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강좌/성령은사

(방언통역은사1) 방언 통역은 예언도 설교도 아니다!

이요나 2007. 2. 14. 12:04
(방언통역은사1) 방언 통역은 예언도 설교도 아니다!


*서론*
성도의 삶 속에서 역사하는 성령 테마를 공부할 때 살펴보았습니다만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 임재하셔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이끌어 가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속주로 받아들인 사람은 그 안에 성령이 계신 것입니다. 바울은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전3:16)고 묻고 있습니다. 이것은 네 몸은 네 것이 아님을 모르느냐? 이미 값을 지불하고 사신 것을 모르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하나님의 성전인 몸과 마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고전6:19-20) 또 바울은 에베소 사람들을 향하여 "술취하지 말라 성령에 충만함을 받으라"(엡5:18)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우리의 육적인 생활을 이기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이끌어 가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또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3:18)고 증거하였습니다. 이것은 성도의 생활 속에 위대한 성령의 역사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이것은 성령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능력인 것입니다.

성령은 성도의 삶으로부터 밖으로 넘쳐 흐르시고 계십니다. 이것이 성령의 충만이며 그 결과로 나타나는 현실이 성령의 은사인 것입니다. 많은 목사들이 크리스천은 하나님의 보물단지라고 말하며 그것을 무한한 행복으로 알고 살아야 한다고 외칩니다. 그러나 이것은 가장 기초적인 것입니다. 아들을 낳은 것은 품안에 품고 행복을 누리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 아들로 하여 세상 가운데 나가서 무엇인가 자기 보다 더 큰 일들을 이루는 것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주께서는 종말의 때에 어린아이들과 아이 밴 자들이 화가 있을 것을 경고하였습니다. 교회는 언제까지나 성도들을 끼고 사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장년의 나이에 든 어린 아이들을 품에 끼고 언제까지나 초보적인 말씀을 가르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교회는 히브리서 기자가 한탄하였듯이 아직도 어린 아이처럼 누군가에게 배우지 않으면 안되는 아이들의 위치에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은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지만 또 우리로 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도록 하십니다. 그것이 우리를 통하여 성령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은사이지요. 예수께서는 초막절 명절 끝날 "누구든지 목마른 자는 내게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리라"(요7:37-39)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은 이것은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것이라고 주석을 달았습니다.


*갈급한 이유를 아는가? *
여기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주목하게 하신 것은 믿는 자 안에 계신 성령의 역사를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택한 자들에게 나타날 성령의 역사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얼마나 위대한 말씀입니까? 성도의 삶에서 성령의 능력이 방출되어 하나님의 능력이 세상 가운데 나타나는 일이란 생각만 하여도 신나는 짜장면입니다. 어떤 자매로부터 최근 갈급한 심령을 하소연하는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갈급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하셨습니다. 갈급은 물을 마셔야 풀리는 것입니다. 콜라나 사이다를 마시면 마실수록 더욱 목이 마른 것입니다. 인스턴트는 안됩니다. 깊은 바위틈을 뚫고 용솟음쳐 솟아 흐르는 물을 마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 광경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 물은 그의 몸 속에 들어가서 그 사람을 만족시키고 계속 흘러 넘쳐 이제 세상 가운데로 흘러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갈급한 자는 먼저 자기를 충족시켜야 합니다. 나를 충족시키지 못하였는데 남의 갈증을 채워준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오히려 나의 갈증이 그 사람에게 더욱 부담을 주는 결과가 될 뿐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부터 14장까지 성령의 은사가 우리의 삶 가운데서 어떻게 방출되고 있는가 그리고 그 성령의 은사가 미치는 영향과 그로 인하여 나타나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하여 자세히 기록하였습니다.

바울은 먼저 12장에서 아홉 가지 은사를 열거하였습니다. 성령께서 자기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주심에 대하여 설명하였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은사를 혼자서 몽땅 가지고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신이 될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 28절에서 모두가 사도이냐 모두가 예언자이냐 모두가 교사이냐 모두가 병을 고치며 모두가 방언을 말하겠느냐고 반어조로 질문하였습니다. 그의 대답은 "아니다"를 포함시킨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자신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주권적으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으로 한 몸을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의도인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우리의 몸의 각 부분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한 기능적 의도이심을 설명하였습니다.

*방언 통역은 언제하는가? *
오늘은 바울이 말한 아홉 가지 은사 중 마지막에 해당하는 방언을 통역하는 은사에 대하여 공부할 차례입니다. 고리도전서 12장 10절 뒷부분에 "어떤 이들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고 말하였습니다. 이것은 방언의 은사에 관련된 은사로서 물론 방언이 없으면 일어나지 않는 선물로서 흥미로운 것은 하나님께서는 유일하게 이 은사를 받기 위하여 기도하라고 권면하셨다는 것입니다.(고전14:13) 이것은 기도로서 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도 됩니다. 그런데 더 흥미있는 것은 "방언을 말하는 자들은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라고 기록되어 있는 부분입니다. 여기서 "만약 방언을 말하는 자..." 이 부분은 사실 교회를 향하여 말하는 방언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향한 개인적인 데보션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 12절에서 교회에서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면 그 사람은 교회 전체에 덕을 세우기 위하여 그것을 해석하도록 기도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부분은 방언이 꼭 개인적인 은사만은 아닌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앞에서 몇 회에 걸쳐서 방언은사를 가지고 살펴보았습니다만 성경은 방언은 분명히 개인적인 데보션으로 사용 하도록 권면하고 있었고 교회에서 사용하는 경우에는 제한을 두고 있음을 배웠습니다.

또 바울은 방언을 교회에서 사용할 수는 있으나 불신자들 앞에서보다 성도들의 모임에서 사용될 것을 권면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교회에서 방언을 사용할 때의 규제와 제한을 말하면서 할 수 있으면 방언은 교회에서 사용하지 않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자기 개인적인 데보션을 위하여는 규제가 없었으나 그리스도의 몸 즉 교회가 모였을 때는 일만 마디의 방언보다는 다섯 마디의 말을 하도록 권면하였습니다.(고전14:18,19) 이것은 교회의 직무와 관련된 것으로 회중 가운데서는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보다 알아듣는 말로 가르칠 것을 중요시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개인적인 방언기도에는 통역이 필요없습니다. 따라서 오늘 바울이 유일하게 통역하기를 기도하라고 말하고 있는 부분은 교회 중에서 즉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들이 모였을 때에는 방언을 말하게 될 때 통역을 할 수 있도록 기도하라고 권면한 것입니다.

*통역과 번역의 차이! *
통역이란 말은 그리스어로 '헬메네이아'(hermeneia)입니다. 설교(homiletics)라는 말이 여기서 유래된 것입니다. 다시 말하여 이것은 성경을 해석하는 학문을 의미합니다. '호미레틱스' 또는 '헬메네이아'는 통역(interpretation)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또 동일한 '헬메네이아'는 어떤 곳에서 번역(translation)으로 사용되고도 있습니다. (참조, 요한1:38)따라서 이 선물을 표현하는 가장 적절한 말은 '통역'입니다. 통역과 번역의 차이에 대하여 설명하기 난처한 것입니다만 번역은 한 단어 한 단어를 다른 나라 언어로 기록하는 것입니다만 통역은 언어를 다른 나라말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전체의 의미를 가장 정확한 의미로 설명하여 상대로 하여금 그것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가끔 동경의 히라노 목사님의 설교를 통역할 때가 있습니다. 그 때마다 느끼는 것인데 히라노 목사님이 말씀하신 부분을 한국어로 통역함에 있어 히라노 목사님은 아주 짧은 일본어로 말하였는데 나는 일본어 말보다 긴 언어로 설명을 하여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 때마다 히라노 목사는 이 친구가 지금 통역을 잘 하고 있는 것인가 의아한 표정을 짓습니다만, 번역은 한절 한절의 단어를 다른 나라 언어로 바꾸어 놓는 것에 비하여 통역은 그 의미를 전달하는 의미가 강합니다. 다시 설명하면 일본어로 "나는 나름대로 많은 책을 읽었다고 자부하는 사람입니다만.."이라고 말하였다고 할 때 내가 그 말을 통역할 때 "나는 나름대로 먹물을 많이 먹었다고 생각합니다만..."라고 말하면 한국인들은 쉽게 그 의미를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통역으로 예언하지 않는다! *
따라서 통역은 번역과 달라서 사람들이 기억할 수 있는 범위의 상황 속에서 전달된 언어 또는 방언이 그 현장에 있는 사람들이 순간적으로 동감을 할 수 있는 순발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따라서 통역은 어떤 경우에는 통역해야 하는 말보다 더 길 수도 더 짧을 수도 있습니다. 때에 따라서는 통역은 설명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방언의 은사를 받은 것은 그 방언이 사람이 아닌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전14:2) 여기서 비밀은 '하나님의 비밀'(Divine secret)를 의미하는 것임으로 방언하는 사람은 사람을 향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것임으로 통역도 하나님께 향한 비밀에 대한 통역에 해당됩니다. 그것이 기도였던지 찬미였던지 간에 감사였던지 간에 이것은 하나님께 고한 것에 대한 통역에 해당합니다.

펜테코스테파의 집회에 가면 누가 방언을 하면 통역사는 종종 "주께서 말씀하시되 나의 자녀들아 너희가 나의 말을 듣고 목소리를 높여 찬양하면 내가 너희를 축복하겠고 나의 영을 부어주리라"는 말을 많이 듣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두말할 것 없이 교회를 향한 권면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잘못된 통역입니다. 그들은 이것을 방언을 통한 설교라고 말합니다만 이것은 분명히 성경적인 가르침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향하여 방언으로 가르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향하여 예언을 통하여 말씀은 하십니다만 방언은사를 통하여 가르치시지 않습니다. 만약 통역이 있었다해도 그것은 잘못된 것이 틀림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교회를 향하여 가르치실 말씀을 위하여 지혜의 말씀은사 지식의 말씀 은사 예언의 은사들을 주셨습니다. 또 이미 성경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런데 구태여 방언을 통하여 가르치셔야 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방언 통역의 설교는 없다! *
오순절교회에서는 주일 예배 중에도 방언으로 인하여 설교가 종종 중단되는 경우가 있습니다만 그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미 설교자를 통하여 성경말씀이 선포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성경의 말씀으로 세우신 질서를 무시하면서 방언으로 혼란을 일으키시지 않을 것은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일은 방언으로도 교회에 메시지가 전해진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하여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물론 그들은 하나님의 성령의 은사를 체험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행동을 이상한 행동으로 볼 것만은 아닙니다. 그들은 이 방언의 은사와 통역의 은사를 잘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방언을 통하여 예언이 주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언의 은사부분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유심히 살펴보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실수를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고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이요"(고전14:3)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미 성령께서는 예언을 통하여 덕을 세우고 권면하고 위로하십니다. 예언은 방언을 통하여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다 알아듣는 언어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시 방언을 통하여 그리고 그것을 방언의 통역은사를 통하여 설명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따라서 방언은 예언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집회 속에서 방언과 통역으로 나타나는 설교라든가 예언은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의 분수를 지켜라! *
바울은 로마서 12장에서 "예언하는 자는 믿음의 분량을 따라 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언에는 믿음이 필요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운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예언하는 자가 방언을 통하여 자기의 덕을 세워 믿음을 갖고 그 믿음으로 예언을 할 수 있게 됩니다. 바울은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다불과 세 사람이 차서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거든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고전14:27,28)라고 말하였습니다.

또 어떤 오순절계열 성도들은 방언을 말할 때 자신의 힘으로 그것을 제어 할 수 없다고도 말합니다만 그러한 주장은 합당치 못합니다. 다불과 차서를 따라 하라는 말씀은 세 사람 정도가 순서를 따라하는 것이 가장 좋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음으로 특별한 하나님의 계획이 아니고는 모두 우리 의지로 제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일들을 하는 성도들을 무시하여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그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들에게 성경적인 지식을 바로 전달하지 않고 잘못된 지식을 가르치는 교회와 교회지도자들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까지 만홀이 여김을 받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가르치는 거짓 예언자들과 교사들을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진리의 말씀으로 징치하실 것입니다.(살후 2:8-12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