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5:1) 화평으로의 초대
(롬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이루자”
로마서 3장에서 아브라함을 예증하여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진리를 증거한 바울은 이제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들은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게 되는 성경적 원리를 증거한다. 또한 로마서 5장은 6,7,8장에서 언급된 그리스도와 연합된 성도의 성화된 생활에 대한 서언에 해당된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8)
바울은 서두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이루자”(1) 제안하였다. 이것은 앞장에 언급된 아브라함의 믿음을 따라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들을 하나님과의 친교의 장으로 초대하는 초청장이다.
A. 칭의(justified)
바울은 여기서 그리스도인의 가장 큰 교리에 해당되는 ‘칭의’ 곧 ‘의로움’(justified)을 언급하였다. 여기서 의롭다는 말은 ‘내가 범죄하지 않은 것과 같이'(just as if I never did it)라는 뜻이다. 사실 나는 많은 범죄를 지은 죄인이지만 하나님께서 나를 범죄하지 않은 사람으로 여기신다는 것이다. 다윗은 이 은혜를 노래하여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다”(시32:1) 하였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의로움은 죄인 된 인간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은혜로서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선물인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죄인 된 우리의 ‘칭의’와 관련하여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라는 전제 조건이다. 우리가 얻은 칭의의 축복은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 얻은 것으로 성경은 “너희 몸은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너희의 것이 아니다”(고전6:19,20) 증거하였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게 하신 목적은 하나님과의 화평을 위함이다. 여기서 ‘화평’이란 헬라어 ‘에이레네’는 하나님으로부터 얻는 영육간의 평강을 뜻하며, 화평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함을 받은 천국의 백성에게 허락된 축복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라”(마5:9) 하셨다.
바울은 2절에서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로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즐거워하느니라” 증거하였다. 여기서 은혜로 ‘들어감’에 해당하는 ‘프로사고겐’이란 단어는 매우 흥미로운 의미를 갖고 있다. 먼저 이 말은 왕의 어전으로 안내를 받는다는 뜻이 있으며, 배가 들어 간 항구라는 의미가 있다. 다시 말하여 더 이상 갈 곳이 없이 완전한 도착지를 의미한다.
이로서 그리스도의 성도는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완전한 은혜 가운데에 도달한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즐거워하느니라’ 한 것이다. 어떤가 당신은 지금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있는가? 당신의 눈에 하나님의 도성 곧 영생의 문이 보이는가? 아직 그 영광을 보지 못하고 있다면 당신은 당신의 믿음의 근거와 토대에 대하여 고민을 해 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 ‘즐거워한다’는 말은 유대인들에게 있어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다. 이것은 단회성의 표현이 아니라 ‘계속해서 즐거움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뜻이다. 바벨론을 들어 패역한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겠다는 하나님의 계시를 듣고도 포도원에 소출이 없고 우리에 소가 없어도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계속 뛰고 일어나고 앉으며 춤을 추던 하박국 선지자처럼 말이다.(참조 합3:18).
B. 은혜로 들어감
계속하여 바울은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이내를 인내는 연단은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3,4) 증거하였다. 환난(헬, 슬립시스)이란 단어는 환경적, 신체적, 정신적인 압박을 의미한다. 우리는 바울이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잘 알고 있다. 바울은 그때의 일들을 회상하며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1:8,9) 고백하였다.
우리 믿는 자들은 때때로 생각지 못할 환난을 겪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의 환난은 이미 다 끝났다 그리스도인에게 남은 것은 축복의 생활뿐이다 말한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의 축복과 그리스도인이 당하는 환난의 깊은 뜻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만약 어느 그리스도인이 있어 그 일생에서 아무 환난을 겪지 않았다면 그는 완전한 나이롱 신자이던가 그 앞에 커다란 환난을 앞두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여기서 말하는 ‘인내’란 헬라어 ‘휘포모네’는 어떤 어려운 상황을 참고 이기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확신된 믿음의 목표를 바라보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견디는 투쟁정신을 뜻한다. 독립투사들과 같이 그 어떤 환난과 고통을 감수하고 오직 목표를 향해 정진하는 것이다.
또한 ‘연단’이란 헬라어 ‘도키메’는 완전한 것을 얻기 위해 용광로의 불 속에 금속을 넣어 불순물을 제거하는 제련의 과정을 의미한다. 성경은 우리의 완전한 믿음을 비유하여 ‘일곱번 단련한 정결한 은이나, 풀무에 연단한 정금에 비유하여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나 나를 단련하신 후에 네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23:10) 기록하였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온전한 믿음을 위해 지금도 연단하고 계신 것이다.
우리가 이처럼 혹독한 환난 중에서도 연단을 거듭하면서도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이 변치 않는 것은 우리 앞에 보장된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 앞에 노다지가 쏟아질 탄광이 있는 것을 알고 있다면 채굴이 힘들도 어렵다고 하여 포기하겠는가? 만약 당신이 돌아서면 그 영광 열매는 결국 뒤에 있는 다른 사람이 얻게 될 것이다.
그러면 이 소망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바울은 “소망이 부끄럽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5) 증거하였다. 여기서 증거된 하나님의 사랑은 세상이 가질 수 없는 사랑 곧 아가페를 뜻한다.
헬라어는 사랑을 표현하는 여러 종류의 단어가 있다. 부모와 자식 간에 느끼는 사랑 곧 ‘스토로게’가 있으며 또한 친구간에 나누는 사회적 사랑 ‘필레오’가 있으며 남녀간에 나누는 감각적인 사랑, 곧 ‘에로스’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 곧, 아가페는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무조건적이고 헌신적인 사랑을 말한다. 그 사랑은 오직 그리스도를 믿어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들만이 받을 수 있고 또 알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아가페 사랑을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사랑이 성령으로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말을 하고 있지만 정작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이냐고 질문을 하면 그 대답들은 충분치 못하다. 모두가 보편적인 사랑의 이해와 삶 속에서의 자기 체험을 말할 뿐이다. 다시 말해 그저 막연하게 알고 있을 뿐이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 살고 있으면서도 또한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로 자처하면서도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실한 표현을 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 곧 아가페의 정체가 인간의 지혜로서는 알 수도 또 짐작할 수조차 없을 만큼 광대하고 포괄적이기 때문이다.
C. 위대한 사랑
바울은 6절에서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여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증거하였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 곧 아가페가 우리 안에 실현된 확실한 증거를 언급한 것이다. 먼저 여기서 사용된 ‘기약’ 이란 헬라어 ‘카이로스’는 하나님의 예정과 메시아 언약에 속한 말로서 성경은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 나시게 하셨다’(갈4:4a) 증거하였으며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면 증거할 것이라” (딤전2:6) 기록하였다. 이로서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지혜 가운데 예정된 것으로 성경의 주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증거한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말하여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자가 혹 있거니와”라고 증거하였다. 여기서 의인이란 말은 ‘다카이오스’로서 율법을 준수하는 경건한 사람을 말하며 ‘선인’(아가도스)이란 사랑을 많이 베풀고 받는 사람을 말한다. 우리 역사를 보아도 선한 사람을 위해 용감하게 죽은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성경 역사에서 의인들을 위해 목숨을 버린 자를 발견할 수 없는 것은 기이한 일이다. 누가 의인 욥을 위해 죽었는가? 다니엘과 이사야와 예레미야가 죽을 때 누가 옆에 있었는가? 그 예수께서 죽으실 때 그 사랑하는 제자들은 무엇을 하였는가? 바울은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죽었는가 묻고 있다. 이처럼 세상은 의인에게 자기 목숨을 걸지 않는다.
혹시 여러분들은 죽음으로 표현된 사랑을 체험해 보았는가? 죽음으로 표현된 사랑은 그 무엇으로도 감당할 수 없는 최고의 무기다. 죽음의 사랑은 자기의 생명에 대하여 칼날처럼 냉정하지 않으면 실행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남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버린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목숨이 하나밖에 없이 때문이다. 물론 부모는 자식을 위해 목숨을 버리기도 한다. 어떤 사람들은 대의명분을 위해 목숨을 초개처럼 버리기도 한다. 그러나 이 경우는 모두 상대적이고 조건부 사랑이다. 그러나 의인도 아니고 선인도 아닌 죄인을 위해 죽는다는 것은 확률 제로일 것이다.
바울은 8절에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증거하였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이고 헌신적임을 증명한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조건이나 상황이나 또한 자신의 유익을 바라지 않는다. 오직 그는 자기의 예정하신 영광의 날을 위하여 자신의 지혜를 쏟아 부은 것이다.
D. 사랑의 대가(9-11)
바울은 9절에서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9) 라고 증거하였다. 바울은 여기서 죄인 된 우리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의 실행 방법을 말한 것이다. 우리의 의로움을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곧 의의 피가 필요했던 것이다.
원래 우리는 하나님과 원수된 자들로서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 심판을 받을 자들이다. 그런데 그 원수된 자들을 구원하기 위해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을 십자가의 제물로 대신하게 하신 것이다. 여러분은 이 말씀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겠는가?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기 쉽지 않다. 이 사랑은 사람이 능히 실현할 수 없는 아가페이기 때문이다.
나는 죽음을 통한 사랑을 체험한 사람 중에 하나다. 내 어머니는 패역하고 방종하는 자식의 영혼을 구원하는 길로 자신의 생명을 버리셨다. 자신이 원하지 않았던 동성애의 고통으로 번민하는 아들을 위해 내 어머니는 자신의 목숨을 담보하셨다. 나는 아직도 자신의 목숨을 버리고 자식의 영혼을 구하신 어머니의 사랑을 충분히 이해할 수 없다. 아마 그것은 내가 누구를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있을 때에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사랑은 생명을 초월한다는 것이다.
계속하여 바울은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하였다. 여기서 화목이란 단어는 두 가지로 해석되었다. 킹제임스 성경은 ‘구속’ 곧 노예를 사기 위해 지불한 보상금의 뜻을 가진다. 또 다른 성경은 ‘화해’(reconciliation)로 번역되었는데 곧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 회복을 의미한다.
‘화목’이란 말은 복음의 핵심이며 바울 사상의 중심 개념에 속한다.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후5:18) 증거하였다.
그러면 화목은 우리에게 있어 무엇을 의미하는가? 먼저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의롭다하심을 얻은 지위의 변화다. 이것이 곧 바울이 말하는 위대한 칭의의 결과다. 또 하나는 지위만 바뀐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변화된 성도의 모습이다. 우리는 이것을 성도의 성화라고 한다.
이제 바울은 성도의 즐거움을 말하여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11) 증거하였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에서 '속죄'(ateonement)라고 번역된 단어는 그 의미가 서로 다른 단어로서 히브리어로 속죄는 '카팔' 인데, 그 말은 '덮는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구약의 양과 소의 희생제사는 죄를 덮을 뿐 없애지는 못했다. 그러나 신약성경 헬라어에서 속죄에 해당하는 말은 '카팔라게'로서 문자적인 의미는 '하나로 만들다' 는 뜻이다. 다시 말하여 완전한 연합을 의미한다.
만약 믿는 당신이 이 즐거움을 누리지 못한다면 그것은 큰 문제가 있다. 그것은 구원의 진리를 터득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지 못한 증거다. 그러므로 죄인된 인간이 창조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여김을 받은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위대한 축복이다.
II. 위대한 선물(12-21)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노릇하리로다”(17)
이 부분은 바울 서신에서만 볼 수 있는 특별한 신학적인 예증이다. 바울은 여기서 최초의 인간 아담과 예수 그리스도를 대조하여 인간의 문제를 조명하고 그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은 고린도전서 15장의 말씀 가운데서도 발견된다.
A. 연합의 개념-공동체(창2:24, 신6:4)
바울은 12절에서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 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증거하였다.
사망이란 말은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한 생명을 부여 받은 인간에게 있어 최고의 형벌이며 가장 큰 굴욕이 아닐 수 없다. 이 사망은 인류역사의 최대의 적으로 인류는 사망을 극복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해 왔다. 그러나 인간은 이 사망의 문제를 넘지 못하고 모두가 사망의 문을 넘어야 했다.
성경은 인류의 최대의 적이며 회복할 수 없는 문제인 사망의 원인에 대한 자료를 제시하는 유일한 책이다. 이 사망의 문제는 인간의 창조의 역사 페이지에서 출발하여 결국 영원한 생명의 문 곧 하나님의 나라에서 막을 내린다.
흥미로운 것은 이 사망의 형벌이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들어 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범죄가 아니었다면 인류사회에서 사망은 없다는 말이다. 바울은 여기서 그 책임을 첫 사람 아담에게 전가하고 있다.
계속하여 바울은 “죄가 율법이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13) 기록하였다. 율법은 사실 하나님께서 부르신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으로부터 400년 이후 모세를 통해서 그의 백성들에게 주신 삶의 질서와 규칙들이다. 이 율법에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행하지 말아야 할 일들이 기록되어 있고 그에 상응한 하나님의 형벌이 주어졌다. 그러나 이 율법의 목적은 죄를 죄로 알지 못하던 사람들에게 죄를 깨닫게 하여 사람들로 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사망은 율법이 주어지기 전에도 모든 사람에게 임한 형벌이었다. 바울은 이를 말하여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하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14) 증거하였다. 여기서 바울은 죄는 율법과 관계없이 인간의 범죄로 말미암아 발생된 것으로 그 형벌로 주어진 사망이 인간을 지배하게 된 사실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인간은 아무도 사망에서 벗어 날 수 없는 죄를 다스리는 최고의 권능임을 설명한 것이다.
여기서 사용된 ‘표상’이란 모형이란 뜻이다. 다시 말하여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아담은 사실 그리스도와 같은 하나님의 영광에 속한 사람이라는 말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나니”(고전15:45)라고 증거하였다. 여기서 ‘산 영’이란 살아 있는 존재를 말한 것으로 처음부터 인간은 사망과 관계없는 존재였음을 뜻한다.
바울은 15절에서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 증거하였다.
바울은 여기서 사망이 범죄의 대가로 온 형벌인 것에 비하여 영생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은사 곧 하나님의 선물임을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사용된 선물이란 단어는 사람 사이에 전달되는 일반적인 선물이 아니라 신이 인간에게 내리는 가장 높고 고귀한 선물을 뜻한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 그 자체를 의미한다.
계속하여 그는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을 인하여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하였다. 바울은 여기서 선물이 하나님의 은사임을 설명하고 있다. 또한 은사 곧 ‘카리스마’는 은혜 곧 ‘카리스’에서 비롯된 말로서 그러므로 많은 범죄한 사람들을 의롭다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에 바울은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노릇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노릇하리라”(17)증거하였다.
왕노릇이란 흥미로운 말이다. 왕이 아닌 사람들이 왕과 같은 통치자의 권세를 갖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왕의 신분뿐만 아니라 왕의 권세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절대적인 권세를 말한다. 한 나라에 왕보다 더 높은 권위가 없기 때문이다.
바울은 고린도서에서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15:22) 증거하였다. 이 말의 온전한 이해를 위해서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 한 사람이 갖는 인격적 의미를 먼저 이해하여야 한다. 이스라엘 민족은 원래 아브라함 한 사람으로부터 출발하여 야곱의 열두 아들로 그 부족을 이루었다.
이스라엘 민족에 있어 한 사람은 한 부족으로 일컫는다. 우리도 이 아무게 하면 그는 이씨 집안의 혈통으로 불리듯이 이스라엘 사람에게 있어 지파는 하나의 공동체적 인격과 운명을 갖고 있다. 여호수아서에 아간의 반역에 관한 내용이 기록되었다.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을 들어 가기 위해서는 큰 성 여리고를 넘어야했다. 하나님은 여리고 성을 무너뜨릴 계획을 말씀하시며 그에 속한 모든 물건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니 어느 것이든 취하면 그 죄를 이스라엘의 범죄로 삼겠다 하셨다.
여리고 성을 함락한 후에 그들은 아주 작은 아이성을 지나야 했는데 여리고 성에 미리하신 여호와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바친 물건을 취한 것으로 인하여 싸움에서 패배를 하고 말았다. 이 때 하나님은 너희 중에 바친 것을 취한 자를 너희 중에서 멸하지 않으면 내가 다시 너희와 함께 있지 아니 하리라 하셨다(수7:11,12)
그 다음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파별로 나오게 하시고 여호와께 뽑히는 지파는 족속대로 나올 것이며 여호와께 뽑히는 족속은 그 가족대로 나올 것이며 여호와께 뽑힌 가족은 각 남자대로 가까이 나오라 명하셨다. 결국 유다 지파의 세라 족속의 삽디의 손자요 갈미의 아들인 아간이 뽑혔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 민족에 있어 한 사람은 한 지파에 속한 공동체로 보았다.
주님은 마지막 때에 일을 비유하여 ‘인자가 영광 중에 올 때에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 같이 하리라’(마25:31) 말씀하셨다. 모든 민족을 모으시고 분별하신다는 말씀은 의미 있는 메시지이다. 흥미롭게도 오늘날 세상은 각 민족 별로 대립되고 연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 앞에서의 한 사람 아담은 모든 범죄한 인간의 대표이며, 한 분 예수 그리스도는 의인의 대표인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18) 증거하였다.
여기서 바울은 우리에게 사망이 미치는 권세와 의가 미치는 권세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아담의 후손인 이 땅의 모든 인간은 사망의 권세 속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선물을 은혜로 베푸신 것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요구되는 것은 순종이다. 아담의 범죄는 불순종으로 비롯된 것이며, 의의 선물은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성취된 것이다.
B. 율법의 가입
끝으로 바울은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20) 하였다. 여기서 ‘범죄’라는 말은 일정한 기준선을 이탈했다는 뜻이다. 이것은 율법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가이드라인을 의미한다.
또한 ‘가입’이란 단어는 흥미롭다. 이것은 중간에 끼어들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실 필요한 것은 아니었는데 인간이 범죄를 하므로 율법이 끼어 넣어 죄를 더욱 죄되게 한 것이란 말이다. 그러므로 율법이 있기 전에는 죄가 있어도 그것을 죄로 삼을 구실이 없었다는 말이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도 “그런즉 율법이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갈3:19) 증거하였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율법을 가입시키신 것일까? 어차피 죄로 인하여 사망할 인간에게 죄를 밝힌들 무슨 소득이 있는 것인가? 바울은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한 것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증거하였다. 여기서 죄와 은혜가, 사망과 영생이 서로 대치 된 것은 매우 흥미롭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기 위한 율법의 효용성을 설명한 것이다. 이제 우리는 6장에서 죄에 대한 성도의 입장에 대하여 살펴 보겠다.
'신약강해 > 로마서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로마서7:25) 크리스챤의 딜레마 (0) | 2007.08.10 |
---|---|
(로마서6:22) 죄와 부활의 트랜드 (0) | 2007.08.08 |
(로마서3:22) 의의 논쟁 (0) | 2007.06.29 |
(로마서4:3) 믿음의 실체 (0) | 2007.06.27 |
(로마서 2:16) 심판에 대한 복음의 정의 (0) | 2007.06.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