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적상담

심리이설 비판사례(2)

이요나 2007. 5. 9. 11:47

심리이설 비판사례(2)

 

질문 3: 내가 나의 내적 갈등을 심리학의 통찰로 해결할 수 있다면 얼마나 더 좋은 일인가? 그런데  왜 이것을 못하게 반대하는가? 심리학이 왜 성경에 위배된다는 말인가?

답: 하나님은 사람으로서는 헤아릴 수 없는 그의 주권으로 우리가 살면서 크고 작은 시련들을 경험하게 하신다. 어떤 사람은 어릴 때 육신적으로, 성적으로, 혹은 말로 받은 학대 때문에 깊은 정서적 문제를 갖고 산다. 그러나 문제는 그가 어디에 가서 누구에게 치유를 받느냐 하는 것이다.

성경 전체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상처를 싸매 주시고 우리를 온전케 해주시는 치유자가 되신다(시 14:1-11)고 주장하신다. 주님은 그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우리의 필요를 완전히 채워주실 수 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가 세상의 철학이나 헛된 속임수에 사로잡히지 말고 신성의 모든 충만이 되시는 그리스도의 충만 속에서 행하라고 말씀하신다.

힘을 얻고 치유를 받기 위해서 우리가 예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을 배운다면 영광을 주님께만 돌리게 된다. 그러나 치유를 받으려고 세상의 심리학을 의존한다면 주님께 동릴 영광을 심리학이 받게 만드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가 살면서 어려움을 겪게 된다는 것을 계속 반복해서 말씀하고 계시다(고후 1:9; 4:7-11; 11:23-28; 12:7-10).

그리고 성경은 성도들의 삶을 싸움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싸움이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아시고 우리의 깊은 욕구까지도 전부 채워주시는 분이심을 우리가 알기를 원하신다(벧후 1:3-4). 그러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하기 위해서 성경만으로도 충분한데 성경을 버리고 우리가 세상의 통찰에 의존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질문 4: 나의 육친의 아버지가 나를 많이 학대했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를 갖기가 매우 힘들다. 이런 경우에 심리학이 내가 어릴 때부터 억제해온 고통을 없downs다는데 왜 심리학의 도움을 받으면 안되는가?

답: 이 세상에는 완전한 육친의 아버지를 가진 사람은 없다. 이 세상에 죄가 들어온 후부터 지금까지 세상에는 악하고 학대하는 아버지가 많이 있어왔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서 알고 사랑할 수 있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성경을 통해 이미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성장하면서 배우고 갖게 된 모든 잘못된 생각들을 찾아 하나님의 진리에 부합되도록 이들을 변화시켜야 한다.

성경은 이런 변화를 위한 완전하고 충분한 방법들을 이미 우리에게 주셨으니(벧후 1:3-4; 딤후 3:16-17; 엡 4:22-29) 이런 방법들을 신실하게 행하면서 변화를 받으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정확하게 하나님과 인간의 마음을 우리에게 계시해주시고 또 문제의 근본까지도 치료해 주실 수 있다.

질문 5: 하나님을 잘 섬기려면 나는 건전한 자존심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내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려면 먼저 나 자신을 잘 사랑해야지 않겠는가?

답: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위해서도 우리는 성경을 보아야 한다. 이는 심리학에서는 정확한 대답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왜 자존심에 관해서는 성경 외의 다른 것에서는 정확한 대답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자존심을 높여야 한다는 말씀이 단 한 구절도 없다.

많은 사람들(심리이설자들)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 22:39)는 말씀을 왜곡해서 이것이 자기들의 심리학적 지혜와 똑 같다고 주장한다. 또 성경도 자기를 사랑하라고 했다고 성경을 왜곡한다. 어떤 사람은 심지어 우리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는 것을 배우기 전에는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렇게 해서 사람들을 자기 사랑으로 몰고 가려고 한다.

그러나 이 구절을 문맥 속에서 잘 보면 하나님은 사랑에는 세 가지가 아니라 두 가지의 명령을 우리에게 주셨음을 알 수 있다: 즉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다. 이웃을 사람하는 표준은 내가 이미 나를 사랑하는 만큼 이웃도 사랑하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이미 우리 자신을 많이 사랑하는 것을 아시고 계셨다. 그래서 그 만큼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신 것이다. 그러면 이 계명을 준행하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도 사람은 다 자기를 사랑한다고 이미 가정하고 남자가 자기의 부인을 사랑하는 기준으로서 이것을 사용하라고 했다. 자존심이 낮은 사람도 사람이 자기를 사랑하는 천성 때문에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려고 자기를 희생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적 사랑의 표시는 자존심이 아니라 자기 희생임을(엡 5:25; 요 13:34; 15:13; 요일 3:16) 알아야 한다.

성경은
자기사랑을 권장하지 않을 뿐 아니라 자기사랑을 강하게 반대한다. 자기사랑은 말세의 특징이 되는 끔직한 죄들 중에서 으뜸가는 죄라고 성경은 강조하고 있다(딤후 3:2-4).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려면 첫 번째 할 일이 자기를 높이지 말고 자기를 부인해야 하는 것이다(막 8:34). 사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이것을 매일 매일 경험하고 살아야 한다(눅 9:23).

성경 여러 곳에서 하나님은 우리가 겸손하고 자기를 지나치게 높이지 말고 오히려 낮추라고 말씀하고 계시다(약 4:6-10; 벧전 5:5-6). 성경에서는 한 곳에서도 인간은 매우 훌륭하고 가치가 있는 존재라는 것을 강조하는 말씀은 없다. 오히려 인간은 죄인으로 태어나고 그 죄성 때문에 모든 일에 죄만 짓고 사는 존재라고 말씀한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더 높이 생각하라고 말씀하신다(빌 2:3).

자존심을 높이는데 있어서 문제가 되는 것은 어디에다 초점을 두느냐가 문제이다. 예수님께서도 우리가 생명을 구하려면 그것을 잃을 것이고 주님과 복음을 위해서 생명을 잃으면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막 8:35).

우리가 자기에게 초점을 두는 것을 멈추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하나님의 큰 두 계명을 따르면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실 것이라고 말씀하고,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면 모든 것을 더해주실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우리가 자기 충족과 자존심만을 구하면 결국은 하나도 얻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했다.

질문 6: 그러나 아이들의 자존심을 높여주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아이들이 자신에 대해서 좋게 느껴야 모든 것에 잘 적응할 수 있지않겠는가?

답: 우리는 성경적으로 자기 희생을 하며 사랑을 보이는 것을 아이들에게 보여주어야 한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이렇게 하라고 명령하셨다(마 5:44). 그래야 주님 안에서 만족하고 보람을 느껴 주님이 주시는 그리스도의 존심을 갖게된다. 우리는 아이들을 낮추고 깎아내리는 말보다는 아이들을 권면하고 세워주는 말을 사용해 그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세워주도록 해야 한다(엡 4:29; 골 3:8). 우리는 자녀들에게 부드럽고 사랑스럽게 해주고 주님의 은혜스로운 사랑을 본으로 보여주어야 한다(엡 4:32-5:2). 그리고 우리 자신보다 자녀들을 더욱 높이 생각해주어야 한다.

그러나 이렇게 하려는 목표가 그들의 자존심을 높여주는 것이 되지 말고 그리스도를 본받고 그들로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해야한다. 우리가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것을 아이들이 볼 때 그들도 우리를 따라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의 마음으로 자기 생명을 희생할 수 있게 된다.

우리의 초점이 아이들의 자존심을 높이는 것이라면 오히려 타고난 아이들의 부패한 마음만을 권장하는 결과가 될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우리의 초점이 아이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주고 주님의 은혜 때문에 남을 섬기는 삶을 보여주는 것이 되면 그들은 더욱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을 배우게 될 것이고 그리스도의 존심(Christ-esteem)을 갖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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