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강좌/성령은사

(방언은사7) 영적체험을 위한 믿음의 궤도!

이요나 2007. 2. 14. 12:03
(방언은사7) 영적체험을 위한 믿음의 궤도!


*서론*
우리가 무엇을 위하여 기도한다고 할 때에도 우리의 이성과 지성은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기도하여야 할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멈추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기도가 온전한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요한일서 5장 14절에는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확신하고 있는 것 한가지는 우리의 기도로 하나님의 뜻을 변하게 할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다만 우리의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뜻이 변하였다 하더라도 그것은 나의 기도가 그의 마음을 변하게 한 것이 아니고 전지하신 그의 계획 속에 이미 그러한 일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기도를 하여 그의 뜻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누가 하나님의 뜻을 바꾸게 하였다는 것은 하나님은 미처 그러한 것을 알지 못하였다는 것이 되므로 전지하신 하나님의 품성에 위배되는 논증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생각할 때 인간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 밖에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도 사람을 아시기 때문에 우리의 품성을 배려하여 사람의 방법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다윗이 "내가 무엇이관대 하나님께서 나를 대하실 때 인간의 규례대로 하셨나이까"고 고백하였습니다. 이러한 연고로 인간은 하나님에 대하여 많이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품성 즉 전지, 전능, 거룩, 영광 이런 단어들은 가히 인간의 지혜로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 속에 속한 신령한 비밀인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앞날을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러한 상태에서 나의 현실 속에서 일어난 일들과 자신의 필요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기도를 하는 나는 나의 기도가 매우 절실하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의 뜻이 내 뜻과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한계 속에 거하지만 하나님은 영원하시며, 영이시며,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있지만 그는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는 장래의 모든 것을 확실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무엇을 어떻게 기도하여야 정확한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에 최선의 방법과 최고의 것을 준비하실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우리의 요구를 하나님에게 알리므로 그의 뜻을 알아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응답이 있을 때 그것이 하나님의 뜻임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아무리 합당하다고 생각하며 오랫동안 기도한 것이라도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든가 아직 하나님의 때가 이르지 못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기도는 "내 생각은 이렇습니다만 당신의 뜻대로 되기를 원합니다"고 고백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지성은 방언을 거부한다! *
그러면 과연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기도하는 방법은 없을까요? 아닙니다. 있습니다. 그에 대하여 바울은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고전14:14)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영으로 기도할 때 그 기도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우리가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뜻을 성령이 기도한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2장에서 "사람의 마음을 사람의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마음도 하나님의 성령 외에는 아무도 알 수 없느니라 하나님의 성령은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신다" 고 증거 하였습니다. 이것이 성령의 도움으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 드리는 예배이며, 찬양이며 기도인 것입니다. 이러한 체험은 얼마나 귀한 것입니까? 그런데도 일부 사람들은 자신의 지성의 거부를 따라 하나님의 선물을 가벼이 여기고 체험을 거부한다면 그 사람은 일생동안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하나님께 예배하고 기도하여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배를 받으실 하나님의 뜻은 전혀 알지 못한 채 하나님을 인간과 같이 생각하여 자신의 생각으로 준비된 것을 가지고 예배와 기도와 찬양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배는 그 예배의 의식이 아무리 장엄하고 화려하게 드렸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받으시는 합당한 예배에 이르지 못한 종교적 행위에 불과한 것입니다. 인간은 성령의 도움 없이 하나님 앞에 나아 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육체는 거룩하신 영의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받으신는 기도와 찬미가 모두 우리가 알이듣지 못하는 방언 뿐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순절 날 일어난 방언은 그들은 할 줄 모르는 언어이었지만 모두 각 국에서 사용하는 언어였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은 하늘의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온 것임을 먼저 인식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성령의 인도하심이냐 인위적 의식이냐는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 안에서 준비되어 그의 임재하심 가운데 드려지는 예배는 대규모적이고 거창해야만 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직 그의 임재하심 가운데 드려지는 예배이면 됩니다.

*방언은 배울 수 없다 *
오순절 계열 교회가 우리나라에 들어 온 이래 각 교회에서는 사람들이 방언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습니다. 일정한 어떤 소리를 내게 하든가 물리적인 방법으로 사람들로 어떠한 소리를 발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그러한 방법으로 방언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 글을 보는 순간 모든 자신의 습관을 버리시고 주의 말씀 앞에 바로 서시기 바랍니다. 그러한 습관이 입에 배어서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자가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기만하는 행위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영이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속임을 당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방언으로 기도를 하고 찬양을 하였다 하더라도 하나님과는 관계없는 그의 종교활동이었던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아직 당신이 성경적 지식 없이 행한 것이기 때문에 언젠가 당신이 온전한 지식에 도달하기를 바라고 인내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의 행위가 잘못된 것을 알고도 행한다면 하나님은 당신에게 응분한 조치를 하실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구약에서 사라가 아브라함의 아내임을 모르고 취하려 했던 아비멜렉에게 하나님께서 그로 하여 하나님께 범죄치 않게 하려고 경고하셨음을 배웠습니다. 또한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성령을 속이다가 죽임을 당한 이야기도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온전한 예배를 위하여 성결하고 온전한 마음으로 주 앞에 나아가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믿음의 궤도! *
그러면 그의 영(방언)으로 기도하기 위하여는 어떻게 하여야 할까요? 사무엘을 낳은 한나와 같은 갈급한 심령이 되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바디메오와 같은 사모의 마음으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또한 혈루병 여인이나 중풍병자의 마음처럼 절대적인 믿음을 가지고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진정한 마음으로 주를 만나기를 간구한다면 주의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여 우리도 영으로 기도하고 영으로 찬미하며 예언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인공위성이 궤도로 진입하기 위하여 최고의 에너지를 가속 시켜야 하듯이 우리의 믿음이 영적 궤도에 진입하기 위하여는 욥처럼 곤핍한 심령이 되어 뼈를 깎는 믿음의 시련이 필요할 지도 모릅니다.

또한 엘리사의 발목을 휘어잡고 애통하는 자식을 잃은 수넴 여인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믿음의 영적 궤도에 올라 주를 만나는 체험을 갖게 된다면 그리고 그 체험속에서 당신이 주 앞에 성결한 마음이 예배를 드리고 있다면 당신은 오직 말씀과 성령의 충만함 속에서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이와 같이 주를 만나는 체험은 한번으로 족할 것입니다. 이미 그의 안에 들어간 당신의 영혼은 더 이상 뼈를 깎는 시련을 체험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지점까지 도달하기까지 당신을 방해하는 최대의 적은 외적인 것이 아니라 당신의 지성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의 지성은 계속 당신이 터득한 지식과 방법을 통하여 체험되어지기를 애를 쓰며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신비의 체험을 거절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은사를 받는 방법은 오직 믿음의 방법 외에는 어떠한 길도 없습니다. 구원이 믿음으로 이루어지듯이 하나님의 은사도 오직 믿음 위에 주어지는 것입니다.

*능동적인 믿음을 해방하라! *
만약에 당신이 하나님께 받았다고 생각하는 은사가 인간의 방법으로 받은 것이라면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이 아닙니다. 한 예로 당신이 어려서부터 익힌 피아노로 연주하는 것은 신령한 영적은사가 아닙니다. 그러나 피아노를 배운 일이 없는 사람이 피아노 교수 이상으로 잘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당신이 미국에서 영어 공부를 하고 왔기 때문에 통역을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신령한 영적은사가 아닙니다. 그것은 삶속에 터득하게 하신 달란트적인 선물입니다.

그러나 영어를 배운 일이 없는데 영어로 말하는 것을 통역할 수 있다면 그것은 성령의 은사입니다. 이렇게 말할 때 여러분의 느낌은 어떻습니까? 성령의 은사는 기적이라고 말할 수 있지요? 맞습니다. 성령의 은사는 기적 같은 것이지 배워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제가 만난 한국 교회에서 방언한다는 사람의 90%는 모두 가짜였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러한 일이 일어 난 것일까요? 이것은 믿음이 수동적인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잘하면 잘 할수록 믿음이 강해진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믿음을 성장시키기 위하여 새벽예배에 나가고 철야예배에 나가고 헌금을 드리고 봉사를 한다면 이것은 엄격히 말하여 믿음이 아닙니다. 의식이고 종교행위인 것입니다. 이러한 종교적 행위로서는 믿음은 결코 성장될 수 없습니다. 믿음은 수동적이 아니라 능동적인 것입니다. 그러그 믿음의 능동적 출발은 하나님의 복음을 들을 때 우리 마음 속에서 생겨납니다. 그야말로 겨자씨 한알과 같은 작은 믿음입니다. 이 작은 믿음이 하나님의 기적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주께서 너희에게 겨자씨 한알만한 믿음이 있으면 이 산을 들어 바다에 심기우리라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이 능동적은 믿음은 주께서 원하는 때에 활동하여야만 합니다. 아무리 무화과나무 잎이 무성하여도 주님이 시장하실 때 열매를 내지 못하면 그 무화과나무는 의미를 잃게 됩니다. 그러나 당신의 심령이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고 주께서 임재하신 현장으로 나아갈 때 당신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수 있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