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우리는 복음사역에 있어 종종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봉착하곤 한다. 대게 그 원인은 두 가지로 볼 수 있는데 그 하나는 복음의 열정이 하나님의 뜻을 떠나 자신의 고집에 빠져 있던가, 아니면 달려 나아가고자 하는 복음의 문이 굳게 닫혀 버릴 때이다. 이럴 때 우리는 많이 좌절하여 포기하게 되는데 사실 주님은 그 일을 위해 우리 안에 소원을 두고 기도하게 하신 것으로 다만 아직 주께서 예정하신 때가 이르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바울 사도의 복음의 열정은 하나님을 아는 유대인과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A. 예수 그리스도
바울은 1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라고 기록하였다. 여기서 먼저 우리는 바울이 지칭한 주인의 이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얼핏 ‘예수 그리스도’란 호칭은 예수의 이름과 성으로 착각되기도 하지만, 우리 주님의 이름은 예수로서 구원자 라는 히브리어 여호수아의 헬라어 번역이며, 그리스도는 히브리어 메시야의 헬라어 번역으로 기름부음 받은 자를 뜻한다.
우리의 이러한 해석의 근거는 이미 성경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 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저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1:20-21)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란 예수님의 직무를 수행하기 위한 호칭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종’에 해당하는 단어 헬라어 ‘둘로스’ (doulos)로서 영어의 '노예'(servant)에 해당한다. 오늘과 같이 문명이 발달한 시대에는 노예라는 단어가 어떤 신분인지 알 수 없게 되었지만 이 당시 노예란 그 주인에 속한 범위 안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존재이다. 따라서 자신의 의지와 뜻을 가질 수 없으며 오직 주인의 명령과 뜻에 복종하는 삶이 있을 뿐이며 그의 생명은 주인에 의해서 주관된다.
고대에 있어 ‘종’의 신분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비참한 위치다. 더욱이 종은 자자손손 세습되어 인간 이하의 굴욕의 인생을 살아야 했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성경에서의 종의 신분은 참으로 귀하고 위대한 존재로 부각되어 있다. 이 종의 반열은 혈육을 타고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 속에 주어진 영광의 직무로서 아브라함(창26:24)을 비롯하여 모세(민12:7), 여호수아(수24:29), 다윗(삼하7:5), 그리고 이사야(사20:3)와 같은 위대한 지도자들에게 주어진 영광의 직위였다.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이들의 삶이 어떠하였으며 이들이 어떻게 하나님께 순종하였는가를 알 수 있다.
B. 하나님의 복음
바울은 자신은 ‘사도로 부름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다’ 증거 하였다. 여기서 ‘택정함을 입었다’라는 말은 태어남으로부터 하나님의 예정을 받았다는 말이다. 이 말은 자신의 태어남이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 있다는 말이며 그 목적은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서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복음이란 단어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신약의 주제이고 또 로마서의 핵심으로 "복음" 곧 ‘유앙겔리온’이란 단어는 "복된 소식"이란 뜻이다.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은 나쁜 소식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창조이래 복음이란 말보다 더 기쁜 소식은 없다. 그 이유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대리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소식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2절에서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증거하였다. 이것은 복음의 역사를 언급한 것으로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복음은 아무런 예고도 없이 단순히 일어난 한 사건이 아니라 복음의 메시지는 선지자들을 통해 하나님에 의해 선포된 것이다. 여기서 바울이 성경이라고 언급한 것은 구약 성경을 말한 것이다.
바울은 3절과 4절에서 세상 가운데 나타난 복음의 실체를 설명하여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라’ 증거하였다. 여기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탄생과 죽으심 그리고 부활하심에 관련하여 성취된 복음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이다.
C. 사도의 직분
바울은 5절에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 증거하였다. 여기서 사도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받은 공식 직함으로 사도란 그리스어로 "아포스텔로스"(apostolos)로서 "임무를 맡겨 파송하다”는 뜻이다. 이 명칭은 예수께서 아버지로부터 받은 ‘그리스도’라는 공식 직함과 같은 맥락이다.
성경에서 바울에게 사도란 말이 또 한번 적용된 바 있다. 사도행전 15장 2절을 보면 유대에서 내려온 사람들로 인하여 이방인의 교회의 전초지 안디옥 교회는 구원에 관한 교리 충돌이 일어났다. 유대인들 중 믿는 사람들이 안디옥 교회 형제들에게 모세의 할례를 주장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그로 여 바울과 바나바가 가르친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은 은혜의 구원에 대해 확고한 교리를 확증할 필요가 있었다. 결국 안디옥 교회는 바울과 바나바를 예루살렘 사도회의에 파송하게 되었다. 이 때 사용된 말이 "아포스텔로스"(apostolos)이다.
D. 성도의 위치와 복
바울은 6절에서 “너희도 그들 중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니라” 증거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이방인을 하나님의 계획과 사랑을 알 수 있다. 원래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을 받은 것은 오직 택한 백성 이스라엘 뿐이다. 그러나 복음의 시대에 있어 이 땅의 모든 인류는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름을 받는 은혜를 입은 것이다.
바울은 이 은혜 가운데 있는 로마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7) 기원하였다.
놀랍게도 성도(Saint)들에게 준 첫 번째 명칭은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로서 이 호칭은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름 받은 모든 사람에게 주어졌다. 종종 우리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힘들 때가 있는데, 그 이유는 우리가 진실되게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진실한 사랑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랑에 대하여 이해도 하지 못하며 그로 하여 하나님의 사랑에 실감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그 증거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믿는 자들 서로를 가리켜 ‘성도’(Saint)라고 부른다.
흥미롭게도 어느 교회는 성도의 기준을 세우고 특별한 사역을 한 몇몇 사람들에게 성자(Saint)의 호칭을 붙인다. 이는 그들은 어느 누가 그의 생애 가운데서 위대한 일을 하였다고 알려져 누가 그 사람의 이름으로 기도하여 어떠한 기적이 일어나면 그 교회에서는 그를 성자(Saint)로 선택한다. 이미 하나님께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른 모든 사람들에게 성도라는 명칭을 주셨는데도 스스로 제한을 하다니 참으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그런 교회의 일원이 아닌 것이 참으로 다행스럽다.
바울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름받은 모든 성도들에게 은혜와 평강을 기원하였다. 여기서 은혜란 아무 공덕없이 받는 대가이며 평강은 성도들이 영육 간에 누리는 생명의 복으로서 이것은 때로 평안, 평화로 쓰이며 지금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영혼의 복이며 장차 그리스도의 날에 얻는 영생의 복이다.
II. 복음의 딜레마(8-17)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15)
A. 사도 바울의 고민(8-10)
바울은 8절에서 “첫째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을 인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 기록하였다. 바울이 여기서 ‘첫째’라는 수사를 부연한 것은 흥미롭다. 그 다음에 둘째와 같은 수사가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어느 것 중에서 우선을 말한 것이 아니라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논지에 강한 비중을 둔 것이라 하겠다.
바울은 먼저 로마교회 성도들의 활동적인 복음활동에 큰 찬사를 보냈다. 바울이 이처럼 그들의 믿음에 찬사를 보낸 것은 그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사실 로마교회는 이방인 사도인 바울이나 사도권의 제자들에 의해 개척된 교회가 아니다. 성경에 로마교회의 개척사에 대한 특별한 언급이 없기 때문에 로마교회가 어떻게 탄생하였는지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이방인의 사도 된 바울이 로마에 첫발을 디딘 것은 가이샤에게 재판을 받기 위한 죄수의 신분이었다(행28장 참조).
그러면 로마교회는 언제 누구에 의해서 개척되었던 것일까? 이에 대한 대답을 우리는 사도행전 2장에서 그 가능성을 발견하게 된다. 사도행전 2장 10절에는 성령강림과 관련하여 오순절 축제에 참가하기 위해 세계 각처 15개 국가에 흩어진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 온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여기서 우리는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라는 기록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사도행전을 통해 오순절 성령강림의 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체험한 유대인들과 유대교에 입문한 이방인들 중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회심하여 제자가 된 사람들이 삼천이나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어쩌면 이들 중 로마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돌아가 로마교회를 개척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또한 에베소나 고린도지역에서 로마로 유입된 그리스도인들이 합세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개척된 로마교회의 복음활동은 로마의 입지적인 특성을 따라 전세계로 확장되어 나갔을 것이다.
바울은 9절에서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라고 고백하였다. 이 고백 속에서 우리는 오직 하나님께만 고백할 수 밖에 없었던 바울의 애타는 마음을 엿볼 수 있다. 더욱이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라는 말은 그 무엇인가 보이지 않는 어떤 형태를 우리에게 전해 주고 있는 것 같다. 이처럼 바울이 로마교회를 위해 하나님께 절박하게 기도해야만 했던 이유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만약 외국에 나가 있는 당신의 자녀들이 성경이 가르치는 온전한 믿음생활의 범위에서 벗어난 교회생활 가운데 있다고 할 때 당신의 마음은 어떻겠는가? 더욱이 자신들이 믿고 있는 그 믿음의 실체가 진리를 떠나 왜곡된 것이라 할 때 자녀가 있는 곳으로 가지 못하는 당신은 어떤 심령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게 될 것인가?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어느 교회의 왕성한 믿음활동이 전세계로 확장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그들이 전하는 믿음의 실체가 온전한 복음의 지식에 이르지 못한 것이라면 이것은 오히려 더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들의 입을 통해서 전달된 복음의 실체는 그들의 입술을 타고 계속 왜곡될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것이 바울의 걱정이었고 또 오늘날 우리 교회가 안고 있는 복음의 딜레마인 것이다.
나는 수년동안 일본에서 생활한 일이 있었다. 그 당시 나는 한국에서 가장 유명하게 활동하는 어느 교단에 속한 성도로서 나는 그 당시 내가 갖고 있는 믿음이 가장 절대적이고 완전한 복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한 생각은 나뿐이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그 속에 속한 모든 성도들의 공통된 생각이다. 이것은 어쩌면 사회주의 국가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이념이 가장 옳다고 생각하는 것과도 같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들이 진정한 자유를 알게 될 때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사실 진리의 가르침을 벗어난 왜곡된 믿음은 그 사람이 성경에 기록된 진리를 발견하기까지는 헤어나지 못하는 철의 장막과도 같다. 이로서 이단들이 막강한 세력을 갖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자신을 믿는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1,32) 하셨다. 이처럼 우리 가운데는 주 예수를 믿으면서도 또 다른 교리를 믿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가 로마서에서 많은 교리적 교훈을 발견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이다. 바울은 로마서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성도의 믿음의 관계를 아주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사도행전을 통하여 교회를 개척의 기초와 그 모델을 살펴 본 성도들은 필히 로마서를 공부해야 할 것이다. 이로서 우리의 믿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근거하게 되기 때문이다.
바울은 10절에서 이방인 복음의 책임을 가진 사도로서의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며 “어떠하던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하였다. 나는 오늘 다시 로마서를 살펴 보면서 바울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이해 할 것 같다. 내가 지금 이러한 마음을 갖게 된 것은 오늘날 잘못된 방향에서 열심을 다하는 한국교회의 안타까운 현실 때문이 아닐까 싶다.
B. 로마교회의 딜레마(11-17)
그러면 바울이 이처럼 노심초사하는 로마교회의 문제점은 무엇이었을까? 이제 우리는 로마교회의 문제점을 살펴 보도록 하자. 먼저 바울은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 함이니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을 인하여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하였다. 이 말 속에는 우리는 로마교회 성도들을 사랑하는 사도 바울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멀리 있는 자식에게 믿음생활에 가장 중요하고 필요한 것을 쏟아 부어 주고자 하는 부모의 진실한 사랑이 넘쳐 흐르고 있다.
1. 신령한 은사
바울은 먼저 ‘신령한 은사’를 말하고 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한 ‘신령한 은사’는 다름 아닌 ‘영적 선물’로서 성령세례를 통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성령의 선물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에서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는 내가 너희의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기록하였고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엡4:8) 증거하였으며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 온다”(약1:17) 하였다.
바울은 신령한 은사를 나눠주려는 의도는 로마교회를 견고히 하기 위함이라 하였다. 견고함이란 성도의 굳건한 신앙의 자세를 말한다. 아들이 세상을 살아가기에 부족함는 지식과 지혜와 총명함을 갖추었다면 그를 보는 부모의 마음은 든든할 것이다. 그러나 연약한 아들을 보는 부모는 아들의 굳건히 세우기 위해 노심초사 할 것이다.
바울은 이미 “내 말과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2:4,5) 하였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주님은 우리에게 성령의 선물을 주신 것이다(엡4:12).
그러므로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성도의 믿음과 신령한 은사는 결코 분리할 수 없는 원초적인 관계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로마교회는 그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었는데도 그들에게 영적 은사가 없었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 하다.
계속하여 바울은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을 인하여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12b) 하였다. 이 부분은 “곧 너희와 나 사이의 공통된 믿음으로 내가 너희와 함께 위로를 받고자 함이라” 번역된 킹제임스 성경이 이해하기 쉽다. 우리가 외국에 나아가 한국사람을 만나면 서로 위로를 받는다. 그것은 우리의 말이 같고 또 풍습과 문화가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같은 동족이라도 서로 이념이 다르면 그 사이에는 냉전이 흐르고 곧 전쟁이 일어난다.
성도들이 서로 공통된 믿음을 갖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 나는 가끔 다른 교단 목사들과 성경의 특정한 교리에 관한 지식을 나눌 때가 있다. 목사들은 성령론이든 구원론이든 또 종말에 관한 일들에 서로 자기 교단의 교리를 피력하기에 한치의 양보도 없다. 이럴 때 나는 정말 마음이 상하게 된다. 너무 답답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갈보리채플 목사들과 만나 서로가 깨달은 바 은혜의 말씀을 나눌 때면 돌아가신 부모를 만난 것처럼 위안을 받게 된다.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바울이 여기서 로마교회에 발생된 근본적인 문제점을 언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바로 로마교회가 사도들의 전도로 출발하지 않은 것을 말한 것이다. 로마교회의 믿음이 전세계로 전파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믿음의 실체는 사도들에게 주신 성령의 선물로 출발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었으나 복음의 진리가 그들 안에서 역사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 당시는 지금과 달리 사도들을 통한 복음의 진리가 완성되지 않은 때라는 것이다. 신약은 쓰여지고 있었고 복음의 진리는 세우신 사도들의 권세 속에서 나타난 성령의 선물 가운데 세움을 받은 복음의 일군을 통하여 전달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들을 통하지 않고서는 바른 진리의 복음을 터득할 수도 없고 그 가운데 역사하는 성령의 능력이 없이는 깨달을 수도 없었던 것이다.
2. 열매를 맺지 못함
바울은 13절에서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막혔도다” 하였다. 여기서 바울이 말한 열매란 사역적 열매 즉 교회를 통해 나타난 성령의 열매를 의미한다. 이미 바울이 전도한 곳에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세워져 성령의 열매가 맺고 있었다. 그러나 로마교회를 통하여 전세계 가운데로 전파되고 있는 믿음의 실체는 성령의 열매가 아니었던 것이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요15:8) 하셨고 다시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요15:16)하셨다. 이것은 오직 주께서 택하신 제자들에게 주신 권세이며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조직도인 것이다.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로마교회를 향한 바울의 안타까움을 읽을 수 있다. 더욱이 로마 시민권으로 전세계에 미치는 로마의 입지적 영향을 익히 알 알고 있는 바울로서는 속히 로마교회로 가서 그들에게 성령의 은사를 나누어 주어 견고한 교회의 모델을 세우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애타는 마음과는 달리 로마의 길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던 것이다.
15장과 16장의 기록을 보아 이 편지는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있을 때 쓴 것이라 생각된다. 이 편지의 분량을 생각할 때 손으로 기록해야 하는 그 당시로서는 상당한 분량이다. 따라서 이 편지는 하루이틀에 기록한 것이 아니라 바울이 데살로니가 아가야 고린도일대에서 사역하는 동안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기록한 것이라 생각된다.
C. 복음의 실체 정의
바울은 14절에서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선언하였다. 여기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보편성을 언급하고 있다. 특별히 바울이 헬라인과 야만인 그리고 지혜자나 어리석은 자를 대조 시키고 있는 것은 그 당시는 헬라 말을 하지 못하는 비지식층에 속하지 못한 사람들을 야만인으로 여겼으며 세상은 지혜자와 어리석은 자로 나뉘어 졌다. 다시 말하여 세상이 철학과 학문에 의해 상류층과 하급인생으로 나누어진 것이다.
1. 복음으로의 평등
특별히 바울이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이 말을 한 것은 복음을 전파하지 못함으로 인종차별을 이룬 헬라의 귀족문화를 바로 잡지 못한 사도의 책임을 피력한 것이라 하겠다. 바울은 이미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3:28) 선언하였다. 이것이 복음이 전파된 곳에 나타나는 복음의 능력인 것이다. 이와 같이 복음은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하나가 되게 한다. 이에 바울은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15) 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의 의도를 분명하게 알게 된다. 이미 로마에 교회가 서고 그들의 믿음이 온 세상에 전해졌음에도 바울이 로마의 성도들에게 복음을 전하기를 원한다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바울은 로마교회의 믿음의 실체에 대하여 회의를 품고 있는 것이다. 과연 로마교회는 무엇을 믿고 있었던 것이며 어떤 믿음생활을 하고 있었기에 바울이 이런 말을 내비친 것일까?
2. 복음의 능력
계속하여 바울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16) 하였다. 바울의 말은 점점 강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로마교회의 믿음생활 속에 나타난 부끄러운 모습을 보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바울은 반어법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말 속에 뼈 있는 말을 내포하고 있다.
우리가 서간문을 읽을 때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은 편지 속에서 글 쓴 이의 마음을 읽는 것이다. 로마서 1장의 전후 문맥을 살펴볼 때, 바울은 지금 온전한 복음의 지식을 터득하지 못한 체 로마의 귀족문화에 편승되어 머리만 커진 자식을 대하는 것과 같은 심정이 틀림없다. 아마 미국이나 유럽에 유학간 자식이 바람직하지 못한 생활을 할 때 부모의 마음도 이와 같을 것이다. 로마교회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도로서 무엇인가 합당치 못한 모습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더욱이 바울이 언급한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는 말에서 우리는 복음의 실체인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대한 의구심을 느끼게 된다. 과연 그들의 믿음의 실체는 무엇이었기에 바울이 이런 말을 하였던 것일까? 또한 바울이 거듭하여 ‘첫째는 유대인이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라 말 속에서 로마교회 성도의 분포와 그들 가운데 나타난 어떤 차별적인 구조가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3. 믿음의 실체
바울의 의도는 17절에서 더욱 확실해진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과연 로마교회 성도들에게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던 것인가? 그러하여 그들은 오직 믿음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표상이 된 것인가? 어쩌면 이것은 오늘 당신과 나를 향한 메시지가 아닌가 싶다. 과연 주를 믿는 나의 생활 가운데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고 있는 것인가? (불행하게도 목사인 나는 확신있는 대답을 하지 못한다)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게 한다’는 뜻은 무엇일까? 영어성경은 'FAITH FROM FIRST TO LAST"(NIV) 라 기록하였고 킹제임스 성경은 ‘믿음에서 믿음까지 계시되어 있다’고 기록되었다. 문법상 ‘~에서’, ‘~까지’는 시작으로부터 종결을 이루는 과정을 의도한다. 그런 의미에서 복음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시작과 완성을 이루는 게시라 하겠다.
또한 우리가 보편적으로 말하는 믿음은 우리 안에 발생된 신적인 요소 곧 영어의 ' FAITH' 를 뜻한다. 그러나 믿음은 그 대상과의 상대적 관계라고 할 때 ‘TRUST’라는 불변의 관계가 유지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적인 요소로 출발한 믿음(Faith)은 불변의 관계인 믿음(Trust)이라야 할 것이다. 나는 이것이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로마교회의 성도들의 믿음의 실체 곧 그들의 믿음생활의 상태를 점검해 볼 수 있다. 사실상 그들이 자랑하는 믿음이란 복음의 실체가 들어 나지 않아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고 또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지 않아 실상은 부끄럽기 짝이 없는 믿음생활이었던 것이다. 신령한 은사도 없고 견고하지도 못하며, 스승과 제자의 안위함도 없으며 열매 또한 맺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의 믿음은 계속 전세계 가운데 퍼져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로마교회의 딜레마였으며 바울의 딜레마였던 것이다. 믿음이라는 포장 속에 사단이 춤을 추고 있었던 것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실로 할말을 상실하고 있다. 2000년 전 바울이 기록한 로마서를 보고 있는 우리의 모습 속에서 로마교회의 딜레마를 보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서른 살에 예수를 믿어 정말 내 인생에 가장 복된 날을 맞이하였다. 내 영혼은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 가운데 평안을 맛보고 있었으며 나는 사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바 되고 내 영혼은 다시 살아나 천국을 살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 속에 기록된 이상의 세계였을 뿐이지 내 생활은 축복이라는 미명아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세상을 달려가고 있었다. 거듭난 내 영은 복음의 계시를 만나지 못하여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지 못한 채, 내 생각과 육체가 이끄는 대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 세월 속에서 내 영혼은 위로를 얻지 못하고 통곡을 하고 있었다.
III. 하나님의 진노(18-23)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18)
바울은 18절로부터 말의 방향을 바꾸고 있다. 지금까지는 로마교회 성도들을 향한 메시지였는데 이제부터는 ‘저희’라는 인칭대명사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에 대해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A. 경건과 불의
바울은 로마서 1장에서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롬1:18,19) 기록하였다. 여기서 ‘하나님의 진노’란 종말론적 사상으로, 주의 오심으로부터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이르기까지 생존했던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종말론적 사상이다. 이미 성경은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해 머물러 있느니라”(요3:36) 기록하였고 또한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를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엡5:6) 기록하였다. 이 두 말씀을 보건데 하나님의 진노에서 자유로울 사람은 많이 않을 것 같다.(이 부분은 2장에서 다루게 된다)
흥미롭게도 바울은 ‘하나님의 진노’에 앞서 로마서 1장 16절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강조하였으며, 17절에서는 ‘하나님의 의’를 강조하였다. 이는 매우 흥미로운 구조로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체험한 사람들의 삶의 과정과 그 결과를 언급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의 속성을 말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나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는 말을 하면서도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것은 자기와 관계없는 것으로 치부하려 한다. 사람이 이러한 믿음을 갖는 것은 매우 바람직하지만, 성경은 계시록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음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여기서 바울이 말한 경건이란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하며 불의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뜻한다. 또한 진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주께서 계획하신 뜻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사람들이 마땅히 지켜야 할 삶의 원리로서 첫째는 하나님과의 관계이며 또한 사람과의 관계이다. 이를 위하여 하나님은 모세에게 두 돌판을 주셨는데, 첫째 돌판에는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루고, 두 번째 돌판은 사람과 그 이웃과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두 개의 돌판은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서로 뗄 수 없는 하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갖고 있다면 이웃과도 좋은 관계를 갖고 있을 것이며 만약 당신이 이웃과 옳지 못하다면 당신은 하나님과도 좋은 관계를 갖지 못한 것이 된다.
예수께서도 이를 말씀하여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7-40) 하셨다. 그러므로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당신은 역시 당신의 불우한 이웃을 사랑할 것이며, 만약 네 이웃의 고난을 돌아보지 않았다면 당신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이웃에 대한 불의를 행하고 있다. 이것은 곧 하나님의 진리를 막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그들은 자신이 하나님을 믿으니 괜찮다고 생각하겠지만 마귀도 하나님을 믿고 떨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요구는 당신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진리를 행하므로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다.
l 죄와 인간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이는 하나님께서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19-20) 기록한 대목이다. 창조로부터 하나님의 임재하심은 우주적으로 증명되었다. 그 분의 만드신 모든 피조물은 그 자신들에게 명백하게 드러난다. 하나님을 부정하거나 또는 무지한 자들이라 할지라도 이 사실만큼은 부정할 수 없다. 이는 자기를 낳은 부모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과 같다고 하겠다.
이에 바울은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다’(롬1:21) 증거하였다. 여기서 바울은 누구를 고소한 것일까? 이들은 바로 믿는 우리를 포함한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다. 바울은 이미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다”(엡2:3) 증거하였다.
우리의 삶의 돌이켜 볼 때 우리가 얼마나 많은 날을 하나님께 영광 돌리지 못하였으며, 얼마나 많은 날을 우리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하나님을 설득하고 있었는가 생각해 보자.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도, 바울도 주님의 뜻이 무엇인가 살펴 보기에 앞서 주님을 설득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사실 이런 일들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지 못하는 인간의 속성 중 하나이다. 이와 같이 인간은 하나님을 설득하려 하고 창조자를 인간의 수준으로 끌어 내리려 한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과연 누가 우리를 지으신 창조자 하나님보다 우리와 또 우리가 해야 할 일에 대하여 잘 알고 있단 말인가?
그러함에도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치도 아니하고’(21b) 않는다는 것 그 자체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성도들에게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8) 명하였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그에 의해서 창조되었고, 또 우리의 인생이 그의 뜻 가운데 있어 우리의 삶의 모든 일들이 하나님에 의해 작정되었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에게 아버지의 사랑에 기뻐할 줄 모르는 아들이 있다 하자. 아들을 사랑하여 새 구두를 선물하였는데, "아빠! 이게 내 바지와 어울린다고 생각하세요?" 말한다면 당신 기분은 어떻겠는가?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주신 은혜에 대하여 못마땅히 여긴 일은 없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안타깝게도 창조이래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는 진리에 초점을 맞추지 못하였다. 그 결과에 대하여 성경은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의 형상으로 바꾸었다”(21b-23) 기록하였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은 그 마음과 지혜가 어두워져 세상의 허망한 것에 사로잡혀 사람과 짐승의 형상을 자기의 우상으로 세우게 된다. 이로서 인간은 영광된 하나님의 형상의 상실하고 스스로 짐승의 형상으로 바뀐 것이다.
B. 죄, 첫번째 결과 – 성적타락
바울은 그러한 사람들에게 나타난 첫 번째 결과를 말하여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들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라고 증거하였다. 사람이 그 창조자 되신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내어버려진다’는 것은 참으로 비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이 범죄한 인간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첫번째 심판일 것이다. 여러분은 사랑하는 대상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일이 있는가? ‘내어버림’을 받은 사람들은 그 마음의 고통과 상처가 어떠한 지를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내어버린다는 뜻은 함께 하지 않는다는 말씀이기도 하다. 내어버려진 자는 고아보다도 더 비참하여 가인과 같이 암흑 속에 유리하는 자가 되어 존재를 상실한 자이기도 하다.
창세기 6장에는 인간 세상에 벌어진 최악의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타락한 천사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은 일이다. 그 일로 하여 하나님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라’(창6:3) 말씀하셨다. 킹제임스 성경에는 이 부분을 ‘내 영이 항상 사람과 다투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도 육체이기 때문이라’ 기록되었다. 이 기록들은 창조자 하나님께서 더 이상 사람들 속에서 역사하지 않겠다는 말씀이다. 그로서 인간은 브레이크 고장난 자동차처럼 끝없는 낭떠러지로 추락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인간 세상에 유입된 ‘다른 육체’의 출연을 예고한 것이라 하겠다. 유다는 종말의 세상을 가는 우리에게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다’(유1:6) 증거 하였고 다시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저희와 같은 모양으로 간음을 행하며 다른 색을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다’(7) 기록되었다. 킹제임스 성경은 ‘다른색’을 ‘다른 육체’로 기록되었다. 설혹 이 부분에 대해 서로 다른 견해를 갖고 있다하드라도 우리는 이 내용에 대하여 민감한 고민을 할 필요가 있다.
바울은 하나님의 영광을 떠난 사람들에게 나타난 첫번째 현상을 가리켜 ‘마음의 정욕’이라 증거하였다. 정욕이란 인간의 마음 속에서 솟아난 성적욕망을 말한 것이다. 이로서 우리는 인간에게 나타난 육체의 정욕이 어디로부터 시작된 것인가의 근거를 발견하게 된다. 바울은 계속하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다’ 증거하였다. 여기서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다는 것은 성적타락을 뜻한 것으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창조하신 ‘몸’을 서로 더럽힌 것을 뜻한다.
원래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자기의 형상과 모양대로 남자와 여자를 지으셨다. 이것은 창조하신 사람으로 하여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여 그 지으신 만물들을 다스리게 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성취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으로 그를 위한 모든 몸의 구조와 질서를 두셨다. 이로서 그 지으신 남자와 그의 아내가 한 몸을 이루는 부부생활이 출발한 것이다. 이에 아담은 자기에게 이끌어 오신 여자를 보고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창2:23)증거 하였고 하나님은 그에게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룰지라”(창2:24) 명하셨다.
여기서 ‘한 몸’이란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하심과 같은 집합적 단일체로서의 연합 곧 영육간의 불가분적 합일체를 뜻한다. 이로서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기록된 것이다. 이는 부부 된 남자와 여자의 영과 혼과 그 몸이 하나가 되어 창조자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시고자 하신 하나님의 지혜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도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마19:6) 말씀하셨고 바울도 그리스도와 교회의 비밀을 말하여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엡5:31) 증거하였다. 따라서 우리가 거룩한 부부생활을 힘써 지켜 범죄한 인간의 성적 행위에 빠지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오늘날 세상 사람들의 삶 속에 나타난 특성 중 하나는 성적 타락이다. 이는 고대로부터 발생된 이방신전의 특성이기도 하며 그들은 종족을 번성 시키기 위한 다산을 명분으로 무질서한 성행위로서 서로의 몸을 더럽혀 왔다. 성경은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 앞에 음행의 올무를 놓은 이방인 선지자 발람을 영원히 저주하였으며(유1:11, 계2:14), 이에 바울은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살전4:3) 증거 하였으며 이를 작은 것으로 여겨 음행과 간음과 동성애에 빠진 자들은 하나님의 기업에서 영원히 제외 하였다(고전6:9).
C. 죄, 두번째 결과 – 동성애 타락
계속하여 바울은 “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 두셨으니 곧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인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일 듯 하매”(26-27)라고 증거하였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버려두신 두번째 결과이다. 흥미롭게도 킹제임스 성경은 ‘욕심’을 ‘애정’으로, ‘곧’은 ‘심지어’라 번역하였다. 그러므로 문맥을 따라 보건데 동성애 행위는 하나님을 떠난 인간에게 나타난 지나친 애정 행각의 결과라고 하겠다. 다시 말하여 음행에 빠져 부끄러움을 상실한 사람들이 행하게 되는 성적 욕구 상태라 하겠다. 그러므로 만약 당신이 음행과 간음을 행하고 있다면 어느 순간에 당신은 동성애를 즐길 수도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가리켜 하나님께서 동성연애자로 만드신 것이라 말하면 안될 것이다. 바울은 여기서 하나님을 떠나 죄에 빠진 사람들이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므로 인간에게 나타난 성적 역리 현상을 말한 것이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불고 있는 동성애 이슈 가운데 한가지 특이한 점은 성경 속에서 동성애 행위의 정당성을 찾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가장 대표적인 주장은 신약에 기록된 동성애에 대한 경고는 주 예수를 믿는 동성애 성향자들과는 관계가 없고 동성애 섹스를 즐기는 난잡한 동성연애자들에게만 해당된다는 이상한 논리다. 이러한 논지는 어느 성경학자의 "신약성경이 동성애를 정죄하는 것은 어린 시절부터 나타난 동성애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을 말한 것이 아니고 인간들의 보편적인 성적 타락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비성경적 괴변에서 출발하였다.
이런 사람들이 논쟁을 벌일 때 즐겨 말하는 성경 말씀은 바로 로마서 1장이다. 그들은 로마서1장 26절로 27절의 말씀을 가리켜 여기서 바울은 동성애로 태어난 사람들을 지칭한 것이 아니라 본성의 순리를 역행하여 동성애자들과 난잡한 성행위를 즐기는 일반 이성애자들이나 양성애자들을 정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가 본문을 보건데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인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라는 말씀 속에서 사도 바울의 의도가 변태적 이성애자들을 향한 것이라는 근거를 찾을 수 없다. 오히려 이런 논쟁을 끌어내는 이들의 저의가 심히 의심스러울 뿐이다.
사실 이들의 논쟁의 본질은 동성애자들이 동성애 관계를 갖는 것은 타고난 본성이므로 비정상적인 행위가 아니고, 이성애자들이 동성애적인 관계를 갖는 것과 양성애자들이 동성애자들과 관계를 갖는 것을 정죄한 것이라는 괴변을 늘어 놓는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는 하나님께서 동성애자로 지었다는 끔찍한 논리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미 우리가 살펴 보았듯이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가 부부로서의 한 몸이 되는 것을 허락하셨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괴변은 어쩌면 그들의 마음 속에 자신들의 더러운 성적 행위에 가면을 씌어 동성애를 고품격 정신적 사랑으로 승화시키려는 악의가 깔려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단언하건데 어느 신학자나 목사들이 이런 논리에 찬동한다면 그는 성경을 모르는 무지한 자이던가 아니면 동성애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사람일 것이라 생각한다.
분명히 말하건데 이들의 용서받지 못할 실수는 논쟁의 대상을 잘못 선택한데 있다. 성경기자 중 가장 논리적 증거를 제시하고 있는 사도 바울에게 도전장을 내었으니 말이다. 만약 이들의 논리와 주장이 사실이라면 그들은 사도 바울보다 위대한 선지식의 소유자들이며 이는 바울을 선택한 예수님의 중대한 실수로 그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섬기는 우리의 믿음은 무너지고 성경은 쓰레기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성경의 저자가 본질적으로 성령이라고 할 때 감히 하나님께서 친히 기록하신 성경의 말씀에 도전장을 내민 이 사람들은 영원한 멸망 가운데로 던져질 것이다.
여기서 이제 우리는 동성애자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대부분의 동성애자들은 그들이 이성적인 성적 선택을 할 수 없었던 아주 어린 나이로부터 동성애 성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결코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으로부터 시작된 것은 아니다. 또한 이들 중에는 고귀한 그리스도인의 가정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주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온 자녀들도 상당히 많다.
또한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이 모두 동성애자도 아니고 그들의 자녀들이 모두 동성애자인 것도 아니다. 대부분의 동성애자들이 이유와 원인도 알 수 없이 어느날 그 마음 속에 동성애적 본능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성에 대한 이성적 판단의 능력이 없을 때 이미 동성애적 성향이 나타나 어쩔 수 없이 동성애 욕정에 사로잡힌 것이다. 그렇다면 비록 이들이 동성애에 빠졌다 해도 이들의 원죄로 치부하기에는 너무 억울하고 공평치 못하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은 여기서 동성애자들을 정죄한 것이 아니라 불의로 진리를 막는 인간이 행한 경건치 못한 일들 곧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보편적인 죄의 원리를 설명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스스로 나는 동성애자로 태어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성경의 냉혹함을 원망하고 불평할 것이 아니라 이러한 성경적 진리를 깨달아 죄된 자신의 마음과 몸을 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내려 놓고 창조자 되신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청해야 할 것이다. 피조물된 우리가 창조자에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러므로 바울은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라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롬8:20) 하였고 또한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라”(롬8:19) 증거하였다. 그러므로 불의한 생활로 하나님의 진리를 거역한 인간의 죄를 통분이 여기고 그로 인하여 걸머진 죄의 십자가를 주 앞에 내려 놓아야 할 것이다.
다시 한번 말하건 데 하나님께서 인간을 이러한 더러운 정욕에 내어 버리신 이유는 사람들이 자신의 마음에 계시된 하나님의 신성과 능력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누구라도 주 예수 앞으로 나와 자기의 죄를 내려 놓고 마음으로 믿어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의 주로 영접하면 예수님은 그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거룩한 의의 자녀로 삼으시고 그 기쁘신 뜻을 따라 하나님의 영광된 삶에 참여케 하실 것이다. 그 분은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시려고 오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결코 버림받은 사람들이 아니라 주의 때에 주의 계획하신 뜻을 위해 예비한 사람들이다.
D. 죄, 세 번째 결과 – 모든 인간의 불의
바울은 계속하여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찬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1:28-31) 기록하였다. 이 말씀은 오늘날 우리 사회의 슬픈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죄들은 사람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등을 돌리거나 하나님을 자신의 양심 밖으로 배제하여 버릴 때 나타나는 사회적 현상들이다.
인류가 존재한 이래 개인이든 사회든, 국가든 그들이 주 여호와 하나님을 거부할 때 급속도로 타락해 버린 것은 역사적 증거다. 그들은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들을 아무 꺼리낌 없이 자행하여왔다. 흥미롭게도 사람들은 한결같이 이러한 자신들의 행위에 대하여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바울은 “저희가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32) 기록하였다.
혹시 이 글을 읽는 당신은 누가복음 18장11절에 나오는 바리새인처럼 "하나님, 나는 다른 사람과 같지 않음을 감사하나이다"라고 기도 하지는 않는가? 사람들은 자신은 이런 지독한 죄는 범하지 않았다고 변명하며 자신은 거룩한 자 중에 서 있으려 한다. 그러나 그들은 영화나 악한 일을 연출하는 배우의 TV프로를 보며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의 행위를 함께 즐기고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리를 아는 우리는 우리의 육신의 정욕 속에 숨어 역사하는 은밀하고 더러운 것들이 어떠한 경우에라도 역사하지 않도록 오직 믿음으로 살아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도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가 되어 결국은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게 될 것이다(갈6:8).
여기서 우리는 바울이 로마서 1장에서 인간의 불의한 생활을 다루면서 왜 동성애적인 속성을 언급하고 있는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이 부분에 대한 성경적 이해가 부족하면 하나님의 진리를 외면한 사람들은 동성애자들이 된다고 생각하기 쉽고, 바울이 여기서 동성애자를 단죄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바울은 여기서 동성애자들을 정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되 경건의 진리를 외면하고 자신의 정욕을 바탕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불의한 삶의 태도를 하나님의 질서를 벗어난 동성애적 속성에 대유(代喩)한 것이다. 그러므로 어쩌면 불의로 진리를 막는 자들은 위대한 범죄하는 교회 지도자들일 수도 있고 진리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당신과 나일 수도 있다.
흥미롭게도 창세기 4장과 5장에서 두 계보가 소개되고 있다. 4장에는 가인의 자손으로 하나님의 뜻을 거슬려 육신의 정욕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 소개되었고, 5장에는 아담으로부터 죄성(罪性)을 갖고 태어난 사람들이라도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소망하는 사람들이 소개되었다. 이 두 장의 기록은 단지 역사적 사실성만을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가인 역시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삶을 추구하던 예배자였다는 경고의 메시지를 전해 주고 있다. 이것은 오늘날 당신에게 하나님 앞에 어떤 예배자가 되어야 할 것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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