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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언은사4)룰룰랄라는 방언이 아니다

이요나 2007. 2. 14. 12:02
(방언은사4)룰룰랄라는 방언이 아니다

*서론*
오늘은 고린도전서 12장부터 14장까지에 기록된 말씀을 중심으로 방언의 논쟁에 대한 부분들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방언을 말하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당된 것인가에 대한 의혹을 살펴보겠습니다. 바을은 고린도전서 12장 11절에서 여러 가지 은사를 나누어주심에 대하여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느니라"고 증거하였습니다.

 

바울 사도는 앞에서 성령의 은사 아홉 가지를 열거한 후에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고 말하였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주권에 의하여 그가 부르신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셨음을 의미합니다.

바울이 말한 아홉 가지 은사 중 방언의 은사에 대하여는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즉 "여러 가지 방언"을 (kinds of tongues)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방언에는 여러 종류의 방언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방언이 모두 같지는 않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고 개소리 새소리가 다 방언은 아닙니다.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아름다운 노래나 말도 신비스럽겠거늘 하물려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전달되는 방언이야말로 그 신비함이 어떻겠습니까?

 

우리가 아홉 가지 은사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면 모든 사람들에게 지혜의 은사, 지식의 은사 또는 믿음의 은사나 신유의 은사 등을 주신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 문맥 전체를 살펴보면 방언의 은사도 모든 사람에게 주신 것이 아닌 것만큼은 확실합니다. 따라서 얼마 전에 저의 칼럼 감상난에 모든 성도가 방언을 하는 교회라고 말한 그 교회는 성경의 가르침과 다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 28절에 이 부분을 다시 거론하고 있습니다. 아마 후일 교회사 속에서 이 문제에 대한 논쟁이 있을 것을 알았는가 봅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하는 것이라 다 사도겠느냐 다 선지자겠느냐 다 교사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겠느냐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겠느냐 다 벙언을 말하는 자겠느냐"(고전12:28-30)고 반어적인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만 여기서 바울의 대답은 '아니요'입니다.

 

바울의 대답은 교회 성도들 모두가 전도자 예언자, 신유의 은사, 능력의 은사, 방언의 은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은 것을 받은 것처럼 흉내내든가 억지로 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개인의 덕을 위하여 *
그런데 다른 은사와는 달리 방언의 은사만큼은 규제와 제약이 따르고 있습니다. 먼저 바울은 개인적인 데보션에는 아무런 제약이 따르지 않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얼마나 많은 방언을 하든지, 어떤 자세로 하든지, 언제 하든지 어떻게 하든지 규제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바울도 어느 누구보다도 방언을 더 말함을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고전14:18) 성령 은사는 고린도 교회의 특징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 중에서 방언의 은사는 고린도 교회의 자랑과도 같았습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문제가 발생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여러가지 방언의 은사가 주어졌습니다. 그렇게되자 교회에는 질서가 무너지기 시작하고 믿지 않는 자들에게 비방이 생기고 믿는 자들 중에 믿음의 척도로 간주되기도 하였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전14:18-19)고 말하였습니다.

이것은 교회의 예배 중에는 방언 말함을 규제한 것입니다. 또 바울은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거든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및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고전14:28)고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교회에서 방언을 하려하면 통역하는 자가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도 또 규제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다불과 세 사람이 차서를 따라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고전14:27) 여기서 '다불과'라는 헬라어는 '플레이스토스'는 가장 많음을 의미하는 최상급을 의미하는 것으로 '세 사람 정도가 좋다'라는 뜻입니다.

*적당히 하라! *
방언에 대한 또 다른 규약은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고전14:30)입니다. 나는 '적당히'라는 말에 전적으로 공감을 합니다. 질서대로 하라는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많은 은사를 행하는 사람들이 이 부분에서 잘못되어 무례를 행하고 있습니다. 특히 말씀과 경건 훈련에 경륜을 거치지 못한 사역자들이 충분히 검증과정을 거치지 못한 말씀의 일부분을 가지고 억지를 부리는 경우를 보면 참 벼랑길을 달리는 말처럼 아슬아슬함을 느낍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예배 도중 갑자기 일어나 방언을 하는 경우가 있는가하면 어떤 모임 속에서는 방언을 하던 사람이 방언이 멈추지 않는다고 법석을 떨기도 합니다. 이것은 정말로 집회를 망치는 고질병에 속합니다. 나는 이러한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고 확신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은 혼란의 하나님이 아니다"(고전14:33)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혼란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것은 성령이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앞에 영웅이 되고 싶은 충동적 행동으로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성령과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즉 무지와 무례의 소치입니다. 이러한 일들로 인하여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비방을 받고 있습니다.  

 

성경은 방언은 믿지 않는 자들로 하여 믿는 자들에게 나타난 방언을 통하여 하나님을 믿게 하려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이든지 간에 어떠한 일이라도 교회와 성도에게 덕이 되지 않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닌 것입니다.

*악마의 소리인가? *
그러면 방언을 말하는 것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어떠하여야 할까요? 방언을 금지하거나 악마의 소리라고 보는 것은 참으로 잘못된 생각입니다. 아직도 우리 주위에는 방언이 악마에게서 온 것이라 하여 금기시 하는 교회가 있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고린도 교회 시대부터 교회 안에 많은 유언비어가 나돌고 있었습니다. 어느 사람이 방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저주하였다든가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부인하였다는 이야기와 같은 것들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러한 것은 방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에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3)고 경계하였습니다. 이것은 그 시대에 이단들이 방언과 같은 어떠한 주술을 이용하여 예수를 모욕하였기 때문에 바울이 이 문제를 확정해 놓은 것입니다.

 

따라서 방언이 성경이 정한 테두리 안에서 행하고 있는 것이라면 절대로 금지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하기를 금하지 말라"(고전14:39)고 경고한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교회 안에서 방언을 사용하는데 있어서는 규제와 제약을 하였습니다.

*방언보다 예언을! *
또한 바울은 방언은사보다 예언은사를 더 권장하였습니다. 이것은 방언이 예언은사보다 못하다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 덕을 세우기 위해서는 아는 언어로 가르치기를 우선한 것입니다. 즉 교회 안에서 행할 때에는 예언은사를 방언은사보다 더 사모하라고 한 것입니다.

 

바울은 14장 1절에서 "사랑을 따라 구하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 하였습니다. 또 그는 다시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만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통역하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고전14:4-5)고 권면하였습니다. 이것은 개인적인 믿음보다 교회의 공동체적인 모임 즉 예배에 대한 중요성을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6절에서 더욱 확실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을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이나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혹 퉁소나 거문고와 같이 생명없는 것이 소리를 낼 때에 그 음의 분별을 내지 아니하면 퉁소 부는 것인지 거문고 타는 것인지 어찌 알게 되리요 만일 나팔이 분명치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쟁을 예비하리요 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 알아 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고전14:6-9)고 강조하였습니다. 따라서 바울은 공중 예배에 있어서는 예언 은사를 방언은사보다 우선으로 하였습니다.

 

이에 바울은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무식한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고전14:23)고 말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방언이 끝났다고 주장하는 부분을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