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강해/골로새서강해

(골로새서1:1)성경적 형제의 의미

이요나 2007. 2. 28. 11:14

(골로새서1:1)성경적 형제의 의미

(골1:1-2)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에게 편지하노니 우리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빌립보를 마친지가 벌써 3개월이나 지났습니다. 서울 갈보리채플의 사역을 잠시 놓고 미국에서 쉬고 돌아오니 벌써 여름은 어디론가 가버리고 열매을 맺는 가을이 되었습니다. 요나의 풍랑을 겪으며 미국에서 돌아 와 중국을 향해 떠나고자 준비하던 저는 이제서야 주께서 나의 떠남을 원치 않음을 깨닫고 다시 서울 갈보리채플의 사역에 전념하기로 작정을 하였습니다. 이유야 어찌되었던지 저를 위해 기도해주시던 성도님들에게는 면목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나는 오늘 다시 골로새서를 시작하면서 주께서 내가 가고자 한 길을 막으신 이유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복음의 열매와 관련된 성경적 원리이기도 하였습니다. 서울 갈보리채플의 후임자의 사임을 놓고 3개월 동안 발생된 여러가지 이해할 수 없는 일들 가운데서 내가 깨달은 것은 복음사역은 사역적 후계가 이루어져야 함을 알았습니다.

그동안 10년의 세월을 한길로 달려 오면서 사역을 이어받을 제자 하나를 세우지 못한 게으르고 못난 종이 된 나는 참으로 주와 교회 앞에 민망한 놈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실 갈보리채플의 사역의 중심은 말씀의 가르침과 그를 통한 제자 사역이였습니다. 어느 갈보리채플을 가던지 각 교회마다 모든 성도들이 제자화 되고 있었고 그들 속에서 사역자들이 헌신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나도 10년동안 제자 사역을 하느라고 발버둥을 쳤지만 왠일인지 많은 사람들이 말씀 안에서 온전한 사역자가 되기도 전에 떠나갔습니다. 생각해 보니 엄격히 말하여 그들은 갈보리채플에서의 부름을 받았다기 보다는 보다 쉽게 목사가 되기를 원했다고 하겠습니다.

참 아들된 형제
바울은 서두에서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이라 기록하였습니다. 지금까지 바울은 제자 디모데를 가리켜 '그리스도 안에서 참 아들'(딤전1:1)이라 불러왔습니다. 그런데 골로새서와 데살로니가서에서는 그를 가리켜 형제라 칭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데모데는 바울의 영적 아들이기도 하고 복음의 형제이기도 합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는 이러한 호칭이 뭐 그리 중요한 것이냐 하시겠지만 이것은 다각적인 의미에서 살펴보아야 할 중요한 부분입니다. 오늘 골로새서 1장1절의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이라는 말씀은 이 서신의 집필자가 바울과 디모데의 공동 발신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것은 물론 바울과 함께 공동으로 집필한 것인지 아니면 디모데가 대필을 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중요한 것은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아들된 제자 디모데를 자기와 함께 형제된 자로서 사도의 직분을 이어받을 형제로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미 룻기를 통하여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설정된 기업무르기에 대하여 공부해 왔습니다. 기업은 그 친족 가운데서 가장 가까운 자로서 기업을 무를 책임과 의무를 가진 자로서 백성들의 장로들 앞에서 증거를 받은 자라야만 합니다(룻3-4장 참조). 이로서 바울은 그의 참 아들로서 복음을 위하여 형제된 디모데와 같이 사도의 기업을 이어갔습니다.

거룩하고 신실한 자녀
또한 바울은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에 편지하노니 우리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골1:2) 하였습니다. 여기서 '성도'란 거룩한 무리로서 하나님의 자녀들을 의미하며 '신실한'이란 말은 믿음의 완성도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룩함과 신실한 믿음을 함께 받은 하나님의 자녀를 말합니다.

요즘 우리의 관계는 어떠한가요? 한 교파간에서도 형제된 사역자들이 서로 싸우고 헐뜯고 피를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찾아 보기 힘들 정도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교회뿐이 아닙니다. 형제간에도 재물을 놓고 피를 부르기 일 수입니다. 이웃 사촌이 형제보다 낫다고 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오늘 이 거룩한 편지는 그리스도의 형제로 친히 부르신 우리의 형제 사도 바울과 그의 형제된 데모데로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라 칭함을 받고 신실한 형제가 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이 위대하고 거룩한 무리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이 세세토록 함께 하실 것입니다.

2. 혈육적 형제의 의미
형제란 원초적으로 한 부모에게서 태어난 혈육적 관계로서 한 일가내에서 촌수에까지 확장되는 혈족의 가계 구성 용어입니다. 지금이야 직계 가족 중심이 되어 혈족에 대한 관심이 점점 멀어지고 있지만 우리가 자랄 때만하여도 혈족의 가계는 엄격한 배경을 갖고 있었습니다. 아마 지금도 명절에 고향을 내려가면 그 형태가 남아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형제의 관점은 매우 불행한 위치에서 출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가인과 아벨의 피의 역사로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한 부모의 피와 살을 물려 받은 형제가 혈육에게 죽임을 당한다는 것은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로서 떨처 버릴수 없는 중대한 원한 관계입니다.

그러나 인류의 조상 가운데 발생된 문제는 결국 이 땅에 그리스도의 대속함을 예견한 죄의 결과로서 우리 인간은 숙명적으로 성경에서 다시 형제들에게 버림을 받아 죽임을 당한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역사를 대면하여야 했습니다.

성경에서 형제에 대한 비극은 끊이지 않고 이어져 왔습니다. 악의 심판날 유일하게 구원 받은 의인 노아의 가족의 아들 셈과 야벳의 예언적 관계는 결국 유업의 주권적 다툼으로 이어졌고 그 가운데는 죄의 속성을 따라 영적존재들의 치열한 영적 전쟁의 역사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택하시고 부르신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이후에도 형제들간의 다툼은 늘 택하심을 따른 유업적 관계에서 치열해 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삭을 낳기 전에 잉태한 이스마엘의 영적 배후는 아직도 전쟁의 실마리를 풀지 못하고 있고 독자 이삭의 아들 야곱과 에서의 장자권 투쟁은 예수 그리스도의 날까지 종속되어 왔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가지 중대한 것을 발견할 수 있는데 유대인에게 있어 기업은 아버지로부터 이어받는 것인데 비하여 혈육적 관계는 모계로 이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잘 나타나 있습니다. 열두지파를 낳은 야곱은 4명의 처로부터 12명의 아들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나타난 장자권에 대한 투쟁은 모계를 중심으로 치열하게 펼쳐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 혈통을 온전히 보전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기도 합니다.

이것을 다시 설명하자면 아버지가 유대인이고 어머니가 한국인이라면 그 자손은 유대인의 계보를 이어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한국인이고 어머니가 유대인이라면 그리고 그 한국인 아버지가 개종한 유대인이라면 그의 자손은 유대인의 혈통을 이어가게 됩니다.

혹시 여러분들 중에 이복형제가 있다면 오늘 이 문제에 대하여는 어느 정도 이해가 될 것입니다. 저역시 이복형제를 갖고 있는터라 어려서부터 저의 어머니는 이복 형들 틈에서도 나를 장자로 키우시기에 힘을 쓰셨습니다. 지금이야 이런 일들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습니다만 이제 우리가 그러한 문제에 대하여 무관심하고 소홀해진 것은 사회구조가 혈족 중심에서 문화배경 속으로 변천되었기 때문입니다.

가문의 영광의 계승
유대인에 있어 계승권은 이스라엘의 역사에 왕권이 도입되면서 더욱 치열해졌습니다. 왕권이란 부와 명예를 이어가는 위대한 가문의 영광에 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형제의 의미는 가계를 이어가는 수단뿐이 아니라 기업을 계승하는 가치적 명분이 있습니다. 그 기업 속에는 그 가문의 찬란한 명예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성경에 기록된 이스라엘 역사의 3/2는 이스라엘의 왕권 수호와 관계가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성경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윗왕의 가계를 이어 받을 것을 증거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 설정된 구속사로서 혈통과 가문의 영광을 전수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가 자신이 그리스도인 것을 증명하려면 자신이 다윗의 혈통인 것부터 역사적으로 증명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처럼 유대인에게 있어 형제란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는 혈족관계입니다. 사사시대에 지파간의 원한 관계로 베냐민 지파가 단절되려는 순간에 처한 사건이 발생되었습니다. 그들은 지파간의 전쟁을 멈추고 그 멸절될 위기의 지파를 이어가기 위하여 자기들의 딸들을 보쌈해 가도록 길을 열어 놓았습니다. 이처럼 유대인에게 있어서 형제적 관계는 떼어 놓을 수 없는 숙명적 관계였습니다.

구약의 가르침
성경은 시종일관 형제 사랑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습니다. 주께서는 성경의 첫번째 강령을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에 두셨고 두번째로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마22:39)하셨습니다. 이 계명은 신명기 6장5절과 함께 인용된 레위기 19장 18절의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는 말씀에서 비롯된 것으로 여기서 '네 이웃'이란 형제에 해당합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의 12지파는 형제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이웃이 누구인가에 관하여는 누가복음 10장29절 이하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강도를 만난 사람은 하나님의 도성 예루살렘에서 유대의 가장 낮은 땅 여리고로 가던 유대인이 분명합니다. 유대인이 아니고서는 도성에서 여리고로 행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때 지금 주님은 제자들과 함께 변화산상에서 내려와 여리고를 통하여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있었습니다(막9-10장 참조)

또한 베드로는 형제와의 원한 관계에 대하여 주께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번까지 하오리까?"(마18:21) 물었습니다. 이에 주님은 "일곱번 뿐이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번이라고 할지니라"말씀하셨습니다. 용서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형제는 가계와 기업을 함께 물려받은 자로서 형제의 죄는 곧 나의 죄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주님은 제자들의 세족식 후에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라고 하신 것입니다.

체제 속의 형제
근대에 와서 형제의 관점은 그 언어의 사용 범위가 확대되고 있습니다. 문론 한 부모를 중심으로 형제를 이루는 혈족관계는 변함없는 사실이지만 형제라는 의미는 이제 혈족을 넘어서 어떤 이념과 사상과 또 서로가 추종하는 어떤 목적 의식에 의하여 형제라는 칭호를 갖게 됩니다.

어떤 면에서 형제에 대한 의식은 특수집단에서 더욱 강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모슬렘, 회교도 가운데 형제단이란 죽음을 불사하는 종교적 강성을 갖고 있습니다. 또한 몰몬교나 여호와의 증인 그리고 문선명과 같은 이단적 공동체의 형제적 결의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입니다. 최근 죽음을 몰고오는 광신도적인 종교집단들을 볼 때 그들이 말하는 형제의 결의는 섬짓하기만 합니다.

이러한 형제적 결의는 종교적 공동체 뿐이 아니라 이념적 집단체제에서 강성을 띠고 있습니다. 특히 이념체제와 독제체제 국가에서는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동포애를 내세워 일치단결의 고취시키고 있습니다. 또한 형제 결속은 특수 목적을 띠고 있는 조직 속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폭력 조직들의 경우는 살을 베어 피를 나누어 마시는 형제 결단식을 치루기도 합니다.

3. 복음적 형제의 의미
신약 성경에서 형제라는 단어는 매우 광범위하게 사용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복음의 형제의 의미가 무엇인가 살펴 보아야겠습니다. 성경은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깨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라"(롬8:17) 기록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매우 쇼킹한 말씀입니다. 이것은 피를 나눈 형제들에게 해당하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복음서에서 주의 성만찬에 대한 기록들을 읽고 있습니다. 주께서 떡을 떼어 주시며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셨고 다시 식후에 잔을 들어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하셨습니다(눅22:19-20).

여기서 우리는 성만찬의 진정한 의미를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성만찬의 가장 큰 대의는 구속의 제사입니다. 곧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 위에 제물로 드리실 자신의 몸과 피의 의미를 비유하신 것입니다. 이로서 우리는 아담으로 이어진 저주를 벗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음으로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기업의 계승자
여기서 우리는 성만찬에 담긴 또다른 중대한 의미를 발견하지 않으면 않됩니다. 주님은 오병이어 기적을 행하시면서 '내가 곧 생명의 떡이라"(요6:35, 51) 하셨습니다. 또한 그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다시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리라"(요6:55-56) 하셨습니다.

자 그러면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와 어떤 관계가 될까요? 주와 우리는 살을 나누고 피를 나눈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다시말하여 살과 피를 나눈 형제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죄인된 우리를 대속하기 위하여 그의 거룩한 몸으로 제물 삼으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하신 후, 그의 살을 먹고 피를 나눈 형제들로 그리스도 자신과 한 형제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성만찬의 중요한 의미인 것입니다.

그러면 주께서는 왜 자기와 형제가 되게 하셨을까요? 우리는 이미 앞에서 바울이 말한 바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깨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라"(롬8:17)는 말씀을 읽은 바 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엡1:11) 하였고 다시 '약속의 성령이 인침을 받아 우리의 기업의 보증이 되셨다'(엡1:13-14) 증거하였습니다. 또한 히브리서 기자는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의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게 하려는 것이니라"(히6:12)하였고

또한 기업을 저버린 자에 대하여 "저가 그 후에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히12:17)하였습니다. 또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여러번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고전6:9) 말하여 하나님의 기업을 받을 수 없는 자들을 경계로 삼았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소망을 잃지 않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기업을 잇는 자들을 향하여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잇게하시리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한 것이라"(벧전1:4)하였습니다. 이제 우리는 신실한 믿음과 이내로서 온전한 지키심을 받은 자의 영광을 위하여 복음의 형제의 직분을 다하여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