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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시편80:8) 주의 우편에 있는 자

이요나 2007. 2. 26. 10:21

(시편80:8) 주의 우편에 있는 자

 

(시80:17) 주의 우편에 있는 자 곧 주를 위하여 힘있게 하신 인자의 위에 주의 손을 얹으소서

 

이스라엘을 포도나무에 비유한 것은 참으로 흥미로운 일입니다. 더욱이 애굽에서 가져다가 열방 쫓아내고 심으셨다는 기록은 아름다운 시와 같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말한 것이기도 합니다.

 

시편80편에서 아삽은 주께 멸망에 처한 이스라엘의 회복을 간구하고 있습니다. 이 시 속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어떻게 사랑하셨으며 어떻게 구속하였는가에 대한 애절한 사랑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아삽은 1절에서 요셉을 양떼같이 인도하시는 이스라엘의 목자여 귀를 기울이소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자여 빛을 발하소서 호소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두 가지 속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하나는 이스라엘의 목자이신 것과 또 구룹 사이에 좌정하신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구룹이란 성전 지성소 안에 안치된 언약궤 위를 덮는 속죄소에 세운 두 생물의 날개사이에 좌정하신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를 말합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을 만나시고 그들의 죄를 사하시는 것입니다. 그 법궤 안에는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친히 받은 돌비와 만나 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항아리가 들어 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질서를 언급하신 것입니다.

 

또한 여기서 아삽이 특별히 요셉을 이스라엘의 대표 주자로 세운 것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그는 다시 2절에서 요셉의 어머니 라헬의 소생들 곧 에브라임과 베냐민과 므낫세에게 주의 용력을 내어 달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구절 속에서 야곱과 라헬의 애절한 사랑관계를 회상하게 됩니다. 야곱은 이방의 목자였던 라헬을 만난 순간 깊은 연민에 빠졌습니다. 그를 위하여 14년의 머슴살이를 마다하지 아니하였고 노년에 라헬에게서 얻은 두 아들 요셉과 베냐민을 각별히 사랑하였습니다.

 

야곱은 후일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을 만나 그의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이스라엘의 양자로 세워 르우벤이 상실한 장자의 축복을 하였으며 후일 임종시에 이스라엘의 열두 방백을 축복할 때에 요셉의 활이 도리어 건장하며 그 팔이 힘이 있으니 야곱의 전능자의 손을 힘입었음이라 그로부터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가 나도다(창49:24) 예언하였습니다.

 

이것은 매우 흥미로운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실 이스라엘의 목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하신 것으로 유다지파에서 나셨기 때문입니다. 그로하여 이사야는 하나님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의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사5:7) 하였습니다.

 

 우리는 창세기 49장에 기록된 야곱의 예언에서 두 가지 역사적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먼저 야곱은 그의 장자 르우벤을 축복하여 너는 나의 능력이요 나의 기력의 시작이라 위광이 초등하고 권능이 탁월하다마는 물의 끓음과 같았은즉 탁월치 못하도다 하여 아비의 침상을 더럽힌 죄를 물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 가운데 열정적인 능력을 통해 그 위세를 더하는 교회 세력들의 위험을 발견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아비의 침상을 더럽히는 것처럼 부끄러운 일은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사에서 자식들이 아비의 침상을 범하는 일들은 비일비재합니다. 곧 교회의 분열은 자기의 태어난 침상을 부정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두번째로 야곱은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잔해하는 기계로다 내 영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예하지 말지어다 그들이 그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이로다(창49:5-7) 하였습니다.

 

이것은 벧엘 귀향 길에 사사로운 원한으로 할례로 귀화한 하몰족을 몰살한 두 형제의 죄를 정죄한 것입니다. 사실 레위는 제사장의 직분을 받은 족속으로 이스라엘의 죄를 담당할 지파였습니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이스라엘의 죄를 당당한 대제사장은 유다지파에서 나셨습니다.

 

오늘 시편기자가 요셉지파를 들어 하나님께 호소하는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 당시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에 남유다는 바벨론 왕국에 멸망을 당하였습니다. 이제 그들은 모두 이방인의 땅에 포로가 되어 더 이상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죄로 말미암아 눈물의 양식을 먹으며 원수의 조롱을 받으며 살아가는 이방의 객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한 소망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주께서 미리 예비하신 요셉을 통하여 환난 받는 이스라엘로 애굽에 들게 하신 하나님께서 환난 중에 울부짖는 택한 백성을 이끌어 내어 열방을 쫓아내신 곳에 드리신 증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그의 백성들을 섭리하시는 증거로서 고난받는 주의 백성들에게는 커다란 위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아삽은 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열방을 쫓아내시고 이를 심으셨다 하였고 다시 주께서 그 앞서 준비하셨음으로 그 뿌리가 깊이 박혀서 땅에 편만하였다(9) 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양떼를 다스리시는 목자의 속성을 배울 수 있습니다. 목자는 양떼를 위하여 앞서 길을 가며 앞서 그 모든 것을 준비한다는 것입니다. 그 상황이 어떻든 목자는 양떼의 생명을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는 것입니다.

 

아삽은 다시 그 가지가 바다까지 뻗고 넝쿨이 강까지 미쳤거늘 주께서 어찌하여 이 담을 헐으사 길에 지나는 모든 자로 따게 하셨나이까? 하였습니다. 사실 포도나무가 무성한 것은 농부가 잘 가꾸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잘못된 것은 목자들의 직무유기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로서 포도원은 수풀의 돼지가 상해하며 들짐승들에게 먹힘을 당한 것입니다.

 

그러나 주의 예정 가운데 심으신 포도원은 분명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삽은 만군의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돌이키사 하늘에서 굽어보시고 이 포도나무를 권고하소서 주의 오른 손으로 심으신 줄기요 주를 위하여 힘있게 하신 가지니이다(14,15) 하였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하셨고 다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이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5)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주의 종 된 목자들이 무엇을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의 문제는 모두 그 목자 된 자들의 불순종에서 비롯됩니다. 그들이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신 질서와 섭리를 벗어나 자기의 배를 신으로 삼기 때문에 교회가 분열되고 또 세상 가운데서 조롱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에 아삽은 17절에서 주의 우편에 있는 자 곧 주를 위하여 힘있게 하신 인자의 위에 주의 손을 얹으소서 그리하면 우리가 주에게서 물러가지 아니 하리오니 우리를 소생케 하소서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기록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성정을 가진 야곱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주의 우편에 있는 자 곧 주를 위하여 힘있게 하신 인자의 위에 주의 손이 임하시면 우리는 멸망 가운데서 생명을 얻고 소생할 것입니다.

 

아삽은 장차 이 땅에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패역하고 모두 잘못된 길로 가더라도 주께서는 주의 이름을 위하여 그의 아들을 보내실 것입니다. 그가 우리의 목자가 되어 우리로 영원한 생명에 들게 하실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우리에게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무리를 치되 브극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되라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벧전5:2-4) 하였습니다.

 

만군의 주여 우리의 얼굴에 주의 빛을 발하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돌이켜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아멘 아멘.

출처 : 세미한 음성
글쓴이 : 요나짱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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