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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18:9,10) 광란의 도시를 향한 주님의 계획

이요나 2007. 2. 22. 16:16

(사도행전18:9,10) 광란의 도시를 향한 주님의 계획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화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아는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9,10)

 

교회성장을 꿈꾸는 종교학자들이 마게도냐 일대와 아가야 지역을 순회 하였다면 그들은 가장 부흥할 수 있는 지역으로 아데네를 선택하였을 것이다. 아데네 사람들이나 그 지역을   드나드는 외국들은 모두 새로운 종교적 뉴스에 귀를 기울이며 소일하고 살았기 때문이다(행17:21).

 

그러나 바울 일행은 철학과 종교의 도시 아데네를 떠나 그 아래 쪽에 있는 항구도시인 고린도시로 들어 왔다. 바울은 어쩌면 아데네에서 커다란 영적 충격과 함께 복음 사역자로서 처절한 한계를 느꼈을지도 모른다.

 

사실 바울은 그곳에서는 다른 지역에서와 같이 유대인의 훼방이나 박해를 받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종교성이 강한 아데네 사람들은 바울에게 새로운 것을 듣고자 선한 학자의 얼굴을 하고 다가 왔었다.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바울이 이곳에서 예수와 몸의 부활에 대하여 강론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어쩌면 바울은 종교성이 강한 아데네 사람들이기에 그들이 우상숭배와 잘못된 철학사상에서 돌이켜 천지 만물의 창조자이시며 만유의 주재이신 하나님께 돌아와 영생의 복을 얻고 또 몸의 부활에 관한 신비의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그들을 설복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아레오바오 대법원 광장에서의 열정어린 바울의 메시지는 죽은자의 부활에 관한 복음의 메시지를 듣고 바울을 기롱하며 손사래를 치며 돌아섰다. 그 순간은 바울에게 있어 심령의 굴욕을 느끼는 참담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바울은 그들 중에서 아레오바고의 직원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는 여자와 몇 사람을 얻은 것으로 만족하고 아데네를 떠나 고린도시로 내려와야 했다(행17:34).

 

I. 고린도시

이후에 바울이 아데네를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1)

 

A. 지역적 배경

그리스는 아데네와 고린도시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고린도시는 에게해와 아드리아해 사이에 길게 뻗은 지협의 넓이가 5마일도 채 되지 않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에는 동에서 서로 가는 모든 상인들은 고린도를 거쳐가야 했던 관계로 동방에서 오는 모든 화물은 에게해를 거쳐 고린도항으로 들어와 거기서 육로를 통하여 아드리아를 통하여 로마로 가는 선편에 실리게 된다. 그러므로 그들은 위험한 말래반도를 넘어 로마로 들어 가는 수백 마일의 여행을 줄일 있었다.

 

B. 고린도시의 도덕 상태.

오늘날에도 연극에서 고린도 사람으로 연출된 사람들은 항상 술취한 사람으로 등장한다. 또한 서양 사람들은 타락한 사람들을 말할 때 그는 고린도 사람과 같이 산다고 말한다. 이러한 것은 고린도시의 특별한 종교적 배경에서 비롯되었다.

 

지금도 고린도시 가장 높은 곳 아크로폴리스에는 쾌락의 여신 아프로디테신전의 유적이 남아 있다. 아프로디테신전에는 천 여명의 여사제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신전 운영비를 조달하기 위해 매일 밤 고린도 시가지로 내려와 매춘행위를 하였다. 그런 연고로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여인들에게 머리에 수건을 쓰라고 특별 주문을 한 것이다. 그 당시 창녀들은 머리에 수건을 쓰지 않고 거리를 활보하였기 때문이다.

 

C. 바울과 고린도시 

바울은 이곳에서 아시아 최상단 본도에서 태어난 유대인 아굴라와 그 부인 브리스가를 만났다. 그들은 글라우디오 황제가 로마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의 추방명령을 따라 이탈리아를 떠나 고린도로 들어 온 것이다. 브리스가라는 이름은 로마귀족의 한 지파인 것으로 보아 어쩌면 아굴라의 아내 브리스가는 로마인 여인일지도 모른다.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생업이 같으므로 함께 살며 일을 하니 그 생업은 천막을 만드는 것이더라(3)는 기록으로 보아 어쩌면 이들과의 만남은 직업적인 것과도 관계가 있을 것 같다. 원래 유대인은 자녀들에게 생업을 위해 한가지 기술을 가르치게 되는데 바울도 아버지로부터 천막을 만드는 일을 배웠던 것 같다. 이것으로 오늘날 자비량 사역자들을 가리켜 텐트 메이커라고 부르고 있다.

 

바울은 이들과 함께 일을 하며 안식일이면 회당에서 강론을 하고 유대인과 헬라인들을 권면하였다. 바울이 각지역의 회당에서 안식일에 강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유대의 가멜리아 문하의 랍비였기 때문일 것이다.

 

문제는 항상 회당을 중심으로 세력을 펼치고 있던 유대인들로부터 시작되었다. 바울은 가는 곳마다 회당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였고 그로 인하여 모세 율법을 중히 여기는 유대인들은 일제히 대적하고 일어섰다. 이것은 어쩌면 여호와의 증인들 속에 들어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창조자이시며 메시아이심을 증거하는 것과도 같을 것이다.  이로 인하여 바울은 아시아 일대에서 유럽의 관문 빌립보에 들어와 빌립보 교회를 개척하다가 옥에 갇히기도 하였으며 대살로니가에서는 야간도주를 해야만 했다. 또한 비교적 신사적이고 복음에 열정을 가진 베뢰아지역에서도 유대인의 추방을 받아 아데네로 도망을 쳐야했다. 바울이 추방당한 도시들은 모두 문명이 발달한 상업중심지였다.

 

고린도시에 자리를 편 바울은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에서 내려 오매 용기를 얻어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힘껏 증거하기 시작하였다. 이처럼 복음을 위해 목숨을 함께한 동역자가 있다는 것은 크다란 힘과 위로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예상 외로 고린도시의 유대인들은 거세게 대적해왔다. 이들은 도덕적으로 최악인 고린도시에서 생업을 하며 살아왔기 때문에 이들에게서는 하나님을 믿는 인품을 찾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가끔 술집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나 동성애자들 중에 믿는 사람들을 만날 때가 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의 언어야 고귀한 성품을 알지 못하므로 어쩔 수 없지만 이미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들 입에서 성적 표현의 말들이 거침없이 쏟아지는 것을 들을 때 정말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고 목사라는 입장이 대 놓고 면박을 주기도 쉽지 않아서 그런 날이면 심령이 상하여 잠을 이루지 못할 때가 있다. 그러니 바울이 유대인들에게서 당한 수모는 말할 것도 없었을 것이다.

 

결국 바울은 대적하며 훼방하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옷을 떨며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 갈 것이요 나는 꺄끗하니라 이 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6) 하고 회당 옆에 살고 있는 하나님을 공경하는 디도 유스도의 집으로 들어 갔다. 여기서 옷을 떨며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가리라는 것은 예수께서도 말씀하신 것으로 복음을 전함을 받지 않는 사람들의 책임을 언급한 것이다. 다시 말하여 영혼의 구원의 책임이 너희에게 있다는 말이다.

 

바울 일행이 회당 옆에 사는 디도 유스도의 집에 기거하게 되자 회당장 그리스보와 그의 가족이 주를 영접하였고 또 그를 따르는 수많은 고린도 사람들도 믿고 세례를 받았다. 일이 이쯤되자 바울은 바울은 더 이상 고린도 지역에 머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떠날 준비를 하였는지도 모른다. 그동안 여러지역을 돌며 받아 온 훼방과 핍박으로 그의 심령이 많이 상하고 용기를 상실하였을 것이다.

 

II. 밤에 바울의 환상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9)

 

A. 두려워 말라.

구약에서는 주의 사자들이 낮에 나타난 일이 많았는데 흥미롭게도 신약에는 예수께서 밤에 환상 중에 나타나실 때가 많았다. 밤에 나타난 환상은 더욱 더 선명하고 확실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바울이 마게도냐에 들어 오기 전에도 주님은 밤 중에 환상을 통하여 메시지를 전하셨다. 또한 바울이 예루살렘 옥에 갇혔을 때에도 주께서 나타나 말씀하셨으며 배를 타고 광풍을 만나 구원의 여지가 없었을 때에도 주께서 나타나 한 사람도 죽지 않을 것이라 하셨다.

 

흥미롭게도 주님은 먼저 바울에게 두려워하지 말라 하셨다. 이것으로 보아 바울은 그 심령이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별의 별 일을 다 겪으며 죽음의 풍상을 겪은 바울이 두려워 하고 있었다는 것은 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는 감옥에 갇혀 족쇄를 차고 있는 상태에서도 찬양을 불렀던 바울이 과연 무엇 때문에 두려워하고 있었을까? 싶다.

 

나는 바울이 두려워했던 것은 부도덕한 고린도시의 성정이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얼마전 나는 트랜스젠더의 생활을 정리하고 병 중에 누워 있는 한 형제를 방문하기 위해 이태원을 방문한 일이 있었다. 이야기가 늦어져 저녁 8시가 넘어서야 그 집을 나왔다. 그의 집은 이슬람사원이 있는 이태원 택사스 골목을 돌아 일명 도깨비시장이 있는 이태원과 보광동의 경계지역에 있었다.

 

그 지역에는 택시잡기도 쉽지 않고 마을버스도 드물어서 버스를 타려면 이슬람서원을 지나 이태원 택사스 골목을 통과하여 이태원시가지로 나와야만 했다. 목사가 되기 전 나는 이태원에서 십여년을 살고 있었지만 이 지역은 우범지대라서 와 본일이 없었다. 이곳을 거닐다 보면 마치 내가 중동의 어느 한 골목을 거닐고 있는 착각이 든다. 이곳에서 지나치는 사람은 한국인과 중동 사람들이 반반이기 때문이다. 또한 밤중에 이 지역에서 스치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태원 유흥가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다.

 

이들 사이로 십여분을 걸어 이태원 길에 나서자 그날은 마침 토요일이어서 거리에는 사람들로 가득찼다. 그런데 거리에 서성이고 있는 사람들의 70%이상은 모두 동성애자들로 보였다. 꺼리낌 없이 거리에서 키스를 하고 또 게이들의 전용 용어가 거침없이 거리를 지배하고 있었다. 택시를 타려고 길가에 서 있는 동안 나를 아는 듯한 트랜스들이 지나가며 내 이야기를 하며 지나갔다.

 

십여년 동안 이 거리를 활보하던 내가 마치 타락의 도시 한 중앙에 서 있는 느낌이 들면서 두려움이 솟구쳤다. 그 두려움은 무서움이 아니라 심령의 두려움이었다. 이태원 거리를 지배하고 있는 악한 영들이 한꺼번에 나를 공격하는 것과 같은 느낌이였다. 이런 일은 과거 일본 동경의 가부기죠에서도 느꼈었던 일이다.

 

거리의 사람들은 상당히 비우호적이고 음란한 얼굴로 우리를 비웃는다. 아마 이런 지역을 지나야 했던 선한 그리스도인들은 한번씩 겪어 보았을 두려움이었을 것이다. 주님은 음란의 도시 고린도를 지배하고 있던 더럽고 악한 영들의 공격으로 심령이 상한 바울을 위로하시기 위해 두려워 말라 하셨을 것이다. 여기서 겪는 두려움은 총이나 칼이나 돌의 위험과 또 다른 심령의 두려움인 것이다.

 

B.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주님은 계속하여 바울에게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하셨다. 아마 바울은 이곳에서 더 이상 복음전파의 소망을 상실한 모양이다. 밤이면 거리에 가득한 창녀들과 술취한 사람들 아마 일본 신쥬꾸나 우에노의 밤거리를 거닐어 본 사람이라면 바울의 심정을 이해할 것이다. 멀리 그곳까지 가볼 필요도 없이 토요일 저녁 이태원 소방서 사거리에 십분정도만 서 있어도 구토를 하게 될 것이다.

 

고린도시의 특성을 살핀 바울은 그래도 하나님을 섬기는 유대인들에게 소망을 걸었을 것이다. 수많은 유대인들이 고린도시의 상권을 지배하고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부를 누리고 살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울은 이 지역의 특상상 그 지역의 지배층인 유대인들을 복음화 하면 고린도시를 변화 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소망을 갖고 복음전파에 열심을 더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지역에 뿌리를 내린 유대인들은 이미 더러운 영들에 지배를 받고 살아와 거칠고 사나웠던 것이다. 혹시 여러분은 이단에 빠진 사람들과 대화를 해본 일이 있는가? 그들은 입으로는 하나님을 말하지만 그들의 마음은 더럽고 완악하여 그들과 잠깐 동안 대화를 해도 심령이 떨리게 된다.

 

따라서 바울은 더 이상 내가 필요한 곳이 아니다 하고 그 마음을 접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바울은 바울을 대적하는 유대인들에게 너희의 피는 너희 머리로 돌아 갈 것이다 나는 너희 피에 대하여 깨끗하다 이제 나는 이방인에게 돌아 갈 것이다 선포한 것이다. 그러나 타락한 영혼을 구원하지 못하고 떠나야 했던 바울의 마음은 탄식으로 가득 찼을 것이다. 그 안에서 성령께서 탄식하셨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선지자 예레미야가 하나님께서 주신 메시지를 백성들에게 전하다가 투옥된 후 다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겠다 결심을 했었던 내용을 기억할 것이다. 그러나 예레미야의 결심과는 달리 그의 가슴 속에서 주님의 말씀이 그의 골수에 불붙는 같아 억제하려 하면 할수록 답답하여 견딜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편지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그로 복음을 전하도록 강권하셨는데 이는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셨는데 죄 가운데 사는 모든 사람을 위해 죽은 것이라.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은 우리들이 다시는 우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주님을 위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었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III. 두려움에 대한 주님의 치료법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10)

 

A. 내가 너와 함께 있노라

 내가 너와 함께 있다 하신 주님의 말씀은 더 이상 다른 말이 필요 없다. 바울은 이미 그가 누구인지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여호와를 아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 기록하였다. 만약 여러분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삼성재단의 이건희 회장이 옆에 와서 내가 너와 함께 있다 한다면 당신은 더 이상 돈 문제로 근심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만약 당신이 재판을 받고 있을 때에 판사가 당신에게 와서 내가 당신 편이다하면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복음 사역자가 복음을 더 이상 전하지 못하고 심령의 압박을 박아 두려워할 때 우리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 내가 너와 함께 있다 하셨다면 모든 문제는 끝난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라고 말한 것이다.

 

바울이 이처럼 담대히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주 예수께서 우주의 창조자시며, 세상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밤에 바울을 격려하시며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히 말하라고 하셨기 때문에 이제 그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권능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와 함께 계심을 믿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두려움에 떨고 있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하나님의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말씀하셨다. 이 얼마나 든든한 말씀인가? 창조자이시며 권능자요 왕 중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데 우리에게 어떤 두려움이 있겠는가? 당신이 두려운 것은 그가 누구인지 모르거나 아니면 그의 말씀을 믿지 못하는 당신의 연약한 믿음 때문인 것이다.

 

당신은 믿음 생활 속에서 간절히 주님을 찾으며 당신의 삶과 그 처한 상황을 주님께 맡길 때 주께서 두려워 말라 라고 말씀하시는 음성을 들어 보았는가? 혹시 당신이 두려워 하고 있을 때 다윗이 시편에서 하나님께서 편이시니 내가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사람이 내게 어떻게 하겠는가? 라는 말씀을 보았다면 당신은 이미 주의 음성을 들은 것이다. 이제 당신에게 있어 필요한 것은 믿음이다. 어린 다윗이 거대한 골리앗 앞에 담대히 맞서 너는 칼과 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라고 외친 것처럼 당신은 더 이상 세상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B. 아무도 해롭게 자가 없을 것이다

주님은 바울에게 고린도시에서는 해를 받지 않을 것이라 약속하셨다. 바울은 고린도시에 사는 사악하고 거칠은 유대인들의 횡포에 공포를 느꼈을 것이다. 그는 이미 루스드라에서 돌로 맞았고, 빌립보에서 매를 맺고 감옥에 갇혔었으며 데살로니가 베레아에서 괴악한 사람들의 횡포를 경험하여 도망을 쳐야했다. 그러나 여기서 주님은 아무도 너를 해칠 자가 없다고 하셨다.

 

주님은 지금까지 아무 보호도 하지 않으셨다가 왜 고린도시에서는 그를 보호하시겠다고 했을까? 그것은 우리도 알 수 없다. 하나님의 방법은 우리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지만 그의 방법은 항상 늦지 않고 정확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주를 의뢰하고 모든 일에 있어서 주의 인도하심을 따라야 한다. 그로하여 바울은 고린도에서 더 이상 도망가지 않고 오래 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수년 전부터 한남동 지역을 떠나려 애를 썼다. 일본으로 중국으로 또 미국으로 갈 계획을 세웠으나 번번히 길이 막혔다. 내가 떠나려 했던 것은 지금의 어려운 환경이 나를 지켜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님은 내가 가려는 곳을 모두 봉쇄한 후 나로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게 하신 후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막다른 시간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내 문제를 해결해 주셨다. 그리고 지금 주님은 나에게 음란의 도시 이태원을 바라보게 하신다.

 

D. 이 도시에 내 백성이 많다

이 말씀은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기도 하다. 사실 고린도시는 예로부터 아프로티테 여신을 섬기는 우상숭배의 도시이며 밤의 환락가다. 그런데 주님은 이 성에 내 백성이 많다고 하셨다. 그렇다고 주님의 말씀은 이곳에 사는 유대인들을 가리키신 것은 아니다. 이미 유대인들은 바울을 핍박하며 위협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연고로 사실 사람의 지혜로는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은 꿈에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주님은 이곳에 내 백성이 많다 하셨다. 주님은 과연 무엇을 보고 계셨던 것인가?

 

우리는 요한복음 4장에서 사마리아 여인의 구원을 보게 된다. 제자들이 먹을 것을 구하려 동네에 들어간 사이 주님은 온전치 못한 생활환경 속에서 죽지 못해 살고 있는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고 결국 그녀는 자기 앞에 선 유대인이 예언자이시며 그리스도이심을 발견하고 사마리아 사람들 속으로 나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였다.

 

이때 먹을 것을 들고 돌아 온 제자들에게 보라 너희가 넉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요4:35) 하시며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라(요4:36) 하셨다. 이와 같이 주님은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보시며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을 행하시는 것이다.

 

아마 미국의 새들백 교회의 릭 워렌과 같은 교회성장 전문가들이 교회개척을 위해 아가야에 왔다면 아데네와 고린도 중에서 종교의 도시인 아테네를 선택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그곳에서 주님의 소망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또한 상한 심령으로 아가야의 끝자락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하려 했던 바울은 그 지역적 환경에 실망하고 마음을 접어야 했었다. 그러나 주님은 주의 무한한 은혜를 쏟아 부어 능력 있는 교회로 발전시킬 장소로 고린도를 선택하신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전혀 알 수 없다,

 

후일 바울은 고린도교회 제자들을 향하여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이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고전1:26) 말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고린도전후서를 통하여 고린도 교회에 쏟아 부으신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볼 수 있다. 주님은 유럽일대를 주의 능력으로 변화시킬 교회로 광란의 도시 고린도를 택한 것이다. 어쩌면 갈보리채플을 일으킨 척스미스 목사에게도 이런 비전을 주신 것이 아닌가 싶다. 미국의 히피들로 오늘의 갈보리채플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이태원을 바라보고 있다. 도저히 어디서부터 손을 대어야 할지 내 머리로는 아무 생각을 할 수 없다. 그러나 주님은 계속 이태원지역을 바라보게 하신다. 또한 생각지도 않았던 옛날 사람들이 계속 나 앞에 나타난다. 나는 주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지만 기다릴 뿐이다.

 

주님 감사합니다.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시니 내가 무엇을 두려워 하겠습니까? 이제 나로 무엇을 할 것인지 말씀하여 주십시요. 주께서 말씀하시면 내가 그 일을 감당하오리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