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강해/로마서강해

(로마서3:22) 의의 논쟁

이요나 2007. 6. 29. 10:11

(로마서3:22) 의의 논쟁

 

(롬3: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우리는 2장에서 인간을 판단하는 하나님의 기준에 대하여 살펴 보았다. 바울은 인간을 판단하시는 하나님의 판단 기준을 말하여 각 사람이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노로 하신다(롬2:6-8) 증거하였다. 또한 바울은 여기서 복음의 최종적인 계획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날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정의하였다(롬2:16).

 

여기서 우리는 이 땅의 모든 인간이 심판을 받아야 한다고 할 때,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의는 무엇이며 또 하나님의 의의 기준은 무엇인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바울은 3장에서 우리가 궁금해 하는 문제들, 곧 하나님의 의를 정의 하며 몇 가지 반문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답변하고 있다.

 

I. 하나님의 의에 대한 유대인의 우월성은 무엇인가?(1-8)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뇨(1)

 

바울은 서두에서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은 무엇인가 자기에게 스스로 반문하고 있다. 이 반문은 바울이 앞에서 증거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판단 기준은 유대인이 자랑하는 바, 율법과 율법의 제도를 통한 할례에 있지 않고 오직 선한 마음을 따라   행한 각 사람의 선한 행실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바울에 증거에 대해 반론을 제기한 것이다.

 

A.     하나님의 말씀을 맡음

바울은 유대인의 우월성에 대하여 먼저 범사에 많으니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2) 증거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그들의 언어 히브리어로 자신의 말씀을 위탁하셨다. 따라서 히브리어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읽을 수 있는 것이 된다.

 

사실 우리 교회는 오랜 세월에 걸쳐 근면하며 정확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보존해온 유대인들에게 많은 빛을 졌다. 1947년 사해 사본(Dead Sea Scrolls)을 찾기 이전, 가장 오래 전에 완성된 구약성서는 서기 900년경의 것이었다. 성서 역사학자들에 의하여 조사된 결과, 새로 발견된 사해사본은 서력 기원전 200년경의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이 사본은 이미 우리가 소유하고 있던 성경과 별 다른 점 없이 거의 비슷하였다. 이와 같이 고대 유대 서기관들은 구약시대의 하나님의 말씀을 충성스럽고 정확하게 복사했던 것이다.

 

B.     이스라엘의 자랑은 무엇인가?(롬9:4-5)

바울은 로마서 9장에서 다시 유대인의 우월성을 언급하여 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 저희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 나셨으니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기록하였다.

 

여기서 바울은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말에 비중을 두었다. 이것은 유대인의 믿음의 역사를 언급한 것이다. 이제 우리는 4장에서 이스라엘의 믿음의 역사의 출발을 살펴 보게 되지만 원래 이스라엘의 이름은 이삭의 아들 야곱에게 주신 것으로 하나님과 다투어 이긴 자란 뜻이다. 이것은 곧 야곱이 인간의 속성을 떠나 하나님의 뜻을 따른 것을 뜻한다. 그로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양자가 되는 영광에 이른다.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다.

 

하나님의 양자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약속을 받는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열방을 너와 너희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 언약과 또 하나는 다윗에게 하신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삼하7:16) 메시야 언약이다. 그를 위해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된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의 삶을 극복하고 의의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율법을 세우셨다.

 

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하여 찬양과 기도와 예배를 받으셨다. 아담 이후 이 땅의 죄 된 인간 중에서 자녀로 선택하신 이스라엘 백성에게 공식적인 예배를 받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에 속한 약속들을 주셨다.

 

이에 대해 예레미야는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렘31:33) 하였다. 이 언약은 그들이 미리하신 하나님의 언약을 파기하여 멸망을 당한 이후에 있을 메시아 언약인 것이다. 이 언약의 말씀대로 이스라엘은 모두 살아서 천년왕국으로 들어 오게 될 것이다.

 

C. 이스라엘 사람 중 믿지 않았다고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지 못한다

바울은 3절에서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시겠느뇨 물었다. 오늘날 우리는 이스라엘에 대하여 과소평가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욕망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여 하나님께 버린 저주받은 민족으로 생각한다. 어쩌면 그 생각은 역사적인 사실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들의 멸망은 선지자들을 통해 미리하신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 진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약속하신 언약들은 아직 폐하지 않으셨고 또한 그 누구도 폐할 수 없다. 이스라엘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은 아직도 살아 있으며 말씀하신 그대로 성취될 것이다. 그러므로 설혹 그들 중에 믿지 않아 멸망을 받았다 하드라도 그 믿지 아니함이 이스라엘을 향하신 하나님의 열정을 폐할 수 없다. 그러므로 바울은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4) 하였고, 다시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증거하였다.

 

한 예를 들어 생각해 보자. 오랜 세월 진화론자들은 인간은 원숭이가 진화된 것이라 주장하고 있다. 아직까지도 믿지 않는 자들은 그것을 믿고 있으며 그러한 논리를 바탕으로 진화론을 전개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 주장한다고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하신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가 유실되는 것도 아니고 바뀌는 것도 아니다. 진리는 그 스스로가 진리로서 자신의 진리로 그대로 존재하는 것이다.

 

D. 인간의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계속하여 바울은 인간의 불의함이 하나님의 의를 나타낼 수 없음을 말하여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시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기록된 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 하리요 내가 사람의 말하는 대로 말하노니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3:3-5) 증거하였다.

 

나는 과거 상당히 악명 높은 사람 중에 한 사람이었다. 아마 나보다 악한 일을 한 사람은 없을 것이라 생각된다. 내가 회심하던 날 하늘의 천사들의 박수 소리가 요란하였다. 나는 이 땅의 모든 악인들이 나와 같이 되기를 소망하고 있다. 또한 나와 같은 사람들의 회심은 하나님의 은혜를 크게 나타냈다.

 

그렇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높여드리기 위해서 악한 행동을 해도 된다는 논리는 성립할 수 없다. 바울은 결코 그렇지 아니하니라 만일 그러하면 하나님께서 어찌 세상을 심판하시리오 그러나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 영광이 되었으면 어찌 나도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3:6-7). 증거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들은 자신의 삶을 성경에 기록된 말씀에 복종시키는 것이다. 그것이 살아 있는 증거로 하나님의 영광이 되어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이다.

 

II. 하나님의 의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우월성은 무엇인가?(9-18)

이제 바울은 그 대상을 바꾸어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9a) 반문하였다.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께 은혜를 받기 위해 악을 행하도록 권면하고 있는, 미혹된 자들의 습성에 관하여 계속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에 대한 바울의 답변은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9b)증거하였다.

 

오늘날 어떤 설교자들은 자신의 과거의 죄악들을 언급하면서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많다 하신 말씀을 들어 자신의 불의함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더욱 더 크게 나타났다고 자랑한다. 이것은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발상이다. 그만큼 그는 교만한 위치에 올라가 있는 것이다.

 

그들은 사람들을 예수께로 인도하기 위해서 인간적 감정이 가득 찬 이야기들을 들려주며 자기의 감정에 호소하여 울고 불고 하기도 한다. 결국 이들의 논리는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라"는 말이 되며 이에 대해 바울은 "저희가 정죄받는 것이 옳다"(롬3:8)고 확정 지었다.

 

그들은 설혹 자신의 이야기가 진실성이 없을지라도 나의 설득으로 사람들의 죄를 회개하도록 돌이킨다면 좋지 않겠느냐 하며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회개 시키고자 말한 나를 거짓말쟁이라고 심판하시겠는가? 어찌했든 간에 그 거짓말로 인해 전도가 되지 않았는가? 말한다.

 

그렇지만 마지막 날에 그 변명은 정당화될 수 없다. 이에 대하여 주님은 이미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2-23) 말씀하셨다.

 

여기서 바울은 시편 14편 1절의 말씀을 인용하여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10)는 증거하였다. 이것이 범죄한 아담 이후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판결이다. 때때로 사람들은 자신에 대하여 상당히 오해하고 있다. 자신의 의를 기준으로 삼을 때 우리는 주변의 사람들에 비교를 하여 자신의 의를 결정하려 한다. 그러나 의의 기준은 죄된 인간에게 있을 수 없고 하나님의 의를 기준으로 하여야 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형상과 모양대로 사람을 지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의란 사람의 인격의 기준이 되는 것이다.

 

계속하여 바울은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 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저희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10-18) 증거하였다.

 

이것은 의를 상실한 인간의 태성적 모습이다. 사실 믿는 우리에게도 이러한 본성이 역사하고 있다. 아직도 우리는 죄성의 육체 속에 살며, 죄의 세상이 우리를 유혹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로 하여 그리스도인이라 칭하는 성도들 중에서도 사악한 일들이 일어나고 그로하여 교회가 서로 분쟁하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해결해야 할 숙제이며 이를 위하여 우리에게 복음을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지혜는 하나님의 의를 터득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죄된 본성을 극복하고 성결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III. 우리의 자랑이 어디에 있는가?(19-31)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27)

 

A.     율법의 목적

바울은 계속하여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3:19-20) 증거하였다.

 

여기서 바울은 율법의 유효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모세의 율법 십계명으로는 아무도 정당화(Justified)될 수 없다. 인간은 시작도 하기 전에 이미 유죄 판결을 받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율법은 우리를 정당화시키기 위해서 주신 것이 아니고 타고 난 우리의 죄를 드러내기 위해서 주신 것이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잘못 이해하여, 자신들을 스스로 거룩한 자로 여기는 데까지 이르렀다. 그들의 종교지도자들은 순종은 외모로 나타나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사람은 율법을 지킬 수 있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산상복음을 통해 율법은 영적이며 모든 사람은 이미 죄를 범하였다고 가르치셨다. 또한 바울도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롬7:14) 증거하였다.

 

예수님은 율법은 사람의 행동과 속마음까지도 다스리고 있음을 보여주셨다. 유대인들의 행동에 아무런 결점이 없었을지라도 그들의 마음의 태도는 악했습니다. 예를 든다면, 그들은 간음은 하지 않았을지라도 마음에는 음욕을 품고 있었고 그들은 살인을 하지 않았어도 형제를 미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이미 율법을 범하는 죄를 진 것이다.

 

바울은 갈라디아에서 율법은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갈3:19a) 증거하였고 다시 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요 오직 불법한 자와 복종치 아니하는 자며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며 거룩하지 아니한 자와 망령된 자며 아비를 치는 자며 어미를 치는 자며 살인하는 자며 음행하는 자며 남색하는 자며 사람을 탈취하는 자며 거짓말하는 자며 거짓 맹세하는 자와 기타 바른 교훈을 거스리는 자를 위함이라(딤전1:9-10) 증거하였다.

 

이와 같이 율법은 죄로 잉태한 이 땅의 모든 인간들을 정죄함으로써, 우리에게 구원에 대한 유일한 소망을 은혜와 긍휼의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죄 사함에 두게 하였다. 그러므로 율법은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에 있게 하신 하나님의 계획과 과정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로 보건데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롬7:12) 증거하였다.

 

B.     오직 믿음의 법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3:21-22).

 

구원에 있어서는 유대인이나 이방인 간에 차이가 존재하지 않다. 각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그의 일생에 저지른 모든 죄로부터 용서함(Justified)받았다. 용서함을 받았다는 말은(Justified) 정말 아름다운 말로 '죄지은 기억도 없다'(Just as if I never done it)는 말의 뜻과 같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씻김을 받고 하나님 앞에 설 때, 하나님께서는 나의 불순종했던 지난 날의 죄들을 일체 없었던 것처럼 나를 바라보실 것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예수를 믿는 나의 믿음을 의로 정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의 소망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 안에 거하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일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떠난 우리에게는 하나님 앞에 의로움이 있을 수 없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면 우리의 구원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변화되지 않는다.

 

몇 해 전 나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매우 불안정했던 때가 있었다. 나는 뜻하지 않은 때에 감당할 수 없는 죄를 범하였고 그로 하여 나는 나의 죄를 씻을 수 없는 것이라 생각했으며   지금도 그 때의 일을 생각하면 과연 내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을 것인가 의심하게 된다.

 

아직도 나는 천년왕국에 관한 성경의 말씀을 읽을 때마다 나는 과연 그곳에 들어 갈 수 있는 것일까 의심하며 과거의 범죄를 기억하고 있다. 과연 이 죄는 계속 마음 속에 두고 더러움을 씻어내듯이 회개해야 하는 것일까? 이처럼 죄의 기억은 우리를 괴롭히고 있다. 이로서 우리는 하나님과 관계를 의심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의심은 부질없는 것이다. 만약 범죄한 당신이 그 죄를 깨닫고 심령으로 회개하여 주 앞에 나갔다면 당신의 죄는 이미 용서함을 받은 것이다. 하나님은 다시 그 죄를 염두에 두고 당신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시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당신의 믿음을 통하여 당신을 보고 계신 것이다

 

또한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아직도 범죄함을 일삼는 어떤 교회 사람들을 보며 왜 하나님께서 그 교회를 더 축복해주시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개구리 올챙이적 생각은 하지 못하고 "하나님 저 사람들은 아직도 육신적 크리스챤인데 왜 잘 살고 있는 것입니까? 하고 볼멘 소리를 하기 일 수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건데 이런 생각을 하는 내 마음 속에는 그들과 같은 행동을 하고 싶은 욕망이 들끓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나는 이런 일들이 죄라는 것을 몰랐을 때가 더 행복했었다고 생각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은 마음속으로 갈망했던 것을 실행하지 않았을 뿐이다.

 

이런 생각이 가득차 있던 어느날 나는 죄의 속성에 이끌려 가지 못할 곳으로 이끌려 갈 번한 일이 있었다. 비디오 방 앞에 서성거렸던 것이다. 그때 불연듯 만약 내가 그곳에서 은밀한 것을 즐기고 있을 때 주님이 오시는 천사장의 나팔소리가 울리면 과연 내가 그 음성을 들을 수 있을 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내가 비디오 방을 나왔을 때 휴거가 끝났다면 나는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나는 비로소 예수님과 함께 갈 수 없는 곳엔 절대로 가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예수께서 나와 함께 할 수 없는 곳에 빠져 있다면 주님은 나를 두고 떠나가버릴 것이라는 사실 말이다. 여러분도 세상으로 들어 갈 때는 먼저 이 생각을 하시기 바란다. 주님은 결코 당신의 시간대로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 때서야 나는 하나님의 은혜의 도움으로, 진실한 의는 세상의 규칙으로 말미암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의의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진리를 깨달았다. 그때부터 나는 비로소 하나님과의 관계에 안정을 갖게 됐었다.

 

그렇다고 내가 범사에 옳은 일만 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한 예를 들어보면, 저는 저의 생활 속의 여러 가지 일 중에서 잘 되어가지 못하는 부분에 대하여 용납하거나 잘 묵인하지 못하며, 다른 쪽 뺨을 돌려 대주는 것도 역시 잘 못할 때가 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께 감사 드리는 것은, 내 잘못에 따라 예수님에 대한 나의 믿음이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가 잘못했을 경우 주님은 책망하기 보다는 주님께 좀더 충실할 것을 가르쳐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의로 말미암아 그분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도록 나를 깨우쳐 주셨다. 그 기본원리에 대해서 나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그분은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는 분이심을 내가 알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3:23).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좀더 나을지는 모르겠지만,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기준에는 이르지 못한다. 우리가 배를 타고 항해하는 중간 지점에서 배가 침몰되었다고 가정해보자. 파선 당한 우리 모두가 헤엄을 치기 시작하여 몇 사람은 300미터도 못 가서 가라앉아 버리고, 어떤 사람은 500미터 정도는 헤엄쳐서 갔지만 더 이상 버티지 못하였으며, 또 그 중 힘이 좀더 센 몇 사람은 1키로 쯤 헤엄쳐나갔지만 결국 그도 역시 물에 가라앉고 말았을 것이다. 결론은 누군가의 도움이 없는 한 아무도 육지에 도착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여 오십보 백보인 것이다.

 

이어서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3:24) 증거하였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정당화되는 길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 피의 값으로 구원을 받는 길뿐인 것이다.

 

구속이란 말은 노예를 사기 위해 지불한 대가 곧 보상금을 말한다. 성경은 값으로 산 것이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6:20) 하였고 또한 책을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계5:9) 기록하였다.

 

그러나 구속이란 말은 현재 시제이며 미래 진행형이기도 하다. 오늘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3:24) 하였고 다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독 죄사함을 받았으니(엡1:7) 라고 기록하여 구속은 현세에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나타나는 보상임을 알 수 있다.

 

또한 바울은 다시 이는 우리의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엡1:14) 기록하였으며 다시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엡4:30) 기록하였다. 이것은 모두 미리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우리가 받을 영광의 보응과 관계된 말씀이다.

 

또한 히브리서 11장에는 특별한 의미로 기록되었다. 우리 성경에는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히11:35) 라고 기록되었으나 이 부분은 악형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구속을 의미한 것이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구속은 그리스도의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보상이 따르는 것이다.

 

바울은 구속의 대가를 말하여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움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3:25-26) 증거하였다.

 

이것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한 토대를 말한 것으로 그 용서의 토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인 우리의 대리인이 되어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걸머지신 것이다.

 

성경은 이미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은 자라"(겔 18:20)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 우리 대신 죄의 심판을 받아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고 죽으셨다. 그로 인하여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실 수 있고 과거의 모든 죄로부터 깨끗케 하실 수 있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과거에 지은 어떠한 죄라도 하나님 앞에 정당화해주신다. 이것이야말로 실로 좋은 소식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바울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 1:16) 증거한 것이다.

 

이제 바울은 하나님의 의에 대해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3:27-28) 증거하였다.

 

이것은 우리의 구원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자랑할 것이 전혀 없게 하기 위해서이다. 언젠가 주님 안에서 완성된 모습으로 보좌 앞에 섰을 때, 주께서 내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해 돌아가셨노라고 고백할 것이다. 예수께서 모든 값을 치르셨으니 나의 모든 것이 그분에게 속해 있는 것이다.

 

나의 죄가 피로 물든 자국을 남겼지만 주님께서 흰 눈처럼 깨끗하게 씻어주셨다. 성경은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즐거움으로 서게 하실'(유 1:24)라 하여 그날의 영광스러러움을 증거하였다. 그날에 우리는 "나는 아주 신실하고 믿음이 좋은 그리스도인이었으므로 끝까지 잘 견뎌냈노라!"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구원은 하나님의 역사였기 때문에 자랑이란 있을 수 없다. 성경에서도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골 2:109)라고 기록하였다. 여기서 충만이란 성령으로 시작된 믿음을 계속 유지해 나아가는 것이다. 당신이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에만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완전한 상태라고 보시는 것이다.

 

끝으로 바울은 하나님은 홀로 유대인의 하나님 뿐이시뇨 또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뇨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는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3:29-30) 증거하였다.

 

원래 유대인들은 자기들만이 하나님을 소유하는 것으로 생각했었다. 그러나 절대로 그렇지 않다.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 지나간 관습의 행위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직 예수를 믿는 믿음만이 우리를 정당화해 줄 수 있다.

 

그러나 바울은 우리의 믿음이 모세의 율법을 폐할 수는 없다고 정의하였다. 주님도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듯이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5:18) 하셨으며 내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시키러 왔다고 하셨다. 이것은 복음은 율법의 부족함을 완성시키기 위한 것임을 언급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율법을 경시하던가 또 율법이 금한 더럽고 악한 행위를 하여서는 절대로 않된다. 복음의 목적은 인간된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을 만족 할 수 없으므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능력을 힘입어 성령의 능력으로 율법의 요구를 완성하는 것이다. 우리는 로마서 4,5,6장을 통해서 이 문제들을 공부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