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적상담

King James 성경과 다른 성경들

이요나 2007. 4. 19. 11:31

King James 성경과 다른 성경들

 


성경적 상담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겠지만 요즘 성경 번역에 대한 말이 여기 저기에서 나오고 있는데 우리가 써오고 있는 성경과 소위 킹제임스 성경이 어떻게 다른지요. 간단히 좀 말씀해 주세요.


I.                    성경에 대해서,

II.                  킹 제임스 성경(KJV)의 역사에 대해서,

III.                   개역상경에 대해서,

IV.                개역성경 분석0,

V.                  표준 새번역에 대해서,

VI.                공동번역에 대해서

VII.               결론.
*글 중 인용된 성경에 번역본이 표시되지 않은 것은 모두 개역성경에서 인용된 것입니다.
0** 이 글에서 표시된 "킹제임스 성경"이란 별도 한글이라는 언급이나 표시가 없는 한 연어로 된 1611년의 King James Version(Bible)을 말하는 것을 꼭 기억해 주기 바랍니다.

 

I. 성경에 대해서:
4:4에서
  예수님은 . . . 사람이 떡으로만 살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하셨다. 그러나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주님의 명령에 대해 별로 관심을 갖지 않는 것 같다. 여기에서 하신 주님의 명령은 간단하고 명료했다.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 . .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 .
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렇게 살 수 있을까? 어떤 사람은
성경을 읽으면 되지! 하며 쉽게 생각할 수 있다. 그러면 어떤 성경을 읽으란 말인가? 번역도 여러 종류가 있으니 어떤 번역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란 말인가? 번역들도 서로 다르고 많은데 어떤 번역을 읽는단 말인가?!

번역들이 서로 다르면 서로 다른 하나님의 마씀이란  말인가? 물론 그렇지 않다. 그러면 서로 다른 것이 어떻게 전부 같은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이 모든 것에는 각각 하나님의 교리와 복음이 있는데 그것이 전부 같은 것을 가르친다는 말인가? 주님의 계명을 다시 읽어보자: 사람이 떡으로만 살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주님은 교리가 아니라 모든 말씀
이라고 하셨다.

무슨 말인가? 우리는 다음 중 하나를 믿을 수 있다:
* 원어로 된 원본만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어떤 번역도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포함하고 있질 않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려면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배워야 한다.
* 그런데 원어로 된 원본은 분실되고 지금은 없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어떤 것인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 그래서 우리는 그의 말씀을 순종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야 한다. 원어로 된 원본만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어떤 번역도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포함하고 있질 않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려면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배워야 한다는 말은 지금의 성경으로 보면 모순되고 틀린 말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신약성경 여러 곳에서 구약의 구절들을 인용하면서 성경(Holy Scriptures)에서 인용한다고 말씀했기 때문이다: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라고 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이 서신을 쓸 때 그가 어려서 읽던 경은
성경이었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그때 디모데가 읽던 성경은 분명히 히브리 성경의 헬라어 번역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성경은 원어의 원본하고는 수 백년의 시대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바울은 이것을 성령으로 감동된 성경이라고 불렀다.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그 말을 번역을 할 때에는 언제나 뜻을 잃게 되어있다. 그러나 신.구약 성경에 성경 무오에 대한 언급이 많은 것을 보면 렘 32:17의 말씀대로 신.구약의 성경 번역문 중에서도 성경이라고 인정될 수 있는 번역 성경이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렘 37:12의 말씀은 이런 하나님의 능력을 증거하는 말씀이다: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주께서 큰 능과 드신 팔로 천지를 지으셨사오니 주에게는 능치 못한 일이 없으시니이다.

하나님은 그의 말씀을 헬라어에서 영어로 완전하게 번역해 놓으셨다는 것이다. 물론 성경 원본은 완전히 소실되어 버렸다. 그래서 원본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완전히 잃은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많다. 첫째로 하나님은 그의 말씀을 보존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이다:
여호와의 말씀은 순수한 말씀들이다. 흙 도가니에서 단련되어 일곱 번 정화된 은 같도다. 오 주여, 이 말씀들을 간수하시리니, 주께서 이 세대로부터 영영토록 그것들을 보존하시리이다 (시 12:6-7, KJV). 하나님의 말씀은 원본이 손실 되었다해서 없어지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이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사람의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며, 풀은 마르고 꽃은 져도 주의 말씀은 영원토록 남아 있음이라. 이것이 너희에게 복음으로 전해진 말씀이니라
(벧전 1:24-25, KJV).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또 시 12:6-7과 벧전 1:24-25의 악속을 우리가 믿는다면 우리는 어딘가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야 한다. 우리가 이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어데 있는지를 먼저 찾아야 한다. 왜 하나님의 말씀이 중요한지를 더 확실히 알기위해 우리는 성경에서 인용된 하나님의 말씀을 좀더 참고해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가장 중요한 핵심적 문제이지 지엽적인 문제가 아니다:

시 33:4
  
여호와의 말씀은 정직하며 그 행사는 다 진실하시도다(KJV).
시 50:16 악인에게는 하나님이 이르시되 네가 어찌 내 율례를 전하며 내 언약을 네 입에 두느냐(KJV).

 

50:17 네가 교훈을 미워하고 내 말을 네 뒤로 던지며(KJV).
시 107:10-11 사람들이 고통과 쇠사슬에 매여 암흑과 사망의 그림자 가운데 앉아 있으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극히 높으신 분의 조언을 경시하였음이라(KJV).
시 119:57 [헷] 오 주여, 주는 나의 분깃이시니, 내가 주의 말씀을 지키리라고 말하였나이다(KJV).

 

119:140 내 열의가 나를 소멸하였으니, 이는 나의 원수들이 주의 말씀들을 잊어버렸기 때문이니이다. 주의 말씀이 매우 순수하므로 주의 종이 그것을 사랑하나이다(KJV).
시 138:2 내가 주의 거룩한 전을 향하여 경배하고 주의 자애하심과 주의 진리를 인하여 주의 이름을
  찬양하리니, 이는 주께서 주의 말씀을 주의 모든 이름 위에 크게 하셨음이니이다(KJV).
잠 5:7 그러므로, 오 너희 자녀들아, 이제 내게 듣고 내 입의 말에서 떠나지 말라(KJV).

그러면 이 말씀들이 어데 있단 말인가? 우리는 먼저 그 말씀들이 없는 곳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이 글에서는 다음의 것을 간단히 살펴자:

헬레니즘 문화의 원문: 1898년 후에 번역된 성경들은 헬레니즘 문화의 원문과 대조한 Nestle's(네슬레의) 헬라어 신약성경을 사용했다. 이런 성경들은 주로 New American Standard Bible과, the New International Version과, the Living Bible과, the New Revised Standard Version과, the New World Translation과, the New Century Version 등이다. 1800년대 후반 까지 정통파 교인들은 헬레니즘 문화의 원문을 완전히 거절해 왔었다. 이는 많은 애급 및 헬라 철학과 인본주의 학자들이 헬레니즘 문화의 원문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잘라냈었기 때문이다.

 

 이 중에서 가장 심했던 사람은 오리겐(Origen)이었다. 이들이 주장했던 일중의 하나는 그리스도를 피조물이라고 까지 했던 것이다. 이 사람이 헬레니즘 문화의 원문을 현대 기독교에게 소개한 사람이다. 그의 1881년의 텍스트가 현대 기독교 문헌의 기초를 이루게 되었다. 그리고 Nestle의 신약성경과 대조되어 합쳐지게 되었던 것이다.


II. 킹 제임스 성경의 역사에 대해서

최초의 사본
신약 성경은 최초에 헬라어로 기록되었다. 헬라어 신약 성경의 최초의 원본들은 AD 100 년 이전에 완성되었다가 그 이후에 소실되었다.

최초의 원본들은 계속해서 사용되다가 다 떨어져 없어지게 되었었다. 그러나 우리에게 최초의 원본들이 없다고 해서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의 순수성이 떨어지는 것은 아님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성경은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완전한 계시이다. 고로 우주의 창조주께서 그의 말씀을 완전하게 보존하시기 위해서 성경을 만드셔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사 40:8, 킹제임스 성경)고 하시지 않으셨는가?

오늘날 많은 신학자들과 교역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완벽하게 보존된다는 것은 순전한 허구이며 망상이라고 생각한다. 성경을 이렇게 보존할 수 있는 가능성은 그들의 지성으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평범한 그리스도인들 경우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보존된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드리는데 전혀 문제가 없다. 이 문제에 대해서 이견을 갖는 사람들이 있거나 의심이 있는 사람이 있다면 기도하는 마음으로 이 성경 구절을 묵상하기 바란다. "주께서 너무 어려워서 못할 일이 있겠느냐?..."(창 18:14, 킹제임스 성경).

헬라어 성경
최초의 자필원본에서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수많은 사본들의 복사되었다. 이것들은 보통 사람들을 위한 사본들이란 뜻으로 헬라어 벌게이트라 불리웠다. 성경은 학자나 비평가등 특별한 사람들을 위한 개인적 소유물이 아니다. 영적 분별력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개인적인 관계에 기초한 것이지 IQ에 기초한 것이 아님이 분명해진다.

승천하시기 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령님이 오셔서 그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도하실 것이라고 제자들에게 약속하셨다. 성경의 완전한 보존은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이었다. "그러나 진리의 영이신 그분이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로 인도하시리라. 그 분은 스스로 말씀하지 아니하시며 무엇이나 들은 것을 말씀하실 것이요 또 너희에게 일어날 일 들을 알려 주시리라"(요 16:13, KJV). 교회는 성경의 정경 확정과 보존에 있어서 세 가지 방법으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았다. 이 방법에 의해서 초대 교회는 신약 성경의 수많은 사본들 가운데서 순수한 것을 보존하고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1.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신자들은 어떤 책이 신약 성경에 포함되어야 할지를 알았다. 성령님은 완전한 신약 성경을 형성하는 27권의 책들을 선택해주셨다. 아무리 새로운 것이 발견되더라도 27권으로 이루어진 신약 성경을 바뀌지는 않았다. 신약 성경은 이미 성령께서 결정해 주셨기 때문이다.
2. 헬라어 사본들도 성령님께서 인도해주셨다. 예를 들면, 요한복음을 담고 있는 두 개의 필사본이 있는데 본문에서 많은 부분이 차이가 있다면 하나의 필사본만을 인정했다. 대개의 경우 예수 그리스도의 신격과 관련된 부분에 차이점이 많았었다.

초기의 신자들이 사용하고 암기했던 핵심 구절들...
1) "진리의 영이신 그 분이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로 인도하시리라." (요 16:13, 킹제임스): 성령님을 진리의 영이시다.
2)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요 17:17, 킹제임스) : 진리는 말씀이다.
3) "그 분이 나를 영화롭게 하시리니"(요16:14, 킹제임스):진짜 성경은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한다.
순수한 헬라어 사본은 "그리스도"와 "주"를 함께 사용함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매우 강조했다. 그런데 오늘날 사용되는 현대어 번역본에는 "그리스도"를 16번, "주"를 12번 삭제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거짓 책들과 변질된 헬라어 필사본들을 거부했다. 신실하지 못한 사람들은 영감받은 성경을 모방하기 위해서 성경 비슷한 책들을 만들었다. 신약 성경에 포함되지 않고 거부된 다음과 같은 책들이 있었다: 열두 사도의 가르침, 바나바 서신, 클레멘트 일서, 클레멘트 이서, 허마의 목자, 베드로 계시록, 바울행전, 폴리갑 서신, 이그나티우스의 일곱 서신, 니코데모 복음, 목수 요셉의 역사, 구주의 유년기 복음......이러한 위작들을 만들어낸 사람들은 자신들의 작품이 더 많이 읽히게 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익숙한 이름을 책 제목으로 사용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책들을 거부한 것이 절대적으로 옳았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 물론 그렇다. 전혀 논쟁의 여지가 없다. 이러한 확신의 근거는 매우 단순한 것이다.


첫째, 하나님께서 모든 과정을 인도하셨다.
둘째, 하나님을 실수하지 않으신다.
셋째, 하나님의 말씀은 최상의 가치가 있으므로 누구라도 그 내용을 아무렇게나 바꾸는 것을

      허락치 않으신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 까지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마 5:18, 킹제임스).

하나님께서 초기 신자들을 인도하심으로 그들은 어떤 책이 신약 성경에 포함되서는 않되는지를 분명하게 알았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헬라어 사본에 대한 문제에서도 그들을 인도하셨다. 바른 사본에서 정직하게 복사하지 않은 필사본은 사용되지 않았다. 변질된 것들은 버렸는데, 애석하게도 어떤 사람들은 쓰레기 더미에서 그것들을 꺼내와서 다시 사용했다.

초창기 신자들이 사용한 헬라어 필사본은 하나님께서 후대를 위해서 보존하기를 원하시는 바로 그 사본들이었다. 완전하게 복사되고 또 복사된 신약 성경 필사본들은 소수의 변질된 사본들보다 휠씬 우세하였다. 오늘날에도 100개의 헬라어 사본들 중에서 단지 5개의 사본만이 변질되어서 쓰레기통에 버려졌던 사본을 증거할 뿐이다.

킹 제임스 성경은 헬라어 벌게이트에서 복사된 95%의 "다수 필사본"과 일치하는 것이다. 그 외의 현대 번역본들은 모두가 하나님께서 보존하신 "다수 필사본"이 아닌 거부되고 버려진 쓰레기 더미에서 나온 것이다. 헬라어 필사본의 95%를 버리는 것은 그동안 보존되어 온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가장 악랄한 공격이었다. 다수 필사본을 버리는 사람들은 성경 보존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조롱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딘 버건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필사본 1,000 중에서 995개를 믿지 못할 것이라는 주장을 결코 받아드릴 수 없다. 어제까지는 알려지지도 않았던 5개의 필사본만이 최초로 영감받았던 비밀을 간직한 채으로 발견됐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이 완전히 실패했다는 것에 대해 나는 절대로 믿을 수 없다. 사실 1800년대 말 복음서 본문의 대부분은 성 캐더린 수도원 쓰레기통에서 독일인 비평가가 꺼내온 것이다.

 

전체 본문이 1,500년 동안이나 보존되었던 두 개의 필사본을 보고 고쳐진 것이다. 그토록 긴 세월에 걸쳐 필사본이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사람들이 옆으로 제쳐 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수백 종의 필사본들은 자꾸 들춰서 닳았기에 새로운 필사본들이 만들어져 후대에 전수되었던 것이다." 킹 제임스 성경의 신약 본문은 초기 교회의 섭리적인 보호의 결과이다. 킹 제임스 성경만이 대대로 전수되어온 다수의 필사본에서 번역된 유일한 성경이다.

성경 변개에 관한 바울의 경고
우리가 성령님께서 거룩한 책의 순수성을 지키는데 실패하셨다면, 우리는 지금 참된 성경을 한 권도 가지고 있지 못할 것이다. 진리를 변개시키는 자들은 다른 시대보다도 성경이 기록되던 바로 그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파괴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인들에게 성경 변개에 관해서 경고했던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변개시키는 많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고 오직 진실함에서 난 것같이 또한 하나님에게서 난 것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 (고후 2:17).

많은 변개가 초기 필사본 시대에 이루어졌다. 어떤 성경에서 각주에 다음과 같은 것을 읽을 때면 이런 말을 기억해야 한다. "고대의 권위있는 필사본에서는 이 단어와, 절, 장이 빠져있다." 성경에 관한한 오래된 것이 순수하다는 보장은 없다. 이 말은 소설책을 다루듯이 성경을 다루는 학자들이 사람들을 속이기 위해서 만든 이론에 지나지 않는다.

다수 필사본은 텍스투스 리셉투스(Textus Receptus)이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으로 참된 원문은 초기 필사본 변개때 그 도전을 이겨냈다. 5세기에 다수 필사본이 헬라어를 쓰는 신자들이 사용한 유일한 성경이었음으로 이 승리는 결정적이게 되었던 것이다. 사회 각층에서는 순수한 본문을 지지하기 때문에 소수 필사본을 버렸다. 다수필사본은 비쟌틴 기간(452-1453)에 계속 복사되었다. 그래서 비쟌틴 원문으로도 불리운다. 오늘날 이 필사본들은 텍스투스 리셉투스나 수용된 원문으로 분류된다.

1516년 헬라어 신약 성경 출간
다수 필사본의 역사는 하나님의 지혜를 나타내면서 계속되었다. 이 원문들만이 한 순간의 단절도 없이 그 유래를 초대 교회 때까지 거슬러 올라 갈 수 있다. 1516년에 최초로 인쇄된 헬라어 신약 성경이 유능한 헬라어 학자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무스에 의해서 편집 출간되었다. 에라스무스는 다수필사본으로 자신의 헬라어 신약 성경을 편집했다. 그는 다수필사본이 교회의 신앙을 올바르게 대표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바티칸 사본과 같은 다른 필사본들도 입수했으나 다른 사람들이 과거에 그랬듯이 열등한 그 필사본들을 거부했다.

성경의 기록은 계속해서 진행되었다. 성경은 제자들에 의해서 기록되었고 수 세기 동안 신실하게 복사되었다. 1516년 이 필사본들이 에라스무스에 의해서 인쇄되었다. 1550년 로버트 스테판이 에라스무스를 뒤따라 다수필사본을 인쇄했다. 이것들은 킹 제임스 성경 신약 본문의 기초가 되었다. 인쇄된 헬라어 신약 성경을 내놓은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보존하고 진전시키는 도구로 쓰임 받았다.

고대 역본들
하나님께서는 헬라어를 쓰지 않는 사람들도 그분의 말씀 없이 내버려두지 않으셨다. 성령님께서 헬라어 성경의 재생산과 보존을 수행하신 것과 마찬가지로 다른 언어로도 번역된 성경들이 있었다. 헬라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된 고대 역본(譯本) 중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구 라틴 벌게이트(the Old Latin Vulgate)이다.

구 라틴 벌게이트
열정적인 초기 신자들의 무리들이 로마 제국 전역을 압도적으로 지배하게 됨으로 신약 성경의 라틴어 번역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성령이 충만한 구령자들은 헬라어 벌게이트를 라틴어로 번역했다. 그리고 이 성경을 "구 라틴 벌게이트"라고 이름을 붙였다.
  이 성경은 우리가 지금 초기 시대의 신약 성경 본문을 그대로 소유하고 있다는 증거들 가진 성경중의 하나이다. 2세기의 이 성경이 1611년의 킹 제임스 성경과 일치한다. 157년 구 라틴 벌게이트의 이탈릭 역본(the Italic version)이 북부 이태리에서 성도들에 의해서 사용되었다. 이들은 참된 성경을 고수하고 있었기 때문에 참혹한 고통을 당했던 왈덴시안들이다. 같은 시기에 프랑스에서는 갈릭 성경(the Gallic Bible)이 번역되었다. 많은 이들이 이들 프랑스 그리스도인들이 영국에 복음을 전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시리아 성경(페쉬타: Peshitta), 150년
복음은 먼저 동쪽에서 전파되었다. 유다에서 가장 가까운 시리아, 안티옥에서 교회가 급속히 성장했음으로 시리아어 성경의 필요성이 생겼던 것이다. 이 정확한 번역본은 150년 헬라어 벌게이트으로부터 만들어졌는데, 그 아름다움과 단순함 때문에 "역본의 여왕"이라고 불리워졌다. 시리아 역본은 177개의 필사본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졌고 그 대부분이 현재 대영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를 만나 안티옥으로 데리고 오니라. 그리하여 그들이 일년 내내 교회와 함께 있으면서 많은 무리를 가르치니, 안티옥에서 제자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더라"에서 이를 증거한다 (사도행전 11:26, 킹제임스).

안티옥에서 신자들이 최초로 그리스도인들이라고 구분되어 불려졌다. 주님을 위한 그들의 간증이 이교도들에게 분명히 제시되었기에 때문에 그렇게 "낙인이 찍혔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신약 성경이 완성되고 나서 곧 바로 설경을 자기들의 모국어로 번역한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날 우리도 그들과 같은 성경을 가지고 있게 된 것이다.

킹 제임스 성경과 일치하는 고대 역본들
헬라어 수용 원문과 영어 킹 제임스 성경은 이미 언급된 고대 역본들과 모두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 역본들의 연대는 주후 150년전으로, 이탈릭 교회도 주후 120년으로 추정된다.  

킹 제임스 성경의 번역은 교황의 파멸로부터 프로테스탄트를 건졌다.
프로테스탄트 개혁은 하나님께서 영적 암흑인 교황의 지하감옥으로부터 자신의 말씀인 성경을 해방시키는 수단과 방법으로 사용하셨다. 영어를 쓰는 세상에서 대다수의 겸손한 신자들에게 성경을 사용할 수 있는 시대가 다가온 것이다. 성경은 이제는 더 이상 소수의 개인 재산이 아니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교황의 통치로부터 세상을 떼어내시고자 특별한 방법으로 개입하신 것이다. 프로테스탄트를 제거하기 위한 로마 교회의 마지막 시도는 1588년 스페인 무적함대와 함께 침몰하고 말았다. 작은 섬나라 영국이 당시 유럽 최강자인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무찌른 것이었다.  

틴데일 신약 성경
윌리엄 틴데일은 위대한 프로테스탄트 개혁자로, 에라스무스의 제자였고, 마틴 루터와 동시대에서 살았다. 그는 1525년 에라스무스의 헬라어 신약 성경을 영어로 번역했다. 이것은 인쇄되어 출간된 최초의 영어 신약 성경이다. 이 일은 독일에서 극심한 시련을 겪으면서 진행되었다. 틴데일은 성경 번역을 반대하는 카톨릭에 의해서 영국에서 추방당했다. 그의 성경은 적어도 만 오천 권이 인쇄되었고 비밀리에 영국으로 수입되었다. 1535년 세 번째 판을 출간했다. 이 성경이 킹 제임스 성경의 선두주자가 된 것이다. 1536년 10월 이 위대한 믿음의 용사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말씀 때문에 순교를 당했다. 먼저 그는 목조름을 당했고 참된 성경의 적들에 의해서 화형당했다. 주님께 가기 전에 그가 한 마지막 말은 "주여, 영국 왕의 눈을 열어주소서!"라고 한 것이다. 그의 동상은 말씀에 대한 그의 사랑 때문에 살지 못하고 추방되었던 바로 그 도시의 템즈 강둑에 세워졌다. 그가 사랑했고, 위해서 죽었던 그 성경은 오늘날 우리가 지닌 킹 제임스 성경 안에 남아있다. 진리를 위한 값이 치루어 지자 킹 제임스 성경이 나타난 것이다.  

천 명의 이름으로 된 청원서(請願書)
틴데일이 죽으면서 드린 그의 기도는 곧 응답되었다. 천 명의 목사들이 서명한 청원서가 제임스 왕에게 보내졌다. 그 요구 중의 하나가 하나님께서 보존하신 원문을 기초로 해서 온전한 영어 성경을 번역하는 것이었다. 이 요청은 허락되어
  당시 가장 엄격한 종파였던 퓨리탄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다른 사람들과 비교될 수 없는 학자들이었다
킹 제임스 성경을 번역한 사람들의 학식은 도전을 받아 본 일이
  없었다. 그들의 방대한 재능과 깊은 지식은 성경 번역과 같은 고귀한 일에 적격이었다. 그들은 학자일 뿐만 아니라 성경을 존중하는 깊은 싱앙가들이었다. 번역을 도왔던 47명 중 한 사람에 대한 설명이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토마스 홀란드 박사, 옥스퍼드의 발리올 엑세터 대학, B.A. 1570년, M.A. 1575년, B.D. 1582년, D.D. 1584년. 그는 여러 분야에서 큰 업적을 이루었다. 그는 영국 학자들 사이뿐 아니라 유럽의 대학교에서도 좋은 평판을 얻고 높이 평가되어 있다. 아폴로처럼 그는 성경에 능통했고, 성경을 설명하는데도 사도처럼 신실했다. 그의 모범은 그의 가르침과 함께 사람에게서 사람으로 전수되었다. 그는 자신이 설교한 대로 살았던 사람이다. 그는 번역진들 가운데 가장 강력하게 로마에 반대했던 사람이다. 그는 대학을 떠나 멀리 여행할 때면 언제나 사람들을 모아놓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로마 카톨릭 나부랭이를 혐오하고 반대할 것을 강하게 권면하고 명령했다는 기록이 있다." 

킹 제임스 성경의 번역 과정은
킹 제임스 성경의 번역에 참여하도록 요청받은 학자들은 퓨리탄, 영국 국교회 성직자와 평신도가 포함되었다. 원래는 54명이 지명되었으나 질병과 임종으로 47명만이 작업에 참여했고, 번역진은 웨스트민스터, 옥스퍼드, 캠브리지에 각각 두 그룹씩 모두 6 그룹으로 나뉘었다.

여섯 그룹은 각각 독립적으로 성경의 특정 부분을 맡아 번역했다. 이들 여섯 그룹은 창세기에서 열왕기하까지, 로마서에서 유다서까지. 이사야에서 말라기까지, 복음서와 사도행전과 요한계시록를, 역대기상에서 전도서까지, 그리고 외경을 나누어서 번역했다.

먼저 각자가 맡은 부분을 번역하고 그것을 각 그룹 안의 다른 모두의 것들과 비교하고, 한 그룹 안에서 한 책이 완성되면 다른 그룹으로 넘겨져서 철저한 비교와 검토가 이루어졌다. 번역진들에게는 47명에 포함되지 않은 다른 학자들의 조언도 받을 수 있었다. 그룹에서의 작업이 완료되고 마지막 점검을 위해서는 세 지역에서 두 명씩 선출되었다. 전체 성경의 사본 하나가 세 그룹에서 각각 런던으로 보내졌다.

킹 제임스 성경의 번역 과정을 두 시기로 나누어 볼 수가 있다. 첫 번째 삼년 동안에는(1604-1607) 전체적으로 일하기에 앞서 개인적인 연구를 했다. 그 다음 삼년에는 여섯 그룹의 작업이 개별적으로 또 협력적으로 이루어졌다. 마지막 9개월은 최종적인 검토 작업을 했다. 그래서 1611년에는 완성된 성경이 인쇄에 들어갈 준비가 되었던 것이다.  

수용된 원문(The Received Text)을 기초한 킹 제임스 성경
킹 제임스 성경 혹은 권위역 성경은 번역 작업에서 수용된 원문을 기초로 삼았다. 완성된 수용 원문은 구약 성경은 히브리어 마소라 원문이고 신약 성경은 헬라어 텍스투스 리셉투스이다. 이것이 유일하고 참된 원문이다.  

하나님께서 승인하신 킹 제임스 성경
역사상 킹 제임스 성경만큼 극심한 공격을 받은 책은 거의 없다. 불신자들은 킹 제임스 성경을 조롱했고, 현대주의자들은 킹 제임스 성경을 은유적으로 해석했고, 교황들은 킹 제임스 성경을 읽거나 보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아직도 킹 제임스 성경은 남아있고, 앞으로도 계속 남아 있을 것이다.

킹 제임스 성경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권위의 증거가 된다. 순수한 말씀이 아니었다면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을 것이다. 킹 제임스 성경이 바로 자신의 말씀을 보존하시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이다: "하늘과 땅은 없어져도 내 말은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마 24:35).

하나님께서는 킹 제임스 성경을 가지고 설교하는 사람들의 사역을 놀라운 방법으로 축복해 주셨다. 20세기 초에 있었던 대 부흥의 불길이 바로 킹 제임스 성경을 가지고 혼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한 사람들에 의해서 붙여진 불이었다. 구원받지 못한 자들은 읽기 쉬운 성경을 선호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에게 순수한 말씀을 제공해야 한다. 성경을 사람들에게 쉽게 이해시키려고 노력하기 보다는 순수한 말씀을 그대로 전파해야 한다.

킹 제임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킹 제임스 성경의 유래를 사도 시대까지 추적해 올라갈 수 있다. 킹 제임스 성경만이 헬라어 텍스투스 리셉투스와 히브리어 마소라 원문에 신실한 번역이다. 신약 성경 텍스투스 리셉투스는 헬라어 벌게이트(150년)에서 유래한 것이다. 또한 킹 제임스 성경은 2세기의 구 라틴 벌게이트와 시리아어 성경들과도 일치한다. 킹 제임스 성경은 전체 헬라어 사본의 95%를 기초로 한 것이다. 킹 제임스 성경은 1611년에 번역되었다. 더 좋은 사본을 찾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시간만 낭비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할 일은 오직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드려서 아직 시간이 있을 때 잃어버린 자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다. 지구상에서 눈에 보이는 것 중에서 완벽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킹 제임스 성경이다. 신자들이 어느 성경이 완전한 성경인지를 아는 것만으로도 크나큰 축복이 아닐 수 없다. 그 본문을 알고, 이해하는 것은 그 다음의 문제이다. 신자들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완전하시고, 위대하시고, 거룩하신 분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분을 100% 알거나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적어도 그 분이 참된 신인지를 알고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어느 성경이 참된 성경인지를 알고 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할일은 그대로 행하는 우리의 삶이다. <구체적인 것은 도날드 클라크의 Bible Version Manual을 참조한 것>

III. 개역상경에 대해서: 우리말 성경 역사의 개요:
처음에 한국어로 성경을 번역한 사람은 스코틀랜드 선교사로 중국에 파송된 로스(John Ross)로 알려져 있다.(나채운, [우리말 성경 연구], 기독교문사 1990, p.36.) 그는 중국어 성경을 들고 1874년과 1876년에 한중 국경지대에 와서 한국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1877년에 그는 만주에서 한국어로 성경을 출간하기 위해 [조선어 문법](Corean Primer)이라는 소책자를 발간했는데 그가 세운 성경 번역의 원칙은 다음과 같았다:

(1) 먼저 한국인 번역자가 중국의 한문 성경을 한글로 번역한다.
(2) 그 원고를 그리스어 신약성경 및 영어 성경(그들이 사용한 성경은 웨스트코트와 호르트가 만든 [영어개역성경] (English Revised Version이었음 - 나채운, 주석 p. 37)과 대조해서 수정한다.
(3) 그리스어 성구 사전과 주석을 참조하여 어휘의 통일을 기한다.
(4) 축자적 번역(literal rendering)보다는 의미에 유의하고 조선어의 관용구를 그대로 살린다.(나채운, p.37.)

한편 이 수정은 1882년에 일본에서 역시 중국어 성경을 사용하여 신약성경의 일부를 번역한 한국 프로테스탄트교의 첫 선교사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인천에 상륙하면서 그가 번역한 마가복음을 가지고 들어왔다.

한글 개역성경
신구약을 다 담고 있는 한국어 성경(구역)은 1911년 3월에 신구약 3권으로 출간되었다.
  구역성경은 구약의 경우 웨스트코트(Westcott)와 호르트(Hort)의 [영어개역성경](RV)과 이 성경의 미국판인 [미국표준역](ASV)을 가장 중요한 원전 중 하나로 사용하였으며 특별히 [미국표준역]의 영향을 받아 히브리어 사자음  'YHWH'를 '주'(LORD)로 번역하지 않고 음역하여 '여호와'로 했다(각주 - 나채운, p.50.). 사실 [미국표준역](ASV)과 여호와의 증인들이 사용하는 [신세계역]을 제외한 전세계 모든 성경은 이 '사자음 문자'를 '주' 즉 'LORD'로 번역했다.

한편 1938년에는 이 성경을 개정한 개역본이 출간되었으며 그 뒤 철자 수정과 얼마간의 본문 수정을 거쳐 1961년에 [성경전서 한글개역판]으로 고정되었다. 바로 이 성경이 우리 나라의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가장 많이 애독하고 애용하며 대부분의 성도들이 단 하나의 오류도 없다고 믿고 있는 [개역성경]인 것이다(나채운, p.57.).

간단하게 [개역성경]의 역사를 살펴봄으로써 우리는 [개역성경]이 중국어 성경을 근간으로 만들어졌다는 점과 웨스트코트와 호르트의 영향을 받은 외국인 선교사들이 '전통 그리스어 공인본문'(Traditional Greek Received Text)이 아닌 '수정 그리스어 본문'(Revised Greek Texts)-혹은 비평 본문(Critical texts)-을 중심으로 하고 거기서 파생된 [영국개역성경](RV)과 미국표준역(ASV)을 번역의 기초로 삼았다는 점을 유의해야 함을 지적한다. 나채운은 자신의 저서에서 중국 역본들도 [킹제임스 성경]이 아닌 [영국개역성경]에 기초를 두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나채운, p.50.).

[개역성경]은 문장이 간결하고 우아하고 웅장하여 성도들에게 사랑을 받으면서 마치 영어권의 [킹제임스 성경] 같이 한국에서 독보적인 성경으로 자리를 굳혔다. 그러나 영어 [킹제임스 성경]과는 달리 [개역성경] 문장의 간결성 등은 본문의 정확성을 무시하고 한자 숙어나 한국어 용례 등을 사용하고 많은 단어를 삭제함으로써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 자체가 한계점을 많이 포함하고 있다.

 

또한 성경 번역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인 본문 선택과 번역자들의 사상에 기초한 용어 선택을 살펴보면 [개역성경]이 기독교 교리와 신학믿음의 실행 등에 큰 피해를 끼쳤던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어찌되었든지 [개역성경]은 보통 사람들의 감정과 문화를 잘 반영하였으며 아주 아름다운 문체와 운율 등으로 읽는 이에게 감동을 주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회심하고 구원의 감격을 맛보았으므로 이 성경이 우리 민족에게 남긴 자취는 영원토록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또 [개역성경]이 전체적으로 다 잘못되었다는 말은 아니다. 단지 [개역성경]의 번역 대본으로 선정된 로마 카톨릭 바티칸 사본과 번역자들의 이교도/샤머니즘 사상으로 인한 번역상의 문제가 많았었다는 것을 지적해두고자 한다.

IV. 개역성경의 분석: 개역성경의 본문:
로스의 성경을 필두로 한 한글 성경은 한결같이 로마 카톨릭 교회 '소수본문'에 근거하여 번역되었다. 이는 다시 한 번 이집트를 기억하게 만든다. [개역성경]의 구약은 1901년의 [미국표준역](ASV)에 기초하여 번역되었는데 [미국표준역]은 웨스트코트와 호르트의 [수정 그리스어 본문에 기초한 영국의 [개역성경]과 그 내용이 같다. 대한성서공회에서 출간한 [공동번역], [표준 새번역] 등도 모두 로마 카톨릭 교회의 이집트 본문을 사용하여 번역되었으며 번역의 대본인 본문이 같으므로 문체만 다를 뿐 그 내용은 거의 동일하다. 성경을 읽다가 각주에 "어떤 사본에" 혹은 "더 오래된 사본에"라는 말이 나오면 이 사본들이 바로 대한성서공회가 전심으로 추앙하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사본임을 기억하기 바란다.

교황, 마리아, 연옥, 사제(신부), 면죄부, 행위 구원 등 비성경적 요소로 가득한 기관, 성경을 소유했다는 이유로 수많은 성도들을 죽인 단체에서 성도들을 위해 올바른 성경 사본을 보존해 왔다고 믿을 수 있겠는가? 또 대한성서공회를 움직이는 연합성서공회의 지도자들이 로마 카톨릭 교회 사제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부디 알렉산드리아 학자들의 말을 믿지 말고 성경의 판결을 믿기 바란다. 이집트 사상을 이어 받은 로마(바빌론)에서는 결코 선한 것이 나올 수가 없지 않겠는가(계 17장, 18장).

개역성경의 용어를 보자
성경 번역이나 해석을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의 개념으로 단어들을 다루어야 한다는 점이다. 처음에 성경이 한글로 번역될 때 중국, 인도의 이교도 사상과 토속 샤머니즘을 버리지 못한 사람들이 번역 작업을 했고 그 와중에 이런 비성경적 사상들이 뿌리를 내리고 정착했기 때문에 [개역성경]에는 기독교 개념으로는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단어가 많이 들어 있다.

 

한 예로 '귀신' 이라는 단어를 보자. [우리말 큰사전]은 귀신을 가리켜 '사람이 죽은 뒤의 넋'으로 정의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리스, 중국 등에 편만한 이교도 사상으로 성경은 결코 이런 개념을 수용하지 않는다. 바른 본문에서 바른 신학을 가진 사람들이 번역하여 전세계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읽혀 온 [킹제임스 성경]은 정관사 'the'가 붙은 마귀 즉 유일한 사탄 마귀와 그의 천사들인 마귀들이 있다고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에는 성경 번역자들의 본문 및 용어 선택이 신학과 교리에 미친 영향을 보는 것이 필요하다. 다음을 살펴보아야 한다:
1. 한 하나님인가, 한 분 하나님인가?
2. 독생하신 아들인가, 독생하신 하나님인가?
3. 하나님의 영인가, 하나님의 신인가?
4. 주인가, 여호와인가?
5. 루시퍼인가, 계명성인가?
6. 천사인가, 사자인가?
7. 마귀인가, 귀신인가?
8. 살아있는 혼인가, 살아 있는 영인가?
9. 짐승의 영인가, 혼인가?
10. 대언인가, 예언인가?
11. 왕국인가, 천국인가?
12. 성경에 오류가 있는가, 없는가?
13. 하늘들인가, 하늘인가?
14. 지옥인가, 음부인가?
15. 믿음인가, 행위인가?
16. 구원받기가 쉬운가? 어려운가?

 

만일 사람이 행위로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된다면 기독교나 다른 종교의 차이가 무엇이겠는가? 성경은 분명히 모든 사람은 죄인으로 그 행위로는 차이가 없다고 말씀한다. 성경은 분명히 모든 사람이 범죄하여 행위로는 결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가르친다(롬 3:23). 그런데 [개역성경]은 로마 카톨릭 교회의 사본에 근거하였기 때문에 계속 행위로 어렵게 구원을 얻어야 한다고 가르치려고 한다.

 

개역: 얘들아 하나님이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 (막 10:24) 그러나 바른 성경은 결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흠정역(킹제임스 역): 얘들아, 재물을 신뢰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17. 구원이 과정 신학인가?
믿는 이들의 구원은 한순간에 일어나는가? 평생의 과정인가?
개역: 갓난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벧전 2:2)
흠정역(킹제임스 역): 새로 태어난 아기들로서 말씀의 순수한 젖을 사모하여 이 젖으로 자라가도록 하라.

새로 태어난 신자들이 먹어야 할 순수한 젖이 무엇인가? [흠정역 성경-킹제임스 성경]은 그 젖이 바로 성경 말씀임을 분명히 보여 준다. 그런데 [개역성경]은 이 사실을 고의로 숨기고 구원받으려면 자라나야 한다고 말함으로 로마 카톨릭 교회의 평생 행위 구원론을 가르치고 있다. 따라서 이런 종교 체제 하에서는 사람이 평생토록 죄의 종이 되어 사제의 말에 순종해야 구원을 얻는 다는 생각을 넣어준다.

18. 믿음인가, 행위인가?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의 일 세대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가 무엇일까? [개역성경]은 그들이 순종하지 않아서 못 들어갔다고 기록한다.
개역: 그러면 거기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순종치 아니함을 인하여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히 4:6)라고 말한다.

[개역성경]은 겉으로 드러난 그들의 행위에 초점을 맞추었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근본 문제에 초점을 맞추신다.

 

흠정역(킹제임스 성경): 그러므로 어떤 사람들이 반드시 그 안식에 들어가야 하는 일이 남아 있는 줄을 알거니와 복음이 먼저 선포된 그들은 믿지 아니하여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 하나님은 이것을 믿음의 문제로 보시지 행위의 문제로 보시지 않는다. 바른 믿음이 있으면 바른 행위가 나오는 것이다. 이런 예는 로마서 11장 32절, 15장 31절, 히브리서 3장 18절, 4장 11절 등에서 반복되고 있다.

[개역성경]의 행위 신학은 다음과 같은 예수님의 말씀에서도 잘 드러난다.
개역: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요 3:36)
흠정역(킹제임스 성경):
아들을 믿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하고 이렇게 행위를 강조하다 보니 [개역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축소시킬 수밖에 없다.

흠정역(킹제임스 성경):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더 이상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더 이상 은혜가 아니니라. 그러나 만일 행위에서 난 것이면 더 이상 은혜가 아니니 그렇지 않으면 행위가 더 이상 행위가 아니니라. (롬 11:6)
개역: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느니라. 보라, 얼마나 중요한 부분을 삭제하였는가?

하나님의 선물 즉 구원은 거저 받는 것인가, 값을 치르고 받는 것인가?
흠정역: 그러나 거저 주시는 이 선물(the free gift)은 또한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롬 5:15)
개역: 그러나 이 은사(the gift)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하나님은 이런 선물을 거저 주신다고 [킹제임스 성경]은 기록하지만 로마 카톨릭 교회의 사본에 근거한 [개역성경]은 NIV 등과 마찬가지로 '거저 주시는'(free)라는 가장 중요한 단어를 여기서 삭제했다(로마서 5장 16, 5:18에서도 마찬가지임). 그런데 이 단어가 이 구절의 핵심이 아닌가?

[개역성경]은 조상들의 은덕으로 자손들이 천대까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고 하는데 과연 그럴까? (출 20:6 참조)
개역: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흠정역(킹제임스 성경): 내 명령들을 지키는 수천의 사람들에게는 긍휼을 베푸느니라. 수천 세대라는 것은 원문에도 없고 알렉산드리아 서기관들이 자기들의 상상 속에서 첨가한 것이다. 앞 뒤 문맥과 성경의 구원 및 은혜관이 무엇을 지지하는지 살펴보기 바란다.

19. 믿음의 대상
믿는 것은 헛것이나 이방신을 믿는 것이 아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 그런데 [개역성경]은 이런 것을 약화시킨다.
개역: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요 6:47)
흠정역(킹제임스 성경): 나를 믿는 자는 영존하는 생명을 가졌나니

20. 내 몸을 쳐야 하는가?
고대로부터 행위로 구원받고자 하는 자들은 자기 몸을 혹사시키거나 참기 어려운 고행을 행했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 이집트의 이시스, 로마의 키벨레, 그리고 에베소의 다이아나같이 피에 굶주린 여신들을 위해 사람들이 피의 제전을 열었음을 알고 있다. 그래서 행위 구원을 가르치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수도사들 가운데는 자기 몸을 극도로 상하게 한 사람들이 많았고, 루터 같은 경우도 이런 일을 하려고 애쓰다가 결국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게 되었다. 그런데 [개역성경]은 "영적으로 높은 상태에 다다르기 위해 고행이 필요하다."는 이교도들의 교리를 지지한다.
개역: 내가 내 몸을 쳐(I beat my body)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고전 9:27)

한국 성도들에게 보상 심리를 허용하면서 많은 은혜를 끼친 이 구절은 실제로 나를 때리라는 것이 아니다. 이 구절에는 '치다'(beat)라는 뜻을 갖는 그리스어가 전혀 사용되지 않았다. 여기에 사용된 단어는 '후포피아조'(hupopiazo)이며 실제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이다.

 

흠정역(킹제임스 성경): 오직 내가 내 몸을 억제하여 복종하게 함은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한 뒤에 어떤 방법으로든 내 자신이 버림을 받을까 염려함이로다.

이 구절에서 바울 사도는 '육체의 정욕들'이 자신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하겠다고 말한 것이며 이것은 갈라디아서 5장 16절 말씀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자기를 치는 행위' 즉 자학 행위는 특히 열왕기상 18장 28절에서 잘 드러나는데 거기서 바알의 대언자들은 자기들의 방식에 따라 자기 몸을 자해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것은 결코 성경의 개념이 아니다.

 

흠정역(킹제임스 성경): 참으로 이런 것들은 자기 의지대로 경배를 드리며 자기를 낮추며 몸을 경시하는 데는 지혜 있는 것같이 보이나 육체를 만족시키는 데는 아무 가치가 없느니라. (골 2:23)

21. 거세해야 하는가?
그런데 자기 학대(虐待)로 만족하지 못한 자들이 이제는 자기 몸을 잘라 내는 거세(去勢)를 하려 하며 [개역성경]은 이것을 지지하고 있다.
개역: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이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 (갈 5:12).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 지방의 신자들을 유혹하던 거짓 대언자들이 그곳의 신자들과 교제하는 것에서 끊어지기를 원했으며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이다.
흠정역(킨제임스 성경): 나는 너희를 어지럽히는 자들이 아예 잘려 나가기를 원하노라.

 

이 구절에서 분명히 바울 사도는 그곳 성도들이 아니라 '그들을 어지럽히는 자들'이 잘려 나가기를 즉 교제에서 단절되기를 원했던 것이다. 누군가가 자기 몸을 자해하기를 원하는 것은 결코 그리스도인의 도리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뉴에이지와 고대 신비주의의 관습인 것이다.

 

[개역성경]이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고 번역한 부분을 NIV와 NASB 등은 'emasculate'(거세하다)와 'mutilate'(신체를 절단하다)라고 번역하여 그 의미가 거세임을 분명히 보여 주고 있다. 결국 동일한 로마 카톨릭 교회의 사본에서 나온 역본들은 고행을 통한 구원이라는 자기들의 교리를 지지하기 위해 이런 두려운 일을 시도한 것이다. 이런 거세 풍습은 갈라디아서의 기독교와 무관하며 신비 종교들에서만 발견되는 특이하고도 무서운 관습이다.
그런데 이러한 신비적인 가르침들로 인해 현대 역본들의 기반이 된 '부패된 그리스어 신약 사본'을 편집한 장본인인 오리겐은 스스로 자기의 몸을 잘라 내고 거세를 행했다.

22. 열심을 내면 우리를 받아주실까?
우리가 열심을 다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예배를 받아 주실까? [개역성경]은 그렇다고 한다.
개역: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요 4:24) 우리말 사전은 '신령'이란 '신기하고 영묘한 것'이고 '진정'이란 '거짓없이 참되게'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신기하게 마음을 다해 진심으로 하나님께 경배하면 하나님이 이를 받으신다는 말인가? 많은 교인들이 이런 구절에 은혜를 받고 열성으로 지성을 내어 예배를 드린다. 기독교는 "지성이면 감천이다"를 모토로 하는 샤머니즘이 아니다. 인격 대 인격이 만나는 관계가 전부인 복음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사람이 영으로 그리고 진리로 하나님께 경배해야 한다는 것이다.

 

흠정역(킨제임스 성경): 하나님은 영이시니 그분께 경배하는 자가 반드시 영과 진리로 경배할지니라. 너무나도 단순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인간의 열심으로 착각하는 실수를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23. 침례인가, 세례인가?
[개역성경]에서 '세례'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밥티조'(baptizo, 스트롱 번호 907), '밥티스마'(baptisma, 908번), 그리고 '밥티스테스'(Baptistes, 910번) 등이다. 이 단어들은 모두 그리스어 '밥토'(bapto, 911번)에서 나왔으며 신약성경에서 총 115회 사용되었는데 용례별로 살펴보면 명사 '밥티스마'가 23회, 인물을 가리키는 명사 '밥티스테스'가 15회, 그리고 동사 '밥티조'가 77회 쓰였다.

한편 [개역성경]과는 달리 [바인의 신약성경 단어 사전], [국제 표준 성경 백과사전], [엉거의 성경사전], [스트롱의 용어색인]등 기독교계에서 가장 널리 인정받고 있는 참고 문헌들과 신학적 편견 없이 영어 단어 자체의 뜻을 가장 잘 보여 주는 것으로 정평이 있는 [옥스퍼드 영어사전]등의 세속 문헌들도 한결같이 이 단어들의 의미가 '물로 뿌리는 세례'(sprinkling)가 아니라 '물 속에 담그는 침례'(immersion)임을 분명히 보여 주고 있다.

이처럼 어원 자체가 너무나 분명한 이 단어가 어떻게 우리나라에서는 세례로 바뀌어 대부분의 한국 교회가 성경대로 침례를 행하지 않고 세례를 행하면서 알게 모르게 하나님의 뜻을 위배하게 됐을까? 전세계적으로 보면 유일하게 중국 성경과 한국 성경에만 이 단어들이 세례로 번역되어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참된 의미를 전혀 전달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말 성경에서 침례가 세례로 바뀐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로는 중국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한국에도 천주교가 기독교보다 먼저 들어 온것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경우 세례를 주는 교회가 전체 교회의 70% 정도를 차지하므로 다수결의 논리를 따라 세례가 옳고 침례는 그르다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하나님은 결코 한국인들만의 하나님이 아니고 다른 민족의 하나님도 되신다. 예를 들어 미국의 경우 침례를 주는 교회가 전체 교회의 70% 정도이다. 그렇다면 그곳에서는 침례가 맞고 세례는 틀린다는 말인가? 과연 하나님께서 다수결의 논리에 따라 판결을 하시겠는가?

침례는 중요한 성경의 교리일 뿐 아니라 성경 본문의 전달 과정에 마귀가 개입한 것을 보여 주는 좋은 사례가 되므로 성경에 근거해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성경대로 행하기 원하는 성도들은 이 문제 역시 믿음과 실행(삶)의 모든 문제에서 성도들의 최종 권위가 되는 성경으로 돌아가 그 판결에 기꺼이 순종해야 할 것이다.

24. 성경의 침례
침례를 주려면 많은 물이 필요하나 세례를 주는 데는 많은 물이 필요 없다. 요한도 살림에 가까운 애논에서 침례를 주니 이는 거기에 물들이 많기 때문이더라 (요 3:23)고 했다. 침례를 받으려면 물 있는 곳에 가야 하지만 세례를 받으려면 물을 가져 와야 한다.

그들이 계속해서 길을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매 (행 8:36). 침례를 받으려면 '물 속으로'(into the water) 내려가야 하지만 세례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빌립과 내시가 물 속으로 내려가 빌립이 침례를 주니라(행 8:38)고 했다.

침례는 '강 속에서'(in Jordan) 받으나 세례는 그렇지 않다. 그들이 자기 죄들을 자백하며 요르단 강 속에서 침례를 받더라. (마 3:6) 침례를 받은 후에는 '물 속에서'(out of the water) 나와야 하지만 세례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그들이 물 속에서 나와 올라올 때에 (행 8:39).

성경은 한결같이 침례가 '물 속에 잠기는 것'이라고 명확하게 규정하고 있으며 불 침례와 성령 침례 역시 '잠기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참으로 나(침례자 요한)는 물로 침례를 주거니와 그분(예수님)께서는 너희에게 성령님으로 침례를 주시고 불로 침례를 주시리니 곧 손에 키를 들고 자신의 타작마당을 철저히 정결케 하사 자신의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시되 껍데기는 꺼지지 아니하는 불로 태우시리라. (마 3:11-12)

이 구절을 그릇되게 해석하여 성령 침례가 곧 불 침례이므로 뜨거운 불을 받아야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침례자 요한은 이 구절에서 결코 그런 것을 뜻하지 않았다. 문맥과 함께 이 구절을 읽어 보면 성령 침례를 받는 자는 예수님의 곳간에 즉 천국에 들어가지만 불 침례를 받는 자는 꺼지지 않는 지옥 불에 들어감을 말했다.

그런데 이런 구절에서 침례 즉 '몸 전체가 잠기는 것'과 세례 즉 '이마에 뿌리는 것'이 어떤 차이를 가져올까? 성령 세례를 받아 이마에만 성령님이 계시면 어떻게 될까? 꺼지지 않는 지옥 불 속에서 과연 이마에만 불이 붙을까? 성경은 분명하게 침례라는 단어가 처음부터 끝까지 '온 몸이 물 속에, 성령님 안에, 불 속에 잠기는 것'임을 보여 준다.

25. 침례의 의미
그리스도인의 침례는 우리의 구원을 이루신 예수님의 죽음, 매장, 부활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면서 특별히 성도들도 예수님과 똑같이 죽었다가 부활한 자들임을 보여 주는 매우 중요한 규례이다. 세례에서는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묻혔다가 일어나는 것 즉 사망과 매장과 부활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너희가 침례 안에서 그분과 함께 묻혔고 또한 침례 안에서 그분과 함께 일으킴을 받았느니라. (골 2:12)

      사망(Death) ==> 매장(Burial) ==> 부활(Resurrection)

세례에서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매장과 부활이 상징적으로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침례를 받은 우리가 그분의 죽음 안으로 침례를 받은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죽음 안으로 침례를 받아 그분과 함께 묻혔나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힘입어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켜 세우심을 받은 것같이 우리도 생명의 새로움 속에서 걷게 하려 함이라. 이는 만일 우리가 그분의 죽음과 같은 모양으로 함께 심겼으면 또한 그분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될 것임이라. (롬 6:3-4)

세례에서는 우리의 옛사람이 죽고 우리가 그리스도로 새로이 옷 입어 생명의 새로움 속에서 걷는 것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너희 가운데 그리스도 안으로 침례를 받은 자는 다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갈 3:27)

26. 침례의 대상
어떤 이들은 침례를 통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침례중생' 교리를 믿고 가르친다. 특히 유아세례를 주는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는 이 의식을 통해 사람이 거듭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은 결코 '침례중생'을 가르치지 않으며 다만 구원받은 사람들이 침례를 통해 자기의 거듭남을 하나님과 하나님의 천사들, 마귀와 마귀의 천사들 및 사람들 앞에서 증거로 보이는 것이라고 말한다. 즉 믿고 거듭난 뒤에 침례를 받는 것이지 침례를 받아 거듭나는 것이 아니다(행 8:12).

사도행전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전파되는 과정을 보여 주며 이 과정 속에서 크리스천 교회가 어떤 일을 실행했는지 보여 준다. 사도행전 8장 이전에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지 않았으며 심지어 사도 베드로도 10장에 가서야 비로소 이방인도 구원받을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사도행전 8장에는 스데반 사건으로 인해 유대인들이 박해를 받아 예루살렘을 떠나게 되고 이 때에 처음으로 빌립이 이방인인 이디오피아 내시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침례를 주는 장면이 자세히 나온다(26-40절).

그런데 이처럼 중요한 장면에서 [개역성경]은 이상하게 37절을 '없음'으로 삭제하고 있다. 원래 이 구절이 없었다면 그 다음 구절들이 한 절씩 앞으로 올라가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을 보면 누군가가 자기의 교리나 신학을 세우기 위해 고의로 이 구절을 삭제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이 구절은 도대체 무엇인가? 36절에서 내시는 "보라, 여기에 물이 있으니 내가 침례를 받는 데 무슨 거리낌이 있으리요?"라고 물었으며 이에 대한 답이 37절에 나오고 내시는 그 답에 따라 어떤 일을 행한다.

 

빌립이 이르되, 만일 그대가 마음을 다하여 믿으면 받을 수 있느니라, 하니 내시가 대답하여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내가 믿노라, 하고 (행 8:37) 이 부분에서 성령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는 사람만이 침례를 받을 수 있음을 보여 주시기 위해 37절을 친히 기록하신 것이다. 즉 복음을 듣고 올바르게 믿음을 고백하는 사람만이 침례를 받을 수 있다는 말이다. 이런 명확한 근거로 인해 초대 교회에서는 믿음을 가진 사람만이 침례를 받아 지역 교회의 회원이 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교도들의 믿음과 연합한 로마 카톨릭 교회가 생겨났다. 중세 암흑시대를 주도한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는 모든 사람을 자기들의 체제 하에 가두기 위해 유아세례라는 비성경적 관행을 도입하여 믿음 고백을 할 수 없는 아이들에게도 세례를 주어 어려서부터 로마 카톨릭 교인으로 만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런데 사도행전 8장 37절의 말씀이 이런 비성경적 관행에 큰 거침돌이 되었기에 그들은 과감히 성경 본문에서 이 구절을 삭제했던 것이다.

 

그 결과 [개역성경]과 같이 로마 카톨릭 교회의 바티칸 사본과 시내 사본에 근거한 역본에는 이 중요한 구절이 없어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올바른 본문에서 번역된 [킹제임스 성경]은 이 구절을 잘 보존하여 로마 카톨릭 교회의 유아세례 교리가 허구임을 잘 보여 주고 있다. 과연 이 구절이 없으면 앞 뒤 문맥이 통하겠는가?

27. 침례의 시기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는 어른들에게 세례를 주기 전에 교리문답서 공부를 위한 학습 기간을 두는 전통을 세웠으며 이 기간이 지나야 비로소 세례를 준다. 또한 로마 카톨릭 교인들은 세례가 '은혜를 가져다 주는 대성사' 중 하나라고 믿는다. 그러나 성경은 결코 침례가 은혜를 가져다 주는 성사가 아닐 뿐더러 구원 또는 은혜도 가져다 주지 못함을 분명히 보여 준다(엡 2:8-9).

 

성경은 이 같은 로마 카톨릭 교회의 관행과는 달리 누구든지 믿으면 곧바로 침례를 주라고 명령한다. 그래서 이디오피아의 내시는 믿음 고백과 함께 즉시 침례를 받았고 사도행전 16장의 자주색 옷감장사 루디아도 믿는 즉시 침례를 받았으며(13, 14절) 같은 장에 나오는 빌립보 감옥의 간수 역시 믿은 즉시 침례를 받았던 것이다. 그 밤 그 시각에 간수가 그들을 데려다가 채찍 맞은 자리를 씻어 주고 자기와 자기 온 가족이 즉시 침례를 받은 뒤에 (행 16:33)

이 글은 결코 침례교인이 될 것을 촉구하는 글이 아니다. 장로교인이든, 감리교인이든 성경대로 침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침례가 구원과는 상관없으므로 이를 무시하려는 사람도 있지만 성경대로 믿기를 원하면 침례에 순종하기 바란다.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다음과 같은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기 바란다. 나의 명령들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요 14:21)

28. 포도즙인가, 포도주인가?
대부분의 한국 교회는 '주의 만찬'이라는 성경 용어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로마 카톨릭 교회의 영향을 받아 '성만찬'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로마 카톨릭 교회에는 사람이 구원을 받기 위해 일곱 가지 성례전 혹은 성사(sacraments)를 행해야 한다고 가르치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성체 성사 즉 '성만찬'이다. 그러므로 이 용어는 그 기원이 로마 카톨릭 교회의 성체 성사 제사에 있으므로 성경대로 믿는 신자들은 이런 로마 카톨릭 교회 용어를 버리고 성경에 기록된 대로 '주의 만찬'이라는 용어를 사용해야 한다.

또한 대부분의 교회들이 분명히 빵을 사용하면서도 떡을 먹는다고 하고 또 누룩이 들어간 포도주를 마신다. 과연 예수님께서 자신의 순수한 피를 상징하기 위해 누룩이 들어간 부패된 포도주를 사용하셨을까? 이 문제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주의 만찬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

주의 만찬은 구약 시대의 유월절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예수님께서 배반당하시던 날 밤에 제자들과 함께 드신 음식은 유월절 음식이었다. 유월절은 그리스도께서 하실 일을 미리 보여 주었고 주의 만찬은 그리스도께서 이미 행하신 일을 되돌아보는 것이다.

 

주님께서 "이것은 내 몸이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분께서는 결코 자신의 진짜 살을 먹으라고 하신 것이 아니다. 주의 만찬의 요소들 즉 빵과 포도즙은 단지 그분의 부서진 몸과 그분의 흘린 피를 상징적으로 보여 줄 뿐이다.

29. 누룩 없는 빵
유월절부터 연이어 시작되는 유대인들의 무교절 기간에는 반드시 일주일 동안 모든 집에서 누룩을 없애야만 했다.
너희는 이레 동안 누룩 없는 빵을 먹을 것이요, 그 첫째 날에 너희 집에서 누룩을 제거할지니 이는 누구든지 첫째 날부터 일곱째 날까지 누룩 있는 빵을 먹는 혼은 이스라엘에서 끊어질 것임이라. (출 12:15, 킹제임스)

이렇게 한 이유는 성경에서 대부분 누룩이 죄의 상징으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너희는 누룩 없는 자들인즉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이는 우리의 유월절 어린양 곧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희생물이 되셨음이라. 그러므로 우리가 이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으로도 말고 악의와 악독의 누룩으로도 말며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빵으로 하자.
(고전 5:7-8, 킹제임스)

그러므로 죄 없으신 그리스도를 정확하게 나타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누룩이 들지 않은 빵을 사용해야 한다. 그런데 이것을 알지 못하고 많은 교회들이 카스텔라나 누룩이 들은 일반 빵을 사서 주의 만찬에 사용하고 있고 또 큰 교회들은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 사용하는 성병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참으로 주님 보시기에 가증한 일이다. 어떻게 우상숭배용 빵 조각을 기독교인들이 사용할 수 있겠는가?

의미만 알고 그분을 기억하면 되지 않느냐고 주장하는 분들도 있으나 상징물이 바른 것을 나타내지 않으면 그 안의 의미를 알 수 없으며 알면서도 이렇게 행하면 위선의 죄를 범하는 것이다. 요즘 로마 카톨릭 교회의 영향을 받아서 신자들을 앞으로 하나 하나 나오게 하고는 빵 조각을 직접 입에 넣어 주는 몰상식한 목사들이 많이 있다. 이것은 로마 카톨릭 교회 사제나 하는 일이지 기독교 목사가 할 일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이 가증한 행위를 심판하실 것이다.

30. 누룩 없는 포도즙
빵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순수한 피를 상징하는 포도즙 역시 누룩이 들지 않은 순수 포도 주스라야 한다. 포도주는 이미 누룩이 들어가서 포도즙이 발효된 것이므로 순수한 그리스도의 피를 나타낼 수 없다. 전세계적으로 성경대로 믿는 무리들이 이런 이유로 포도 주스를 사용한다. 단지 로마 카톨릭 교회의 영향을 받은 국내의 프로테스탄트 교단들만이 전통을 따라 포도주를 사용하는데 이것은 큰 잘못이다.

 

또한 [킹제임스 성경]은 마지막 만찬에서 주님께서 사용하신 음료가 '포도 열매'라고 정확히 기록하고 있다(마 26:29, 킹제임스; 막 14:25; 눅 22:18, 킹제임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이 포도나무 열매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왕국에서 너희와 함께 새롭게 마시는 그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마 26:29, 킹제임스)

포도즙에 상응하는 영어는 'wine'인데 히브리어, 그리스어, 영어에서 'wine'은 동형 이의어(homograph)로 포도즙 틀에서 갓 짜내어 발효되지 않은 포도즙과 시간이 지나 발효된 포도주의 의미를 다 포함하므로 용례별로 구분하여 번역하되 성경이 분명히 술을 금한다는 사실과 앞뒤 문맥을 고려하여 번역해야 한다. 예를 들어 창세기 14장에 나오는 멜기세덱은 앞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인데 이런 인물이 성도에게, 그것도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 술을 준다는 것은 신학적으로 합당하지 않다.

 

흠정역(킹제임스 성경): 살렘 왕 멜기세덱이 빵과 포도즙을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창 14:18, 킹제임스) 또한 요한복음 2장의 가나 혼인 잔치, 주의 만찬 등에 쓰이는 'wine'도 마찬가지로 포도즙이다. 예수님께서 술을 만들어 주신다는 것은 그분의 신성과 속성을 고려할 때 도저히 맞지 않는다.

포도를 짜서 주스를 만드는 틀은 'winepress'인데 이 경우도 포도주 틀이라 하면 안 되고 포도즙 틀이라 해야 한다. 포도를 짜면 당연히 포도즙이 나오지 않는가?
개역: 천사가 낫을 땅에 휘둘러 땅의 포도를 거두어 하나님의 진노의 큰 포도주 틀에 던지매 (계 14:19)
흠정역(킹제임스 성경):
이에 그 천사가 자기의 낫을 땅에 휘둘러 땅의 포도를 모아 하나님의 진노의 큰 포도즙 틀 속에 던지매.
옛날에는 포도즙을 오래 보존하기 위해 포도즙을 끓여 쨈같이 만들었으며 필요할 때마다 이를 물에 풀어서 사용했다.

31. 신약인가, 구약인가?
32. 번역인가, 음역인가?
33. 기독교인가, 천주교인가?
34. 그리스도께서는 니골라당을 미워하신다


구약과 신약 시대의 가장 큰 차이 중 하나는 신약 시대에는 더 이상 성직자 계급이 없다는 것이다. 구약 시대에는 제사장(priest)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중재했으나 주 예수님께서 한 번 완전한 희생을 드린 이후에는 더 이상 중간 중재자가 필요 없고 신자 모두가 제사장이 되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되었다(만인 제사장).
그러나 너희는 택함 받은 세대요, 왕가의 제사장이요, 거룩한 민족이요, 특별한 백성이니 이것은 너희를 어둠에서 불러내어 자신의 놀라운 빛으로 들어가게 하신 분께 대한 찬양을 너희가 보여 주게 하려 하심이라. (벧전 2:9, 킹제임스)

그런데 [개역성경]은 이런 사실을 가리려 하고 있다.
개역: 네게도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계 2:15)
흠정역(킹제임스 성경): 네게도 니골라당의 교리를 붙잡는 자들이 있으니 내가 그것을 미워하노라. 그리스어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여기 나오는 니골라당은 '성도들 위에 군림하려는 자들'로서 구약 시대의 제사장(priest)처럼 성도들을 통치하려는 자들이었다. 신약 교회가 생기자마자 이런 무리가 생겼으며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이런 자들의 교리를 미워한다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로마 카톨릭 교회는 아직도 구약 시대의 종교로 남아 자기들의 성직자를 'priest' 즉 제사장이라고 부르고 있고 성직자 계급주의를 철저히 유지하고 있다. 사실 이런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결국 이처럼 중요한 구절을 삭제해야만 했다.

35. 신부인가, 사제인가?
성도들은 결국 로마 카톨릭 교회 사제를 신부(神父)라 부르면 안 된다. 이는 곧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으로 성경이 금하는 것이다(삿 17:10, 킹제임스; 마 23:9, 킹제임스). 그런데 목사(pastor)들이 로마 카톨릭 교회 사제처럼 행사하려고 로만 천주교 신부의 칼라 의복을 입고 긴 옷 입기를 좋아하며 심지어 구약의 제사장들처럼 세습을 시도하고 있으니 얼마나 안타까운가! 또한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는 계속해서 미사라는 제물을 드리기 때문에 모이는 장소를 '성당'이라고 하는데 기독교인들이 예배당을 가리켜 '성전'이라고 하는 것은 이를 그대로 배운 것이다. 성당이나 성전에는 반드시 제사장이 있어야 하는데 과연 목사가 제사장이란 말인가?
이제 이것들(죄와 불법들)을 사면하셨은즉 다시는 죄로 인하여 헌물을 드릴 필요가 없느니라
(히 10:18, 킹제임스)고 하시지 않았는가?

이처럼 예수님께서 단 한 번 영원한 희생 헌물을 드리시고 단번에 속죄를 이루셨으므로 더 이상 제사장과 성전과 성당이 필요 없다. 이렇게 귀중한 예수님의 단번 속죄를 무시하며 그분을 짓밟는 자들을 향하여 우리 예수님께서는 "내가 그것을 미워한다."고 말씀하셨다.

36. 고해성사
로마 카톨릭 교회 사제의 권위는 고해성사에 달려 있는데 [개역성경]은 개악된 본문의 영향을 받아서 하나님이 아닌 사람들에게 죄를 고백하라는 로마 카톨릭 교회 교리를 또 다시 지지해 주고 있다.
개역: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약 5:16)
흠정역(킹제임스): 너희 잘못들을 서로 고백하고

로마서 15장에는 아주 묘한 구절이 있다.
개역: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군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직하게 하려 하심이라.

 

흠정역(킹제임스 성경): 이것은 곧 나로 하여금 이방인들을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자가 되어 하나님의 복음 사역을 하게 하사 이방인들을 바치는 일이 성령님을 통해 거룩히 구별되어 주께서 받으실 만하게 하려 하심이라.

과연 사도 바울이 제사장이 되어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려 했을까?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기록한 히브리서에 그는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중보자가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고 천명했다. 그런데 어떻게 [개역성경]은 이렇게 번역하고 있는가? 그 이유는 [개역성경]의 근간이 된 사본들과 역본들이 로마 카톨릭 교회의 제사장 체계를 주장하기 때문이다. 믿는 성도들이 다 제사장이라는 것은 영적 의미의 제사장을 말하는 것이지 결코 [개역성경]이 말하는 것과 같이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일을 하는 제사장이 아니다. 성경에는 교리적으로 오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개역성경]은 로마 카톨릭 교회의 영향으로 오류를 만들고 있다.

37. 여자 감독과 집사
초대 교회부터 성경에는 이름 없이 주님을 섬긴 많은 여인들이 있다. 특별히 한국 교회에는 여자들의 활동이 아주 왕성하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주의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은 너무 보기에 좋은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교회 안에서 창조의 질서가 지켜지길 원하신다. 여자는 온전히 순종하며 조용히 배울지니라. 오직 나는 여자가 가르치는 것이나 남자에게 권위를 행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다만 조용할지니라. (딤전 2:11-12, 킹제임스)

그래서 디모데전서 3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에게 영감을 주사 교회의 두 직분인 감독과 집사의 자격에 대해 다음과 같은 구체적인 조건을 제시하셨다. 그러므로 감독은 반드시 책망 받을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며 깨어 있으며 맑은 정신을 가지고 있으며 행실이 바르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는 재능이 있으며
(딤전 3:2, 킹제임스). 이와 같이 집사들의 아내들도 반드시 신중하며 헐뜯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맑은 정신을 가지고 있으며 모든 일에 신실한 자라야 할지니라. 집사들은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 자기 자녀들과 자기 집을 잘 다스릴지니라. (딤전 3:11-12, 킹제임스)

여기서 말하는 감독은 교단의 감독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는 교단이 나오지 않으며 성경의 교회는 모두 독립/자치 교회이다. 여기서 감독으로 번역된 단어는 영어로 'bishop'인데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는 이를 주교로 부르고 있다. 현대 교단들의 감독 체제는 바로 로마 카톨릭 교회의 주교 개념에서 나온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감독은 한 지역 교회의 감독을 말한다. 지금 식으로 표현하면 담임 목사가 될 것이다.

 

성경이 이야기하는 교회의 직분은 목사와 집사뿐이 였으며 이들은 반드시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했다. 즉 여자는 이런 직분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그것이 창조의 질서를 위배하기 때문이다. [개역성경]도 디모데전서 3장 2절과 디모데전서 3장 12절은 잘 번역했으나 디모데전서 3장 11절에서 큰 실수를 범하고 있다.

 

개역: 여자들도 이와 같이 단정하고 참소하지 말며 절제하며 모든 일에 충성된 자라야 할지니라. (딤전 3:11)
[개역성경]은 이곳을 '여자들도'라고 번역함으로써 마치 여자들도 집사가 될 수 있는 것처럼 번역했다. 그러나 심지어 NIV 같은 현대 번역본들도 [킹제임스 성경]과 마찬가지로 이곳을 "그들의 아내들도" 즉 "집사들의 아내들도"라고 정확히 번역하고 있다. 아마도 여자 집사를 인정하기 위해 이런 번역을 한 것으로 사료된다.
흠정역(킹제임스 성경): 이와 같이 집사들의 아내들도 반드시 신중하며 헐뜯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맑은 정신을 가지고 있으며 모든 일에 신실한 자라야 할지니라.

38. 마리아는 평생 동정녀인가?
마태복음 1장에는 우리 주 예수님이 마리아의 맏아들임이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요셉이) 그녀의 맏아들을 낳기까지 그녀를 알지 아니하다가 마침내 낳으니 그의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마 1:25, 킹제임스) 성령님께서는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로 숭배하여 평생 동정녀라 부를 자들이 생길 것을 미리 아시고 마태복음에 예수님이 그녀의 '맏아들'(firstborn son)이라고 분명히 기록해 놓았다. 잘 알다시피 마리아는 예수님 외에도 여러 명의 자녀들을 낳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는 예수님의 형제들이 다 그분의 사촌이라고 주장한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낳은 이후에 평생토록 동정녀로 지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주장을 합리화시키기 위해 그들은 서기관들을 동원하여 '맏아들'의 '맏'을 삭제해 버렸다.
개역: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각주: 정동수, <개역 성경과 킹제임스 성경 비교 분석>(말씀과만남)]

V. 표준 새번역에 대해서
[개역성경]이 확고하게 자리를 굳히는 동안 대한성서공회는 새로운 세대를 겨냥한 새로운 번역의 필요를 느꼈다. 또 동시에 외국인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지 않고 한국 사람들의 손으로 만든 번역이 있어서 외국인 선교사들의 힘으로 거의 이루어진 [개역성경]을 대체시켜야겠다는 생각이 힘을 얻게 되었다. 이에 대한성서공회는 외국에서 공부한 국내 학자들이 이런 작업을 감당할 수 있으리라 믿고 1983년에 번역 작업을 시작하여 [표준 새번역]이라는 새 역본을 발간하였다.

 

 [표준 새번역]은 연합성서공회가 1983년에 발행한 [그리스어 신약성경 3판]과 히틀러의 추종자였던 키텔(Kittel)이 수정한 '히브리어 구약성경'과 거의 유사한 [슈트트가르트 비블리아 헤브라이카](Biblia Hebraica Stuttgartensia 1967/1977, BHS)를 번역의 원전으로 삼아 만들어진 것이다.[(대한성서공회, [표준 새번역] 서문, 1983. 나채운 역시 자신의 저서에서 이를 확증해 주고 있다 (우리말 성경 연구), 기독교문사 1990, p.460.)] [표준 새번역] 역시 [개역성경]과 마찬가지로 동일한 그리스어 본문과 히브리어 본문을 사용했으므로 문체만 다를 뿐 그 내용은 거의 같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VI. 공동번역에 대해서
1968년에 대한성서공회는 프로테스탄트 교회와 카톨릭 교회의 연합 작품인 [공동번역]을 만들기 위한 위원회를 구성했다. 이것은 사실 1960년대에 이루어진 제2차 바티칸 공회의 종교 일치 운동(Ecumenism)의 사상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나채운, p.72.) 1962년에 미국성서공회와 영국성서공회의 니다(Nida)와 브래드녹(Bradnock)이 한국을 방문해서 새로운 번역 원칙을 제시하였다.(나채운, p.72.)

그들은 '형식적 일치'보다는 '동적 일치' 번역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공동번역] 위원회는 이런 원칙을 수용했다. 성경 번역에서 '형식적 일치'란 본문의 단어 하나 하나를 수용 언어가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그대로 일치하게 번역하는 것으로 이렇게 번역된 대표적인 성경으로는 [킹제임스 성경]을 들 수 있다. 반면에 '동적 일치'란 단어 단어에 신경을 쓰기보다는 사상이나 뜻이 전달되도록 번역하는 것이며 이렇게 번역된 대표적인 성경으로는 [신국제역](NIV)을 들 수 있다. 다음은 구체적으로 이런 번역의 원칙이 어떤 차이를 가져오는지 보여 준다.

마가복음 14장 5절에 보면 한 여인이 예수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옥합을 깨뜨려 그 향유를 예수님께 부었다. 그 향유의 가치를 헬라어 원문에서는 300 데나리온이라고 했는데 NIV에서는 1년 분 봉급(one year's wage)이라고 번역했다. 그러면 NIV의 번역을 오역이라고 할 수 있느냐? 필자는 이 부분의 NIV 번역은 너무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한 데나리온이 하루 품삯이면 1년 동안에 안식일과 절기를 빼면 300 데나리온 정도 번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렇다면 NIV의 번역은 현대인들에게 훨씬 더 그 의미가 분명하게 전달된다고 할 수 있다.(장두만, [목회와 신학], 1998년 6월, 7월.)

이런 주장대로라면 성경에 나오는 달란트, 데나리온, 에바, 큐빗 등을 모두 '1년 치 봉급', '10평', '세 바구니', '50센티미터' 등으로 바꾸어야 하지 않겠는가? 왜 이 부분만 '1년 치 봉급'으로 해야 한단 말인가? 과연 누가 하나님의 말씀을 교정할 권한과 그에 필요한 영감을 그에게 주었는가? 하나님께서는 성경의 단어, 단어에 영감을 불어넣으시고(축자 영감) 단어, 단어를 보존하시지 단지 뜻만을 보존하시는 것이 아니다.

 

성경을 번역할 때 300 데나리온이라 두고 그것이 대략 1년 치 봉급이라고 풀어 주는 것이 마땅한 일이다. 그래서 목사와 교사가 필요한 것이 아닌가? 성경이 하나님께서 처음에 주신 단어 단어를 그대로 유지한 가운데 독자들이 그 안에서 뜻과 사상을 찾아야 한다. 성경은 값싼 소설책이 아니며 초등학교 학생들의 만화책이 아니다.

 

이런 책은 한 번 읽고 나면 더 이상 읽을 필요가 없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신비를 간직한 책이므로 계속해서 읽어도 질리지 않는 것이다. 저자는 결코 어려운 단어를 써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성경이 뜻이나 사상만을 전달한다면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God's word)으로서의 가치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단어 단어를 보존하신다!

[공동번역]의 구약은 1937년도에 발행된 키텔의 [Biblia Hebraica]에서 번역되었으며 신약은 연합성서공회가 1966년에 발간한 [그리스어 신약성경 1판]에서 번역되었다.(대한성서공회, [공동번역]서문, 1977.)

이렇게 출간된 [공동번역]은 전세계적으로 볼 때 프로테스탄트와 카톨릭 교회가 연합해서 만든 성경 중 두 번째 것이다. 또한 이것은 한국에서 발행된 최초의 의역 성경(Paraphrased Bible)이며 프로테스탄트 판과 카톨릭 판이 출간되었는데 카톨릭 판에는 외경도 정경으로 들어가 있다.(나채운, p.75. 나채운은 또한 지난 200년 간 로마 카톨릭 교회가 한국어 성경을 발간한 적이 없음을 밝히고 있는데 우리는 이를 통해 카톨릭 교회의 성경관이 어떠한지 금방 알 수 있다. "그런즉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느니라"(롬 10:17, 킹제임스).)

VII. 결론
성경으로만 하는 상담도 딤후
3:16-17의 말씀과 벧후 1: 3-4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원본과 King James Version에 가장 충실한 한글 성경으로 상담을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마음에 다짐해봅니다:

딤후 3:16-17(킹제임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어진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훈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이 온전하게 되며,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구비되게 하려 함이니라. (All scripture [is] given by inspiration of God, and [is] profitable for doctrine, for reproof, for correction, for instruction in righteousness: That the man of God may be perfect, throughly furnished unto all good works.);

벧후 1:3-4 (킹제임스)
그의 신성의 능력이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심에 따라 그에 관한 지식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영광과 덕에 이르도록 부르셨으니 이로써 우리에게 지극히 크고 귀한 약속들을 주심은 너희로 하여금 이 약속들을 통해서 정욕으로 인해 세상에 있게 된 타락을 피하여 하나님의 본성에 동참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According as his divine power hath given unto us all things that [pertain] unto life and odliness, through the knowledge of him that hath called us to glory and virtue: Whereby are given unto us exceeding great and precious promises: that by these ye might be partakers of the divine nature, having escaped the corruption that is in the world through lust. 

 

출처: http://www.happyallthed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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