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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23:11) 나의 끝과 주님의 시작

이요나 2007. 3. 11. 19:16

(사도행전23:11) 나의 끝과 주님의 시작

 

(행23:11)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

 

우리말에 사서 고생한다는 말이 있다. 하지 않아도 될 고생을 스스로 고집을 부리다가 뻔한 고생을 겪게 될 때에 하는 말이다. 이미 주님은 바울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동족 구원을 향한 강한 열정을 품고 주께 기도할 때 환상 중에 나타나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저희는 네가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행22:18) 말씀하셨다.

 

그러나 이때 바울은 주여 내가 주 믿는 사람들을 가두고 또 각 회당에서 때리고 또 주의 증인 스테반이 피를 흘릴 적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하고 그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킨 줄 저희도 아나이다(22:19,20) 항변하였다. 이처럼 바울은 유대인들을 능히 설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주님은 바울에게 거듭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 보내리라 말씀하셨다. 주님은 그의 믿음의 확신에 동의하지 않으셨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10년이 지난 후에도 동족 구원을 향한 열망을 버리지 못하고 동역자들을 통해 여러 차례 말씀하신 성령의 경고를 무릅쓰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 온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불을 보듯이 뻔하다. 동족 구원을 향한 바울의 복음적 열정은 오히려 유대인의 정체적 자존심에 기름을 끼얹은 기폭제가 되고 말았다. 이미 그들은 자신들은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모세에게 주신 율법을 지키므로 이미 구원을 받은 민족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바울과 유대인은 하나님의 도성 예루살렘에서 동상이몽을 꿈꾸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오늘 우리가 살펴 본 내용들은 이 땅의 모든 복음 사역자들이 한번쯤은 겪게 될 일들이 아닌가 싶다. 사실 목사들이 하는 짓을 보면 정말 어처구니 없는 일들이 많다. 자신이 볼 때에는 분명 하나님께서 뜻하시는 일로서 주께서 기뻐하실 것이라는 확신에 사로잡혀 있는데 다른 사람의 눈으로 볼 때 저 목사는 왜 저 일에 저렇게 매달려 있는가 싶을 정도로 집착할 때가 있다. 사실 나 또한 때때로 김칫국을 마시며 사로잡혀 사서 고생을 하고 있다.

 

물론 결과적으로 볼 때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겪은 처절한 실패의 고통은 그의 믿음을 견고케 하는 믿음의 경륜이 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분명한 것은 바울은 주님의 미리 이르심과 미리 경계하신 성령의 지시를 넘어 스스로 주의 뜻을 성취하겠다는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겠다. 다시 말하여 겪지 않아도 될 일들을 스스로 자처한 것이다.

 

I. 예루살렘의 동상이몽

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가로되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까지 내가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하거늘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바울 곁에 섰는 사람들에게 그 입을 치라 명하니(32:1,2)

 

예루살렘에 올라 온 바울은 결국 아시아에서 올라 온 유대인들의 충동을 받은 유대인들에게 사로잡혀 모세의 율법을 훼방하고 성전을 더럽히는 자로 지목되어 몰매를 맞아 죽게 되었다. 간신히 성전 치안을 맡은 로마 군사들에 의해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자신을 변증할 기회를 얻기 위해 천부장에게 청원을 한다. 그때에도 그는 능히 유대인들을 설복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그는 떡 줄 생각도 하지 않는 사람들 앞에서 바울은 김칫국부터 마시고 있었던 것이다(행22장).

 

천부장의 배려로 유대인들 앞에 선 바울은 히브리어로 자신의 믿음을 증거하여 하나님을 향한 열정과 주의 택하심 그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부르심에 대하여 증거 하였다. 히브리어로 변증을 한다는 것은 자신이 유대인 중의 유대인임을 증거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바울이 자신의 회심의 계기를 설명하기 위해 스데반의 순교에 관한 증언을 하기에 이르자 이런 놈은 살려 둘 자가 아니다 소리치며 죽일 듯이 바울에게 달려 들었다.

 

결국 바울은 소동을 일으킨 주동자로 지목되어 예루살렘의 치안을 담당하고 있던 군사들 의해 군영으로 끌려 가 채찍질을 당하게 되었다. 이 때 바울은 채찍질 하는 군사에게 너희가 로마 사람을 죄도 정치 하지 않고 채찍질 할 수 있느냐 항변하여 이 말을 전해 들은 천부장은 그의 죄가 무엇인가를 판단하기 위해 그를 고소한 이스라엘 공회를 소집하여 심문 하기에 이르렀다(행22:24-30).

 

A. 실패를 극복하기 위한 결사적인 투쟁

바울을 심문하기 위해 소집된 예루살렘 공회 앞에 선 바울은 다시 한번 자신을 증거할 기회를 얻었다. 비록 지난 번 성난 유대인 회중들을 설복하는 데는 실패 하였지만 한 때 자신이 몸담고 섬기던 공회원들 앞에서 자신의 회심과 믿음의 열정을 증거한다면 하나님에 대한 열정과 지식을 갖고 있는 지도자들에게 회심의 기회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이처럼 바울은 어떤 일을 함에 있어 그 일이 끝을 보기 전까지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일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그러나 23장 서두에서 보는 바와 같이 바울은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헌신에 대한 증거를 제대로 시작도 해 보지 못하고 입을 얻어맞는 수모를 당하고 만다.

 

졸지에 수모를 겪은 바울은 그를 향해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네가 나를 율법대로 판단한다고 앉아서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 하느냐(3) 항변하였다. 바울은 여기서 그에게 율법 제이 강령인 형제사랑을 인용하여 그의 위선적 언행을 지적한 것이다. 이에 어떤 사람이 바울을 향하여 네가 하나님의 대제사장을 욕하느냐?고 책망하자 바울은 형제들아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 줄 알지 못하였노라 기록하였으되 너희 백성의 관원을 비방치 말라 하였느니라 답하였다.  

 

이 상황은 우리에게 두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이때 바울은 시력이 심히 나빴을 것이라 가정이다. 그 이유는 갈라디아서에서 이미 바울은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더면 너희 눈이라도 빼어 나를 주었을 것이라 역설한 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하면 공회의 조직과 서열의 위엄을 잘 아는 바울로서 자신의 입을 치라고 명령한 사람이 어떤 지위에 있을 것이라는 짐작을 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이 내용은 우리에게 어떤 충격으로 돌발적인 발언이 나왔을 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교훈을 시사하고 있다.

 

또한 흥미롭게도 바울은 여기서 서로 다른 교리를 갖고 있는 두 조직의 대립을 이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울은 위험이 처할 때마다 로마사람에게는 로마 시민권자의 지위를 유대인에게 있어서는 유대의 존경받는 율법사 가말리아 문하생이었음을 십분 이용하였다.

 

여기서 바울은 공회원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으로 구성된 것을 알고 공회원들을 향하여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을 인하여 내가 심판을 받노라고 외쳤다. 이 선언은 어떻게 보면 기회주의자처럼 보이는 항목이다.

 

바울이 이렇게 말한 것은 사두개인들이 바리새인들이 믿는 부활과 천사와 영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두 조직간에 교리적 분열을 일으켜 공회의 판결에 혼란을 일으켜 자신 처한 위험을 모면하려 한 것이다.

 

바울의 이러한 생각은 적중하여 공회 두 조직 사이에 서로 분쟁이 일어나 결국 아무런 판결도 내지 못한 채, 바울은 병사들에 의해 군영에 갇히게 되었다. 이로서 바울은 목숨은 부지하였으니 동족의 구원에 관한 그의 신념과 꿈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그리고 자신의 앞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난감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현실 속에 발생한 문제로부터 스스로 자신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인 투쟁을 하는 긴장된 바울의 모습을 보게 된다. 실라와 함께 빌립보 성의 감옥에 갇혀서 태연스럽게 하나님을 찬양하던 때와는 상당히 다른 상황이다. 그 무엇이 복음을 위해 죽음을 불사한 사도바울의 마음을 이처럼 참담케 한 것일까?  어디 그뿐인가? 자신의 생명을 지키기로 한 바울의 필사적인 항쟁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는 마치 덫에 갇힌 새가 올무를 벗어나려는 듯이 필사적이였다. 

 

바울이 군영에 갇혀 있을 때에 분노한 유대인들 사십여명이 당을 지어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아니하고 마시지도 아니하리라 맹세하고 은 바울을 죽이기로 결안 하고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고하고 꾀를 써서 바울을 더 조사할 일이 있으니 공회로 보내달라 천부장에게 청하여 도중에서 바울을 살해할 계획을 세웠다. 이 음모를 알게 된 바울의 조카가 바울에게 이 사실을 고하자 바울은 그에게 급히 천부장에게 이 사실을 알리라고 한다. 사건이 이에 이르자 천부장은 바울을 폭도들로부터 구하여 총독에게 보내기 위해 보병 이백명 마병 칠십명 창을 든 군사 이백 명의 호위를 붙여 가이사랴로 보내기에 이른다.

 

B. 절망에 빠진 사도 바울

바울은 안토니오 군영에 감금된 체 이틀을 보내야 했다. 그는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 지 전혀 예측하지 못하고 있었다. 다른 사도들을 비롯하여 예루살렘 교회도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성경은 침묵하고 있다. 다만 바울을 위하여 주의 뜻대로 되기를 기도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옥에 갇힌 바울은 완전한 실패자가 되어 심령의 고통을 받고 있었을 것이다. 성령의 경고를 무릅쓰고 자신의 고집을 피운 일에 대하여 크게 자책했을 지도 모른다. 자신의 불복종은 결국 아무 성과도 없이 이방인을 향한 복음증거의 종말을 초래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을 받은 자로서 동족인 유대인을 향한 사역을 위해 고집을 부린 자신의 교만함을 자책하였을 것이다.

 

우리는 종종 이러한 실패를 경험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실패의 잔을 마시기 전에는 결코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경은 자신의 지혜를 신뢰하지 말고 오직 주 여호와 하나님을 신뢰하라고 하였다. 그런데도 번번히 우리는 성령의 지시에 도전하고 있다. 그리고 실패를 한 후에야 코를 빠뜨리고 주님의 처분을 기다리게 된다.

 

II. 바울에게 하신 예수의 말씀

 

A. "담대하라

그날 밤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려야 하리라(11) 하셨다. 담대하라는 말씀은 바울이 사기가 꺾이어 허탈해 있다는 증거이다. 이럴 때 다른 사람이 아닌 예수께서 옆에 오셔서 담대하라 하신 것이다. 이 얼마나 큰 위로일까? 바울은 그의 발목을 붙잡고 형용할 수 없는 심령에 사로잡혀 통곡하였을 것이다.

 

성경에서 담대하라는 말씀은 여러 번 등장한다. 원어적으로 담대하라는 안심하라는 말과 같다. 주께서 가버나훔에 계실 때 네 사람이 중풍병자를 들 것에 메고 지붕을 뜯고 예수님의 발 앞에 내려놓았을 주님은 그들에게, 소자야 안심하라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막9:2) 하셨다. 또한 제자들이 풍랑에 밀려 죽게 되었을 때 예수께 물위로 걸어서 오심을 보고 유령이라고 생각하며 놀라는 그들을 향하여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하셨다. 또한 주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에 낙담한 제자들에게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였노라. 라고 하셨다. 이와 같이 주님은 두려워하고 있는 우리를 향하여 담대하라, 안심하라고 권면하신다.

 

B. "내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과 같이

또 주님은 바울이 실패했다고 여긴 예루살렘에서 복음의 증거를 인정하셨다. 우리는 바울이 성령의 말씀에 불순종한 것이기 때문에 바울의 복음 증거는 군중들에게 호응을 얻지 못한 것이라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군중들의 반응과 주께서 바울의 사역을 인정하시는 것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때때로 우리가 예수를 증거할 때 주변 사람들에게 조롱과 조소를 받게 된다. 또한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설교의 반응을 얻지 못하고 허탈해 질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나의 복음전도는 실패했다고 낙심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를 증거한 우리의 충성에 대해 상을 받게 되는 것이지 군중들에게 얼마나 많은 반응을 받았는가에 따른 것은 결코 아니다.

 

저들은 바울의 증거에 대해 대단히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그의 증거를 인정하셨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게  너희 수고가 주안에서 헛되지 아니하다. 라고 썼다. 이와 같이 우리가 주 앞에 행한 일들은 결코 헛되지 않은 것이다.

 

사실 우리는 보험 판매원처럼 임무를 맡지 않았음을 기억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주신 복음의 상품을 사람들에게 어떻게 잘 설명하였는가에 따라 보수를 받는 것이지 몇 개를 팔았는가에 따라 받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은 100명에게 증거하여 전부가 다 예수를 구주로 영접할 수도 있다. 또한 어떤 사람은 100명에게 증거하였지만 한 사람도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두 사람이 다 그들의 봉사에 따라 상을 받으려고 주님 앞에 설 때, 그 두 사람은 똑같은 상을 받게 된다. 이것이 주님의 방법이다. 주님은 포도원의 비유에서 오전에 들어 간 사람이나 오후 늦게 들어간 사람이나 똑 같은 삯을 받았다 하셨다. 그러므로 복음 사역자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데려올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들에게 모셔갈 책임이 있을 뿐이다.

 

III.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

 

A.     주님은 다음 사역을 지시하셨다.

바울은 오래 전에 자신이 로마에 가고 깊은 소원을 표현했었다. 또한 그가 이 운수가 사나운 예루살렘 여행이 시작되기도 전에 마게도니아와 아가야의 교회들을 방문했을 때 그들에게 로마에 갈 것이라고 자신의 예정을 말하며 내가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고 말했다.

 

그러나 사실 바울은 자신이 가야할 로마보다 예루살렘에 집착해 있었던 것이다. 아마 주께서 그에게 네가 로마에서도 나를 증거해야 하리라 하신 말씀으로 보아 바울은 더 이상 나아갈 용기를 상실하고 있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이 때 주께서 그에게 아직 로마에서의 일이 남아 있음을 상기시켜 주신 것이다.

 

우리는 어떤 일에 실패를 했을 때 다시는 그 쪽을 보고는 소변도 보지 않을 것이라 작정한다. 참으로 야박하고 회전속도가 빠르다. 그리고 사실 어떤 일이 있어도 그 방향은 가려하지 않는다. 나는 12년전 한국에 돌아와 내가 유흥업을 하던 이태원에 교회를 개척하고 마치 그곳을 복음화 할 것처럼 패기 있게 입성하였다.

 

그러나 나의 회심의 증거를 듣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을 줄 알았던 옛 동료들은 나를 마치 벌레 보듯이 하였다.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까지 나의 목사됨을 의심하며 조롱의 말들을 쏟아 내었다. 나는 결코 다시는 이태원지역을 돌아 보지 않을 것이라 결심하고 한남동으로 내려 왔다. 그리고 8년동안 그곳을 한번도 가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 주님은 지금까지 모든 사역에서 실패한 나에게 그곳을 돌아 보게 하신다.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담대함이다.

 

B. 주님은 상실한 우리 마음에 주의 뜻을 심기 시작하신다.

사실 바울이 로마에 올라간 것은 2년 후의 일이다. 2년 동안 바울이 어떤 일을 하게 될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주님은 바울이 로마에 가야할 것을 포기하지 않도록 소망을 심어 놓으셨다. 바로 로마에는 악마의 화신 네로 황제가 있었고 전 세계는 로마로 향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방인의 사도 바울에게 있어 로마 입성은 그의 복음사역의 최종목표인 것이다. 바울의 이번 예루살렘의 반응은 그 중요한 목표까지도 상실할 정도로 커다란 쑈크였던 것이다.  주님은 이것을 다시 깨우치신 것이다.

 

바울의 로마여행은 극도로 비참한 죄수의 몸 가게 되었다. 선장은 늦은 가을에 여행을 시작하여 겨울의 폭풍을 만나는 여행을 하는 아주 어리석은 실수를 했다. 결국 그들은 항해 중큰 폭풍을 만나서 열 나흘 간 해를 보지 못했고 풍랑에 떠밀려 갔다. 결국 그들에게는 더 이상 살아날 가망이 없었다. 이 때 바울이 일어서서 선객들에게, 안심하라,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만 파선되리라. 나의 속한 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젯밤에 내 곁에 서서 내가 가이사를 꼭 보아야 하겠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안심하라, 나는 하나님을 믿노라. 라고 말했다. 바울의 믿음은 네가 로마에서도 나를 증거하여야 하리라 하신 말씀이 바탕이 된 것이다.

 

  C. 시작과 끝은 주님께 있다

성경은 자신의 사역이 끝났다고 생각되었을 주께서 친히 나타나셔서 친히 재임명하신 일들을 증거하고 있다. 엘리야는 아합 왕 앞에서 팔백명의 이방인 제사장들을 죽이고도 아합의 처 이세벨의 협박에 떨며 주 앞에 죽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주님은 그에게 나타나 먹을 것과 물을 주시며 다시 광야로 돌아가 네가 할 일을 하라고 명령을 하셨다. 그것은 바로 후계자를 세우는 일이었다.

 

또한 베드로는 주를 부인한 주께서 다시는 자신을 신뢰하시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며 커다란 실의에 빠져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다시 바다로 고기잡이를 나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주님은 미리 떡을 구워 놓고 그를 기다리며 내 양들을 먹이라고 격려하셨다. 이 얼마나 감격스런 일들인가?

 

여기서 우리 부름받은 사역자들은 우리의 모든 사역의 시작과 끝이 주 예수 그리스도께 있음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계획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스스로 시작할 수도 없는 것이며 또 스스로 끝을 낼 수도 없는 것이다. 당신이 분명 주의 부르심을 받은 것이라면 당신이 하여야 할 모든 사역의 시작과 끝은 오직 주에게 그 주권이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은 절대로 절망해서는 않된다. 아직 우리 옆에는 우리를 부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서 계신 것이다.

 

주님! 나의 영광과 보좌되신 당신의 위대한 이름을 찬양합니다. 내 생명을 주관하시며 나의 발걸음을 세시는 주님, 이제 나로 절망의 땅에서 다시 일어 나게 하소서. 오직 주님만이 나의 힘이시며 능력이시며 시작과 끝이 되십니다. 나로 담대케 하소서. 예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