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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25:19) 죽었는가 살았는가?

이요나 2007. 5. 7. 11:35

(사도행전25:19) 죽었는가 살았는가?

 

(행25:19) “오직 자기들의 종교와 또는 예수라는 이의 죽은 것을 살았다고 바울이 주장하는 그 일에 관한 문제로 송사하는 것뿐이라”

 

바울은 벨릭스 총독 지배 속에서 2년 동안 옥살이를 하였다. 벨릭스는 바울의 명성과 그를 지지하는 세력들이 많음은 알고 친지들의 방문과 그를 수종하는 사람들의 출입을 허용하며 돈을 얻을까 하여 자주 바울을 불렀다. 이처럼 벨릭스는 바울의 충정어린 구원의 복음을 듣고도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오직 그의 마음은 재물로 가득차 있었다.

 

I. 로마로 향한 바울의 각오

A. 신임 총독 베스도

2년 후 벨릭스의 부패는 로마 원로원에 고발되어 가이샤 앞에 압송되었다. 그러나 그때에도 황제의 친구였던 그의 형 팔라스의 도움으로 구속되지 않았고 다만 총독자리에서 물러나고 그의 후임으로 로마 원로원으로부터 유능한 인재로 인정받는 베스도가 총독으로 부임하였다.

 

신임 총독 베스도는 부임 삼일 후, 유대교 지도자들을 만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 갔다. 그가 그처럼 서둘러서 예루살렘에 올라 간 것은 유대의 원활한 통치가 예루살렘을 장악한 제사장들을 중심으로 한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제사장과 유대교 지도자들은 바울을 다시 고소하여 바울을 다시 예루살렘으로 보내 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들은 도중에 매복하여 바울을 죽이려 했던 것이다. 이처럼 바울을 향한 유대인들의 적대감은 2년이 지나도록 없어지지 않고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그들의 마음 속에는 자신들과 한 조직 속에 있었던 바울이 변심하여 그리스도의 사람이 된 것에 대한 분노가 불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신임 총독 베스도는 자신이 곧 가이샤라에 내려가야 하므로 유력한 자들이 함께 가이사랴로 내려가 거기서 그들의 송사를 듣자고 제안하였다. 이렇게 하여 결국 그들은 베스도와 함께 가아사랴로 내려와 재판을 열게 되었다. 그들은 여러 가지 사건들을 나열하며 바울을 송사하였으나 정확한 범죄의 증빙을 제출하지 못하고 바울의 변명을 듣게 되었다.

 

B. “내가 가이사께 호소하노라(Caesarem appello)

바울이 총독 앞에서 유대인의 율법이나 성전이나 가이사에게나 내가 도무지 죄를 범하지 않았다 변명하자 베스도는 유대인들의 환심을 얻고자 바울에게 네가 이 사건에 대하여 예루살렘에 올라가 내 앞에서 심문을 받기를 원하느냐 물었다. 이에 바울은 내가 가이사의 재판 자리 앞에 섰으니 마땅히 거기서 심문을 받을 것이라 당신도 잘 아는 바와 같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불의를 행한 일이 없다(10) 대답하였다.

 

바울이 이처럼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자신을 죽이려는 계략을 알고 있었고 또 로마법에 의해 로마 시민은 자신의 재판이 공정치 못했다고 생각될 때 황제 가이사 앞에 호소할 수 있는 권리가 보장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을 Caesarem appello’라 한다. 이에 베스도는 바울에게 “네가 가이사에게 호소하였으니 가이사에게 것이라" 하였다.

 

 베스도가 이렇게 말한 것은 바울이 로마 법정에 서야 할 만한 죄를 찾지 못하였고, 또한 바울의 요청을 무시해 버린다면 유대의 총독이 된 자신이 로마법을 이해하고 있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황제 네로에게 비쳐질 것이기 때문이다.

 

때 마침 아그립바 왕이 신임 총독 베스도에게 인사차 방문하러 왔을 때, 베스도는 바울의 문제를 그에게 설명하면서 가이사에게 상소할 자료가 있을까 하여 바울의 증언을 듣기로 했다 말하였다. 아그립바 왕은 헤롯 아그립바 2세로서 헤롯대왕의 증손자이며 야고보를 죽인 헤롯 아그립바 1세의 아들이다(행12:1). 또한 그의 처 버니게는 벨릭스와 결혼한 드루실라와 함께 친 남매 사이로 근친상간의 부부이다.

 

베스도는 갈릴리와 베레아 지방 분봉왕인 아그립바에게 바울의 사건을 설명하여 이 사건의 전말은 유대인들의 고소에 따르면 유대인들은 예수가 죽었다고 믿었고, 바울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났다고 주장하는 것뿐이었다 고 증거하였다. 다시 말하여 예수가 살았는냐 죽었느냐 하는 논쟁이었다.

 

II. 부활의 문제는 오늘날 현재까지도 계속되는 분쟁이다.

A. 예수는 죽었거나 아니면 살아있다.

에수께서 죽었는가 살았는가 하는 논쟁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로부터 지금까지 계속 쌍날과 같이 대립되는 싸움이다. 어느 한쪽도 이 문제 만큼은 양보하려 하지 않고 있다. 이 문제로 하여 2천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고 순교를 당해야 했다. 사도들의 순교도 모두 이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께서 죽었는가 살았는가는 그 어느 쪽이 진실이고 또 그 한쪽은 거짓이 틀림없다.

 

그러나 문제는 교회 안에서도 이 문제에 대하여 의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안타깝고 분통이 터지는 일이 아닐 수 없으나 생각하고 보면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불쌍한 사람들인지 또 이들이 장차 받아야 할 심판이 얼마나 크고 두려운 것인지 믿는 우리를 떨리게 한다.

 

B.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는 죽었다고 믿는다.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사심을 의심하는 것은 실제로 그들이 보지 못하였고 또 죽어 장사 지낸 사람이 다시 살아 날 수 없다는 지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이러한 이야기들은 모두 동화와 같이 치부해 버릴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이 성경의 이야기들을 허무맹랑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설화로 치부하는 것이다.

 

그러면 믿는 우리는 무엇을 보고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사심을 확신하는 것일까? 이것은 바로 성경이다.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믿고 있으며 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다시 사신 부활의 주를 친히 본 사도들의 증거를 믿는다. 만약 이것을 믿지 않는다면 우리의 믿음의 목적은 상실하게 되며 우리의 굳은 믿음과 확신 또한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러므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살아나심은 그를 믿는 모든 성도들의 믿음의 목표이며 절대 신앙의 근거인 것이다.

 

그러함에도 주 예수를 믿는 사람들 중에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그 하나는 그들의 믿음이 성경에 기록된 말씀에 있지 않고 잘못된 교리를 따르고 있기 때문이며 또 하나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로서 그들은 스스로 말씀 밖으로 나간 자들이 되어 멸망의 심판을 차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그들이 무슨 말을 한다고 해도 그들은 이미 주의 심판을 받은 자들인 것이다.

 

C. 예수가 죽었다고 믿는 사람들은 어둡고 희망이 없는 세상에 살고 있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진정한 소망이 없이 물질세계의 노예가 되어 하루하루 죽어가고 있다. 인류가 존재한 이래 사람들은 많은 사상과 철학과 이념들을 내세워 인류의 복지를 증진시키고 아름다운 세상을 건설하고자 노력하여 왔지만 불행하게도 세상은 날이 갈수록 악해지고 또 병들어 가고 있다.

 

지상낙원 건설과 세계평화주의자들의 건투에도 세상은 통제되지 않는 폭력과 전쟁이 끊이지 않으며 성적 타락과 인간의 패역들로 사회는 날로 불안해져 언제 파선할지 모르는 배가 되어 자신들도 알지 못하는 길을 달려 가고 있다. 이들에게 무슨 희망이 있으며 이들의 하루의 수고가 무슨 소득이 있는가? 그러므로 사람들은 서로 말하기를 우리에게 다만 오늘이 있을 뿐이다 말하며 그들은 돼지 같이 살다가 개처럼 죽는다.

 

사람들은 현실 속에서 마음속공허를 채워보려고 계속 새로운 것을 시도한다. 그러기 위해 돈을 필요로 하고 섹스에 빠지고 마약과 술에 의존하며 부귀와 영화를 얻기 위해 명예를 탐익한다. 그러나 그 누구도 재물의 만족을 채우지 못하고 섹스와 술과 마약 속에서 그들의 이상을 만족 시키지도 못하여 자신이 추구하던 명예로운 삶을 성취하지 못한 채 죽음으로 들어간다. 그들의 죽음은 아무런 의미도 소망도 없다. 다만 영원히 죽어 심판에 이르는 것이다.

 

그들이 이처럼 소망을 갖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생명에 소망도 없고 이 땅에는 정의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말하기를 선한 사람도 덧없이 죽어가고 악한 사람들은 더욱 왕성하여 대대손손 부귀와 영화를 누리며 하루에도 아무런 잘못도 없이 죽어가는 생명들이 있으니 인생은 공평치 못하며 하나님은 이 세상에 없다고 말한다.

 

III. 예수 그리스도 사심에 대한 바울의 증거

 

A. 바울도 한 때 주께서 죽었다고 믿었다.

바울도 한 때 예수 그리스도의 살아남을 믿지 않았다. 그가 다메섹 광야에서 예수를 만나기 전까지 그는 예수께서 오시기로 언약된 메시아이심을 믿지 않았고 그의 다시 살아나심을 전하는 증인들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는 도리어 그리스도의 다시 살아나심을 증거하는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였다.

 

만약 우리가 사람의 살아남을 믿는 것은 두 가지 경우가 있다. 그 하나는 직접 만나는 것이며 또 다른 방법은 살아난 사람과 직접 만난 사람을 통하여 그에 대한 예기를 듣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그에 대한 확실한 보증이 필요하다.  

 

여기서 우리는 왜 주 예수께서 친히 사도를 세우셨는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주님은 사도들에게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음으로 증거하니라’(요15:26,27) 하셨다.

 

또한 베드로는 사도의 세우심에 대하여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리워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로 더불어 예수의 부활을 증거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행1:21,22) 증거 하였다. 이것은 다시 말하여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사심을 목격한 자들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기 위해 세우셨음을 의미한다.

 

사도요한은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1:1) 하였다. 이와 같이 우리가 사도들의 증거를 통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살아나심을 믿는 것은 그들이 주 예수를 위하여 어떻게 살았으며 또한 그들이 우리에게 무엇을 증거하고 있느냐에 있다.

 

바울은 주 예수를 만난 후 사도로 세움을 받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었다. 그리스도의 증인이란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깨닫고 그의 복음을 위해 선포자로 의탁을 받아 주의 의로우심과 살아나심과 다시 오심을 후세에 전하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초개처럼 여겨 죽기까지 충성하였던 것이다. 

 

바울은 자신의 헌신을 말하여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맞았으며 세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여 애쓰고 여러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속에 늘리는 일이 있으니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고후 11:24-28) 증거하였다.

 

만약 주의 살아나심을 눈으로 보지 못하였다면 누가 그를 위해 이러한 고난을 받을 수 있겠는가? 이로서 우리 또한 주의 살아나심을 믿고 그의 이름에 힘입어 의로운 삶을 살며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살아나심과 또 지금 성도와 함께 하심과 그의 날에 다시 오심을 전하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주 예수를 믿는 자들 중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정하는 것이다.

 

B. 부활의 증거

바울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의심을 갖고 있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고전15:12) 책망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본 산 증인들을 말하여 주께서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고전15:4-8) 증거하였다.

 

이에 대하여 사도바울은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였으리라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였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 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음이나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하셨으리라” (고전15:13-15) 하였다.

 

다시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고전15:16-19) 증거하였다.

 

IV.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사심과 성도의 복

예수께서 살아 나셨다는 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증명하고 있는가? 그것은 먼저 성경에 기록된 예언자들의 증언들이 성취된 것을 증명하며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이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죄에서 구원을 받았음과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증명하며 또 아직 우리 중에 일어나지 않은 성경의 예언들이 우리 앞에 그대로 성취될 것을 믿게 한다.

 

만약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의 증거를 듣고도 그를 구원자로 받아 드리지 않는다면 그는 성경에 기록된 말씀대로 스스로 멸망을 받게 된다. 성경이 이미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3:18) 기록하였기 때문이다.

 

이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의 주로 영접한 사람은 그가 생전에 지은 모든 죄를 용서받게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의와 평강과 기쁨으로 충만한 삶을 누리며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는 은혜를 입게 되어 장차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그리스도의 영광을 함께 누리게 된다. 이 얼마나 큰 은혜며 영광스런 일인가?

 

그러나 주를 믿지 않은 사람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은 그 사실 하나로 죄에서 사함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멸망으로 들어 가게 된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참으로 안타깝고 애석한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께 인도할 사명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더욱 커다란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에 이른 사람들이 예수께서 살아나심처럼 살지 못하고 예수께서 죽으심처럼 사는 것이다. 예수께서 살아나심처럼 산다는 것은 그의 살아나심처럼 의롭고 거룩한 삶을 살아 장차 주의 날에 우리를 부르실 때에 그와 같이 변화되어 천국에 들어 가는 것이며, 그의 죽으심처럼 사는 것은 예수를 믿으나 마치 소망없는 세상 사람들과 같이 육신의 이끄심대로 사는 육신적 크리스챤들을 말한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날에 각자 자신이 행한 대로 주의 판단을 받게 될 것이다. 성경이 이미 우리가 다 반듯이 그리스도의 심파대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을 것임이라(고후5:10) 기록하였기 때문이다.

 

사도바울은 우리에게 의의 도를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너희에게 나으리라(벧후 2:21) 하였으며 예수께서도 이미 주인의 뜻을 알고도 예비치 아니하고 뜻대로 행치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것이니라”( 12:47-48) 증거하셨다.

 

오늘날 우리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도가 되어 예배에 참석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예수께서 사셨다는 신앙을 갖고 있으면서도 아직 그들이 주께서 죽으신 같이 살고, 주님의 계명이 그들의 삶에는 적용되지 않는 것처럼 사는 사람들을 볼 때 정말 가슴 아픈 일다. 그들은 자신의 육신의 소욕을 따라 살고 육신의 정욕을 따라 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우리에게 믿음은 모든 사람들의 것이 아니라 하셨으며 다시 믿음의 결국은 영혼의 구원이라 증거하였다. 따라서 실제적 구원은 예수께서 사신다는 것을 믿는 이상으로 주님이 명령하신 삶을 사는 것이다.  

 

성경은 믿는 우리를 향하여 “자녀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생각컨데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8:17,18) 하였으며 다시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히10:37)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찌할 것인가? 성경은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라 하셨으니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의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히10:37-39) 기록하였다.

 

사랑하는 주님 주께서 사셔서 우리에게 영광의 날로 들어갈 길을 열어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이 영광을 우리에게 주셨사오니 한 세상 사는 동안 주의 이름에 힘입어 성경에 기록하신 주의 말씀을 따라 거룩하고 의로운 삶을 살게 하시고 주께서 다시 살리신 이 생명으로 하여 주의 영화로운 날에 이르게 하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