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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2:16) 심판에 대한 복음의 정의

이요나 2007. 6. 5. 16:24

(로마서 2:16) 심판에 대한 복음의 정의

 

(롬2:16) 곧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

 

바울은 1장 18절에서 하나님의 진노에 대하여 언급하였고 이어서 하나님의 진노의 원인과 그로 인하여 나타난 현상들을 설명하였다.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를 보편적으로 생각할 때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임하는 종말론적인 심판을 말한다.

 

I. 판단의 기준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능력(1:16)과 하나님의 의(1:17)를 말하면서 하나님의 진노(1:18) 대하여는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려 한다. 설혹 갖고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믿는 자신은 하나님의 진노와 관계 없는 것으로 알고 있고 또 그렇게 치부하려 든다. 그 이유는 일단 하나님의 진노라는 그 말이 주는 의도가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바울은 이 문제는 로마서 2장에서 정의하고 있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라(2:1) 남을 판단한다는 것은 남의 잘못을 정죄하고 가리는 심판행위를 말한 것으로 주님은 산상수훈을 말하실 때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마7:1,2) 하셨다. 언급한 하나님의 진노 곧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적용에 해당된다. 바울은 3장에서 그 결론을 짓고 있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인간은 누구를 무론하고 남을 판단하는 성질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각자의 지성과 이성을 갖고 있어서 자기 기준을 중심으로 다른 사람의 옳고 그름, 좋고 나쁨, 잘하고 못함을 비판한다. 이것은 어쩌면 선과 악을 선택한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할 때 갖고 나온 특성일지도 모른다. 어쨋던 이 땅의 모든 인간은 눈에 보이는 것을 이분법적인 시각으로 판단하려는 성질을 갖고 있다. 그러나 주님은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에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피를 빼어라(마7:5) 하셨다.

 

흥미로운 것은 우리가 손가락으로 남을 가리킬 때 네 손가락은 우리 자신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라하였고 다시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판단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2) 기록하였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이 담을 헐고 들어가서, 이스라엘의 집을 들러보아라" 하시매 에스겔이 들어가서 보니 갖가지 더러운 그림들과 가증스러운 짐승들과 우상들이 사면 담에 그려져 있었다. 이때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너는 사람들의 마음 속을 보고 있느냐"(겔 8:8-12) 말씀하셨다.

 

앞으로 당신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때 당신이 "주님 저는 그를 해할 의도는 아니었습니다"고 말한다면 하나님께서 "당시 네가 마음에 어떤 생각을 품고 있었는지 우리 함께 살펴 볼까? 하고 말씀하실 것이다. 그때 부인할 수 있겠는가?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외형적인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 곧 심령을 보고 계신 것이다.

 

이미 성경에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히 4:13-6)고 기록되어 있다. 그 어떠한 것도 하나님 앞에 숨길 수 없다. 그분은 당시 당신 마음속의 은밀한 동기를 아시고 계시기 때문에 확실한 사실에 의해 심판하실 것이다.

 

계속하여 바울은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3) 묻고 있다. 여기서 바울은 과연 누구를 겨냥하여 묻고 있는 것인가? 유대인인가? 이방인가? 아니면 믿는 자들을 향한 것인가? 또는 믿지 않는 모든 자들에게인가? 흥미로운 것은 이 말을 듣는 사람들은 모두 나는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바울은 여기서 3종류의 인칭대명사를 사용하고 있는데 먼저 저희우리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바울은 1절에서 저희의 죄를 판단하는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이라 말하였고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판단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하였다. 여기서 우리란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아 인간의 불의에 속하지 않아 하나님의 진노에 들지 않은 진리의 복음 안에 든 사람들이다.

 

바울은 이미 1장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감사해야 할 인간들이 도리어 행하지 못할 정욕적인 삶으로 나타난 불의한 행위들에 대하여 정죄하였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사형에 해당한다고 정하심을 알고 있으면서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고 한다고 증거하였다.

 

여기서 바울은 불의를 행하는 사람이나 그를 판단하는 사람이나 모두가 다 불의를 행하고 있다고 정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은 지금 당신이 이들 편에 속하였느냐 아니면 저들 가운데 속하였느냐 아니면 바울이 말한 우리 가운데 속한 것이냐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인내하심

바울은 4절에서 모두를 향하여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4) 질문하며 하나님의 세가지 성품 곧 인자하심용납하심 그리고 길이 참으심을 언급하였다.

 

사람들은 간혹 하나님의 인내하심을, 하나님의 결점 때문인 것으로 생각하던가, 심한 경우는 우리의 잘못을 인정해주시는 것으로 오해하곤 한다. 어떤 사람은 "만약 하나님이 있다면 나를 쳐 죽여보라고 해봐!" 말하며 주먹을 휘두르며 "이것 봐, 내가 하나님은 없다고 말했잖아"고 말한다. 그러나 만약 그가 주 앞에 회개를 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진노의 날에 자신이 한 말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인내를 '잘못해도 괜찮은 것'으로 잘못 이해해 하나님의 선하심을 오히려 우롱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하심이 사람을 회개하도록 인도한 것이다. 그러므로 베드로 사도는 말하여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벧후3:9) 증거하였다. 그러나 증거는 이를 심판의 날을 전제한 것임을 알아야 것이다.

 

오늘 날 많은 설교자들이 지옥을 연상케 하는 하나님의 진노를 거듭 강조함으로써 죄인을 회개시켜 보려고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고 있는가? 그들의 현실을 보면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받아 마땅하지만,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그를 회개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다. 심판의 날이 이르면 이 모든 비밀은 밝혀질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2:5) 기록하였다.

 

다윗은 기도하기를, "하나님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시 51:1) 고백하였다. 여기서 다윗은 "하나님 제게 의를 베풀어 주십시요" 말하지 않고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여 달라고 간청하였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우리를 회개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의 판단의 날이 각 사람 앞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6-8) 증거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공평하심을 발견하게 된다. 또한 이 공평하심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될 것이다. 믿지 아니한 사람에게는 믿지 아니한 사람에게 대한 하나님의 판단이, 또한 믿는 사람에게는 믿는 사람에게 대한 하나님의 판단이 있을 것이다. 주님은 이미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5:28,29) 하셨다.

 

* 영, 혼, 육

계속하여 바울은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혼)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며(9)증언하였다. 여기서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혼)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라는 말은 매우 흥미롭다. (우리 성경은 대부분 이라 기록되었지만 이것은 을 의미한다).

 

우리가 이 부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간창조의 원리를 공부할 필요가 있다. 성경은 인간 창조에 대하여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image)을 따라 우리의 모양(likeness)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 . .(창1:26)라고 기록하였다. 여기서 우리의 형상이란 하나님은 영이라는 뜻이고, 우리의 모양이란  “하나님의 자결권를 말한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living soul;혼)이 된지라(창2:7)라는 말씀은 인간은 영적이고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또한 생령은 영, 혼, 육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흥미롭게도 각 교회는 교파에 따라 인간의 구성을 신학적으로 2분설 혹은 3분설로 구분하고 있다. 2분설을 따르는 곳도 영혼을 함께 묶고 있지마는 우리 갈보리채플에서는 3분설을 따른다. 그 이유는 성경이 그렇게 기록하였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soul and spirit)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히4:12) 기록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영과 혼과 육에 직접관계 하고 있음을 증거하였고, 바울은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이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살전5:23) 기원하였다.


그러므로 우리가 온전한 구원을 엄격하게 말할 때 영, 혼, 육의 구원을 말하는 것으로, 구원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영접할 때 우리의 영이 구원을 받아 그 구원은 영원히 보장 되어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막16:16)는 말씀을 이루게 된다. 그러나 성도의 삶이 아직 육체와 시간의 제약 속에 있어 주께서 약속하신 그리스도의 날이 이르러 영원한 생명을 얻기까지 성도의 혼은 시험의 기간을 통하여 그 믿음의 결과 곧 혼의 구원을 이루게 된다(벧전1:9).

 

물론 사도들과 같이 일순간 성령세례를 받아 그 직무 수행에 합당하도록 영과 혼이 일순간 온전케 된 성도들도 있겠지만 믿음의 도표상으로 볼 때 우리의 혼은 우리가 믿은 날부터 우리의 영혼이 육을 떠날 때까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말씀에 순종함으로 성화되어 가는 비물질 부분으로 육체에 살아 있는 동안은 현재 진행형이라 보아야 한다. 이로서 성도는 삶의 순간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갈 때 믿음이 완성되어 그 영혼이 그리스도의 날에 이르게 된다

 

성경은 이 부분에 대하여 많은 것을 기록하였는데 베드로는 믿음의 결국 곧 영혼(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벧전1:9) 하였고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혼)을 깨끗하게 하여 . . . (벧전 1:22)라고 증거하였다. 이 부분을 우리 한글성경은 모두 영혼으로 기록하였지만 에 해당되는 부분이다. 또한 야고보는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 영혼(혼)을 사망에서 구원하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이니라(약 5:20) 하였으며 다시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어 버리고 능히 너희 영혼(혼)을 구원할 바 마음에 심긴 도를 온유함으로 받으라 (약 1:21) 증거하였다.
 
이와 같이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성령님은 바로 우리의 영 안으로 들어와 우리가 거듭나게 되지만, 우리에게는 각자의 자유의지가 있어 우리의 혼이 성령의 인도하심과 권고하심, 가르치심을 따라 육신의 소욕과 내 생각을 벗어 버리고 기록하신 말씀에 순종할 때 의로 덧입혀진다. 이것을 우리는 중생된 삶이라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를 아는 것은 성령님의 책망을 받아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에 의해 죄를 깨닫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우리의 혼을 깨끗이 하려면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민감해져야 하므로 우리는 육신의 생각들을 모두 죽여야만 한다.

 

우리가 한 세상 살아가면서 인간의 혼을 지배하려는 치열한 싸움이 항상 진행되는데 이것이 영적 싸움이다. 이를 도우시기 위해 우리 영안에 거하신 분이 성령이다. 그러나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주의 말씀을 힘입어 자신의 혼을 지배하지 못하면 그 곳은 어떤 형태로든 항상 악한 영들이 관여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신의 혼을 온전케 하려면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함께 못박음으로 심령을 깨끗이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죄의 역사가 우리의 혼에 미치지 못하게 하여야 한다.

 

혼은 마음과 정신으로 주관되고, 지성(知)과 감성(情)과 이성(意)의 지배를 받는다. 이 혼은 나의 영을 표현하는 비물질 기관으로서 나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대표기관이라 하겠다. 따라서 이 부분이 어떤 힘에 의해 침해 받으면 혼이 마비되어 정신분열과 같은 증상을 일으키게 된다. 인간이 스스로 이 부분을 잘 관리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아직 사단의 지배권 속에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삶의 지혜로서 이 지혜는 진리를 아는 지식을 터득하므로 세상을 분별하는 명철을 얻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이 성령의 힘을 입어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배되지 않으면 우리의 영은 삶의 문제들로 고통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이로 인한 영적 문제, 정신분열, 불안, 염려, 공포로 인한 우울증, 부부문제, 자녀문제, 나쁜 삶의 패턴과 습관들, 곧 마약 및 알코올, 성중독, 동성애, 도박, 간음, 음행, 분노, 시기, 질투와 원망, 나태함, 외로움, 색욕, 거짓말, 열등감, 자기 연민과 같은 것이 일어나 영이 곤고해지고 육신의 질병을 야기하여 결국은 인생을 망치게 된다

 

* 영광의 보응

계속하여 바울은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라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니라(2:7-11) 기록하였다.

 

하나님은 각별한 섭리 안에서 유대인이나 이방인들이나 모든 사람들을 동일하게 다루신다. 만약 당신이 그리스도를 따른다면 당신의 국적과 신분과 관계 없이 주께서 직접 당신을 축복하고 상금을 주실 것이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하나님께 강퍅한 마음을 갖고 당신이 원하는 길을 고집한다면 유대인이든 이방인이었든 간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심판하실 것이다. 심판 날 당신의 국적은 아무 도움도 되지 않을 것은 하나님은 공평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에 이른 사람들을 보게 되는데 하나님은 이 땅의 모든 성도들이 이에 이르기를 바라실 것이다. 이들과 관련하여 성경은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케 된 의인들의 영들과(히12:22,23) 이라 기록하였다.

 

기록된 장자들의 총회라 하였은즉 이들은 아브라함에 속한 이스라엘이 틀림없으며 교회는 곧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된 우리를 의미한다. 그런데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케 된 의인들의 영들은 과연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 또한 이들이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구분 된 이유는 무엇 때문이며, 왜 이들 앞에 심판자이신 하나님이 언급되어 있는 것일까? 분명한 것은 온전케 된 의인들의 영들이라 하였은즉 온전케 되기 위해 어떤 고통의 과정을 겪은 영혼들임에는 틀림이 없다.

 

여기서 우리가 간과할 수 없는 것은 부활에 관한 성경적 지식이다. 바울은 성도의 부활에 대하여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그 후에는 나중이니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저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 둘 때까지 불가불 왕노릇 하시리니 맨 나중에 멸망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고전15:23-26)이라 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각각 자기 차례되로 되리니라는 말씀에 주의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란 말할 것도 없이 주의 재림하시는 날을 말하며 바울은 이날을 말하여 다시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4:16,17) 증거하였다.

 

  *백보좌 심판

그러면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 24,25절에서 말한 그 후에는 나중이니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저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 둘 때까지 불가불 왕노릇 하시리니 맨 나중에 멸망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이라 한 말은 과연 어느 때를 말한 것일까? 이 부분은 계시록 20장에서 발견하게 된다. 이때는 앞서 주를 맞이한 하나님의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이 땅에서 천 년동안 왕노릇 한 이후의 일이다. (여기서 성도란 영과 혼과 육이 온전함에 이른 거룩하고 의로운 삶을 산 하나님의 백성을 말한다)

 

이때의 일을 계시록은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 동안 왕노릇하니 가 나머지 자들은 그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계20:4) 기록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첫째 부활에 들어간 성도들이 어느 시점까지인지 알 수 있으며 그 이후에는 심판이 예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모든 허물과 죄에서 사함을 받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말씀에 순종하며 산 성도들도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아가게 된다. 성경은 이미 이는 우리가 다 반듯이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5:10) 기록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는 진노의 심판이 아니라 믿음 안에서 각자가 행한 대로 합당한 판단을 받기 위함이다. 다시 말하여 상급을 받기 위한 곳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이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살전5:23) 기록하신 말씀을 이루어야 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모든 성도는 자신이 행한 마음의 기록부 곧 혼의 원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과거 우리의 행한 일들을 기억하고 있듯이 혼의 기록 원장은 그대로 백보좌 심판대로 옮겨진다. 영은 한번 예수님을 믿으면 영원히 구원 받지만 혼은 우리가 말씀을 행한 대로 예수님의 심판대 앞에서 심판을 받은 후에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도는 누구나 자기의 혼의 기록부를 가지고 있고 그 마음들이 행한 대로 심판을 받게 된다.

 

이를 증거하여 바울은 음행한 성도를 정죄하여 이런 자를 사단에게 내어 주었으니 이는 육신으로는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게 하려 함이라(고전5:5) 하였다. 이 사람이 비롯 범죄하였으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그 영이 구원을 받았으므로 그 영은 곤고와 고난을 받은 후 백보좌의 날에야 깨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최종적인 날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사도요한은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데 없더라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계 20:11-15) 기록하였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믿지 않는 사람이 죽으면 땅에서 죽던, 바다에서 죽던 지옥 곧 음부(hades)로 들어 가야 하는데 바다와 사망이 별도로 구분되어 있는 것이다. 예단하기 어려운 부분이지만 나는 이들은 노아 홍수에 죽은 사람들의 영혼이라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창세기 1장 1절과 2절 사이의 그러나(토우)라는 단어의 해석에 융통성을 할애하여   우리가 알 수 없는 또 다른 창조의 세계를 인정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바다가 그 가운데서 내어 준 죽은 자들을 노아 홍수 때 죽은 자들이라고 볼 수 있는 근거는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께서 영으로 살리심을 받아 저가 또한 영으로 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였다(벧전3:19)는 베드로 사도의 증거를 바탕으로 한다. 여기서 사용된 이라는 타르타스(tartarus)는 단어는 타락한 천사들의 영들을 가두기 위해 지옥 하데스 밑에 예비된 감옥이지만 그로 인하여 멸망받은 타락한 영들은 바다에 가두어 둔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면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 주매(계20:13b)란 부분에서 음부는 불순종한 자들의 영혼을 가둔 지옥이라 할 때 사망이란 특별한 처소는 어떻게 해석하여야 할 것인가?

 

로마서 5장에는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롬5:14) 기록되었으며 바울은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니라(롬6:15) 증거하였으며, 다시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6:23) 하였다. 나는 이 말씀이 그대로 되는 줄 믿는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로를 믿음으로 죄인에서 의인된 성도들은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 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이 둘째사망 곧 불못이라(계20:13,14)는 인간의 최종적 심판에 대한 계시의 말씀에 대한 각별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주님은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던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5:28,29) 말씀하셨다.

 

이처럼 백보좌 앞에 선 모든 영혼들은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게 된다. 이처럼 자기의 행위가 그대로 혼의 원장에 기록 되어 있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생명책에 녹명되지 못한 자들의 영혼과 사망과 음부가 불못 곧 게헨나로 던져진다는 것이다. 이후로는 사망도 지옥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을 때 칭의 받은 영은 생명책에 녹명 되어 하나님의 자녀의 자격을 얻지만 그가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성화된 생활을 하지 못하고 다시 죄의 종이되면 그 혼은 사망에 이르러 백보좌의 심판을 받게 된다는 말씀이다. (나는 이 말씀이 그대로 되는 줄 믿는다). 부디 이 글을 보고 있는 당신은 이곳까지 오지 않아야 할 것이다. 이 일은 첫째 부활에 참예한 하나님의 성도들이 누려야 할 그리스도의 영광을 누리지 못하고 천년왕국 이후 영혼의 심판을 받은 이후의 일이기 때문이다.(계20:4-14 참조).

 

  *율법과 양심의 판단

바울은 12절에서 갑자기 율법을 거론하여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2:12) 기록하였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과 이방인으로 나누어진 세상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기준을 설명한 것이다. 그 당시나 지금이나 세상은 하나님의 백성과 믿지 않는 자들로 나누어졌고 이 모든 사람들은 결국 모두 하나님의 심판대에 이르게 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들어보지도 못한 사람들은 그들이 갖고 있는 지식에 의해 심판을 받을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2:13-15) 증거하였다. 이 얼마나 공평하신 판단인가?

 

이미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기본적인 분별력을 주셨다. 이것이 바로 양심인 것이다. 이 기준된 양심은 그의 마음에 쓰여져 있는데 그 생각에 의해 자신을 변명할 수도 있고 비난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원하는 대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당신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심판하시고 믿지 않는 당신은 당신 안에 역사하는 양심의 기준을 따라 당신을 판단하신다. 어느 쪽이든지 하나님의 판단은 하나님의 기준에 의해 공평하게 될 것이다.  

 

* 그리스도의 심판의 날

이제 바울은 결정적인 선언을 한다. 곧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2:16) 바울은 여기서 그리스도의 심판날을 전재하고 있다. 믿는 사람들에게는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나 그날은 모두 두려운 날이다. 만약 하나님을 믿는 당신은 이미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따라 성령의 인치심 속에서 온전한 성도의 삶을 살았다면 살다가 죽던 살다가 주를 만나던 당신은 전혀 걱정할 필요 없다. 주께서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하셨기 때문이다. 온전한 믿음의 당신은 후일 하나님의 도성 곧 하늘의 예루살렘에 천만천사와 장자된 이스라엘과 함께 선 교회의 성도로서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성도의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다.

 

만약 주 예수를 믿어 구원받은 당신이 성경에 기록된 대로 살지 못하고 당신의 혼이 구원되지 못한 체 그리스도의 날을 맞게 된다면 딱 한번의 기회가 주어질 것이다. 그 이유는 당신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처형을 당하셨기 때문이다. 이 때 당신의 영혼은 7년 대환난 가운데 당신의 믿음의 시련을 통하여 오직 순교 당함으로 하늘에 입성할 수 있다. 성경은 이미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계6:9) 라고 기록하였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주 예수를 믿어 영이 구원을 받았다 하더라도 음행하던 어떤 사람처럼 이 온전한 삶을 살지 못하고 당신의 생각이 이끄는 대로 육신의 소욕을 만족하며 살다가 죽음을 맞이하였다면 당신은 그리스도께서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에 심판의 부활에 참여하여 자기 행위에 따라 기록된 책에 의해서 심판을 받을 것이다.

 

이들에 대하여 성경이 이미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데 없더라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계 20:11-15) 기록하였다.

 

그래도 이 순간에까지 이들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었으니 참으로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의 믿음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의 공로 때문인 것이다. 이들은 어쩌면 바이러스 스펨을 강제로 포멧 시킨 것 같은 컴퓨터 하드와 같다고 하겠다.

 

이제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공평하신 하나님은 그의 공평하심을 따라 판단할 것이며 당신이 피할 길은 하나도 없다. 다만 당신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밖에 없다. 먹고 사는 일을 위해 재물을 모으고 육신의 정욕대로 살 것인가? 그러면 당신의 육체는 춤을 출 것이지만 당신의 혼은 고난을 받게 될 것이다.

 

II. 유대인과 율법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29)

 

 *율법의 목적과 모순

 유대인이라 칭하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기며 네가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규모를 가진 자로서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이요 어리석은 자의 훈도요 어린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적질 말라 반포하는 네가 도적질 하느냐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이 여기는 네가 신사 물건을 도적질하느냐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2:17-23)

 

여기서 바울은 어쩌면 자신을 가리켜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바울은 자신의 유대인 됨과모세의 율법을 가진 것을 자랑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네가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규모를 가진 자로서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이요" 라고 기록한 대상은 바로 우리를 말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처럼 유대인들은 스스로를 가리켜 세상의 도덕과 영적 지도자들이라 생각하였다.

 

그러나 바울은 "잠깐만! 도적질 말라고 반포하는 네가 도적질하느냐?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숭배를 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너희는 마음으로 비밀리에 우상숭배를 하느냐?"고 말하여 율법의 진정한 의미는 사람의 행위보다는 그들의 마음 자세를 다스리고 판단하는 것임을 지적했다. 바로 이것을 주님은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셨다(마 5:17-18).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살인과 간음과 맹세와 원한과 이웃사랑의 다섯 가지를 예로 들어,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이 어떻게 율법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가를 설명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의 진정한 뜻은 무엇이었는가에 대해서 가르치셨다.

 

하나님은 각 사람의 마음에 기준을 두고 계시지만 서기관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사람의 행위에 적용시켰다. 그러므로 사람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고자 한 율법의 목적은 그들의 잘못된 해석으로 말미암아 그 뜻이 왜곡되어 버리고 말았다.

 

또한 서기관 자신들은 율법을 오로지 행위에만 적용함으로써 스스로를 굉장한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자아모순에 빠졌으며 다. 율법의 진정한 의미를 잘못 이해하므로 스스로 교만에 빠진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스스로 의인이라 칭하여 하나님의 뜻을 저버렸다. 바울은 그 결과를 말하여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네가 율법을 행한즉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한즉 네 할례가 무할례가 되었느니라"(2:24-25) 증거하였다.

 

유대인들은 모세의 관습적인 할례를 통해 구원을 얻는다고 믿었지만 그들의 영이 율법에 불복종함으로써 그들의 관습은 무효화 돼버렸다. 이와 같이 어떤 관습에 매인다는 것은 잘못된 행위이다. 그러므로 구원을 받기 위해 세례를 받는 의식들도 잘못된 관습이다.

 

불행하게도 많은 사람들이 갓난 아이들의 머리 위에 물을 뿌리는 유아 세례 의식을 통해   아이가 구원을 받은 것이라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 아이는 그 세례 사건에 대해 아무런 기억도 없다. 다만 이것을 증명해주는 수료증을 소유하고 있을 뿐이다. 사실 종교적 의식은 구원과는 전혀 무관한 일이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열정적인 믿음과 거룩한 삶을 통해서만이 이루어진다.

 

  *믿음의 구심점

그러므로 당신의 마음가짐과 그 행함이 온전한 구원의 여부를 결정하게 되는 것이며, 당신이 어떠한 종교적 의식을 경험이었을지라도 현재 당신의 불의한 삶이 모든 것을 무효로 돌려버릴 수도 있다. 이에 바울은 네가 율법을 행한즉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한즉 네 할례가 무할례가 되었느니라. 그런즉 무할례자가 율법의 제도를 지키면 그 무할례를 할례와 같이 여길 것이 아니냐(2:25-26)말하여 할례의 유익한 점들이 불복종으로 없어져버렸다고 말하였다.

 

중요한 것은 종교적 관습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복종이다. 유대인들의 할례 의식은 오늘날 교회가 행하는 세례와 같다고 하겠다. 나는 세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 받을 수 없다는 어느 교파의 주장을 반대한다. 세례는 회개의 과정으로 자기 육신의 욕심을 거부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살기를 원하는 사람의 마음의 표현이지, 세례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세례가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니다. 세례는 복음사역을 위해 사도에게 주신 그리스도의 명령이지만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못 박히심으로 완성된 것이다.

 

본래 무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의문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너를 판단치 아니하겠느냐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2:27-29).

 

사람이 자기 육신의 정욕을 따라 살게 되면 할례와 같은 관습적인 의식은 무의미 해져버린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어떤 의식을 관습화하려 한다. 그것은 자신이 그 의식을 통하여 의식이 요구하는 목적에 도달하였다는 자기 만족을 얻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관습적인 의식을 보는 것이 아니라 각 사람들의 마음을 중요하게 생각하신다.

 

이와 같이 오늘날 우리가 행하는 세례는 옛 사람은 죽고 성령에 의한 새 삶을 살게 됨을 상징한다. 그러나 세례를 받는다고 새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신이 죄인 됨을 알고 구세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거듭난 그리스도인으로 살고자 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성령을 주시는 것이다.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라는 말씀은 매우 흥미롭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사람에게 믿음의 칭찬을 받으려 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사들 앞에 나서고 교회 회중 앞에 나서기를 좋아한다. 나는 이렇게 앞서서 나선 사람들치고 정말 바르고 성실하게 일을 한 사람을 보지 못하였다. 그들은 목사나 교회로부터 칭찬을 받지 못하면 용두사미가 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