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강좌/성령은사

(방언은사8) 방언을 네 기준으로 판단하지 말라

이요나 2007. 2. 14. 12:03
(방언은사8) 방언을 네 기준으로 판단하지 말라


*서론*
어제는 근본적으로 성령의 은사는 인위적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성령은사를 받기 위한 믿음의 접촉점에 대하여 말하고자 합니다. 원칙적으로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는 순간 우리 안에서 생기는 능동적인 믿음이 중요합니다만 이러한 능동적인 믿음을 갖게 되는데는 어떠한 접촉점이 필요하기도 합니다. 오순절 계열에서는 성도들에게 "할렐루야!" 또는 "영광! 영광! 영광!"을 빨리 외치게 하여 나중에는 입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올 때 그것을 방언이라고 스스로 받아들이도록 유도시키고 있습니다.

이것을 '믿음의 동기' 또는 '믿음의 매개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오순절 계열에서 행하는 방언 받기 기도모임 같은 곳에서 받는 방언이 모두 잘못된 것이라고 비난 할 것만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그들의 가르침을 정당한 원리로 받아 드려서는 더욱더 안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동기를 통하여 믿음으로 방언을 체험하는 경우가 있음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어떤 집회에서 믿음의 동기가 발생되어 신유은사가 나타나기도 하고 귀신이 쫓겨나기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단이라고 불리우는 집회에 가서 믿음의 동기가 접촉되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는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그러한 사역을 중심으로 하는 곳에서 믿음의 동기가 더 많이 발생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동기를 유발시켜 귀신을 쫓고 병을 고치는 일들을 중심으로 하는 교회와 사역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기업을 얻지는 못할 것임도 아울러 알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께서 그들을 향하여 "내가 너희를 도무지 모르겠구나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라"(마7:22)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우리의 생명이 이 땅에 국한 된 것만이 아님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 믿음의 절대적 매개체! *
성경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증거하였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사모하는 영혼의 울부짖음은 어디서나 기적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척 스미스 목사님의 설교에서 들은 이야기입니다만 미국의 뉴포트 비치 감리교회에 출석하고 있는 어느 가정에서 매주 월요일마다 성경공부 클래스가 있었는데 꽤 안정된 정기적인 모임이었습니다. 그들이 성령 테마를 공부할 때 공부를 하던 성도들 중 많은 사람들이 성령세례를 체험하였습니다. 그들 중 성경공부에 주기적으로 참석하던 한 부인이 있었습니다. 그 부인은 마음 속으로 간절히 성령세례를 받기를 간구하고 있었고 함께 성경공부를 하던 부인들도 그 여인이 성령세례를 받게 되기를 기도하였습니다.

어느 날 집에 돌아 온 그녀는 남편과 함께 야구 씨즌 경기를 보던 중 갑자기 하나님 앞에 경배 드리고 싶은 충동이 견딜 수 없도록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작은 거실로 나가 무릎을 끓고 하나님 앞에 경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때 갑자기 엄청나게 커다란 바람이 터지는 소리가 귓전을 때렸습니다. 그 때 그녀에게는 사도행전에서 오순절 날 크고 강한 바람소리를 들은 사람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은 말씀을 떠올리는 순간, 그녀는 감당할 수 없는 기쁨에 빠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그 순간 믿음의 확신 속에서 성령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소리는 남방기구에서 수증기가 빠지는 소리였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 소리를 듣던 순간 믿음이 생겨 하나님의 성령을 체험한 것입니다. 그녀는 그 후부터 방언을 하며 기쁨과 평안을 누리며 성령 충만한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매개체 속에서 접촉된 믿음의 동기입니다.

*다른 사람과 관계없다! *
또 척 스미스 목사가 체험한 간증 속에는 이러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척 스미스목사가 아리조나에서 목회할 때였습니다. 그 때 성도 중 한 청년이 성령의 세례를 받기를 사모하고 간구하고 있었습니다. 그 청년은 늘 성경공부 모임에 참석하며 갈급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나는 성경공부 후 참가한 몇 사람들과 함께 그 청년에게 손을 얹고 그에게 성령의 선물이 주어지기를 주께 기도하였습니다. 그때 갑자기 그 청년의 입에서 "다쟈아, 다쟈아, 다쟈아"라고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다쟈아? 이건 도대체 무슨 말이야? 하고 우수운 생각을 하였습니다. 웃음을 참느라고 애를 먹었습니다.

그 때 뒤에서 우리와 함께 기도를 하고 있던 어떤 부인이 나에게 와서 척 목사님 지금 이 청년은 체코슬로바키 말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를 말하고 있습니다고 전해주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정말로 감탄하여 하나님께 회개하며 주께 경배하였습니다. 성령의 은사는 옆에 있는 사람들의 지성이 부인을 하던지 말던지 그의 소원을 따라 주권적을 역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의 은사는 믿음을 가지고 그 은사를 받기를 사모하고 간구하는 사람에게 어떠한 믿음의 동기를 통하여 주어지는 것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갈3:2) 물었습니다. 이것에 대한 대답은 말할 것도 없이 "믿음이다"이지요.

*종교적 도덕과 관계없어! *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행함으로 성령을 받는 줄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성령세례를 받지 못한 것은 아직 자신이 담배를 피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던가 술을 마셨기 때문이라고도 생각합니다. 이것은 믿는 자들로서 지켜야 하는 도덕적인 측면이지 그것으로 성령의 세례가 금지되거나 그런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을 주를 의지하고 우리에게 성령을 주실 것을 믿고 간구할 때 주께서는 우리의 믿음 위에 그의 성령의 은사는 주권적으로 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다만 주를 만날 만한 때, 즉 찬스를 찾을 필요가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성령의 세례는 우리를 거룩하게 하기 위하여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또 흥분할 정도의 활력을 체험하게 하기 위하여 주시는 선물도 아닙니다. 그의 증인될 그리스도인에게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선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 세례를 받기 위하여는 어떠한 거룩함의 기준점에 도달하여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격은 믿는 자들이면 되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3년 전 미국 갈보리채플 성경대학교를 졸업한 젊은 찬양 리더 치누아 포드라는 형제가 우리교회에 와서 나와 함께 살면서 1년 간 사역했습니다. 그는 흑인이었습니다. 그는 성령세례를 체험한 청년으로서 정말 성령충만한 예배 인도자였습니다. 나는 그가 리더하는 찬미 속에 있으면 주의 임재하심에 감격하여 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는 주를 알고 사모하는 그리고 주로부터 사랑받는 예배자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의 삶의 방법이었습니다. 그의 삶의 방법은 준비되지 못한 자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는 저녁에 라면을 끓여먹고 가스불을 끄지 않기 일쑤였습니다. 다림질을 한 후 코드를 꼽아 둔 체 집을 나오기 일쑤였습니다. 이미 선약된 약속이 있어도 누군가가 전화를 하면 대구라도 달려가는 그런 무절제의 친구였습니다. 돈이 있으면 한꺼번에 다 써버리고 그 다음날 부터는 굶어도 좋았습니다. 나는 정말 함께 생활할 수 없는 그 친구 때문에 화도 많이 내고 울기도 많이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청년은 성령을 체험한 하나님의 예배자임은 틀림없었습니다. 이와 같이 성령의 은사는 성령은사를 사모하는 그의 사람들에게 주권적으로 주시는 주의 선물인 것입니다.

*내 방언에 관섭하지 마라! *
중요한 것은 어떠한 은사라도 그에게 근본적인 그리스도의 사랑이 있느냐 없느냐는 매우 중요합니다. 바울은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꾕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 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13:1-3)고 말하였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에게는 사랑이 그 무엇보다도 절대적 우월하고 중요함을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누가 정당한 방언을 하던지 비정상적인 방언을 하던지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고 있느냐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따라서 방언을 말하는 사람을 어떠한 이유로 해서 금지해선 안됩니다.

나의 방언은 아름답고 어떤 사람의 방언은 "빠샤 빠샤"하고 소리를 낸다할지라도 혹시 그 소리가 내 귀에는 "뿌셔 뿌셔" 과자 선전 같이 들린다 하더라고 그것은 그 사람의 믿음 속에서 활동된 하나님의 선물인 것입니다. 따라서 내가 앞에서 잘못된 방언을 지적한 것으로 하여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앞에서는 온전한 하나님의 방언의 은사에 대하여 성경적인 이론적 증거를 한 것이고 오늘은 믿음의 바탕 위에 주권적으로 주어지는 방언의 은사에 대하여 설명한 것입니다.

남들이 뭐라고 생각하던지 당신이 진정한 믿음 속에서 하나님께 받은 방언이라면 당신은 아무 걱정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 방언으로 영적인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그 기도를 통하여 당신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체험하게 되고 하나님 앞에 더욱 강한 일꾼으로 헌신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성경에 기록된 방언에 대한 규제를 따라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방언을 통역할 수 있게 해달라고 주께 간구하고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사랑을 잃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을 아는 사람들이 행하는 성경적 질서인 것입니다. 내일부터는 통역의 은사로 이어지겠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늘나라 통역관들이 되어 보십시다. 안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