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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7:25) 크리스챤의 딜레마

이요나 2007. 8. 10. 19:49

(로마서7:25) 크리스챤의 딜레마

 

(롬7: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른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바울은 오늘 우리가 공부할 로마서 7장에서 3가지의 질문을 하고 있다. 먼저 그는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죄냐(7) 하고 질문을 던지고 그럴 수 없다고 답하였다. 율법을 죄악시한 크리스챤들을 향한 반어법이다. 두번째로 바울은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냐? 물었고 그럴 수 없다고 답하였다. 이것은 율법의 역할에 대한 변증으로 율법의 신성함을 증거한 것이다. 끝으로 그는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질문하였다. 이것은 죄로 말미암아 고통받을 율법의 정죄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크리스챤들의 울부짖음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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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율법의 모순(1-14)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7)

 

우리가 6장에서 살펴 보았듯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미 죄의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의인이란 칭의를 받고도 아직 죄의 문제에 얽매어 다시 율법으로 정죄를 받아야 할 사람처럼 살고 있다. 이것은 마치 이미 우리는 은혜의 시대에 살고 있는데 시대를 역류하여 율법의 시대로 돌아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다시 말해서 몸은 21세기에 살고 있으면서 생각과 삶의 방법은 19세에 살고 있는 것과 같다.

 

A. 패러다임 쉽프트

바울은 서두에서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율법이 사람의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고 묻고 있다. 이것은 반어법으로서 아직도 율법에 얽매어 살고 있는 크리스챤을 향한 엄한 경계의 메시지이다. 다시 말하여 법을 알고 있으면서도 너희는 아직도 율법에 매어 있는 자들처럼 행동하고 있느냐고 묻고 있는 것이다.

 

솔직히 말해 나 역시 오래 세울 이와 같은 생활을 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물론 그리스도인의 이러한 과정들이 믿음의 경륜을 이루는 성화의 과정이라고는 하지만 내 경우 나는 너무나 많은 희생의 삶을 치러야 했고 그 기억들은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아픔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아픔의 세월은 모든 크리스챤들이 필연적으로 겪어야 할 과정이 아니라 성경의 무지에서 온 것이라 생각할 때 나는 그 책임을 교회에 묻고 싶다.

 

이를 위하여 바울은 아직 완전한 성화되지 못한 우리의 상태를 설명하기 위해 부부간의 관계를 예로 들어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와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느니라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케 되어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2,3) 증거하였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삶 속에서 적응된 생활환경에 충실하고자 한다. 어쩌면 이것은 환경적 중독이라 할 수도 있다. 이러한 현상은 마음과 몸이 그 환경적 요소에 완전히 물들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사람들은 새로운 환경으로의 도전을 소망하고 있다. 만약 이러한 정신이 우리에게 없다면 우리는 계속 퇴보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자신의 열악한 환경 가운데서 밝고 아름다운 환경을 향하여 끊임없는 도전을 계속한다. 그런데 유독 종교적인 면에서는 사람들은 자신의 틀을 벗으려 하지 않는다.

 

나는 과거 순복음에서 믿음을 발견하였고 지금까지의 믿음생활의 절반을 그곳에서 해왔다. 내 영이 갈급하던지 말든지 나는 순복음 안에서의 믿음생활에 만족을 하고 있었고 그곳에서 내 인생의 믿음의 종지부를 찍고자 하였다. 아마 이 땅의 모든 크리스챤들이 다 나와 같을 것이다. 이로서 교단과 교파가 존재하고 그 교회 주관자의 능력에 따라 교회는 계속 성장하게 된다.

 

내가 갈보리채플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일본에서 미국 갈보리채플을 일으킨 척 스미스 목사님의 목회철학과 비전이 담긴 갈보리채플의 역사를 소개하는 믿음의 모험이란 비디오 테이프를 보게 된 후부터였다. 그들의 사역은 십여년간 순복음생활에 익숙해 온 나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고 내 영혼은 신선한 바람을 타고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처음 내가 순복음교회를 떠나야겠다고 생각할 때부터 실제로 그 행동을 옮기기까지는 1년의 세월이 걸렸다. 내가 롯의 처와 같이 계속 뒤를 돌아 보고 있을 때 천사는 내 손을 잡아 이끌어 내었다. 지금 생각하면 내게 무슨 미련이 그리 남아 있었기에 소돔을 떠나 오기를 그리 망설였는지 바보같이 느껴지지만 이제는 허상이 된 소돔의 풍경은 완전한 새로운 법이 자리를 잡기까지 가슴 한쪽에서 아련한 연기를 피우고 있다.

 

그곳은 내 생전 처음으로 강렬한 열정을 가지고 영혼을 쏟아 부었던 곳이며, 또한 그들의 입에서 품어낸 오중복음은 내 혼을 사로잡기에 넉넉한 매력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네게 있어 오중복음은 아무런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내게 있어 오중복음의 남편은 이미 죽었기 때문이다. 이미 나는 그 법에서 자유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제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니라(4) 증거하였다.

 

B. 율법의 속성

우리가 이처럼 우리를 얽매고 있는 죄의 틀에서 풀려나지 못하는 것은 우리 삶의 법을 주관하고 있는 율법으로부터 자유케 되지 못한 때문이다. 사실 우리의 영은 죄의 법에서 벗어나 은혜의 법 가운데로 이전이 되었는데도 우리의 육신은 계속 죄의 율법에 매여 있는 것이다.

 

우리가 과거 죄인 되었을 때 우리의 생활을 되돌아 보면, 죄인 된 우리는 삶의 주권자 된 율법의 요구를 따라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에 역사하여 결국은 사망의 열매를 맺으며 살아 왔다. 이러한 속성은 마치 우리가 자동차를 타고 길을 떠날 때 그 도착지에 도달하기까지는 교통법규 속을 벗어 날 수 없는 것과도 같다. 이와 같이 율법은 인간의 죄를 들어 내는 유일한 도구였으며 그 죄의 판결은 결국 사망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의 신분은 율법이 주권에서 벗어나 은혜의 주권으로 이전 된 자들이다. 이것은 이미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율법의 요구를 폐하고 이제 그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 새로운 은혜의 법을 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Text)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6) 증거하였다.

 

7절에서 바울은 우리에게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고 물었다. 이에 대한 그의 대답은 단연코 그럴 수 없다이다. 계속하여 바울은 그 이유를 말하여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다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증거하였다. 흥미로운 것은 우리로 묻고 로 대답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문제들은 우리 모두의 공통된 문제이고 바로 나 자신의 문제인 것이다.

 

가끔 우리는 율법에 대하여 회의를 갖게 된다. 만약 우리에게 율법이 없었다면 우리가 양심을 따라 살 수 있었을 것인데 왜 하나님은 우리에게 율법을 더하여 우리로 사망에 이르는 죄인이 되게 하셨을까?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율법이 있기 전에도 사망은 모든 사람에게 왕 노릇하였다는 것이다(롬5:14).

 

죄가 먼저일까 율법이 먼저일까? 단연코 죄가 먼저이다. 바울은 율법은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갈3:19a) 증거하였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우리에게 더하신 것은 죄가 죄된 것을 알지 못하고 범죄하는 인간들에게 죄가 죄 된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 세상의 질서 속에 율법이라는 질서를 바탕으로 깔아 주신 것이다. 다시 말하여 율법은 오늘날 윈도우와 같아서 모든 인간은 율법의 윈도우 바탕 안에서 각자 인생의 프로그램을 운행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율법은 오늘날 윈도우 안에 설치된 바이러스 프로그램과 같아서 윈도우가 돌아 가고 있는 동안 발생된 모든 바이러스와 스펨은 잡히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8) 증거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율법과 계명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계명은 우리가 행하여야 할 일들을 하라고 명한 것이고 율법은 우리가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경계한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계명을 성취하고자 하는 가운데 죄에 이끌리게 되고 그 죄는 율법에 얽혀 판결을 내리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로 하여 옳은 길을 살게 하기 위해 주신 율법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죄로 알지 못하고 자기 뜻대로 살던 우리가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는 살아 나고 나는 죽게 된 것이다(9그러므로 바울은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9, 10) 증거한 것이다. 

 

II. 의인의 모순(11-17)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들어 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되게 히려 함이니라(13)

 

A. 율법과 계명의 신성

바울은 12절에서 이로 보건데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다 증거하였다. 어떻게 보면 역설적인 말 같지만 사실 율법은 인간이 만든 법이 아니라 죄인 된 인간들을 의인으로 살게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어떤 교회들은 율법을 아주 도외시하여 구약에 소홀하게 다루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잘못된 생각이다. 예수께서도 내가 온 것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시키러 왔다 하셨으며 율법의 일점일획도 땅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하셨다. 그것은 계명이나 율법이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으로 죄를 죄되게 하여 인생으로 하여 스스로 죄인 됨을 깨닫고 은혜의 복음에 참예하기 위한 하나님의 예정이기 때문이다.

 

계속하여 바울은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냐? 묻고 있다. 이에 대한 바울의 답변은 역시 그럴 수 없다이다. 이것은 로마서 7장에서 두번째 질문이기도 하다. 사실 이 질문은 인간을 서글프게 하는 질문이기도 하다.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육체의 속성을 가진 인간에게 율법이 계속 살아 있어서 범죄한 우리를 사망으로 끌고 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14) 고백하였다. 여기서도 바울은 죄 아래 팔린 자가 자기 자신임을 나타내고 있다. 정말 바울은 주의 사도임에도 솔직한 사람임을 알 수 있다.

 

B.     크리스챤의 4가지 딜레마

여기서 바울은 선과 악 사이에서 고통받은 인간의 고뇌를 쏟아 놓고 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바울은 이러한 문제를 다른 사람에게서 찾아낸 것이 아니라 자기 신앙고백으로 털어 놓고 있다는 것이다.

 

먼저 바울은 자신이 행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고 고백하였다. 이것은 죄를 행하는 인간의 최대 모순인 것이다. 물론 사람들이 범죄에 대한 계획을 세우기도 하지만 사실은 그들도 자신들이 행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만약 그 죄를 알고 행하였다면 나이 어린 아이들을 성폭행하지도 않을 것이고 살인을 저지르지도 않을 것이다. 어떤 일을 할 때 그 일에 대하여 알지 못하고 행한다는 것 그 자체를 생각해 보라, 얼마나 비참한 일인가?

 

두번째로 바울은 원하는 것을 행하지 않는다 고백하였다. 이 말은 자신이 행하는 일을 알지 못하는 대신에 자신이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저녁에 잠들기 전에 하루 동안 한 일들을 생각하고 많이 반성하고 내일부터는 성경을 많이 읽고 많이 기도하고 형제들을 위해 선한 일을 하여야겠다고 계획을 세운다. 그런데 막상 아침에 교회에 나오면 기도는 뒷전, 말씀도 보는 척 마는 척하고 인터넷에 빠지던지 쓰잘데기 없는 것들에 올인한다. 참으로 후회투성인 생활의 연속이다.

 

계속하여 바울은 미워하는 것을 행한다고 하였다. 미워한다는 것은 남들이 행하면 정죄하고 책망하는 일들을 말한다. 남들이 하면 음란이고 내가 하면 로맨스인 것처럼 정말 못말리는 자장면이 아닐 수 없다. 요즘 나는 은근히 월요일을 기다린다. 목사들에게 있어 월요일은 휴식의 날이기 때문이 아니라 MBC 월화 드라마 커피 프린스가 머리에서 뱅뱅돌기 때문이다. 누가 드라마에 빠지면 야단을 치고 성경이 어쩌고 기도가 어쩌고 말하면서 월요일 밤이 되면 커피 프린스 앞에 멍석을 펴고 시간을 재촉한다. 참 목사가 이래도 되는가 싶어진다.

 

바울은 끝으로 만일 내가 원치 아니라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라고 고백하였다. 이 말은 원치 않은 것을 한 후에야 눈 앞에 서 있는 율법을 보고 잘못을 깨닫는다는 것이다. 다윗은 정말 위대한 선지자이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다. 다윗과 같은 믿음은 성경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으며 그는 아직도 오시지 않은 그리스도의 천년왕국을 보고 기뻐하였다. 그런데 한 순간 옆집 여인의 목욕하는 것을 보고 욕정을 이기지 못하여 간음을 행하고 그로 인하여 그 여인의 남편을 살인하고 말았다. 흥미로운 것은 그 악한 일의 과정이 진행되는 동안에 그는 자신이 하는 행한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였으며 자신이 미워하는 일을 행하였다는 것이다.

 

그후 나단 선지자가 와서 비유를 말하여 어느 부자가 늦게 찾아 온 친구를 접대하기 위해 양을 잡고자 하였으나 자기 것을 아껴 가난한 옆집의 딸처럼 여기는 양을 빼앗아다 잡았다고 말하자 다윗은 그런 놈은 당장 잡아다가 물고를 내야 한다고 역정을 내였다. 이 때 나단 선지자가 바로 당신이 그와 같은 일을 했다고 책망하였다. 아마 그 순간 다윗의 하늘이 노랗게 되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원하지 않은 것을 행한 후에야 율법의 선한 것을 깨닫게 되는 비열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이에 바울은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17) 고백하였다. 이것은 죄인된 상태에서의 고백이 아니라 죄에서 구원함을 얻어 그리스도의 의인 된 삶을 사는 자의 고백인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비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죄를 깨달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죄에서 구원함을 받아 의인된 사람의 몸에 아직도 죄가 살아 있어 자기가 원하지 않는 것을 죄가 행하게 한다니 자기 몸을 스스로 다스리지 못하는 인간의 비통함이 아닐 수 없다.  

 

III. 크리스챤의 모순(18-25)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24)

 

A.     육체의 속성

그러므로 바울은 육체에 거하는 죄의 속성을 고백하여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18,19) 증거하였다.

 

최근 각 정당마다 대선출마 후보들의 검증 공박이 열을 품고 있다. 대통령으로서의 도덕적자질을 놓고 한치의 양보도 없이 상대 후보의 과거를 들춰내기에 여념이 없다. 지난번 대선에서는 사실이 아닌 네거티브 공방으로 대통령이 뒤바뀌고 말았다. 그런데 대통령이 끝날 때 보면 깨끗하고 명예로운 대통령은 하나도 없다. 인간이 모두 그 밥에 그 나물인데 누가 누구를 검증하겠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러므로 바울은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서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21-23) 고백하였다.

 

  B. 바울의 깨달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된 자의 고백이 이쯤되면 그의 가르침을 받은 우리들은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우리 모두가 유구무언인 것이다. 모두가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할 수 밖에 없다. 이 세상에 바울의 이러한 고백을 뛰어 넘을 사람이 있다면 그는 정말 인간이 아닌 천사일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신을 송두리째 내려놓고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24) 통곡하였다.

 

오늘 나는 바울의 고백을 들으며 위선의 탈을 쓰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죄에서 사함을 받고 의인의 칭호를 얻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부름을 받은 자로서 도저히 행할 수 없는 죄악들이 내 몸 속에서 딩굴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나는 내 직분을 감당하여야 할 사명을 갖고 있다. 이 직무를 벗어버릴 수도 또한 죄의 육체로부터 벗어날 수도 없다.

 

여기서 바울은 우리에게 아이러니한 답변을 전달하고 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25). 이 답변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찾을 수 있는가? 과연 바울은 무엇을 감사하고 있는 것인가? 마음으로 주 예수를 섬기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아직 죄의 법을 섬길 수 밖에 없는 육신 속에 거하는 인간의 비통함을 호소하면서 그는 과연 무엇을 감사하고 있는 것일까? 이 해답을 우리는 8장에서 찾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