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78: 9) 영적축복과 실패의 원인
(시78:9)에브라임 자손은 병기를 갖추며 활을 갖었으나 전쟁의 날에 물러갔도다
오늘 우리가 공부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시험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이다. 이 물음은 어쩌면 우문우답 같지마는 사람은 불행하게도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 할 수 있다. 이것은 매우 슬픈 일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계획은 그의 사람들로 하여 하나님께서 갖고 계신 능력을 모두 사용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물론 각 사람들 속에 역사하는 하나님의 능력은 그를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누구도 하나님의 예정을 떠나서 더 큰 능력을 불러 일으키지는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사람들에게 주의 능력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제한하시지는 않는다. 부름받은 사람들이 더욱 강한 믿음으로 더 큰 하나님의 능력을 창출해 내기를 바라실 뿐이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으면 이 산더러 바다에 옮기우라 하면 그리 될 것이라 하셨다. 이것은 오직 믿음으로 불가능을 가능케 할 수 있다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는 우리를 위해서 예비된 하나님의 능력을 모두 꺼내어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 과연 그 이유는 무엇일까? 오늘 우리는 이 문제를 살펴 보기로 하자.
I. 탁월한 선택 파워
시편기자는 9절에서 “에브라임 자손은 병기를 갖추며 활을 가졌으나 전쟁의 날에 물러갔도다” 하였다. 이것은 비유로서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모든 사람들에게 모두 귀감이 되는 말씀이다. 아삽은 한 사람의 증인을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다. 그는 바로 요셉의 둘째 아들로 북 이스라엘의 첫번째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여로보암의 조상이다. 에브라임은 요셉이 애굽에서 므낫세와 함께 낳은 두번 째 아들이다.
야곱은 임종시에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축복할 때 둘째인 에브라임을 앞세워 축복을 하였다. 요셉은 못마땅해 했으나 야곱은 하나님 앞에 에브라임을 내세웠다. 그리고 그 둘을 자기의 양자로 삼아 요셉에게 두 배의 땅을 분배하였다. 이것은 장자의 축복이 르으벤으로부터 요셉에게 전이 된 것을 의미한다.
특별한 택함을 받은 에브라임 지파는 비록 다른 지파에 비하여 숫자적으로는 열세였지만 그 지도력에 있어서 특별한 두각을 나타내었다. 사사기 5장에서 여선지 드보라는 에브라임 지파가 단독으로 아멜렉과 싸워 이겼다고 칭송하였다(삿5:14).
에브라임의 용맹이 치솟자 다른 지파의 단합과 사기를 위해 그들은 기드온의 때의 미디안 전쟁(삿8:14)에서와 사사 입다시대의 암몬과의 전쟁(삿12:1)에서는 제외 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용맹은 교만을 불러 일으켜 에브라임 지파의 미가는 자기 집에 산당을 세워놓고 가정신을 섬기는 죄를 행하였으며(삿17:1-12) 그 지역에 살던 레위지파 사람과 그의 첩에 관한 이야기는 사사시대의 가장 추악한 일이 되었다.
또 왕국시대에 에브라임 지파는 다윗지파를 따르지 않고 사울지파를 지지했으며(삼하2:8-10) 후일 압살롬이 반란에도 가입하기도 하였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분변하지 못하고 자기의 생각과 지파의 유익을 따른 처사이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하나님은 후일 다윗왕국 때에 부패한 이스라엘을 둘로 나누어 에브라임 지파의 여로보암에게 주었다(왕상11:25). 이를 예언을 한 아히야 선지자도 에브라임 지파였다(왕상11:29). 이것이 북 이스라엘의 시작인 것이다.
북이스라엘의 왕이 된 여로보암은 에브라임 지파의 성읍인 벧엘을 북이스라엘 왕국의 종교적 중심으로 세우고 벧엘과 단에 제단을 쌓아 금송아지를 세우고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내려가는 것을 막았다. 이것은 에브라임 지파를 높이 쓰신 하나님에 대한 배신이였다. 이로 하여 북이스라엘은 멸망을 받고 말았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과 능력을 받은 지파와 사람이 무엇 때문에 멸망을 당하는 지를 알 수 있다. 그가 전쟁에 능한 병기와 활을 갖고 용맹을 갖었다 해도 전쟁의 날에 물러섰다면 그는 패자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넉넉한 힘과 지혜를 주신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을 이기고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가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히10:39) 하였다. 그를 위해 하나님은 서열을 무시하고 가장 어리고 작은 에브라임의 머리에 축복을 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에브라임은 그 능력이 자기 스스로의 것으로 착각하여 교만에 빠져 하나님의 뜻에 이르지 못하여 버림을 받고 말았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무엇이 우리로 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 시키게 하는지 알아 보도록 하자
II. 죄는 하나님을 제한한다(10, 17 )
A. 죄로 하여 버려진 사람들
하나님의 사람들이 예비된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는 가장 큰 원인은 죄다. 이 죄의 문제는 처음부터 하나님과 인간의 사이를 떨어지게 하셨던 문제이기도 하다. 원래 인간은 하나님과 교통을 가질 수 있도록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 이것은 이 땅에 거룩하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룩하기 위한 영광스런 하나님의 계획이었다.
그러나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자기 좋은 것을 선택하여 스스로 범죄자가 되었다. 이로서 모든 인간은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었고 죄 속에서 살다가 흙으로 돌아가 심판의 날을 기다리는 존재가 되었다.
우리는 성경에서 주께서 택하고 기름부음 부으신 사람들이 스스로 범죄하여 하나님께 버림받은 사람들을 볼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사람 중의 하나는 삼손이며 또 다른 한 사람은 사울이다. 우리는 이들의 행적을 볼 때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축복하여 어느 누구도 감당할 수 없는 커다란 은혜를 베풀었다. 그들은 그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하나님의 위엄과 능력을 소유한 지도자로 기름부음을 받았다.
1. 삼손
삼손은 신정시대의 사사였다. 다시 말해서 오늘의 목사라고 하겠다. 그는 태어남으로부터 하나님께 바쳐진 나실인이 지켜야 할 하나님의 계율을 스스로 어겨 그의 머리에 두신 하나님의 능력을 상실하여 이방인들의 노예가 되어 조롱거리가 되고 말았다. 삼손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성적 타락이다. 그는 성의 노예가 되어 하나님의 사람이 지켜야 할 거룩성을 상실하고 만 것이다.
오늘날 우리 교회에서 가장 큰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것은 성적타락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성전 된 우리의 몸을 더럽히는 문제로 바울은 단호하게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께서 그를 반듯이 멸할 것이다 예언하였다.
이 정권이 들어서면서부터 우리나라는 동성애자들의 인권을 내세워 성전환을 합법화하고 그도 부족하여 호적을 정정하는 대법원 판결을 내렸다. 이제 이 나라는 성적 판결이 하나님의 창조하신 질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성적 기회를 따라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한데도 교회는 잠잠하고 하나님의 거룩함을 상실한 여성단체들도 침묵을 하고 있다.
바울은 로마서 1장에서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었다’(롬1:21,22) 하였다. 그 결과 하나님은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 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여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남자들로 순리대로 여인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일듯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다’(롬1:24-27) 증거하였다.
성경의 역사로 볼 때 이스라엘에게 있어 가장 혼란스런 때마다 남색하는 자들의 문제가 거론되고 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는 길목으로 간 것을 의미한다. 최근 우리나라는 전례 없이 전국이 물 폭탄을 받고 있다. 이러한 것을 하나님의 책망으로 말한다면 비웃겠지만 아직도 교회에서는 자성과 회개의 소리가 나지 않고 있다.
2. 사울
두번째로 우리가 주의 있게 살펴 볼 사람은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으로 선택 받은 사울이다. 사실 사울은 계보로 보나 성품으로 보나 왕으로서의 자격을 갖춘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선지자 사무엘을 통해서 사울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세우셨다.
사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그의 종들을 통해서 통치해 가시고자 하였다. 그러나 사사들과 제사장들의 자식들이 타락하고 부패하여 백성들이 외세를 두려워 하였고 자신들도 이방인처럼 위엄있는 왕의 통치를 요구하였다. 사무엘은 이 일을 악하게 보았으나 하나님은 이를 수용하라 하시며 백성들이 너를 버린 것이 아니라 나를 버린 것이라 하셨다. 그래서 탄생된 것이 사울 왕이다.
사울의 문제는 영적 교만이다. 그는 주께서 세운 선지자의 가르침을 따라 백성들을 통치할 권세를 받은 사람이다. 그런데 사울은 하나님을 종교로 만들고자 하였다. 하나님은 성전에 앉아서 예배나 받으시면 되지 않겠느냐 하는 의도라고 하겠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명령이나 율법대로 행한다는 것이 왕으로서 자존심 상한 것이라 생각했었나 보다. 사무엘은 이러한 사울에게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책망하고 사울이 왕됨을 슬퍼하였다.
이 두 증인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달되는 메시지는 지도자의 육체적 타락과 영적 교만이다. 이러한 일들은 모두 하나님의 계획과 그 능력을 제한하는 행동들이다. 하나님은 그의 택하신 자들 속에서 그의 위대한 능력을 통하여 하나님의 위대한 나라를 세우시고자 하셨던 것이다.
이것은 아무리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의 축복이 임하여도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지 아니하고 그 율법을 준행하기를 거절하면 결국 그들은 전쟁의 날에 물러선 것과 같다는 말씀이다. 이와 같은 일들은 하나님을 우리에게서 제한하는 일로서 그들이 비록 주께서 행하신 일들을 보았다 하드라도 그것은 마치 꿈을 꾼 것같이 기억에서 사라지고 말 것이다.
III. 불신앙은 하나님을 제한한다(19, 20)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능력으로부터 떨어져 나가고 우리에게서 하나님을 제한하는 두 번째 원인은 불신앙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러한 불순종은 물질 곧 재물로부터 비롯된다. 이 문제는 현실을 살아야 하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매우 난감한 문제이기도 하다. 이 땅에서 삶을 영위해 나가려면 물질은 불가분의 터전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육체가 물질로 이루어지고 또 물질 위에 우리의 삶의 터전이 있기 때문에 물질이 없이는 하루도 살아 갈 수 없다. 주님은 우리에게 물질을 주셨다. 또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물질이 필요 없다고 하시지 않았다. 다만 우리의 삶의 목적이 무엇을 위해 사는 가를 물으신 것이다.
바울은 로마교회의 성도들에게 교훈을 거스려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가리켜 이들은 자기 배를 섬기는 자들이라 하였으며(롬16:18) 다시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로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자라’(빌3:19) 증거하였다.
시편기자는 “저희가 저희 탐욕대로 식물을 구하여 그 심중에 하나님을 시험하였으며 그뿐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이 광야에서 능히 식탁을 준비하시랴”(18,19) 하였다 증거하며 이것은 지존자이신 하나님을 배반한 것이라 하였다(17).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이들은 이미 능하신 하나님의 이적을 체험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애굽에서 그들을 구원하실 때에 모세를 통하여 행하신 이적들을 보았으며 홍해 바다를 갈라 물이 벽처럼 선 사이를 건넜으며 낮에는 구름으로 밤에는 화광으로 인도하셨으며 반석에서 물을 내어 신령한 물을 마시게 하셨던 것이다.
시편기자는 이들이 “저가 반석을 쳐서 물을 내시며 시내가 넘쳤거니와 또 능히 떡을 주시며 그 백성을 위하여 고기를 예비하시랴 하였도다” 하였다. 참으로 인간은 새대가리 같은 존재들이다. 도저히 잊을 수 없는 능력의 순간들을 까맣게 잊고 배를 채우기 위해 탐욕에 빠져 전능자 하나님을 의심하였으니 말이다.
이 때도 하나님은 저희의 요구를 들어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먹이시구 동풍을 준비하여 메추라기를 장막에 쌓으셨다. 아삽은 “저희가 먹고 배불렀나니 하나님이 저희 소욕대로 주셨도다”(29) 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이들이 욕심에서 떠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에 하나님은 아직 식물이 그들의 입안에 있을 때에 분노하여 이스라엘의 살진 자와 청년들을 죽이셨다(31).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을 보고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물었다. 이 말은 앗수르의 산헤립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열국의 모든 신 중에 누가 그 땅을 내 손에서 건졌기에 여호와가 예루살렘을 내 손에서 능히 건지겠느냐?”(열하18:35) 한 말과 무엇이 다른가?
또한 유대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세금을 가이샤에게 바치는 것이 옳으냐 그르냐 질문하였으며 간음한 여인을 향하여 모세는 이 여인을 돌로 치라 하였거늘 당신은 무어라고 하겠는가? 물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다치고라도 베드로가 바다를 걸어 오신 예수께 주시어든 나로 바다를 걷게 하소서 한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오늘날 우리는 어떠한가? 하나님이 3기 암을 치료하시겠느냐? 묻고 있지 않는가? 또한 과연 하나님이 한국에서 갈보리채플을 일으킬 수 있겠느냐 묻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확신한다. 주께서 네게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다면 이 산을 들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면 그대로 되리라 하셨기 때문이다.
어처럼 우리 믿음 생활 속에서 하나님을 제한하는 가장 큰 벽은 불신앙이다. 이것은 공중의 새를 기르시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스스로 자기의 소욕을 채우려 하는 불신앙에서 온 것이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셨다. 그 이유는 그곳에는 재물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필요한 그 모든 것을 주께서 다 준비해 놓으셨기 때문이다.
IV. 두려움은 하나님을 제한한다
하나님을 우리에게서 제한 하는 세 번째 것은 두려움이다. 물론 이것은 믿음의 실패자에게 오는 불신앙의 대가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생각할 것은 우리는 모두 연약한 존재라는 것이다. 실패할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부름을 받은 지 25년에 말씀하신 한 아들을 얻었다. 이삭은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여 자신의 생명을 먼저 드림으로 두려움에서 해방되었다. 야곱은 사기꾼이란 이름을 벗기 위해 20년동안 머슴살이를 해야 했다. 야곱의 아들은 형제 요셉을 판 것으로 평생을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가인은 형제를 죽이고 내 벌이 중하여 견딜 수 없다 하였다. 이처럼 두려움 뒤에는 형벌이 따른다.
그러면 왜 우리는 두려움을 갖어야 하는가? 장래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장래를 알 수 없다는 것은 내가 제한 속에 있다는 것이다. 이로서 우리는 실패를 거듭하고 두려움을 떨게된다. 그러나 주님은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으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15:7) 하셨다. 이를 위해 주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수시어 진리 가운데로 이끄시며 장래 일을 알게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육체에 속한 모든 두려움에서 벗어나 진리의 말씀 가운데서 자유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주님은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1,32) 하셨다. 진리 가운데서의 자유함 이것이 우리를 평안케 하리라.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영적 전쟁에 놓여 있다. 사단은 우는 사자와 같이 우리를 유혹하고 있다. 이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는 것뿐이다(엡6:11-17).
주님 감사드립니다. 오늘 나로 하여 주의 말씀을 보게 하심은 나로하여 당신의 계획에 동참하게 하여 당신의 기쁨과 평안을 누리게 하심을 알고 있습니다. 내가 성경에 이르신 말씀을 지켜 내게서 주를 제한치 않도록 하옵시고 나로 죄에 얽혀 두려움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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