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강해/골로새서강해

(골로새서1:15)하나님의 아이콘

이요나 2007. 2. 28. 11:08

(골로새서1:15)하나님의 아이콘

(골1:15)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우리는 앞에서 최고의 은사 즉 믿음 소망, 사랑의 실천을 지향하여 전세계 가운데서 복음의 열매를 맺고 있는 골로새 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여러가지 문제들을 살펴 보았습니다. 그들은 최고의 은사를 통하여 신령한 지혜와 총명을 받은 성도임에도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는 성도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믿음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았으며, 주께 합당치 못하였으며 선한 일에 열매를 맺지 못하여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같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들은 삶의 진정한 기쁨을 터득하지 못하였고 환난에 대한 견딤과 사람들을 향한 인내가 부족하여 그들의 삶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이 바울이 그들에게 편지를 써야했던 이유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골로새 교회가 왜 이처럼 무가치한 교회로 변질되었는가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에바브로의 가르침이 부족하였을까요? 저는 개인적으로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바울은 에바브로를 가리켜 '우리와 함께 종된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군'이라 하였습니다.

저는 골로새서를 시작하면서 골로새와 이웃하고 있는 라오게디아와 히에라볼리의 역사적 지리적 배경을 언급한 바 있습니다. 역사란 늘 정치적 배경과 함께 집권자들에 의하여 주관되어 가고 있는데 정치는 권세의 속성을 따라 경제능력을 수반하는 영토와도 관계가 깊습니다. 따라서 지리적 배경은 그 정치적 제일 요건에 해당할 수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얼굴
최근 노무현 정권이 들어서면서 수도권 이전 시비로 국론이 분열되고 있습니다. 서울은 조선의 도읍지로 정해진 이래 600년 동안 대한민국의 상징이며 표징이 되어 왔습니다. 서울은 정치적 집권자의 권세의 요지이며 그 나라의 인격을 대변하는 정체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무슨 이유에서 서울 이전을 고집하는지 모르지만 이것은 지금까지 내려오던 서울의 정치적 배경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권세의 얼굴을 만들기 위한 틀이라 할 수 있습니다. 태조 이성개가 고려를 멸망시키고 서울을 개성에서 지금의 서울로 천도한 것도 같은 맥락인 것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노무현 정권이 내놓은 서울 천도는 과거사 척결과 국가 보안법 폐지와 맞물려 있는 정략적 차원에 서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세가지 문제가 모두 통과 되었다고 가정할 때 대한민국의 역사속에서 5000년을 이어 구비구비 흘러 내려 온 민족정기는 허리를 잘라내고 새판을 짜게 될 것입니다.

최근 노무현 정권이 들어서면서 흥미로운 일 하나는 늘 죽자사자하고 데모를 하던 한총련들이 잠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들의 얼굴은 정몽주 의원에게 구름날개를 달아 주던 월드컵에서 나타났었고 또 탄핵을 반대하던 광화문 촛불 속에서도 보였다는 것입니다.

이야기가 다른데로 흘러 버렸습니다만 바울 사도는 오늘 우리가 살펴볼 골로새서 1장 후반부에서 먼저 우리의 구속자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하나님의 형상'이라 칭하였고 또 '교회의 충만' 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왜 바울 사도는 '형상'과 '충만'이란 단어를 사용하였는가에 대하여 깊히 상고하여야 할 것입니다.(이 부분은 2장에서 자세히 다루겠습니다)

우리와의 관계
바울 사도는 13절에서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사함을 얻었도다"말하였습니다. 지금 바울사도는 먼저 그와 우리와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인간은 그 존재가 어디로부터 시작된 것인가를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흑암의 권세' '아들의 나라'라는 말을 통하여 이 땅의 모든 인간들에게 직면한 근본적인 영적문제와 그를 해결하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을 설명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를 두렵게 하는 것은 '어둠의 권세'라는 보이지 않는 영역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지금 우리 믿는 자들 모두가 알고 있는 또 두려워 하는 '흑암의 권세' 에 대하여 과거의 우리는 그것이 삶을 살아가는 기본적 틀로서 그 안에서 인생의 락과 욕망을 성취해 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흑암의 권세'라는 영적사슬 속에 묶여 있는 죽음의 고리였던 것입니다.

바울이 여기서 말한 '옮기셨다'는 말은 우리의 신분적 완전변화 상태를 언급한 것입니다. 일시적인 지위개편이 아니고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신분적 위치 즉 거지의 신분에서 왕자의 신분으로 이동된 것을 말합니다. 그 원인에 대하여 바울은 '그의 사랑'이라 하였고 그 결과를 '구속'이라 표현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인격
바울은 15절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즉 우리의 구속자를 설명하여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라 서술하였습니다. 여기서 바울사도는 그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적 위상을 '형상'과 '먼저 나신 자'라는 말로 압축하여 설명한 것입니다.

바울이 여기서 사용한 '형상'이란 말은 헬라어 '에이콘'(eicon)으로서 어떤 존재를 그림으로 나타낼 때 사용하는 것으로 오늘날 인터넷 상에서 흔히 말하는 '아이콘'(icon)과 같은 성질의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이 단어를 창세기 1장 26절에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사용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도록 나타내신 아이콘인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사용된 '에이콘'은 그 사용의 용도에 있어서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같이 아이콘적인 의미에서 사용된 것이 아니라 그 당시 헬라사람들이 최고의 이성과 정신은 창조자의 본체라 정의했던 '로고스'(Logos)에 대하여 언급한 그림문자에 해당됩니다. 따라서 '형상' 즉 '에이콘'은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사용할 수 없는 단어인 것입니다.

최고의 명예
그러면 '먼저 나신 자'란 무엇을 의미할까요? 여기서 우리가 이 말을 잘못 해석하게 되면 이것을 시간적인 의미로만 생각하여 예수도 피조물이다 라는 의식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먼저 난 자'는 '처음 난 자'와 동의어로서 명예와 관련된 뜻으로 사용된 것으로 이방 가운데서 택함을 받은 이스라엘을 칭할 때와 '메시아'에 대한 언어적 아이콘입니다.

시편 기자는 "내가 또 저로 장자를 삼고 세계 열왕의 으뜸이 되게 하며'(시89:27)라고 기록하였습니다. 따라서 '먼저 나신 자'라는 의미는 '모든 피조물의 명예를 가진 자' 즉 '창조의 영광'을 언급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그가 모든 피조물 앞서 존재하였다'라고 변역해도 좋을 것입니다.

주관자의 인격
계속하여 바울 사도는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자들이나 정사(씨스템)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16절)기록하였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두가지 영역에 대한 비전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먼저 초우주적 비전에 속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과 같은 영적영역에 속한 비전에 관한 것입니다. 비전이란 아직 현실로 다가오지 않은 확정된 것들을 향한 소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우리는 16절에서 우리 마음 가운데 나타난 바울이 제시한 보이지 않는 것들 가운데 나타난 아이콘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eicon) 가운데서 터득한 신령한 지혜와 총명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시험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가이샤의 것은 가이샤에게' 말씀하신바 계십니다. 이것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권세와 나라를 언급하신 것입니다.

통치자의 인격
우리는 에스겔서 서두와 이사야서 6장에서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영적 씨스템의 역사를 볼 수 있습니다. 여섯날개의 네 천사들이 커다란 수레바퀴 속에서 쉬지 않고 역사하고 있었습니다. 사도요한은 계시록에서 그들을 다시 소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능력이 지금도 쉬지 않고 인류 가운데 역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당신이 오늘날 우리 앞에 펼쳐진 보좌나 주관자들이나, 정사나 권세들의 실체를 볼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바울 사도는 17절에서 우리를 구속하신 자를 소개하여 "또한 그가 만물보더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하였습니다. 그것은 만물을 창조하신 이가 그 만물 가운데 들어 있을 수 없음을 증언 한 것으로 우리의 구속자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물의 창조자이시며 주관자이심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다음에서 바울이 말하는 바 예수 그리스도의 또 다른 모습 즉 '충만'의 모습을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