은 모두 가능성을 말한 것이지 확정 지을 수 없는 논리들입니다. 이제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방언을 좀더 살펴봄으로써 이 문제를 확정지어 볼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