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20:32) 무엇이 교회를 든든히 세우는가?
(행전20:32)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입이 있게 하시리라”
바울이 에베소에 두란노 서원을 개설하고 제자들을 양성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자 그 지역을 지배하던 마술사들이 모두 변화되어 은 오만에 해당하는 마술에 관한 책들을 모두 불태우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에베소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세력을 얻게 되자 아데미 신전을 중심으로 상권을 이루고 있는 은장색 더메드리오가 직공들과 상인들을 선동하여 바울의 복음사역을 아데미 신전을 모욕한 행위로 몰고 가고자 하였다. 어쩌면 이러한 소동은 그들에게 있어서 생존권 전쟁이라고 할 수 있겠다. 민란의 조짐이 일어나자 급기야 에베소시 서기장이 나와 지혜롭게 해결하여 소요가 그쳤다. 이에 바울은 마게도냐 지역의 교회들을 둘러보고 오순절 축제에 예루살렘에 올라갈 계획을 세웠다.
바울이 석 달이나 서둘러 마게도냐 지역으로 돌아서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계획한 것은 수리아 지역의 배편을 이용할 것을 안 유대인들이 공모하여 배 안에서 바울을 바다에 던져 죽이기로 공모한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바울의 행선 예정이 결정되자 바울의 제자들 곧 베뢰아 사람 부로의 아들 소바더와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와 세군도와 더베 사람 가이오와 및 디모데와 아시아 사람 두기고와 드로비모가 먼저 드로아로 가서 바울과 의사 누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소바더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 아마 바울이 베뢰아에서 복음을 전할 때 얻은 제자였을 것이다.
바울은 그동안 마게도냐 일대와 아가야, 고린도 지역에 개척된 교회들을 돌아 보고 빌립보항에서 드로아로 들어와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제자들과 합류하여 그곳에서 일주일을 머물렀다.
7절에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다. 무교절이 지난 후 바울이 떠나기 전에 안식 후 첫날 성찬을 떼기 위해 제자들과 모여 말씀을 강론하게 되었다. 사람이 많이 모여들었는지 8절에는 윗 다락에 등불이 많이 켜졌다고 기록되었다.
밤이 깊도록 바울의 성경강해가 길어지자 창에 걸터 앉아 말씀을 듣고 있던 한 청년이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그만 삼층 누각에서 떨어져버렸다. 사람들이 달려가 살펴 보니 그는 이미 죽어 있었다. 이때 바울이 내려가 그 청년 위에 엎드려 몸을 앉으며 ‘떠들지 말라 저에게 생명이 있다’ 하니 청년이 살아나 서로 위로를 받고 날이 세도록 떡을 떼어 먹으며 이야기를 지샜다. 참으로 정겨운 교회의 모습이 아닐 수 없다.
그후 제자들은 배를 타고 앗소로 내려가고 바울은 도보로 아시아 지역 형제들을 돌아 보고 앗소에서 제자들과 만나 배를 타고 미둘레네로 가서 밀레도를 거쳐 에베소를 지나 가까운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으로 가고자 길을 재촉하였다.
III. 사역자들의 명심보감(17-38)
바울은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오게 하였다. 여기서 교회 장로들이란 에베소에서 키운 제자들로서 그 지역의 목사들을 말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비장의 메시지를 전달하게 된다.
바울은 18절에서 그들에게 “저희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 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너희 가운데서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 바니 곧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꺼리낌 없이 너희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유대인이나 헬라인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이라”(18-21) 하였다.
바울은 먼저 그곳에 이르러 첫날부터 지금까지 자신이 행한 일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이것은 바울의 사역이 시작과 끝이 한결 같았음을 의미한다. 바울은 먼저 눈물 가운데서 겸손한 섬김을 하였다고 진술하였다. 여기서 눈물로 겸손한 섬김을 하였다는 것은 복음 사역자로서 어떤 대우를 바라지 않고 스스로 생활의 고통을 감수하며 자신의 할 일을 하였음을 의미한다.
얼마 전 텔레비전 뉴스에서 필리핀에 나가 있는 선교사들의 음란하고 사치스런 생활이 보도된바 있다. 사람들은 설마하고 의심하겠지만 이러한 일은 세계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다. 선교사라고 하는 사람들이 한국에 들어와 교단과 각 교회를 돌아 후원금을 거두어 호화스런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부지 기수이다. 이들은 장차 주의 날에 자신들이 받아야 할 주의 판단을 준비하여야 할 것이다.
두번째로 바울은 유대인들의 간계를 인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겼다고 진술하였다. 이것으로 우리는 그 지역 유대인들이 정치적이든 사회적이든 어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바울을 대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그들은 제자들을 훼방하기 위하여 계속 잘못된 가르침을 유포하였을 것이다.
세번째로 바울은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 꺼림이 없이 너희에게 전하여 가르쳤다’ 하였다. 이것은 복음 사역자로서 성도들에게 오직 유익한 것이면 꺼리낌없이 가르쳐야 할 것을 말한 것이다.
여기서 유익한 것이란 믿음 생활에 도움이 되는 일들을 언급한 것으로 책망과 교훈에 관한 것이다. 어떤 사역자들은 성도들의 잘못된 생활을 보고도 묵묵히 지나쳐 버리기도 합니다. 이것은 그들로 죄의 올무에 빠지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어찌했든지 믿음생활에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꺼리낌없이 가르치는 것이 사역자의 도리인 것이다.
계속하여 바울은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증거 하였다’ 하였다. 이것은 가장 중요한 것이다. 사역자들이 축복에 관한 메시지 보다는 자신의 과오에 대하여 하나님께 대해 회개하도록 권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이제 바울은 중대한 결심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망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라노라”(22-24) 하였다.
바울은 여기서 앞으로 자신이 당할 일들에 대하여 성령의 예고를 받았고 이미 어떠한 일들이 일어 날 것을 예측했음을 언급하고 있다. 계속하여 바울은 그들에게 “보라 내가 너희 중에 왕래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 하였으나 지금은 너희가 다시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 아노라”(25) 그러므로 이것은 결국 에베소 교회를 향한 유언의 메시지인 것이다.
*이제는 제자들의 몫
이제 바울은 복음의 후계자인 그의 제자들이 행해야 할 일에 대하여 말하였다. 먼저 바울은 “내가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깨끗하다” 하며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너희에게 전하였음이라”(27) 하였습니다. 이것은 매우 두려운 말씀이기도 하다. 다시 말하여 내가 복음을 위하여 택함을 받은 너희에게 사도로서 전달할 모든 말씀을 전하였으므로 모든 사람의 구원에 대한 책임은 너희에게 달렸다고 하는 말이다.
나는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너희에게 전하였다”라는 바울의 말을 정말 좋아한다. 이 얼마나 자신만만한 태도인가? 조금도 꺼리김 없고 부족함 없는 넉넉한 사도의 태도를 볼 수 있다. 과연 나는 내가 세상을 떠날 때 나의 제자들에게 이러한 말을 할 수 있을는지 두렵기만 하다.
여기서 하나님의 뜻을 너희에게 다 전하였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말씀이다. 이것은 교회와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예정에 속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너희는 부족함이 없는 복음의 사역자로서 너희들도 꺼림없이 모든 복음을 다 전하라는 경계의 말씀이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하여 너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너희의 거룩함이라 하였으며 또한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너희를 행한 하나님의 뜻이라 하였다.
*성령의 감독자
계속하여 바울은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28) 하였다. 이것은 바울이 제자들의 사역적 책임과 의무에 대해 경계한 것이다. 여기서 바울은 먼저 그들이 성령에 의한 택하심을 받았음을 언급하였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이 세상이나 오는 세상에서도 구원함을 얻지 못할 것이라 경계하셨다. 성령은 곧 하나님의 영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이 땅에 보내심을 받은 진리의 영이시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인침을 받은 사람들의 모든 사역과 삶은 그 성령 안에서 하나님 앞에 바르게 나타나야만 한다.
여기서 ‘감독자’(스코포스)란 그 당시 로마정부에서 직할시에 파견한 행정 감독관이다. 오늘날 도지사와 같은 지위이다. 따라서 교회 지도자는 하나님의 나라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피로 사신 교회를 위해 파송된 감독관인 것이다.
바울은 후일 나타날 일들을 경계하여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좆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29,30) 하였다.
여기서 흉악한 이리란 하나님의 양떼를 먹이로 삼는 잘못된 지도자들 곧 이단들을 말하다. 오늘날 이단들을 보라. 그들은 성도를 먹이로 삼아 결국 자신들의 영광을 위해 일을 하고 있다. 그러나 더 문제는 어그러진 말로 제자들을 미혹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비록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말할 지라도 할지라도 잘못된 교리를 유포하고 혼합한 포도주를 성도들에게 마시게 하는 사람들이다.
*삼년의 필요성
이제 바울은 제자들이 복음의 사역자의 길을 지킬 수 있는 힘에 대하여 언급하여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하였다. 바울은 그들을 가르침에 밤낮으로 삼 년이 걸렸다. 이 시간은 예수께서 사도들과 함께 한 시간이기도 하다,
나는 가끔 갈보리채플에 헌신하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들을 본다, 그러나 그들은 1년이 못되어 모두 떠나가 버린다. 그들은 제자의 도에 대하여 스스로 자기 완성을 하였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주님은 제자들과 삼년을 함께 하셨는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이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였다’는 말씀을 통하여 바울이 그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기에 쉽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여 그들은 이방인의 속성과 유대인의 잘못된 가르침에 빠져 있어서 진리로의 인도함이 쉽지 않았다는 말이다.
나는 새롭게 다른 교회에서 우리 교회로 오는 형제들을 만나게 된다. 그 형제들은 이미 축복과 관련된 설교에 중독이 되어 있어서 성경 전체를 배우는 것에 익숙하지 못하다. 목사의 입에서는 자신의 생활의 축복만을 위한 예언적 선언이나 기도가 쏟아져 나오기를 바란다.
또한 잘못된 교리들에 익숙해져서 성경에 기록된 바른 교훈을 가르치는데 정말 오랜 인내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런 연고로 바울은 우리를 향하여 모든 사람에게 대하여 인내하되 믿는 가정을 위해서 더욱 인내 하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어떤 일이 있어도 목사든 바른 교훈을 가르치기를 중단해서는 아니 된다. 그것은 그 영혼의 온전한 구원을 포기하는 것과 다름없이 때문이다.
*은혜의 말씀께 부탁
32절에는 흥미로운 말씀이 기록되었다. 바울은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하였다.
이 말씀의 핵심은 거룩한 주의 백성들이 받을 하나님의 기업에 관한 중요한 말씀이다. 이것이 복음의 비밀인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를 믿으면 천당에 간다고 믿는다. 이것은 맞는 말씀이다. 믿음의 결국은 영혼의 구원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무엇 때문에 우리를 구원하신 것인가에 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주님은 분명히 이 땅에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하셨다. 그리고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 곧 천년왕국을 세우시고 우리와 함께 왕노릇하실 것을 약속하셨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기업인 것이다.
오늘날 교회들이 종말에 관한 일들과 또 교회에 있을 일들 그리고 장차 이 땅에 펼쳐질 그리스도의 나라에 대하여 가르치기를 꺼리는 것은 매우 기이한 일이다. 이것을 가르치지 않는다면 결국 복음의 결국은 무엇이며 그리스도의 은혜가 무엇인가를 상실하게 된다. 주님은 우리에게 우리가 복음으로 말미암에 세상에서 핍박을 받을 것이라 말씀하셨다. 그것은 세상이 우리로 하여 하나님의 기업을 받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어버지 하나님께 “저희를 진리로 보전하여 주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하신 것이다.
결국 믿는 사람들이 든든히 설 수 있는 것은 장래에 대한 하나님 나라의 기업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고 인내로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완성하는 것이다. 이것을 위해 필요한 것이 은혜의 말씀인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은혜에 말씀이란 종말론적인 영혼의 구원에 관한 것을 의미한다.
*주는 자의 복
계속하여 바울은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너희 아는 바에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의 쓰는 것을 당하여 너희에게 범사에 모범을 보였다”(33,34) 증거하였다. 바울은 지금 여기서 제자들의 생활 윤리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그는 삼년을 에베소에 거하며 제자들을 가르침에 있어 그와 함께 한 동역자들의 생활의 필요를 스스로 감당해 왔던 것이다. 다시 말하여 교회에 짐을 지우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한 여기서 바울이 너희에게 모본이 되었다고 한 것은 너희도 그렇게 하여야 한다는 말이다.
오늘날 우리 교회는 어떠한가? 성도가 10명이 안되어도 목사들은 책상다리를 틀어 앉고 성도들의 주머니를 쥐어 짜기 위하여 축복이라는 메시지를 날리며 때로는 성경 말씀을 들어 저주의 메시지로 협박을 하기도 한다.
바울은 자신이 보인 모범을 설명하여 “이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해야 할지니라” 하였다. 바울은 자기의 생활을 위하여 아굴라의 가족과 함께 장막을 짓는 일을 하였다. 이로서 자비량선교를 뜻하는 텐트메이커란 말이 나왔지만 우리가 자기 생활을 위해 일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처음 갈보리채플에 왔을 때 이러한 사역의 원리를 깨닫지 못하였다. 아마 미국의 갈보리채플에서 경제적인 지원을 해 줄 것이라 생각을 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나를 파송한 동경 호라이즌의 히라노 목사님이나 미국 갈보리채플의 목사들을 초청하여 집회를 부지런히 열기도 하고 그들의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은 내게 무엇을 요구하지도 않았고 또 내게 어떤 경제적인 지원을 하지도 않았다. 교회를 개척하여 오직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목회를 해야하는 것을 철칙으로 삼고 있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떤 어려운 경우에서라도 약한 자를 도와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그동안 젊은 그리스도인들의 결혼을 위해 7년 동안 정말 성심을 다해 봉사해 왔다. 내가 짐작하건데 우리 모임을 통해서 결혼한 사람들은 100명이상 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세례요한이 말한 신부를 취하는 친구의 기쁨을 충분히 알고 있다.
내가 이 사역을 주동한 이래 나는 재소자 돕기 운동을 비롯하여 우리 주변에 환난을 당하는 사람들을 위해 모금운동을 해 왔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우리 모임에서 함께 동거동락하며 결혼한 사람들의 반응이 냉담하다는 것이다. 하긴 내게 축의금을 받고도 인사조차 오지 않는 사람들에게 기대를 한 내가 잘못일 것이다.
바울은 주께서 하신 말씀을 인용하여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였다. 그렇다 남을 도울 수 있다는 것만큼 커다란 복은 없을 것이다. 나는 과거 예수를 믿으면서도 클럽을 운영하여 큰 재물을 모았었다. 나는 즐거움으로 교회에 십일조를 내고 또 선교헌금 봉투에 넉넉히 넣었다. 그 당시 내가 관리하던 헌금봉투는 5개였다. 나는 나를 축복한 목사들에게 넉넉히 사례를 하였고 매주 교회에 헌금을 하는 기쁨을 교회를 나가기도 하였다.
그런데 나는 내 주변에 어려운 사람들에게 인색하였다. 남을 위해 돈을 내어 본 기억이 하번도 없다. 능히 고아원이나 양노원 하나를 운영할 수 있는 여유가 있었는데도 말이다. 대기업처럼 전세계를 휘어잡고 있는 교회에 헌금을 하는 일에 기쁨을 삼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성도들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나는 남을 도울 수 있는 기쁨으로 살고 있다. 내가 어떤 방법으로라도 나보다 연약한 사람들을 돕는다는 것은 정말 복받을 일이다.
오늘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향한 바울의 메시지는 이 땅에 복음을 맡은 모든 지도자들에게 향하신 말씀이다. 에베소 교회는 계시록에 기록된 일곱교회의 서두에 나오는 교회로서 어쩌면 교회의 대표이며 시작과도 같다고 하겠다.
계시록에서 주님은 에베소 교회에게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emfjos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계2:2,3) 하셨다. 이와 같이 에베소 교회는 그 맡은 바 복음에 충실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에게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계2:2,4) 하셨다.
나는 여기서 그들이 상실한 처음 사랑이 무엇이었을까 생각해 본다. 어쩌면 그것은 주께서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다” 하신 주님의 말씀을 떠나 받기만 하는 교회가 된 것을 말씀하신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왜냐하면 복음서에는 그 어느 곳에도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다’ 하신 말씀이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주님 감사드립니다. 나로 하여 내가 주와 은혜의 말씀을 사모하고 있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그 말씀이 나를 지탱하사 나로 세상의 악에 물들게 하지 않으시고 나로 그리스도의 기업을 바라보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더욱이 감사할 것은 나로 약한 자들을 돌아 보도록 때를 따라 필요한 물질을 보내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주께서 말씀하신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이 있다 하신 말씀을 영원히 기억하게 하소서. 예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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