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강해/사도행전강해

(사도행전14:22) 이 믿음에 거하라

이요나 2006. 12. 28. 17:19

(사도행전14:22) 이 믿음에 거하라

 

(행14:22)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오늘의 말씀의 내용은 소아시아의 중심지 이고니온에서 발생된 일이다.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른 바울과 바나바 일행은 그곳 회당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전한 후 유대인들의 대적으로 에베소에서 로마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한 교통의 요지 이고니온으로 내려왔다. 이고니온은 루스드라와 더베에 가까운 지역으로 갈라디아로 둘러 쌓인 루가오니아 주에 속한 소아시아 중심 도시로 바울의 1,2차 전도 여행의 중심지가 되었다.

 

I. 전도의 불연속성(1-7)

그 성내에 무리가 나뉘어 유대인을 좇는 자도 있고 두 사도를 좇는 자도 있는지라(4)

 

A. 표적과 기사의 나타남

이고니온에 도착한 바울과 바나바는 곧바로 유대인 회당에 들어가서 은혜의 복음을 전하였다. 흥미롭게도 복음의 현장에서 나타난 두 가지 현상은 믿는 자들과 대적하는 자들로 나누인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도 같은 복음의 속성이다.

 

3절에는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저희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거하시니 라고 기록되었다. 흥미롭게도 이제 바나바는 성경에서 사도라 칭함을 받게 된다. 이것은 성령의 은사로 주께서 복음을 위해 사도와 선지자와 복음전하는 자와 목사와 교사를 세우셨다는 말씀의 성취이기도 했다.

 

또한 흥미로운 것은 저희가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저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거하셨다 라는 기록이다. 여기서 우리는 두 사도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자신들의 능력이 아닌 주께서 주신 성령의 능력에 전적으로 의존한 것을 볼 수 있다.

 

오늘 우리는 과연 이 말씀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여야 할까? 오늘날 우리는 성령의 능력의 나타나심 가운데 주께서 자기의 은혜의 말씀을 전하게 하고 있는가? 이점은 우리가 깊이 각성하고 또 우리 자신의 사역적 역할이 어떠한가 생각해 볼 일이다.

 

B. 군중의 분열

이고니온의 회당에 들어가 은혜의 말씀을 전하자 회중들 가운데 사도들을 따르는 사람들과 구원의 복음을 대적하는 무리로 나뉘었다. 이에 유대교를 열성당원들이 일어나 사도들을 죽이려 하자 결국 두 사도와 일행들은 루가오니아의 성 루스드라와 더베의 지역으로 물러서게 되었다. 후일 바울은 그 지역 더베에서 루스두라에서 태어난 유대인 젊은 청년 디모데를 만나게 된다(행16:1). 그후 디모데는 바울의 제자가 되어 고린도와 에베소에서 사역을 하였다.

 

II. 사람의 성정(8-15)

(고전9:25)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않을 것을 얻고자 하노라

 

A.     구원받을 만한 믿음의 발견

루스드라에 머물며 복음을 전하던 바울과 바나바 일행은 날 때부터 앉은뱅이 된 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걸어 본 일이 없던 사람이다. 그가 바울이 전하는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는 것을 본 바울은 그에게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에게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명하자 그가 일어나 뛰어 걸었다. 나는 가끔 메시지를 전할 때 회중들 중에서 믿음을 발견하게 될 때가 있다. 그것은 천군만마를 얻은 것처럼 커다란 기쁨이다. 대게 그렇게 만난 사람은 믿음의 동역자가 되기도 한다.

 

B.     사람들의 신적 반응

11절에는 무리가 바울의 행한 일을 보고 루기오니아 방언으로 소리질러 이르되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 오셨다 하여 바나바는 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허메라 하더라 기록되었다.

 

여기서 쓰스란 헬라의 최고의 신 제우스를 가르치며 허메는 제우스 신의 막내 아들로 신들의 일들을 제우스에게 전하는 지식과 웅변에 능한 신을 말한다. 사람들이 바나바를 쓰스라 한 것으로 보아 바나바에게 더 관심을 갖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일이 이렇게 되자 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관을 들고 나와 무리들과 함께 두 사도를 향하여 제사를 지내려고 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신적 불가사의한 일을 접할 때 사람들의 영적 상태를 발견하게 된다. 이 일은 예루살렘 초대교회에서도 발생된 일이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 앞에 앉아 구걸하던 앉은뱅이를 일으켰을 때 사람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주목하였다. 나는 이럴 때가 사역자들에게 있어 가장 위험한 때라고 생각한다.

 

이에 바울과 바나바 두 사도는 옷을 찢고 그 무리 가운데로 뛰어들어 가서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너희에게 복음 전하는 것은 이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시고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아 오라 함이라(15) 외쳤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현상은 오직 사람들에게만 나타나는 현상이다. 짐승들은 앉은뱅이가 일어나든지 소경이 눈을 뜨던지 그 일을 행한 사람을 신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짐승은 신을 감지할 영적 인식이 없기 때문이다. 

 

C.     사역자들의 영광과 위기

바울은 먼저 자신들을 가리켜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소개하고 있다. 분명 바울을 통하여 앉은뱅이를 일으킨 능력이 나타난 것이지만 이 일은 주께서 그들의 손을 통하여 표적과 가사를 베푸신 것이다. 여기서 오늘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하여 신중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많은 사역자들이 이처럼 신적 능력을 사모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구로동의 어느 목사가 또 어느 섬의 물을 신적 능력이 있는 물이라 유포하여 메스컴을 시끄럽게 하고 있다. 수년전 이 목사는 자기 교회에 사도들과 천사들이 내려와 예배에 참관한다고 거짓을 유포하던 사람이다. 나는 왜 이 사람이 이처럼 헛된 일에 열을 올리는지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문제는 그곳에 모인 엄청난 사람들이 그 일들이 모두 신적인 능력의 나타남이라 믿고 있다는 것이다.

 

설혹 어떤 사역자를 통하여 하나님의 신적 능력이 나타났다 하드라도 우리는 절대로 동요해서는 않된다. 그것은 그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신 일을 성취하시기 위한 것이지 결코 그 사람에게 주신 영적 권세는 아닌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자신에게 나타난 신적권능을 마치 자신의 능력인 것처럼 생각하고 자랑한다면 그는 영원히 멸망을 받을 것이다. 이미 우리는 12장에서 헤롯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아 충이 먹어 죽은 사건을 알고 있다.

 

성경에는 이러한 신적 능력은 성경에 여러 번 소개되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러한 신적 권능을 나타낸 선지자들도 모두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란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도구로서 그의 손을 빌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 것일 뿐이다.

 

야고보는 우리에게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를 오지 않게 간절히 기도한즉 삼년 육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 오고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다(약5:16,17) 증거하였다.

 

사실 이스라엘의 선지자 엘리야는 아합왕과 대신들 앞에서 이세벨의 이방인 선지자 450명을 갈멜산으로 불러 그들과 신적 경합을 벌렸다. 그들은 제물을 잡고 북을치고 춤을추며 그들의 신이 내려 오기를 빌었다. 그러나 저녁이 되도록 그들의 신은 아무 반응이 없자 엘리야는 나무제단에 물을 가득붓고 하나님께서 나타나시기를 기도하였다.

 

이에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제물을 열납하셨다. 이것으로 엘리야는 이방인 선지자들을 모두 목베어 죽일 수 있었다. 그러나 엘리야는 이세벨의 협박에 두려워하여 하나님 앞에 목숨을 취해 줄 것을 호소 하기에 이른다. 이처럼 후일 하늘로 들림을 받은 엘리야도 두려움에 쌓여 우울증에 사로잡혔던 연약한 인간 중의 한 사람이었다.

 

또한 사사 기도온은 미디안 족속을 두려워하여 포도주 틀에 숨어 타작을 하던 소심하고 연약한 사람이었다. 그는 늘 하나님의 부르심 가운데서도 과연 자신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날 것인가를 시험하였다(삭6:11). 이와 같이 이 땅의 모든 인간은 다 연약한 인간일 따름이다. 이스라엘의 선지자 사무엘이나 위대한 예언자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도 모두 어미의 복중에서 지음받고 구별받은 택한 자일 뿐이다.

 

후일 바울은 자기의 연약함을 증거하여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 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처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네게 이르시되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려 하려 함이라(고후12:7-9) 증거하였다.

 

III. 바울의 증거(16-18)

(롬1:19-20)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A. 천지를 지으신 만유의 하나님

두번째로 바울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목적을 언급하여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 헛된 일을 버리라 하였다. 현대문명이 발달된 오늘날에서 무당집이나 산간 부처에게 절을 하며 또 힌두교와 같이 소를 신을 삼는 것을 볼 때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사실 우리도 모두 그러한 데 이끌려 가던 사람들 중의 하나이다. 이것은 모두 사람들의 마음을 혼란케 하여 그 영혼으로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하게 하려는 악한 영들의 역사로 말미암은 종교적 행위인 것이다. 

 

계속하여 바울은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시고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아 오라 함이라(15) 하였다. 바울은 여기서 그들이 섬기고 있는 피조물 곧 창조자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들의 헛됨을 말하고 있다. 그 물질들은 모두 우리 인간을 위해 둘러치신 환경 조건인 것이며 또한 처음부터 우리의 풍요로운 삶을 위한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의 영혼의 갈 바를 발견하지 못하여 자신의 두려움을 안식하기 위해 그 대상을 이성과 감각으로 느끼기 어려운 곳에 놓인 피조물을 자기의 신으로 삼던가 또 자신의 이상의 모양을 따라 신상을 만들기도 했다. 어쩌면 하나님과 단절된 인간이 태고로부터 가져야 하는 비극이라 할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을 증거하여 만유를 지으신 창조자이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이라 증거하였다. 살아계신다는 것은 지금도 함께 역사하신다는 것이다. 그는 하늘보좌에 앉아 계시지만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사신 하나님인 것이다. 그 하나님이 바울의 손을 빌어 앉은뱅이를 일으키신 것이다.

 

  B. 살아계신 하나님의 계시

16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족속으로 자기의 길들을 다니게 묵인하셨다 증거하였다. 여기서 묵인하셨다는 것은 방임하셨다는 말씀이기도 하다. 이것은 죄인된 인간으로 조금은 위안이 되는 말씀이기도 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어느 시대를 통해서도 사람들에게 자신을 증거하셨다는 것이다.

 

 바울은 그를 말하여 너희에게 하늘로서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너희 마음에 만족케 하셨다(17) 증거하였다. 바울의 이러한 증거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셨음을 깨닫지 못한 것은 사람이 스스로 미혹을 받았기 때문이는 메시지가 담겨 있는 것이다.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에 이른 우리에게 있다. 과연 우리는 우리 앞에 어떤 형상도 두고 있지 않으며 또 어떤 미혹을 받지 않고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다시 말하여 사람손을 통하여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 가운데 심령이 미혹되어 바울과 바나바 앞에 제물을 드리려 하지는 않는가 하는 것이다.

 

IV. 사역자의 본분(19-28)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하며 저희를 그 맡은 바 주께 부탁하고(23)

 

끝으로 우리는 19절에서 바울의 불길한 소식을 접하게 된다. 바울의 전도로 소아시아 지역의 유대교에 큰 혼란이 생기자 유대교에 비상이 걸렸다. 그로하여 안디옥과 이고니온의 유대교도들이 몰려와 바울을 돌로 친 것이다. 그들은 기절한 바울이 죽은 줄 알고 루가오니아 성밖으로 내쳐 버렸다.

 

이 내용과 관련하여 우리는 고린도후서와 갈라디아서에 특별한 내용을 접하게 된다. 흥미롭게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12장 2절에서 14년 전에 셋째 하늘로 이끌려 들어가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을 들었다고 증언하였다. 또한 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에서 십사년 후에 바나바와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는 기록을 볼 수 있다. 사실 갈라디아서는 1차 전도여행 때 소아시아 지역에서 쓴 것이다.

 

이 사건의 연대가 서로 맞던지 아니던지 어쨋던 흥미로운 것은 바울이 이 시점에 유대인돌에 맞아 죽은 것을 생각되어 성밖으로 버려졌다는 기록이다. 그러나 바울은 둘러선 제자들 사이에서 일어났고 그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복음을 전하고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았다. 이로서 1차 전도의 기틀이 놓이게 된 것이다.

 

이 때 바울은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였다 기록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이 전한 그리스도의 나라와 환난에 대한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다.

 

나는 오늘 중국 진 바울 형제에게서 이멜을 받았다. 2004년 중국 방문 중 처음으로 만난 중국인 사역자였다. 그는 지하 신학교를 운영하며 여러 개의 지하교회를 운영감독하고 있었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옥고를 여러 번 치루었으며 고문으로 손가락이 절단되기까지 하였다.

 

그곳의 중국인들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 그리스도를 사랑하여 은혜의 말씀에 갈급하고 있었다. 그들의 성경책은 책장을 넘기지 조차 힘들 정도로 낡아 있었고 그들은 진리의 말씀을 듣고자 하는 갈급함에 쌓여 있었다.

 

이러한 역경을 보며 나는 우리의 믿음 생활은 얼마나 평안한 복을 받은 것인가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바울은 제자들에게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였다. 맞아 죽을 각오로 순교자의 길을 걸어야 한다는 것이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에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셨다. 이것은 예수님의 마지막 유언이기도 하다. 여기서 증인이란 순교자를 뜻한다. 이 말씀대로 사도들은 모두 복음으로 순교를 당하였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죽음의 고통 너머에 천국이 있다는 것이다. 어차피 우리는 육체를 이겨야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환난을 자랑스럽게 권면한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이러한 믿음을 지킬 수 있을까? 그것은 금식과 기도이다. 바울은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기도하며 저희를 그 믿은 바 주께 부탁하였다 증거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교회의 지도자의 믿음의 결단을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풍족함을 외치는 우리 교회의 지도자들의 메시지와는 상반된다. 과연 우리의 믿음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오늘 우리 귀에 내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신 말씀이 메아리처오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