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강좌/성령은사

(방언은사1)교회탄생과 성령의 선물

이요나 2007. 2. 14. 12:00
(방언은사1)교회탄생과 성령의 선물


*서론8
오늘은 방언의 은사에 대한 첫 번째 시간입니다. 이 문제는 초대교회로부터 지금까지 우리 교회 안에서 커다란 파문을 일으켜 온 문제이기도 합니다. 일단 예수를 믿은 성도들은 이 문제에 대하여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입니다. 우리나라도 1960년대부터 오순절교회의 활동이 커지면서 방언은사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되었고 지금은 믿는 자는 방언을 체험하여야 한다는 의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물론 아직까지 이 방언은사에 대하여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보수적인 교회도 있지만 우리는 이러한 검증을 오직 성경을 통하여 하여야 합니다.

바울도 방언은사에 대하여는 예언은사와 대비하여 설명을 하면서 할애를 많이 하였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저와 함께 성경을 자세히 살펴봄으로서 방언에 대한 온전한 지식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전에 기억하여야 할 것은 성령에 관한 것은 하늘에 속한 신령한 것이 나타나는 것임으로 한계 속의 인간으로는 완전히 알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다만 성경의 지식과 성령의 가르침으로 우리는 이해할 수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이 성령에 관한 이야기가 구약성경에는 소개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한가지 가능성이 있다면 열왕기하 20장에 소개된 히스기야 왕의 일입니다. 히스기야 왕은 이사야 선지자로부터 죽음의 경고를 받았습니다. 살아생전에 하나님으로부터 죽음을 미리 선고받는다는 것은 은혜 중에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회개할 기회를 얻게 되니까 말입니다. 이에 히스기야 왕은 얼굴을 벽에 두고 살려달라고 울기 시작했습니다. 이사야 38장 14절에는 "나는 제비같이 학같이 지저귀며 비둘기 같이 슬피 울며 내 눈이 쇠하도록 앙망하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압제를 받사오니 나의 중보가 되옵소서"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이것은 히스기야가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하나님께 나아간 표현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가 극한 슬픔을 당하면 사실 언어가 막히고 눈물조차 멈추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을 억장이 무너진다고 합니다. 생떼 같은 자식이 죽어 넘어 가는 것을 보는 부모의 모습 속에어 우리는 이러한 경황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방언이라고 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신약시대의 방언과는 다른 의미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방언은 자기의 감정과 의지 속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지는 발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구약에서 방언에 대한 약속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이중성취'(dual fulfilment) *
이사야서 28장을 보면 "그러므로 더듬는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그가 이 백성에게 말씀하시리라 전에 그들에게 이르시기를 이것이 너희 안식이요 이것이 너희 상쾌함이니 너희는 곤비한 자에게 안식을 주라 하셨으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음"이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하여 신학자들은 방언에 대한 예언이라고 하지 않습니다만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에서 이 구절이 사람들이 방언을 말할 시대에 대한 예언이었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것을 '이중성취'(dual fulfilment)라고도 하는데 즉 '가까이'(near)와 '먼 장래'(far)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기 쉽게 설명한다면 하나님을 배반한 에브라임의 술 취한 자들은 예언자 이사야의 가르침에 대하여 "누가 누구에게 지식을 가르치며 누구에게 도를 전하여 깨닫게 하려는가 젖 떨어져 품을 떠난 자들에게 하려는가?"(사28:9)고 조롱하였습니다.

이들은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라"는 이사야의 단순한 가르침에 대하여 "우리에게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되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하라는군"하고 조롱하였습니다. 다시 말하여 "네가 우리는 어린아이로 취급하는 것이냐"고 비웃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사람들은 단순한 원리를 가르치면 업수이 여기기 일 수입니다. 무엇인가 알아듣지도 못하는 신학적인 지식과 원어를 많이 사용하면 그것이 굉장한 지식인 것으로 알고 떼를 지어 몰려다니고 성경본문을 그대로 가지고 알기 쉽게 가르치면 누구를 초신자로 알고 성경을 가르치려고 하느냐 비아냥거립니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사대주의 사상에 물들어서 빠다 냄새가 나면 사죽을 못씁니다. 이처럼 이사야 시대의 사람들도 부귀영화에 취하여 이사야의 단순한 가르침을 비방하며 멸시하였습니다.

*전쟁이 안식이다? *
이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조롱한 그것들이 그대로 이루어지리라 예언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앗수리아 군대를 보내시어 그들이 조롱한 이사야의 예언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라" 배우고 싶다고 하느냐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하사 그들이 가다가 뒤로 넘어지며 부러지며 걸리며 붙잡히게 하시리라"(사28:13)하신 것을 성취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사야의 단순한 가르침을 받지 않음으로 해서 그들은 결국 앗수리아의 침략을 받아 그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앗수리아 말로 "경계에 경계를 경계에 경계를 교훈에 교훈을"더하는 아주 기초적인 가르침을 받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입니다. 즉 이방인들에게 배우는 더듬거리는 말은 하나님의 심판의 증거였던 것입니다.

이사야가 말한 "더듬는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그가 그 백성에게 말씀하시리라"하신 말씀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사야는 그들에게 "이것이 너희의 안식이요 이것이 너희 상쾌함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말로 가르치는 성경공부가 쉽겠습니까 영어로 가르치는 성경공부가 쉽겠습니까? 여러분들은 지금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더듬거리며 배우고 있지 않습니까? 세상은 이미 외국의 문화와 문물로 우리를 사로잡고 그들의 가르침을 배우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바로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이 시대에도 앗수르의 군대는 여러분의 생명을 위협하며 가르치고 있습니다.

*믿는자에게 주신 표적 *
방언에 대한 성경적 예언은 마가복음 16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께서 제자들에게 "믿는 자들에게는 이러한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 전 세계로 나가서 복음을 선포하라는 명령과 함께 주어진 권세였습니다. 또한 방언의 약속은 그들이 베푸는 세례를 믿고 받는 자들에게 주어진 선물이었습니다.

많은 신학자들이 이 부분을 가지고 원본에 있다 없다 하며 옥신각신 이의를 제의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마가복음 16장 기록 중 최후의 12절은 '코딕 시나이' 사본이나 '코딕 바티칸' 사본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 두 사본은 모두 알렉산드리아 사본의 일부를 번역한 것입니다.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기원140년부터 202년까지 살아 있던 초대교부 일레니우스와 기원170년부터 235년까지 살아 있던 히폴레이토스는 마가복음 16장 9절 이후부터 20절까지의 말씀 전체를 모두 인용하였습니다. 따라서 고대 마가복음 사본 중에는 이 부분이 생략된 부분도 있어서, 9절 이하의 말씀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신학자들은 기원420년~460년경에 기록된 시나이 사본 등을 가지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그보다 훨씬 전에 초대교회 교부들이 이 부분을 가지고 인용하였습니다. 또한 이 부분에 대한 뒷바침은 사도행전 2장에 명확히 기록되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오순절 성령강림 때에 나타난 방언은사의 나타남입니다.

*성령강림의 3가지 표징 *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2:1-4) 어떤 곳에는 "성령께서 능력을 주셨다"기록 하였고 또 카톨릭의 도웨이 번젼(Douay Version)에는 "성령이 그들의 말을 재촉하였다"고 기록되었다. 어쨌든지 오순절 날 성령께서 교회에 임하신 놀라운 표증으로 모든 사람이 다른 나라말로 말을 하였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사용된 "언어"라는 단어는 그리스어로 '그로사'(glossa) 또는 '구로사이즈'(glossais)입니다만 오순절 날 세상 여러 곳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이 축제에 참가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이스라엘 남자들은 매년 3번의 축제 즉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나팔절)은 필히 참가하도록 율법으로 정해져 있습니다. 이것은 민족전체의 축제로서 율법으로 정해진 성일(聖日)인 것입니다. 주께서 유월절 양 잡는 날에 고난을 받으신 후 50일째 되는 날이 오순절이었습니다. 이날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축제에 참가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의 몸 된 교회에 성령을 주셨던 것입니다. 기도하며 성령의 강림을 고대하고 있던 회중들이 앉은 온 집안에 급하고 강한 바람이 임하며 불의 혀 같은 것이 갈라지는 것이 보여 각 사람의 머리 위에 하나씩 임하였다고 기록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 장엄한 광경입니까? 하나님의 신(神)이신 성령이 온 교회 성도들 머리 위에 불로 임하신 광경을 상상해 보십시오.

* 이방인에게도 주심 *
그들 속에 임한 급하고 강한 바람소리를 상상해 보십시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질서입니다. 만약 이러한 광경이 우리 실생활 속에서 생겼다면 수라장이 되었을 것입니다. 요즘 괴상한 소리를 지르며 벌렁벌렁 너머지는 집단들의 무질서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성령은 무엇이든지 가능하심으로 회중들을 놀라게도 하지 않으시며 넘어져서 의식을 일케 하지도 않으십니다. 그들은 그 바람소리를 자기의 귀로 들었고 각 사람 위에 혀의 불같이 갈라지는 것들을 눈으로 보았으며 각자의 입으로 분명하게 다른 나라의 말을 말했던 것입니다. 이 때 그들이 모두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로 말하기 시작했다고 기록되었습니다. 여기에 사용된 그리스어는 '디아렉토스'(dialektos)로서 정확한 각 나라의 언어를 의미합니다.

이 얼마나 위대하신 하나님의 능력의 나타나심입니까? 이것을 가지고 이렇다 저렇다 왈가불가 한다는 것은 그들 자신이 하나님의 능력도 성경의 말씀도 모른다는 증거입니다. 사도행전 10장을 보면 베드로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고넬료의 집에 갔을 때 일어났던 사건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에게도 성령 부어주심을 말미암아 놀라니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행전10:44-45) 따라서 성령이 이방인 신자들에게도 임하실 때 그들 속에서도 방언이 나타났습니다.

*왜 사랑이 부족한가? *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 갔을 때 그 교회에 부족한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아마 사랑이 없음을 보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열매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이 성령의 열매 사랑 속에는 희락과 화평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사랑이란 단어의 측면에 포함된 의미이기도 합니다. 어느 교회를 가보면 참으로 열성이고 힘이 있어 보입니다. 흡사 그 교회 성도들은 자신들의 교회를 위하여 목숨바친 사람들 같습니다. 그러나 그들속에서 진정한 평안과 기쁨을 발견할 수 없음은 기이한 일입니다. 여러분들도 지난번 김대중 대통령의 북한 방문 뉴스를 보셨을 것입니다. 꽃을 들고 마치 광적인 충동으로 김정일을 외쳐대는 그 사람들의 모습에서 무엇을 발견하고 있습니까? 또 이단들의 집회의 모습 속에서 무엇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열심과 정렬입니다. 그러나 그들 속에서 필히 발견되어야 할 평안과 기쁨이 없습니다. 이것은 그들 가운데 그리스도의 성령의 열매인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것을 발견할 수 있다면 여러분은 이미 영분별 은사를 체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 속에서 성도의 생명인 평안과 기쁨을 발견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고 질문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다 하였습니다. 이에 바울은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고 물었습니다. 그 때 그들은 요한의 세례를 받았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이에 바울은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예수라 하거늘 그들이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하고 예언도 하였다"(엡19:4-6)고 술회하였습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손을 얹자 방언과 예언의 은사가 임했습니다. 이처럼 방언이 임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 주신 성령의 강림의 표시로 나타난 하나님의 선물이었습니다. 그러면 방언의 은사의 목적이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