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강해/창세기 강해

(창세기3장-4)네 생각은 어떠하냐고 묻는다면..

이요나 2007. 2. 21. 15:02

(창세기3장-4)네 생각은 어떠하냐고 묻는다면..

 

(창세기3:2-5)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뱀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사단의 개념

여호와의 증인을 만나면 "우리도 하나님을 믿는 형제인데요 성경에 대하여 당신과 의견을 나누고 싶은데요? 하며 접근을 시도한다. 만약에 예수 그리스도의 형제인 당신에게 성경의 말씀을 놓고 왈가불가 하며 "네 생각은 어떠하냐?"고 묻는다면 당신은 그 사람과 말 할 필요조차 가져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이미 함정을 파 놓고 당신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럴 때 그 사람에게 할 말은 단 한가지이다. "하나님 말씀을 논하건대 주께서 당신을 나의 스승으로 세우지 않으신 것만큼은 나는 안다"라고 하면 된다. 오늘은 하와의 근본적 잘못이 어디에 있는가를 성경을 통하여 살펴볼까 한다.

 

사단에 대한 우리의 개념과 성경이 가르치는 개념과는 현격한 차이가 있음을 본다. 밀턴(Milton)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사단의 모습을 보면 머리에 뿔을 달고 붉은 옷을 걸치고 갈퀴 손의 무시무시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우리의 생각 속에는 늘 이러한 사단의 모습이 자리잡고 있다. 괴기 영화에 등장하는 마귀의 모습들과 같이 공 포의 이빨과 눈초리 그리고 피 흘림 등..... 그러나 성경에 묘사된 사단의 모습은 처음부터 "광명한 자"(번쩍이는 자)이다.

 

또 성경에는 사단이 용으로 상징되고 있는데 우리는 이 지상에서 용을 볼 수 없다. 중국 영화에는 용과 관련된 축제가 많이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그 또한 성경이 기록한 용의 모습은 아니다. 우리에게 나타나는 사단의 정체가 그러한 모습이라면 그러한 사단의 공략에 당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현실 속에 표현되는 사단 즉 용의 모습은 권선징악의 사회적 통념을 따라 누구라도 보는 순간 그가 악한 자임을 알 수 있도록 묘사되었다. 그러나 성경이 사단을 가리켜 "광명한 천사"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이 문제다.

 

*전문적 지식의 필요성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때때로 사기꾼에게 이용을 당하게 된다. 늘 속지 말아야지 하면서 결국 또 당하고 만다. 그가 우리와 관계가 더욱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사기의 확률은 더욱 높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를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변의 친한 사람들에게 사기를 당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첫째로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경험의 부족에서도 올 수 있다. 따라서 우리를 홀리는 사람들은 그 일에 대한 전문적 지식을 알고 있으며 그 일에 대한 경험을 갖고 있다는 결론이 된다.

 

사단에 대한 개념은 이러한 측면에서 생각해야 한다. 예수께서 40일간 광야에서 시험을 받을 때 사단의 질문을 살펴보면 사단은 예수님이 처해 있는 환경을 직시하고 있었으며 앞으로 있을 일들에 대하여 구체적인 지식과 안목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40일간 금식한 사람에게 현실적으로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리고 그가 하나님의 능력을 갖고 있다고 할 때 그는 돌을 가지고 빵을 만들어 현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자기 스스로 하나님이 설정하신 자연의 법칙과 질서를 무시하여야만 가능하다. 또한 그 시점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메시야로 어필되기 위하여서는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자연의 질서를 벗어난 어떠한 이적을 일으킬 때 그는 세상 가운데서 최고의 인기자가 될 수 있다. 또한 사단의 마지막 시험은 메시야의 목적 즉 이 땅에서의 왕이 되기 위하여 가장 빠른 지 름길로 가기를 제시하고 있다. 즉 목적을 위하여서는 수단과 과정을 무시해도 된다는 이론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세우신 질서를 스스로 깨뜨리지 않는다. 이것의 그의 공의이시다. 이와 같이 사단은 예수 그리스도의 목적과 현실적 상황을 꿰뚫고 있었고 나름대로의 관찰력과 이론을 갖고 있었다.

 

사단의 도전은 기본적으로 3가지 공통점을 갖는다. 첫째로 하나님 말씀에 대한 도전이요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도전이요, 세 번째로 성령의 역사에 대한 도전이다. 하와에게 질문을 하는 뱀의 말투를 생각해 보자.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 하셨습니까?" 이 말에 담겨져 있는 저의(底意)를 생각해 보자. 만약 당신에게 누가 이렇게 질문을 한다면 어떠한 생각이 생기겠는가? 인간은 사고를 갖고 있다, 하나님의 형상을 주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자결권이 주어졌는데 중요한 것은 질서 안에서 주어졌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에게는 누구의 간섭을 배제하는 속성이 있다. 뱀의 질문은 "너 에덴 동산의 주권자 아담아! 너희는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 아니냐?" 하는 의도가 포함되어 있다. 의심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 이것이 사단의 첫 번째 시도였다.

 

이것은 하나님의 공평성에 대한 의혹을 갖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즉 공평하신 하나님이라면 그럴 수가 없다는 것이다. 요즘에도 불신자들이나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이와 똑같은 질문들을 한다. 즉 하나님의 말씀에 의심을 제기하는 것이다.

 

현대에 와서는 위대한 석학이라는 위인들이 나타나서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들이 만든 잣대를 가지고 이 부분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저 부분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것이 아니라고 분리를 시키기도 한다. 또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은 특수한 사람만이 알 수 있도록 계시되어 있는 것임으로 내가 잘 알 수 있도록 편집하여 쉽게 가르쳐 드리지요"라고 한다.

 

*힘의 대결

문제는 아담의 편이 있었다. 아무리 사기를 치려고 해도 그것에 대한 지식이 풍성하다면 그 사기꾼은 성공할 수 없다. 하와는 뱀의 의혹에 대하 여 하와의 답변은 무엇인가 정확성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무엇인가 그 의혹에 대답할만한 충분한 지식이 없었던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명령은 하와가 직접 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하와의 잘못이 없지 않은가? 아담이 평소에 성경공부를 제대로 시키지 않았기 때문이 아닌가? 물론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떠한 지식도 그 지식이 자기 안에서 체험으로 터득된 지식이 되기까지는 질문과 의혹이 따르게 마련이다.

 

이 언약은 쌍방의 체험적 지식의 합의 하에 조인된 것이 아니라 창조주와 피조물의 사이의 명령과 순종의 체계 속에 체결된 것이다. 즉 다시 말하여 창조주의 전지 하심과 만물을 주관하는 주권자의 뜻으로 내려진 권위로서 검토되고 인간에게 연구하고 검토되어야 할 학문과 이론이 아닌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우주의 질서는 살피고 연구하여 지혜와 지식을 발견할 수는 있지만 그것을 변형하고 발전시킬 수는 없다. 왜냐하면 창조주의 전지하신 지식과 지혜로 세우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와의 잘못은 무엇이었을까? 그 의혹에 대하여 아담에게 묻지 않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동산의 모든 관리권은 아담에게 주어져 있었고 뱀은 아담의 지배 속에 있는 생물이었다,

 

그러므로 인간 이하의 동물이 하나님의 말씀에 이의를 제기하였을 때 그것에 대한 결정권은 아담에게 있었던 것이다. 창조주의 언약의 말씀에 대한 사단의 도전을 하와가 맡아야 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하와는 그의 질문에 대하여 그 질문의 요지가 자기가 답변할 성질의 것이 아님을 먼저 깨달았어야 했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하와가 먼저 범죄 하였다"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에서 벗어날 때 그 자체가 범죄의 첫 발걸음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