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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언은사2) 영적체험은 자신이 할 수밖에 없다

이요나 2007. 2. 14. 12:00

(방언은사2) 영적체험은 자신이 할 수밖에 없다

*서론*

오늘은 방언의 목적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방언기도는 성도들의 신앙생활에 힘과 용기를 얻게 됩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 2절에서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경에서의 "알아듣는 자가 없고"(no man understands him)라는 부분은 어떤 성경에는 "누구도 듣지 못하노니"라고 번역된 곳도 있습니다.

 

이것은 자기의 영(靈)으로 비밀을 혹은 하나님의 비밀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방언은 사람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말하는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 부분을 사도행전 2장의 사건과 어떻게 합리화 시켜야 할까요? 사도행전 2장에서 성령이 강림할 때 그들은 각각 각 나라말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말하였습니다. 이것을 듣고 있던 사람들은 놀라서 경탄하며 "이들은 모두 갈릴리 사람들이 아니냐?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됨은 어찜이뇨?"라고 놀랐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또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부분을 들어서 어떤 사람들은 방언에는 두 종류가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즉 하나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방언의 은사로서 일반적인 각 나라말이고 그리고 또 하나는 기도의 언어로서의 방언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들은 고린도전서 14장15절을 들어 방언은 바울이 하나님께서 성도의 기도생활을 돕기 위하여 주신 언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또 바울이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의 지상성을 설명하기 위하여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라고 말한 부분을 들어 바울이 말한 천사의 방언은 기도의 언어로서 천사들이 쓰는 하늘나라의 언어라고 주장하며 방언은 이 지구상의 언어와 기도용 방언으로 구별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이것은 표면상의 모순을 설명하려는 억측이며 교리로 정립할 수 없는 증거 불충분한 논증인 것입니다.


*개인적인 교제 *
이러한 논증은 바울이 말한 한 성경구절을 잘못 이해하는 데서 발생하였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 14절에서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얻지 못하리라 그러면 어떻게 할꼬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마음으로 찬미하리라" 여기서 바울은 방언으로 기도하고 방언으로 찬미함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문맥을 따라 살펴보면 개인의 기도와 찬미에 국한된 것입니다. 우리는 삶 속에서 혼자서 기도하고 혼자서 찬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교회라는 공동체 속에서 출발되었습니다. 나는 한 개체이면서 교회 공동체의 일원입니다. 이것은 우리 각 사람이 한 가정의 한 인격적 존재이면서 한 가족의구성원임과 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기독교는 공동체의 인격과 개체의 인격을 함께 이룬 그리스도의 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위에서 말한 영으로 기도하고 영으로 찬미하는 것은 주와 개인의 인격적 교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의 이름으로 하나된 교회라는 커다란 몸을 이루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공중예배에서는 공중예배의 규례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다시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전14:18-19)고 말한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의 의도는 공중 예배와 방언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16절에서 방언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영으로 축복할 때"를 논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축복에 해당하는 영어 'bless'는 축복 외에도 '기뻐하다' '감사하다'라는 의미로도 쓰입니다. 바울은 17절에서 다시 "감사는 잘하였으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방언은 하나님을 경배하고 할 때도 사용하고 하나님께 감사할 때도 사용되는 것입니다.

*"궁극적 체험"(Ultimate experience) *
흥미로운 것은 근대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이른바 "궁극적 체험"(Ultimate experience)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말하는 궁극적 체험을 사람들이 가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가정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궁극적 체험은 참으로 말로 나타내기 곤란한 부분입니다. 왜냐하면 '궁극'이란 지금까지 체험한 모든 것을 초월한 체험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전혀 새로운 영역으로 미끄러져 들어가야 하는 것으로서 자신이 느끼고 있다는 묘사를 표현할 길이 없는 곳을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기가 체험한 궁극적 체험을 설명할 길이 전혀 없음으로 그 표현 방법을 지어낼 수조차 없습니다. 따라서 철학도들의 모임 속에서 어떤 사람이 "나는 오늘 밤 기도 중 그 미궁에 빠졌었다"고 말할 때 누가 그것을 설명해보라고 하면 그 사람은 무식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무도 설명할 수 없는 궁극적인 체험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궁극적인 체험을 하였다고 해도 결국 그 사람은 개인적인 체험일 뿐, 다른 사람에게 어떠한 영향을 줄 수 없는 개인적인 것입니다. 그러한 궁극적인 체험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그 세계를 경험하기 위하여 동양의 신비적인 요가 요법을 사용하기도하고 참선이라는 불가의 수행을 하기도 하며 어떤 극단적인 사람들은 대마초나 마약을 복용하여 그 세계를 체험하고자 애를 쓰기도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은 그들이 요구하는 궁극적 체험을 설명하지도 못하고 또 달성하지도 못하여 그것을 체험해 보기 위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어 궁극의 세계로 들어가려는 어리석음을 저지르기도 합니다.

*영적 기반의 추축 *
이들이 말하는 '궁극'이라는 단어 'ultimate' 즉 '최후'를 체험하기 위하여 죽음을 통한 환상의 세계로 달려가는 것입니다. 급기야 '궁극의 체험'에 몰두하던 독일의 교수들과 학생들 사이에 자살이 속출하였었습니다. 근래에도 세계 각 국에서 자살을 획책하는 종교집단들은 모두 이러한 궁극적 체험을 통하여 또 다른 세상으로 들어간다는 괴변으로 사람들을 미혹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크리스찬의 체험은 어떤 의미에서 궁극적 체험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령에 대하여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이 부분을 설명하기가 매우 힘이 든 문제로서 성경도 이에 대하여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 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라"(고전2:14)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귀머거리에게 아름다운 교향곡을 설명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 곡이 아무리 아름답다하더라도 귀머거리는 그 음악의 아름다움을 감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 황혼의 바닷가를 설명한다고 하십시다. 그는 당신이 말하는 그 아름다움을 절대로 느낄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는 그것을 느낄 능력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설명을 하여도 그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감지할 수 있는 안테나가 없기 때문에 우리의 수고가 무익한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성령에 관한 토대가 만들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믿는 사람들 속에 있는 사랑의 본체 즉 평안과 기쁨을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영적인 부분들이 그들에게는 어리석은 짓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사람을 이해 못하는 믿지 않는 사람들을 이상하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도 속히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서 우리와 같이 영적인 기반이 그들 속에 구축되도록 기도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뭣하는 짓거리들이냐고?! *
바울은 고린도전서 2장 15절에서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고 말하였습니다. 이 표현은 영어로 "scratch their head"로서 "이거 무엇 하는 짓거리들이야? 미친 것들 아냐?' 하는 말과 같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영적 체험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에게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7) 말하였습니다.

 

여기서 "뛰어난"이란 의미는 "초월하다"를 의미합니다. 그러면 사람의 생각을 초월한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이것은 참으로 어려운 부분입니다. 베드로는 그 영광의 기쁨을 말로 할 수 없어서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움으로 기뻐하니"(벧전1:8)라고 서술하였습니다. 그러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자기 자신이 스스로 체험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34:8)고 말하고 있습니다. '맛을 본다'는 것은 체험을 의미합니다. 자기가 체험해 보지 않으면 아무도 그것을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영적 체험을 말로 설명하려 하여도 그 영적 세계는 궁극적으로 설명할 길이 없는 신비의 세계입니다. 그래서 바울도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라고 말한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북한에 가서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의 맛을 다른 나라를 경험해 보지 못한 북한 사람들에게 설명한다면 당신이 말하는 그것을 그들이 이해하기란 매우 어려운 것입니다. 아무리 이론적으로 그들을 설복 시키려 해도 그들이 경험해보지 못한 세계는 미지일 뿐입니다. 우리가 텔레비전을 통하여 우주에 대한 지식을 얻었다하더라도 우주 여행을 체험하고 돌아 온 사람들의 그 체험은 말로 들어서 그들이 체험한 그 감각에는 이르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체험할 수밖에.. *
이와 같이 영적 체험은 그것을 체험한 그 사람만이 느끼는 기쁨과 촉감적 체험이 있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3:18-19)고 기도하였습니다.

 

바울이 여기서 말한 취지는 현실을 초월한 세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지식의 한계를 초월한 세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로 할 수 없는 영광의 충만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함께 하므로 우리 안에서 느껴오는 내적 기분과 감각 그리고 더 나아가 촉감적 체험인 것입니다. 어떠한 말로도 표현할 길이 불가능한 체험인 것이지요. 이러한 영적인 체험은 그리스도인이 되면서 누구나 맛 볼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체험하는 기쁨과 평안함의 은혜가 주어지는 것이지요.

따라서 이러한 영적 체험은 자기 자신이 맛 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영적 체험 즉 하나님의 은혜로 부어지는 감당할 수 없는 기쁨과 평안의 충만함이 계속 부어지고 있다면 당신은 그것에 대한 감탄과 감사의 말을 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언어의 한계를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셔서 깊은 탄식이나 영적인 말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송하게 되는 것입니다.

 

 욥은 하나님의 광대하심과 그의 하시는 일의 위대하심에 대하여 "인간이 발견한 하나님의 지식의 체험은 그 행사의 시작점이요 우리가 그에게 들은 것도 심히 세미한 소리뿐이다"(욥26:14) 고 말하였습니다. 엘리야가 체험한 하나님의 위대하심도 세미한 음성이었습니다.(열상19:12). 이러한 성경의 증거를 볼 때마다 나는 미친 듯이 발광을 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는 사람들을 보면 이해가 않됩니다. 여러분들도 이제 고요한 중에 임하시는 하나님 은혜를 맛보시기 바랍니다. 은밀한 중에 체험하시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