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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24:25) 편리한 틈은 다시 오지 않는다

이요나 2007. 3. 20. 15:30

(사도행전24:25) 편리한 틈은 다시 오지 않는다

 

(행24:25) “바울이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니 벨릭스가 두려워하여 대답하되 시방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

 

오늘 메시지는 매우 흥미로운 내용을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다. 물론 이 내용은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겪었던 일들 중의 한 부분이지만 여기서 우리는 이 내용이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이것이 강해설교의 묘미이고 성경공부의 목적이라 하겠다.

 

본문 25절에는 “바울이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니 벨릭스가 두려워하여 대답하되 시방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는 말이 기록되어 있다. 이 말은 총독 벨릭스가 바울에게 복음전도를 듣고 한 말이다. 흥미로운 것은 벨릭스가 바울의 메시지를 듣고 두려워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 곧 복음은 그 말씀 속에 권위가 있어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두렵게 한다. 따라서 듣는 이가 믿어야 할 것인가 믿지 않아야 할 것인가를 스스로 결정하여야 한다. 만약 그가 복음의 권함을 듣고 믿으면 구원에 이르는 것이며 돌아서면 그는 결국 멸망을 받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전할 때 지금은 내가 세상에서 할 일이 많으니 나중에 내가 편할 때에 믿겠다고 말한다. 그는 세상에서 좀더 놀고 싶은 마음이 남아 있는 것이다. 그 생각에는 내가 실컷 놀다가 정말로 심판을 받을 날이 가깝다고 느껴질 때 예수를 믿으면 천당에 갈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사람들 앞에서는 너의 신발의 먼지를 떨어버려 그의 죄가 그의 머리로 돌아가게 하라 하셨다.

 

I. 바울과 대제사장의 대질 심문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염병이라 천하에 퍼진 유대인을 다 소요케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5)

 

바울을 죽이려는 유대인들의 음모를 알게 된 예루살렘 치안 담당 천부장은 400여명의 군사와 70명의 마병의 특별 보호아래 바울을 유대 총독 벨릭스 앞으로 압송하였다. 바울은 자신의 앞에 어떤 일들이 전개될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이미 주께서 네가 로마에서도 나를 증거하여야 하리라는 메시지를 받은 터라 그는 자신의 최종 목적지가 어디인 것을 알고 있었다.

 

어쩌면 자신의 최종 목적지를 알고 달려 간다는 것은 그 목표가 확실하기 때문에 나름대로 주어진 시간들에 충실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최종 목적지가 무엇을 의미하는 지에 따라 그 느낌은 달라질 것이다. 바울은 이미 지금 자신의 최종 목적지 앞에 놓인 피의 제단을 바라보며 자기 앞에 펼쳐지고 있는 상황에 충실해야 했던 것이다.

 

A. 변사 더둘로의 고소

천부장의 빈틈 없는 호송으로 바울을 죽이려던 유대인들의 음모가 무산 되자, 대제사장 아나니아와 장로들은 총독을 움직여 바울을 죽이기 위해 당대의 유능한 말쟁이 더둘로를 변사로 고용하였다. 정황으로 보아 그는 로마가 인정하는 법정 변호사였을 것이다. 이로서 바울은 총독 앞에 서 종교재판을 받게 되었다. 사실 재판은 누가 더 변론을 잘하느냐에 승패가 걸렸다고 볼 수 있다.  

 

바울을 송사하기 위해 나선 변사 더둘로는 먼저 총독 벨릭스에게 우리가 당신을 힘입어 태평을 누리고 이 민족이 당신의 선견을 인하여 여러 가지 개량된 것을 인하여 크게 감사를 드린다는 찬사의 메시지를 쏟아 내었다. 이방인 총독을 힘입어 태평을 누린다는 말은 사실 하나님을 힘입어 살아가는 이스라엘 민족정신에 반하는 고백이며 사실과 다른 아첨의 말이다. 또한 그는 벨릭스가 총독이 된 후, 여러 측면에서 시도한 개혁정책을 앞을 내다보는 선견지명이라 아부하였다. 이것은 말할 것도 없이 정경일치를 위한 종교적 타협일 것이다.

 

오늘날 세계 도처에서 우리 교회들이 얼마나 타협을 시도하고 있는가?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라면 그것이 무엇이 되었던 타협점을 찾고, 자신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슬그머니 꼬리를 감추기 일 수다. 얼마 전 유명교회의 장로인 대법원장이 고등법원에서 기각된 성전환 항소자에 손을 들어 주었다.

 

소수성 인권의 차원이라고 하지만 그의 판결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 교회의 장로라는 지위를 무색케 하였다.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은 이에 대한 한국 기독교계의 반응이다. 교계는 그의 판결에 어떤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하물며 어떤 교회 지도자는 동성애에 대한 성경적 이의를 제출하였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교회는 사회와 정치와 사돈을 맺고 있다. 스스로 적그리스도 체제의 틀을 놓고 있는 것이다.

 

변사 더둘로는 바울의 죄를 고소하여 바울을 가리켜 나사렛 이단의 괴수요 천하에 퍼진 유대인들을 소요케 하는 염병이라 하였다. 더불로의 주장에 유대인들은 박수를 치고 있었다. 나사렛 이단이란 바로 수년 전에 십자가 처형을 당한 예수 그리스도를 말한 것이다. 사실 이단으로 치자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한 유대교가 이단인 것이다. 성경은 예수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영마다 이단이라 기록하였다(요일4:2,3).

 

또한 그는 예루살렘 성전을 더럽혔다고 거짓 증언을 하였다. 지금 같으면 사진이나 동영상과 같은 증거물이 있어 꼼짝할 수 없겠지만 그 당시는 증인들의 증언에 의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흥미롭게도 현대인 성경에 의하면 천부장 루시아가 바울 강제로 빼앗아 갔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루시아를 함께 고소하였다고 기록되었다.)

 

   B. 바울의 변론(10-23)

소송자들의 대리인 소송인 더둘로의 고소가 끝나자 벨릭스 총독은 바울에게 변론의 기회를 주었다. 바울은 먼저 총독을 향하여 당신이 여러 해 전부터 이 민족의 재판장이 된 것을 내가 알고 있으며 내 사건에 대하여 기쁘게 변명하겠다고 말문을 열었다. 이 말은 총독에 대하여 바울이 잘 알고 있으며 자신의 사건에 대해 꺼리낌 없이 변론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바울은 먼저 자신이 예루살렘에 예배를 드리러 온지 열 이틀 밖에 되지 않았고 내가 성전에서 누구와 변론을 한 것이나 성중에서 무리를 소동케 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으니 저희는 소송의 근거가 제출할 것이 없다 하였다.

 

바울은 계속하여 자신이 유대인들에게 소송을 당하는 이유를 증거하여 ‘나는 저희가 이단이라 하는 도를 좇아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및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으며 저희의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라 이것을 인하여 나도 하나님과 사람을 대하여 항상 꺼리낌이 없기를 힘쓰노라”(14-16) 하였다.

 

여기서 바울은 세 가지를 설명하고 있는데 먼저 그는 자신이 믿는 예수 그리스도의 도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믿는 바 하나님의 도와 동일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바울은 자신이 믿는 믿음의 정체성에 대하여 증거한 것으로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이단이라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뜻이다. 그 이유는 그들이나 그리스도교나 모두 같은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며 동일한 율법과 예언자들의 글에 기록된 말씀을 믿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바울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하늘에 속한 소망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그것은 바로 의인과 악인의 부활에 대한 소망이다. 다시 말하여 의인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악인은 영원히 심판에 처한다는 성경의 궁극적인 목표이다.

 

오늘날 우리 교회는 이 문제에 대하여 심각하게 고민하여야 할 것이다. 많은 교회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침묵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들은 성도의 현실 생활에 초점을 맞추어 물질축복을 강조하며 교회부흥이 교회의 목적을 삼도록 권면하고 있다. 최근 목적이 이끄는 삶이라는 책을 펴내어 전세계 가운데서 주목을 받는 미국 새들백 교회의 릭 워렌 목사의 메시지를 보라. 그는 성경을 왜곡하여 교회의 휴거나 주님의 재림과 같은 예언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없다고 증거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성경기자들은 주의 재림과 천년왕국을 가르치고 있으며 주께서도 종말의 날에 대하여 경계하셨다.

 

세 번째로 바울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과 사람을 대하여 양심에 꺼리낌 없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믿음생활의 기본적 원리를 말하였다. 사실 이 부분은 이 땅에 사는 우리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이 전심으로 힘써야 할 삶의 지침이다. 믿음이란 그 믿음의 열매가 삶 가운데 나타나야 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가 가장 염려할 부분도 이 부분이다. 장차 우리는 모두 의인의 부활과 악인의 부활 그 어느 속에 속한 자들로서 그 선택이 자의에 있지 아니하고 우리의 삶이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 선한 증거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계속하여 자신이 여러 해 만에 예루살렘에 온 또 다른 목적이 있음을 설명하였다. 그것은 기근으로 고생하는 민족들을 구제하기 위한 예물을 봉헌하기 위함이었다. 이것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실천하는 믿음의 증거이다. 이 문제 또한 오늘날 우리 교회들이 살펴 보아야 할 대목이다.

 

끝으로 바울은 유대인들이 자신을 송사한 이유에 대하여 “오직 내가 저희 가운데 서서 외치기를 내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하여 오늘 너희 앞에 심문을 받는다고 한 이 한 소리가 있을 따름입니다” 증거하였다. 결국 바울의 메시지는 죽은 자의 부활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증거하고 있다. 이것은 그 시대에 가장 큰 이슈로서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향하여 “내가 그리스도와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라’(빌3:10,11) 증거하였다. 이것이야 말로 우리가 믿는 믿음의 근거이며 목표인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만약 우리에게 부활이 없다면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들일 것’이라 하였다.

 

II. 총독 벨릭스와 유대여자 드루실라

“수일 후에 벨릭스가 그 아내 유대여자 드루실라와 함깨 와서 바울을 불러 그리스도 예수 믿는 도를 듣거늘”(24)

 

여기서 우리는 바울을 재판하고 있는 총독 벨릭스와 그 아내 드루실라에 대하여 살펴보자. 벨릭스는 사실 로마제국에서 노예에서 유대의 총독으로 임명된 유일한 자로서 그 배후에는 네로 황제의 총애를 받고 있던 형 팔라스가 있었다. 그로하여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Tacitus)는 벨릭스를 평하여 “그는 노예의 정신으로 왕권을 행사했다.” 고 증거했다.

 

바울이 그의 앞에 섰을 때에는 그는 이미 5년간 유대 총독으로 있었다. 그후 2년 뒤 벨릭스는 부패와 연루되어 로마로 소환 당했지만 그때도 팔라스의 도움으로 처형만은 면했다.  그는 차례의 결혼을 하였는데 무명시절의 첫 부인의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으며, 둘째 부인은 안토니오와 클레오파트라의 손녀였다.

 

세 번째 처 드루실라는 헤롯 안티파스의 손녀로서 헤롯 아그립바1세의 딸이다. 그녀의 부친 헤롯 아그립바 1세는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처형한 자로 후일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머리에 충이 먹어 죽었다(행12:1,23). 드루실라와 헤롯 아그립바 2세는 남매지간이다. 벨릭스는 자객을 시켜 가까운 친구도 죽이라고 명령할 있는 악독한 사람이었다.

 

총독 벨릭스의 아내 드루실라는 처음에 에메사(Emesa)의 왕인 아지주스(Azizus)와 결혼했다. 후일 그녀의 아름다움에 매료된 벨릭스는 마술사를 이용하여 드루실라를 유혹하여 빼앗았다. 이제 우리는 이 마술사에 대한 흥미로운 내용을 살펴 보자

 

흥미롭게도 22절에는 벨릭스가 이 도에 관한 것을 더 자세히 아는 고로 연기하여 가로되 천부장 루시아가 내려오거든 너희 일을 처결하리라고 기록되었다. 이 도에 관한 것을 더 자세히 알고 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대한 것을 잘 알고 있다는 말이다. 과연 총독 벨릭스는 과연 누구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도를 공부한 것일까? 여기서 우리는 벨릭스에게 드르실라를 유혹해 온 마술사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당시 이방세계에서는 마술사들이 큰 인기를 끌고 있었다. 우리는 이미 바울의 전도로 에베소에서 마술하던 사람들이 은 오만이나 되는 책을 모아 불에 태운 것을 통하여 그들의 세력이 얼마나 막강했었나를 짐작할 수 있다.

 

바울은 이번 예루살렘에 올라 오기 전 가이사랴에 사는 전도자 빌립의 집에서 여러날 묶었었다. 아마 바울은 그에게서 스데반 집사 순교 이후 일어난 초대교회의 핍박으로 사마리아 성으로 갔었을 때의 일들을 상세히 전했을 것이다.

 

이미 우리가 앞에서 살펴 바와 같이 빌립집사의 전도와 함께 나타나는 기적을 보고 수많은 사람들이 세례를 받았으며, 중에 박수 시몬 마구스(Simon Magus) 세례를 받고 빌립을 따라 다녔음을 알고 있다.

 

후일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를 방문하여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기를 기도하자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는 것을 박수 시몬이 놀라, 베드로 앞에 돈을 갖고 나와 자신에게도 능력을 달라고 주문했다. 베드로는 그의 악독함을 꾸짖어 너는 우리의 도에 관계 없다고 저주하였다. 성경학자들은 박수 시몬이 벨릭스가 부린 마술사와 동일인물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그로므로 시몬은 벨릭스에게 복음을 전한 번째 사람일 것이다.

 

또한 24절에는 드루실라를 가리켜 유대 여자라 기록하였다. 이것은 그녀가 유대인의 왕으로 책봉된 헤롯 가문의 여인으로 헤롯대왕을 따라 유대교로 개종한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경로로 하여 벨릭스는 유대인의 종교와 민족성에 대해 충분히 있었을 것이다. 

 

III. 바울의 강론

바울이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니 벨릭스가 두려워하여 대답하되 시방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 하고(25)

 

우리가 어떤 새로운 지식을 접할 때 사람들은 그 지식에 대하여 좀더 더 알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더욱이 그 지식이 종교적인 것이라 할 때 그 매력은 대단하다. 종교적인 지식들은 자신의 삶과 미래에 대한 소망들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A. 복음의 주장은 대단히 합리적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잘 아는 바울은 자신을 통하여 그리스도 예수 믿는 도를 듣고자 하는 벨릭스 부부에게 복음의 진리를 전파할 절호의 기회를 포착하였을 것이다. 이에 바울은 그에게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에 대하여 강론을 하였다. 여기서 강론이란 의에 대하여 절제에 대하여 장차 임할 심판에 대하여 성경적인 강해를 한 것을 말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보혜사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그가 너희에게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증거하실 것이라’ 말씀 하셨다. 그러므로 지금 바울은 성령에 충만함을 받아 벨릭스에게 복음의 진리를 자세히 풀어서 설명하였던 것이다.

 

B. 의에 관하여

바울은 먼저 의에 대한 바른 교리를 설명하였다. 의란 바른 삶 곧 바른 일을 말한 것으로 이 의는 복음의 토대로서 하나님의 거룩한 품성이며 그리스도인의 인격이다. 그러므로 그 성도들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 절제하여야 할 육체적 속성들이 있으며, 이로서 장차 우리에게 주어질 하늘에 속한 상급과 심판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하였을 것이다.

 

복음은 이처럼 우리에게 합리적인 방법으로 다가 온다. 그러함에도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 듣기를 주저하는 사람들을 보면 이해가 안된다. 이사야 선지자 하나님의 백성으로 의로운 생활을 하지 못하는 백성들을 향하여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라고 하셨다. 그러나 죄 가운데 사는 사람들은 합리적인 생활을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들은 절제된 생활을 하지 못하여 종래는 멸망을 당하게 된다.

 

바울은 후일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다만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롬2:4-5) 하였으며 다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롬2:26-28) 하였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의로운 삶을 위해 우선순위를 설정하셨다. 그것은 먼저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를 갖는 것이며 그 다음은 사람과의 관계인 것이다. 이것은 주께서도 말씀하신 모든 율법의 2대 강령으로서 주 여호와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며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하신 것이다. 만약 당신의 삶에 있어 하나님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다면 당신은 불의한 자인 것이며, 또한 이웃들과 바른 관계를 맺지 않고 있다면 불의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C. 절제에 관하여

절제란 본능적 욕구나 욕망을 스스로 억제하는 의지를 말한다. 이것은 죄의 속성을 갖고 태어난 인간들의 기초 본능에 속한 것으로 안목의 정욕 육체의 정욕 이승의 자랑에 속한 것이다. 이 유혹을 떨쳐 버린다는 것은 쉽지 않지만 의로운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는 가장 중요한 덕목에 속한 것이다.

 

절제는 아홉 가지 열매를 맺는 첫번째 초석이다. 바울은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이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5:22,23) 하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사랑과 희락과 화평에 대하여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성취되는 열매이다. 그 다음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야 할 열매로서 우리는 사람들에 대해 많이 참아야 하며 많이 사랑해야 하며 많이 베풀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내 안에서 먼저 충성과 온유와 절제를 이루어야 하는데 그 출발이 절제로부터 시작된다. 따라서 절제하지 못한 자는 온유하지 못하며 충성되지 못하다. 그 사람은 결국 다른 사람과의 온전한 관계를 이룰 수도 없고 더 나아가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를 이룰 수 없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내일이 없는 것처럼 절제를 하지 못하고 살고 있다. 나 역시 그런 사람 중에 하나였다. 날이 갈수록 사람들의 성정은 조급해지고 절제를 상실하고 있다. 자신의 폐에 문제가 있을 것을 알면서도 담배를 끊지 못하고 간이 망가질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술을 마신다. 또한 문란한 성관계를 통하여 나타날 질병과 성중독의 피해를 알면서도 스스로 절제를 하지 못한다. 성경은 이러한 자들에게 심판이 있을 것을 증거하여 이는 우리가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5:10) 기록하였다.

 

D. 장차 심판에 대하여

이 땅의 모든 인생은 자기가 한 일에 대하여 값을 치러야 할 날이 다가오고 있다. 전도자는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과 네 눈이 보는 대로 좇아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인하여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 하였으며 다시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전12:14) 기록하였다.

 

또한 잠언서 기자는 “내가 부를지라도 너희가 듣기 싫어하였고 내가 손을 펼지라도 돌아보는 자가 없었고 도리어 나의 모든 교훈을 멸시하며 나의 책망을 받지 아니하였은즉 너희가 재앙을 만날 때에 내가 웃을 것이며 너희에게 두려움이 임할 때에 내가 비웃으리라. 너희의 두려움이 광풍같이 임하겠고 너희의 재앙이 폭풍같이 이르겠고 너희에게 근심과 슬픔이 임하리니 그 때에 너희가 나를 부르리라 그래도 내가 대답지 아니하겠고 부지런히 나를 찾으리라 그래도 나를 만나지 못하리니 대저 너희가 지식을 미워하며 여호와 경외하기를 즐거워하지 아니하며 나의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나의 모든 책망을 업신여겼음이라 그러므로 자기 행위의 열매를 먹으며 자기 꾀에 배부르리라”(잠1:24-31) 하였다.

 

IV. 복음의 때

바울을 통하여 진리의 복음을 들은 벨릭스는 두려워서 떨었다. 그것은 스스로 자신의 죄의 막중함을 인정하는 것이다. 만약 그가 죄가 없었다면 두려워할 것도 또 떨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벨릭스는 마음을 바꾸기로 결단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가 만약 바울의 증거를 듣고 회개하고 자신의 죄를 고백하여 그리스도의 의에 이르고자 하였다면 그는 이 지구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행복한 사람으로 기억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불행하게도 그의 이름을 생명책에 기록하지 못하였다.

 

안타깝게도 그는 양심의 고통을 외면한 체 바울에게 “시방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 하고 바울을 보냈다. 그러나 그가 생각한 것처럼 자신에게 맞는 편리한 시간은 다시 오지 않았다. 이처럼 복음의 기회는 내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성령은 바람처럼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아무도 알 수 없다. 벨릭스는 자신에게 온 영생의 복을 외면하고 만 것이다. 그 이유는 바울을 대하는 그 마음에 돈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있어 돈은 그의 인생을 해결하는 신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재물은 우상숭배라 기록한 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복음을 외면하고 있다. 시방은 좀 그러니 인생을 좀더 즐기다가 내가 편한 때에 그때 믿으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안목의 정욕과 육체의 정욕과 이승의 자랑은 그를 더욱 깊은 곳으로 이끌고 갈 것이다. 그곳은 바로 다시 돌아 나올 수 없는 불타는 지옥은 것이다. 내가 생각하건 데 좀더 편리한 때에 성경의 가르침을 고려해 보고 그때에 자신의 삶을 주님께 의뢰하겠다고 계획했던 사람들 중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지옥에 있을지 궁금하다.

 

성경은 이들의 말로에 대하여 이미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른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라”(계20:12) 기록하였다.

 

사랑하는 나의 주님, 내가 이들 가운데 속하지 않음을 감사 드립니다. 그러나 아직 내가 온전한 절제를 이루지 못하여 하나님의 의에 이르지 못할까 두려우니 주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주여 나로 주의 영화로운 날을 보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