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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21:14) 주님의 뜻과 나의 뜻

이요나 2007. 2. 25. 19:33

(사도행전21:14) 주님의 뜻과 나의 뜻

 

(행21:14) 저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

 

이즈음 바울은 이미 자신 앞에 다가 올 운명을 예측하고 있었다. 이미 바울은 제자들에게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2-24) 말하였으며, 3년 동안 가르친 에베소 지역 목사들 모아 놓고 지금은 너희가 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 아노라(행20:25) 하며 복음 사역자들이 지켜야 할 마지막 권면의 메시지를 전하였다. 그리고 지금 바울은 오순절 축제에 참가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상에서 이르는 곳마다 예루살렘에서 기다리고 있는 고통과 투옥될 것이라는 성령의 경고 받고 있다.

 

I. 성령의 경고와 바울의 선택

A. 수리아 지역의 제자들의 경고

바울은 밀레도에서 에베소 지역의 목사들에게 사역적 권면을 한 후 고스섬을 떠나 로도섬으로 들어가 베니게로 들어가는 배를 타고 구브로 섬을 왼쪽에 두고 수리아를 향하여 항해하여 두로항에 닿았다. 그리고 이 지역의 제자들을 만나 그곳에서 일주일을 지냈다. 그들과 함께 지내던 중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들어 가지 말라 권하였다(4). 그러나 이미 심령에 매인 바 된 바울의 결심은 꺾을 수 없었다. 결국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바울을 위하여 주께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 뿐이었다.

 

두로항을 떠난 바울은 가이샤라에 들어 가기 위해 돌레마이항에 도착하여 형제들의 안부를 돌아 본 후 이튿날 가이샤라의 빌립집사의 집으로 들어 갔다. 빌립은 초대교회에서 선임한 일곱집사 중의 한 사람으로 지금은 전도자의 사명을 받은 사역자로 그에게는 네 명의 처녀 예언자를 두고 있었다. 바울은 이곳에서 여러날 머물면서 그동안의 일들을 나누며 서로 위로를 받았을 것이다.

 

B. 가이샤랴의 아가보 선지자의 경고

그러던 어느날 아가보라는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가이샤라에 내려와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 매고 말하여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 주리라” 예언을 하였다. 이 아가보 선지자는 이미 11장에서 ‘천하에 흉년이 들것’(행11:28)을 예언한 바 있다. 이 예언을 들은 사람들은 입을 모아 바울을 말려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 것을 권하였다.

 

그러나 이 때에도 바울은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을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13) 단호하게 자신의 결심을 굽히지 않았다. 이에 그들은 바울이 성령의 권함을 받지 않음으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기도하며 더 이상 만류하지 않았다.

 

여기서 우리는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에 대하여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주님의 뜻은 과연 무엇이었으며 바울은 왜 예언자를 통하여 전하는 성령의 메시지를 거역까지 하였는가? 이 일은 어떻게 보면 바울이 성령의 권함을 거절하는 죄를 범하는 것으로 보여지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사람의 의지는 성령의 권함을 거절할 수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어느 교파에서는 인간은 하님의 예정하심을 거절할 수 없다고 믿고 있다. 이러한 주장은 칼빈을 따르는 칼빈주의자들이 선언한 칼빈주의 5대 강령 중에 불가항력적 은혜에 속한 교리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바울이 확실하게 성령이 전하신 예언의 메시지를 거절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는 이미 앞에서 ‘내가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에 올라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한다’(행20:22) 선언한 바 있다. 그 역시도 위험이 기다리고 있는 것은 감지하고 있었으나 그의 마음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야만 하는 강한 심령에 매여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때때로 두 가지 선택의 기로에 매일 때가 있다. 특히 나는 늘 이런 일로 번민을 하게 된다. 어떤 계획을 세울 때 분명히 성령께서는 그 길을 막으시는 것 같은데 내 심령은 그것을 하지 않으면 안될만큼 강렬해질 때가 있다. 그럴 때 대부분 나는 나의 강한 열망을 선택하게 되는데 결국 그 종점에 가서야 나의 선택이 부질없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러면서도 번번히 나는 같은 실수를 범하고 있다.

 

II. 주님의 뜻에는 종종 고통을 수반한다.

A. 주님도 선택의 기로에 놓고 기도하셨다.

우리는 예수께서도 선택의 기로에 놓여 번민하셨던 것을 알고 있다. 주님은 십자가의 처형을 앞에 두고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고 기도하셨다. 아무런 답변이 없었지만 주님은 동일한 기도를 세 번이나 피와 땀을 흘리며 하셨다.

 

물론 주님은 하나님의 계획을 잘 알고 계셨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인 자신께서 사람들에게 수치와 모욕을 당하고 로마사람에게 넘겨져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하여 인류의 죄를 용하하고 주를 믿는 자들로 모두 죄사함을 얻게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구속의 사역이 하나님의 뜻인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주님은 왜 세번이나 동일한 기도를 하신 것일까? 십자가의 고통이 두려웠기 때문일까? 물론 완전한 인간의 몸을 가지셨기 때문에 그 고통도 두려우셨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아들이신 예수께서 자신이 받을 고통으로 인하여 그런 기도를 세번이나 하셨을 리는 만무하다.

 

나는 이 메시지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복음 사역을 맡은 우리가 어떤 일을 결정할 때 그 어떤 경우에 처하더라도 주의 뜻을 따르라는 것을 경계한 것이라 생각한다. 대게 인간은 자신이 져야할 십자가에 대한 두려움을 갖기 때문에 결국 자기의 뜻을 따라 가버리기 때문이다.

 

대게 주께서 우리에게 뜻하신 바는 우리가 아는바 각자에게 주신 자기의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하셨고 쟁기를 쥐고 뒤 돌아 보는 자는 나의 제자가 될 수 없다 하셨다. 그러나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다. 베드로는 우리에게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 2:21) 하였다.

 

B. 바울은 이미 자신이 져야할  십자가를 알고 있었다.

바울은 이미 자신의 앞에 놓인 십자가를 바라 보고 있었다. 그리고 예언자들을 통하여 여러 번 앞으로 당할 일들이 전달되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것을 막은 것이다. 성령이 전하신 것은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결박을 당할 것이고 그것은 바로 로마인에게 넘겨질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일과 동일한 것이다. 주님은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유대인에게 잡혀 로마인에게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실 것을 알고 계셨고 세번에 걸쳐 제자들에게 계속 메시야의 길에 대한 교육을 하셨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의 뜻대로 하여 지기를 기도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미 엄청난 고난을 받고 있었으며 최후에 받아야 할 고난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이미 그의 앞에는 사도 야고보와 스테반 잡사가 장렬한 순교를 당하였다. 그리고 다른 사도들과 같이 바울은 이방인의 구원을 위해 최종적으로 로마의 황제를 만나야 할 것을 예측하고 있었다.

 

그를 고린도후서 11장에서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나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 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맞았으며 세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니 여러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수고하여 애쓰고 여러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속에 늘리는 일이 있으니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고후11:23-28) 증언한바 있다. 그러므로 바울이 성령의 예언을 이기고 자신의 길을 가는 것은 성령을 거역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주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던지 하겠다고 기도하면서 막상 선교를 위해 어디를 가라고 하면 미국이나 카나다나 일본과 같은 살기에 편안한 곳을 선택하려 한다. 누가 중국이나 이란과 같은 복음의 사각지대를 가라고 하면 망설이며 그것은 주님의 뜻이 아니라고 말하며 여러 가지 변명들을 늘어 놓는다.

 

나는 8년 전 일본에 사명을 갖었다고 말한 목사 한 분을 일본에 파송한 일이 있었다. 그분은 일본에 들어가 교회개척을 해보지도 못하고 자신들의 딸들을 모두 공부를 시켜 성공적인 결혼을 시켰는데 그 딸들은 모두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출가를 하였다. 그리고 그는 일본인 담임 목사와 의견 충돌을 일으키고 미국행을 택하였다.

 

그 당시 나는 그에게 주께서 당신에게 일본의 사명을 주셨는데 교회를 개척해 보지도 않고 미국으로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 생각해 보라고 권하였다. 아마 그 목사님도 그 당시 두 가지 갈림길을 놓고 고민을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미국을 택하였고 그의 변명 속에는 미국에도 일본인이 있다 하였다. 그러나 그 목사님은 안타깝게도 그곳에서 1년도 못되어 중병을 얻어 목회를 하지 못하고 있다.

 

나는 그 목사님을 보며 이 일은 나를 위해 경계의 경종을 울리신 것이라 생각하고 이제부터는 어떤 일을 선택할 때 나의 유익을 택할 것인가 주의 십자가를 질 것인가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의 목전에는 지금 동성애자들과 트랜스젠더들의 문제가 놓여있는데 지금 나는 이 일을 해야할 것인지 말아야 할 것인지 두려움에 쌓여 있다.

 

C. 과거 사역자들의 성경적 증거

이러한 선택적 번민의 고통에 대하여는 구약에서도 볼 수 있다. 야곱이 요셉을 잃고 애통하던 중 그 땅에 기근이 임하여 애굽에 식량을 구하러 자식들을 보냈을 때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처해 그의 사랑하는 어린 아들 베냐민을 애굽 땅에 보내도록 강요당했을 그는 처음에 제안을 극구 반대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 사람으로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돌려보내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결단하고 베냐민을 사지로 보내게 된다.

 

또한 사무엘이 아직 아이였을 때 밤에 그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 스승인 엘리 제사장에게 달려가 저를 부르셨나이까? 하고 물었다. 이에 엘리가 대답하기를 아니다 가서 누워 자라 라고 했다. 그 밤에 이런 일이 세 번이 일어나자 엘리 제사장은 이름 부르는 소리를 듣거든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라 하였습니다.

 

그때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엘리의 집에 다가올 심판을 말씀해주셨다. 이튿날 엘리가 사무엘에게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것을 물었고 사무엘은 그에게 말하기를 두려워했으나 엘리가 사무엘에게 내게 숨기지 말고 모든 것을 말하라 그렇지 않으면 네게 저주가 임하기를 원하노라. 말하였다. 이에 어린 사무엘은 그가 주께 들은 바를 그에게 전해주었다. 그 말을 들은 엘리는 이는 여호와시니 선하신 소견대로 하실 것이니라. 하였다. 이처럼 주님의 뜻은 그 일을 맡은 사람에게 분명히 전달하시는 것이다.

 

또 우리는 다윗이 압살롬을 피하려고 예루살렘에서 도망하면서 내가 여호와 앞에서 은혜를 얻으면 도로 나를 인도하사 내게 궤와 계신 데를 보이시리라. 그러나 저가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기뻐하지 아니한다 하시면 종이 여기 있사오니 선히 여기시는 대로 내게 행하시옵소서 하리라. 고백하였다. 이와 같이 구약의 선지자들은 모두 그 모든 길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지기를 기도한 것이다.

 

III. 왜 어떤 사람들은 자신을 하나님의 뜻에 맡기기를 싫어하는가?

그 첫번째 이유는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개념과 지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북한 사람들이 잘못된 이념에 빠져 있듯이 또한 여호와의 증인을 따르는 사람들과 같이 잘못된 지식을 갖고 있는 것과 같다.

 

나는 최근 많은 동성애자들을 만나 상담을 하게 되는데 그들은 젊은시절 나와 같이 동성애는 타고난 천부적인 것이므로 절대로 벗어날 수 없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나 또한 예수를 믿고 신학을 하면서도 그들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이러한 생각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는 것이며 그 뜻을 알지 못한 이유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전달하는 성경적 지식의 부족이던가 아니면 잘못된 가르침에 중독되어 있이 때문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마치 옥에 갇힌 사람들 같아서 그들을 구원할 구원자가 필요한데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 그의 종들을 보내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가 되는 것에 순종할 것을 말씀하시며 하나님의 뜻은 그의 백성들이 바벨론에 정착하여 그곳에서 번성함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거기서 70년을 거하다가 다시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 올 것이라 전하하며 이것이 거역할 수 없는 하나님의 뜻이라 하시며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니니 재앙이 아니라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렘 29:11) 하였다.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로 경험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깨닫게 하신다. 그에 대하여 우리는 알지 못하여 불안하고 또 거부하게 되지만 하나님의 뜻은 항상 우리를 위한 계획으로 그 길만이 안전하고 평안에 이르는 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은 알 수 없지만 어떤 고난을 당할 때 우리 앞에 선 하나님의 증인들이 어떻게 하였는가를 살펴 보고 그들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가장 좋은 선택인 것이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 나로 하여 주의 진실을 알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주께서 매일 매일 말씀 속에서 나의 갈 길을 알게 하시고 주의 뜻을 성실히 알게 하시니 이제 내게 말씀하소서. 내가 주의 길을 가겠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