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15:15) 교리적 충돌의 원인
“이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퇴락한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이는 그 날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즉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라 함과 같으니라”(행15:15-18)
우리는 앞에서 바나바가 개척한 안디옥 교회는 바울의 동참으로 더욱 강력한 능력의 교회로서 면모를 갖추게 된 것을 보았다. 많은 예언자들과 교사들이 세워져 바울과 바나바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이방인 전도를 향하게 된다.
구브로섬을 기점으로 밤빌리아, 비시디아 안디옥 이른 바울과 바나바는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의 회당을 중심으로 유대인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였다. 결사항전을 펼치는 유대인의 대적 가운데서도 바울 일행의 복음전도는 성령의 나타나심으로 보이신 이적과 표적들로 수많은 이방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고 또한 많은 제자들을 얻게 되었다. 바울과 바나바는 다시 안디옥 교회로 돌아와 형제들에게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은혜를 전하였다.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1)
A. 유대로부터 온 형제(참조:갈2)
교리적 충돌의 발단은 예루살렘 교회의 부흥과 함께 유대교에서 전향한 유대인들이 안디옥교회에 와서 모세의 할례를 받지 않으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는 유대교의 교리를 가르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우리는 6장 7절에서 이미 초대교회의 부흥과 함께 많은 제사장들이 전향에 온 것을 알고 있으며 또한 오늘 15장 5절에도 전향한 많은 바리새인들이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원래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의 구원을 믿지도 또한 원치도 않았다. 오직 이스라엘 백성들만이 하나님으로부터 택한 바 된 민족으로 성민으로서의 자긍심을 갖고 있었다. 이런 성민의식은 모든 유대인들 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사도로 부름 받은 베드로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환상 중에서 주의 음성을 듣고 고넬료 백부장의 집에 들어가 성령이 임하심을 보기 전까지는 베드로의 마음도 굳은 바위처럼 열리지 않았었다.
여기서 우리는 사람들의 사고 의식은 자신들이 배우고 터득한 지식을 넘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지혜란 결국 자신들이 깨달은 지식의 범주 안에 있는 것이라 하겠다. 이처럼 유대인의 선민사상은 수 천년 동안 민족적 정기와 의식이 되어 모세의 율법을 통하여 유구하게 전달되어 왔다.
B. 모세의 율법과 할례
여기서 그들이 주장한 모세의 할례란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을 인치신 하나님의 은혜로서 사실 이 할례는 모세로부터 출발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이었다. 하나님은 이상 중에 하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순종하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고(창15:5,6) 그에게 영원한 기업의 언약의 증표로 ‘너희 중의 모든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창17:10) 하셨다. 이로서 누구든지 할례를 통하여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축복을 받게 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할례의 은혜를 다시 모세를 통하여 허락하셔야 했던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 들어가 400년 동안 살면서 할례의 언약을 행할 수 없었기 때문에 애굽의 종살이에서 불러내신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중보로서 율법을 주신 것이다. 후일 바울은 “아브라함에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저희로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롬4:11) 증거하였다.
II. 예루살렘 공회(6-21)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 줄을 믿노라” (행15:11)
유대인들이 안디옥 교회에 들어와 모세의 율법대로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는 주장을 하게 되자 오직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복음의 진리를 터득한 안디옥 성도들에 사이에 커다란 파장이 일어났다. 아무리 성령이 충만한 성도들이라도 유대인들의 교리를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들고 나온 것이기 때문에 그들의 증거를 무시해 버리기에는 합당한 복음의 변증이 있어야 했다.
바울과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일어나자 이방교회의 전초지인 안디옥 교회로서는 구원에 대한 복음적 교리를 확증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예언자들과 성경교사들을 많이 있던 안디옥 교회도 이처럼 교리적 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것은 참으로 흥미로운 일이다.
결국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복음의 근원지인 예루살렘의 교회로 가서 사도회의의 결론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바울과 바나바을 위시한 안디옥 교회의 대표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안디옥에서 발생한 교리적 논쟁에 대하여 변론하니 그들 중에 함께 한 바리새파 중의 믿는 사람들이 일어나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논거하였다.
여기서 왜 우리는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는가 살펴 볼 필요가 있다. 그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여 이제 하나님의 교회의 한 성도가 되었는데 왜 이들은 사도들과 다른 논리를 갖고 있었던 것일까? 이러한 일들은 아직 우리 교회 가운데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들이 예수를 믿지 않은 것도 또 구원을 받지 못한 것도 아닐 것이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결코 사도들과 함께 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초대교회와 함께 하였다는 것은 유대교를 출교 하였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 드렸다고 하여 동일한 지식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은 이미 유대인들만이 갖고 있는 성경적 지식을 갖고 있었고 오랜 세월 그 지식 가운데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그들이 확신할 수 있는 지혜를 얻기까지 논쟁은 결코 끊이지 않을 것이다. 이와 같이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인간의 지혜와 지식은 그 진리를 터득하기까지 죽음을 불사한 영적전쟁에 돌입하게 된다.
A. 베드로의 증거(택하심)
과연 이 문제는 어떻게 해결될 것인가? 6절에는 ‘사도와 장로들이 이 일을 의논하러 모여 많은 변론이 있었다’ 기록되었다. 오늘날 종교연석회의와도 같다고 하겠다. 차라리 겨란이 먼저이냐 닭이 먼저이냐 하면 그 근원을 성경에서 찾아 볼 수 있어서 좋을 것이지만 아직 복음의 진리가 문서로 기록되지 않은 시점에서 모든 해답은 성령이 주도하는 능력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으로만 가능하다.
이때 사도의 수장 베드로가 일어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저희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거하시고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사 저희나 우리나 분간치 아니하셨느니라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7-10) 하였다.
참으로 장내를 숙연케 하는 선언이 아닐 수 없다. ‘너희가 어찌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주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는 멍에를 제자들 목에 두려느냐?”는 말은 참으로 두려운 말씀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베드로는 지금 ‘너희가 도대체 누구냐?’ 하고 묻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누구를 선택하였느냐? 묻고 있는 것이다.
복음을 영접한 제사장들이나 바리새인들도 베드로의 이 말 앞에서 어떤 말을 할 수 없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반대하여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장본인들이고 주께서 생전에 부르신 제자들을 사도로 삼아 자신의 복음을 맡기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복음을 맡기시기 위해 누구를 택하셨느냐는 질문 앞에는 그 누구도 나설 수 없는 것이다. 더구나 사도들을 택하신 것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위함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택함을 받지 않은 자들이 이방인 가운데 나아가 성경을 가르치는 것조차 잘못인 것이다.
베드로는 여기서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저희에게도 성령을 주셨다’ 증거하였다. 이미 이것은 사마리아와 시리아와 안디옥을 통하여 나타난 증거인 것이다. 만약 성령을 그들에게 주시지 않았다면 이방인 가운데 복음의 역사는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에 베드로는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 줄을 믿노라” 증거하였다. 여기서 베드로는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속한 것임을 증거한 것이다.
베드로의 이 한 마디로 논쟁은 종지부를 찍고 말았다. 그들에게 불만이 있던 말던 진리는 오직 하나인 것이며 진리의 영에 의해 나타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믿는 제사장들이나 바리새인들의 출발이 사도들로부터 출발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갖고 있는 지식으로부터 출발하고자 한 것이다. 만약 그들이 회개하여 각각 침례를 받아 죄사함을 받았다면 주의 성도들과 동일하게 성령을 받았을 것이다. 또한 그들이 성령을 받았다면 진리의 영의 인도를 받아 사도들의 가르침에 순종하고 성도와 동일한 믿음을 갖었을 것이다.
B. 야고보의 논증(말씀의 화합)
그러나 아직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는 커다란 갭이 있었다.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을 표방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교적 풍습과 생활방법 그리고 언행을 갖고 있는 이방인들과 동등한 성도로서 함께 멍에를 멘다는 것은 쉽지 않은 문제였다. 이것은 오늘날 우상숭배가 생활화된 아시아나 아프리카 사람들의 생활 풍습을 받아드리는 것만큼 쉽지 않은 것이다.
이에 예루살렘 교회의 최고 지도자인 주의 형제 야고보가 일어나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저희를 권고하신 것을 시므온이 고하였으니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합하도다 기록된 바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퇴락한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여 함이라 하셨으니 즉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는 주의 말씀이라 함과 같으니라” 증거하였다.
야고보는 지금 의기 소침한 유대인들을 권면하여 베드로를 통하여 하신 말씀은 이미 주께서 선지를 통하여 하신 말씀과 동일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일으키신 것은 다윗이 소망해 온 천년왕국을 이 땅에 세우기 위한 것임을 말한 것입니다. 그로므로 주께서도 구원이 이스라엘에게 있다 하시신 것이다.
C. 풍습과 문화의 성경적 화합(거룩한 생활의 통일)
계속하여 야고보는 하나님을 믿는 유대인과 이스라엘 사람들 사이에 문제되고 있는 종교적 풍습과 생활의 벽을 무너뜨리기 위해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 오는 자들을 괴롭게 말고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메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가하니 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라”(19-21) 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은 영과 혼과 육의 문제로 발생하는 갭을 발견하게 된다. 만약 우리가 천사와 같이 영혼에 국한되어 있다면 우리의 믿음은 성령에 의하여 간단하게 하나로 통일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 사람들은 각 지역과 각 민족별로 언어와 서로 다른 종교적 풍습을 갖고 있어서 그 지식들은 생활문화가 되었다.
이미 유대인들은 율법을 통하여 하나님을 거역하는 육체의 속성을 벗어버린 생활에 익숙하였지만 이방인들은 마치 짐승들과 같이 육체의 속성을 따라 우상을 섬기고 생명의 근원인 피를 중요시 하지 않으며 저주받아 목매어 죽인 것을 가까이하는 풍습을 갖고 있으며 또 음행을 일삼았다. 이것은 모두 성경이 금한 것으로 유대인들이 미워하는 이방인들의 생활이었다. 결국 유대인과 이방인의 마찰을 없애기 위해서는 이방인의 생활이 성경의 가르침대로 돌아 와야만 했던 것이다.
III. 선교사 파송(22-29)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가한 줄 알았노니”(28)
A. 선교 사역자 인증
이로서 교회 안에 발생된 교리적 분쟁은 성령의 지혜로 완전하게 봉합되었다. 우리가 고린도전서 12장 성령은사에서 배우게 되겠지만 오늘 베드로와 야고보를 통하여 나타난 은사는 지혜의 말씀의 은사에 속한다. 지혜의 말씀의 은사는 초대교회 출발시 헬라파와 히브리파의 분쟁과 같이 교회의 파벌이 생길 때 나타난 은사이다. 이와 같이 사단은 교회 가운데 역사하여 성도들을 이간하고 분쟁케 하여 서로 하나가 되지 못하게 한다. 이것을 위해 주께서는 지혜의 말씀을 통하여 문제를 해결한 것이다.
이제 우리는 초대교회의 공식적인 선교사 파송식을 보게 된다. 예루살렘 교회는 더 이상 이방 가운데서의 분쟁의 씨를 말리기 위해 예루살렘 교회 사도회의에서 결정된 공문을 각 지역 교회에 보내기 위해 먼저 분쟁의 실마리가 된 안디옥 교회에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유다와 실라를 파송하였다. 이들은 교회의 리더(인도자)로서 예언자 중의 속한 사람들이었다.
야고보는 “들은즉 우리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시킨 것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혹하게 한다 하기로 사람을 택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인 우리의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너희에게 보내기를 일치 가결하였노라” 는 편지로 된 공문을 유다와 실라 편에 보내게 되었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과연 누가 선교사가 될 것이냐는 성경적 답변을 보게 된다. 먼저 택함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주께서 세우신 사도들의 주권 가운데 역사하신 성령의 나타남으로 말미암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여야 하는 헌신자라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B. 교회의 금기사항
또한 여기서 이방교회의 일원 된 우리는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오늘날 우리를 미혹하는 우상의 제물은 무엇이며 과연 우리는 생명의 근원인 피와 목메어 죽인 것에 해당하는 것들에 조심하며 음행을 피하고 있는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오늘날 우리 교회는 많은 축제의 제물들에 대하여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크리스마스, 부활절 그리고 바렌타인데이와 같은 날에 우리는 얼마나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가? 전도라는 미명아래 세상의 축제와 어울려 즐기려는 것은 결국 우리의 마음을 세상에 빼앗기고 마는 것이다. 또한 낙성식에 참여한 제물들을 꺼릿김 없이 먹어도 되는가? 선짓국이나 순대와 같은 우리의 음식 문화에도 조심을 하여야 할 것이다.
IV. 선교의 확장(30-41)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녀가며 교회들을 굳게 하니라”(41)
A. 재 방문의 필요성
교리적 문제의 해결로 안디옥 교회는 바울과 바나바의 가르침을 따라 평안을 되찾게 되었다. 그후 바울과 바나바는 그들이 다녀 온 이방교회의 형제들의 안부를 알기 위해 다시 방문할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 생각된다. 우리가 아무리 한 하나님, 한 주와 한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 하드라도 우리는 거리와 시간을 극복할 수 없는 한계를 갖고 있다. 우리가 얼굴을 맞대고 서로 거리와 시간을 극복하여야 하는 것은 그 속에는 늘 악한 영들이 새로운 지식들을 갖고 역사하기 때문이다.
결국 바울과 바나바는 제2차 전도여행을 계획하며 바나바는 1차 여행 때 고행의 길을 이기지 못하여 중도에서 돌아간 조카인 마가(요한)을 데리고 가자고 제안한다. 그러나 바울은 지난번의 일을 문제 삼아 마가의 동참을 거부하였다. 흥미로운 것은 이 일로 두 사람이 심히 다투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복음사역에서의 의견은 늘 마찰을 갖게 된다.
결국 바나바는 마가를 대동하고 구브로 섬으로 떠나고 바울은 실라를 택하여 시리아와 길리기아의 육로를 선택하였다. 결국 두 사도의 다툼으로 이방전도의 길은 둘로 나누어진 것이다. 우리는 때때로 이러한 일들을 많이 경험하게 된다.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을 가지고 서로 다투고 헤어지게 되는데 결국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B. 믿음의 모험
여기서 우리는 마가에 대하여 좀 살펴 보자. 마가는 바나바의 조카로 홀 어머니에게서 유복하게 자랐다. 예수님 생전 마가는 12살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그는 주께서 잡히시던 날 겟세마네 동산의 일을 목격한 증인이기도 하다. 후일 그는 삼촌을 따라 바울과 함께 전도여행을 떠나게 되나 바닷길과 산악지대를 넘나드는 이방지역의 고행을 이기지 못하고 도중에 돌아 선다.
그러나 후일 바울은 로마 황제 네로 앞에 서기 위해 구금되었을 때 디모데에게 마가를 내게 데려 오라 말한다. 바울은 저가 내게 유익하다 하였다. 아마 이때 바울은 마가를 통해서 로마인들을 위한 복음서를 쓰게 하였을 것이라 생각된다. 또한 빌레몬의 편지에서 마가를 가리켜 나의 동역자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가 문안한다고 기록하였으며 후일 베드로는 나의 아들 마가라 칭하였다. 이처럼 어린 나이에 믿음의 모험은 후일 커다란 복음의 산실이 된다.
아버지 당신의 복음을 위해 택하신 주의 종들에게 역사하신 놀라운 일들을 봅니다. 아직도 우리 가운데 역사하는 분열의 고통을 하감하시고 당신의 종들의 입을 열어 지혜의 말씀을 허락하소서. 우리가 주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때 주의 영이 우리의 마음을 열고 지혜로서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속히 우리로 하나가 되게 하소서, 예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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