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8:2) 누가 나를 건져 내랴?
(롬8: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이제 우리는 로마서에의 중심이며 가장 중요한 부분을 공부할 차례다. 어쩌면 로마서 8장은 신약 전체를 한 장에 다루고 있는 것이라고 말해도 될 것이다. 여기에는 인간의 죄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원리와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예정과 계획 그리고 최종적인 목적에 대하여 기록되어 있으며 그를 위해 택하시고 부르신 자들에게 주신 성령의 능력과 그 사랑의 열매에 대하여 기록되었다.
흥미롭게도 로마서 8장은 7장과 문단의 전환 없이 이어진 상태에서 어떤 물음에 대한 답변으로 전개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로마서 7장 24절로부터 연결하여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스스로 세가지 질문을 던지고 있다. 먼저 그는 ‘누가 나를 건져 낼 것인가?’(7:24) 하고 죄의 법과 하나님의 법 안에서의 내면적 갈등을 호소하였다.
두번째로 바울은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24)하고 묻고 있다. 이 부분은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이 바라는 소망에 관한 것으로 사실은 하늘에 비밀에 속한 것이라 하겠다. 세번째로 바울은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35)고 반문하였다.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열정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그들은 육신의 따라 행하지 아니하고 성령을 따라 행하느니라)(1)
A. 정죄의 두 원리
바울은 1절에서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 곧 육신을 따라 걷지 아니하고 성령을 따라 걷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KJV) 라고 증거하였다. 흥미로운 것은 우리 성경에는 괄호 안의 내용이 삭제 된 것이다. 그러나 이 부분을 빼고 읽어 내려간다면 우리는 상당히 큰 오해를 불러 일으키게 된다. 이것이 한국교회에 미친 영향은 말할 수 없이 크다. 이로 하여 많은 교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으면 모든 죄가 사함을 받았기 때문에 모두가 천국에 들어간다는 잘못된 교리를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육신을 따라 걷지 아니하고 성령을 따라 걷는 자들에게는 정죄함이 없다’(kjv)고 기록되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정죄’에 대한 두 가지 원리가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 하나는 ‘영원한 정죄’이며 또 하나는 ‘일시적 정죄’인 것이다. ‘영원한 정죄’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아서 지옥으로 들어가는 것을 말하며 ‘일시적 정죄’란 믿는 자들의 범죄에 대한 정죄인 것이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고 정죄에 이르지 아니할 것이며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느니라”(요5:24) 하셨고 또한 “믿고 침례를 받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나 믿지 않는 자는 정죄함을 받으리니”(막16:16) 하셨다. 이 부분은 영원한 정죄에 속한다.
그러나 바울은 주의 성찬을 대하는 우리에게 “이는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자신의 죄(저주)를 먹고 마시는 것이기 때문이라 이 때문에 너희 가운데 많은 사람이 약하고 병들었으며 상당수가 잠들었느니라”(고전11:29,30) 증거하였다. 이 부분은 우리 믿는 자들이 삶 속에서 행하는 죄를 말한 것으로 영혼의 구원과는 다른 차원이지만 바울은 여기서 분명하게 죄의 결과를 말하고 있다. 그로므로 바울은 “네게 믿음이 있느냐 그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의 옳다 하는 바로 자신을 책(정죄)하지 않는 자는 복이 있도다”(롬14:22) 증거하였다. 이처럼 성경의 말씀을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상당한 오해의 소지가 있는 것이다.
B. 성도 안에 역사하는 두 가지 법칙
바울은 2절에서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기록하였다. 여기서 바울은 우리에게 ‘두 가지 법’을 증거하고 있다. 그 하나는 ‘죄와 사망의 법’이요 또 하나는 ‘생명과 성령의 법’이다. 이 두 법칙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 안에서 공존하는 법칙으로 ‘죄와 사망의 법’은 우리 육체 안에서 역사하는 법이요 ‘생명과 성령의 법’은 믿음 안에서 육체로부터 분리된 영 안에서 법칙이다.
이 두 법칙은 세상의 자연법칙과 같아서 우리가 스스로 거역할 수 없는 인간의 삶의 바탕과 같은 것이다. 바로 이것이 로마서 7장에서 바울의 번민이었고 믿는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공통된 딜레마인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사도는 “내 지체 속에 있는 또 하나의 법이 내 생각의 법과 싸워 나를 내 지체들 속에 있는 죄의 법에게로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롬7:23) 탄식을 하며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고 탄식한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간과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부분으로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영혼의 구원을 받았다는 그 기쁨으로 하여 자기 안에 역사하는 죄의 문제가 모두 해결되었다 생각하여 자기도 모르는 사이 사망과 죄의 법칙에 이끌려 돼지가 씻은 후 다시 더러운 곳에 눕는 것과 같은 생활을 거듭하는 것이다.
이 두 법칙에 대하여 조금 더 설명을 하자면 ‘죄와 사망의 법’이란 아담으로부터 죄인 된 이 땅의 모든 사람들 속에 역사하는 육체의 법칙으로 그 누구라도 육신의 소욕을 따라 복종하면 결국 율법의 요구에 의해 사망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를 믿는 자들에게 ‘생명의 성령의 법’을 주셨는데 이것은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성령이 우리 안에 내주 하심으로부터 믿음 안에서 분리된 영 안에서의 역사하는 하나님의 성령의 법칙이다. 그러므로 주께서 니고데모에게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요3:6) 말씀하신 것이며, 바울 또한 영적인 할례를 말하여 “또한 너희가 그의 안에서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그리스도의 할례로 육신의 죄들의 몸을 벗어 버린 것이라”(골2:11) 증거하였다.
바울은 3절에서 율법의 문제를 언급하여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이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라고 증거하였다.
바울이 여기서 다시 율법을 언급한 것은 율법 또한 하나님으로부터 온 법으로서 인간의 죄를 다스리기 위해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육체의 법과 성령의 법이 우리 믿는 자들 안에 설치된 두 가지 법칙의 씨스템이라면 율법은 죄를 다스리기 위한 외형적 보조 프로그램이라 하겠다. 바울은 이미 앞장에서 율법을 더한 것은 죄로 더욱 죄되게 하기 위한 것이라 증거하였다. 그로하여 율법은 죄로 말미암아 왕노릇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육신이 율법의 요구를 충족 시킬 수 없는데 있다. 그로하여 하나님께서 그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와 같은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신 것이다. 그 일을 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 의로운 삶을 위한 보조장치 율법은 더 이상 믿는 자들 가운데 필요없다. 예수께서 친히 그 장치의 요구를 성취하여 치워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에게는 사망과 죄의 법과 생명과 성령의 법만이 역사하게 된 것이다.
C. 정죄의 두 가지 방법
여기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죄된 우리의 육신에 대한 율법의 요구를 처리하시는 두 가지 방법이다. 그 하나는 부정적인 방법을 인간의 죄를 자신의 몸으로 친히 대적하신 것이며, 또 다른 방법은 비록 인간의 육신을 모양을 입고 오셨지만 죄없는 생활을 몸소 실천하신 것으로 이것은 긍정적인 방법의 실천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주님은 “만일 내가 와서 그들에게 말해 주지 아니하였더라면 그들에게 죄가 없었을 것이나 이제는 그들이 자기들의 죄에 대하여 변명할 것이 없도다”(요15:22) 하셨고 다시
“만일 내가 어느 누구도 하지 못할 일들을 그들 가운데 행하지 아니하였더라면 그들에게는 죄가 없을 터이나 이제 그들이 그것들을 보았고 나와 내 아버지를 둘 다 미워하였느니라”(요15:24) 라 증거하셨다.
II. 두 종류의 사람들(5-11)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니라”(9)
A. 육신을 따르는 사람들- 육신의 일들을 생각한다 – 사망
바울은 5절에서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증거하였다. 바울은 여기서 우리 안에 있는 ‘생각’의 문제를 언급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생각이란 우리의 의지와 감정에 속한 것이라서 인간을 이루는 인격의 한 요소가 되기 때문이다. 앞에서 언급한 육신의 문제도 우리가 다스리기 쉽지 않지만 자신의 생각 또한 다스리기 쉽지 않은 존재이다.
나는 어떤 일을 행할 때 늘 나의 생각에 혼란을 많이 일으킨다. 대부분 양단간에 결정을 해야 하는 부분인데도 그 결정을 내리기가 쉽지 않다. 그로 하여 여러 번 실패를 경험하였는데 지금 와서 생각하니 그 생각을 내게 유익한 기준에서 했기 때문인 것 같다.
바울은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이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7,8) 증거하였다. 이것은 얼마나 두려운 말씀인가? 믿는 우리라도 우리가 육신의 생각을 따를 때 결국 하나님과 원수 된 일을 하게 된다는 말이 아닌가?
그러므로 이 말씀은 우리가 어떤 일을 결정할 때 좌표가 되어야 할 것이다. 내가 어떤 일을 결정할 때 만약 나의 생각이 자신의 유익을 구하거나 자신을 기쁘게 하는 일이면 그 생각은 결국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이다. 그런데도 흥미로운 것은 우리의 생각은 늘 육신의 소욕을 따라 행한다는 것이다.
B. 성령을 따르는 사람들- 성령의 일들을 생각한다. – 생명과 화평
여기서 우리가 기억할 것은 바울이 증거한 사망과 영생은 우리에게 실제적이라는 성경적 증거이다. 바울은 이미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6:23) 증거하였으며 그에 대한 최종적인 판결은 계시록 20장에서 첫째 부활과 둘째 부활에서 판가름난다. 만약 당신이 첫째 부활에 참예한 자가 되지 않는다면 천년왕국 이후 백보좌 심판을 통하여 영생의 문으로 들어 오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첫째 부활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유업을 받는 자로 등장을 하기를 소망한다.
C. 그리스도인의 정의(9-11)
그러므로 바울은 그리스도인을 정의하여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니라”(9) 증거하였다. 이 말씀은 믿음과 구원에 이르는 보편적인 말씀이다.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이란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영접할 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영이 없다는 것이 된다. 그러니 자칭 스스로 메시야라고 칭하는 신천지의 이만희 같은 이단자들이 성령 운운하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임을 알 수 있다.
바울은 11절에서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증거하였다.
이 말씀은 매우 중요한 말씀으로 우리의 바라는 바 영원한 생명에 관한 말씀이다. 만약 우리가 이 땅에서의 삶만을 고집한다면 그리스도를 믿어 생명의 성령의 법을 성취하는 의미가 무익하게 된다. 이 세상에는 예수를 믿지 않고도 나무나 잘 사는 사람도 많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하신 말씀 또한 실제적이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만약 우리에게 실제로 살아나는 일이 없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또한 무익하며 또 이 땅에 살면서 온갖 비난과 악한 영들로부터 우리를 지켜 온 믿음 또한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부활을 부인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고전15:13-15a) 라고 증거하였으며 다시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전15:19) 하였다.
나는 최근 우리나라의 많은 교회들이 휴거와 칠 년 대환난과 또 이 땅에서의 그리스도의 왕국인 천년왕국을 믿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몇 분의 목사들과 함께 식사를 나누다가 종말론에 관한 이야기가 나와서 나는 내가 배운 대로 갈보리채플의 입장을 설명하였더니 갑자기 수저를 놓고 얼굴을 붉히며 그러면 당신들은 세대주의적 전천년을 믿느냐 언성을 높이는 것이었다. 참으로 황당한 순간이었다. 나는 한국교회의 진정한 영적부흥을 이루려면 이러한 성경적 교리가 먼저 확립되어야 할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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