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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8:30) 영화로의 초대

이요나 2007. 9. 11. 14:46

(로마8:30) 영화로의 초대

 

(롬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오늘은 로마서 8장 세번째 시간이다. 우리는 앞에서 바울의 질문 가운데서 먼저 죄에 속한 우리를 누가 구원하실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통하여 살펴 보았다. 그의 대답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어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증거하였다.

 

우리가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 산다는 것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며 또 공식대로 되는 것 또한 아니다. 우리의 육신은 계속 죄의 법을 따를 준비가 되어 있고, 내 의지는 연약하여 육신의 생각에 휘말리기 일수다. 결국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것은 내 의지적 선택에 의해 결정되는 데 그 결정은 결국 하늘에 속한 소망을 알 때 믿음의 확신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양자가 된 우리의 지위와 장차 그리스도와 함께 누릴 소망이 있음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피조물이 아직 세상의 지배를 받고 있어서 그 연약함 가운데서 탄식하며 몸의 구속을 기다려야 하는데 있다. 이 인고의 세월을 우리가 어떻게 견들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 오늘 우리가 공부할 내용이다. .

 

I. 성령의 역사(26-30)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28)

 

A.     성령의 탄식

바울은 26절에서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 하시느니라” 증거하였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바울이 말한 ‘성령’은 제3위격인 성령의 본체를 말한 것이 아니고 ‘성령의 역사하심’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여 파워의 나타남을 말한 것이다.

 

또한 ‘말할 수 없는 탄식’이란 방언을 말한 것이 아니라 입 속에서 토하지 못하는 ‘신음’을 말한다. 다시 말하여 자신의 의지로 무엇을 말할지 몰라 신음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아들을 소망한 한나의 기도 속에서 이러한 신음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어떤 견딜 수 없는 문제를 당하면 그 문제의 해결점을 찾지 못하여 무엇을 어떻게 구해야 하는지 알지 못할 때가 있다. 나는 과거 일본에서 신학을 하면서 내 육신에 얽힌 죄의 문제를 어떻게 벗어야 하는지 몰라서 가슴을 붙잡고 깊은 탄식을 한 일이 있었다. 아마 나로 인하여 숨을 거두셔야 했던 내 어머니의 마지막 탄식도 이러했을 것이다. 만약 당신의 생 떼 같은 아들이 당신의 눈 앞에서 숨이 넘어간다고 해 보자 그때 당신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다만 가슴 깊은 곳에서 견딜 수 없는 탄식의 통곡이 있을 뿐이다.

 

바울은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27) 증거하였다. 우리 말에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치 속 사람의 마음은 알 수 없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을 지으신 분께서는 능히 그 모든 것을 살피시므로 우리가 말할 수 없는 탄식을 친히 간구하여 주시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우리의 간구의 중보는 우리가 합당한 지식을 알지 못하여 드리는 잘못된 기도도 중보하신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우리는 우리가 어떤 일에 잘못을 하면 주님 나를 죽여 주십시요. 나는 망해도 쌉니다. 저주를 받아 마땅합니다와 같은 위험한 기도를 합니다. 그러나 사실 내 마음은 입으로 나온 말과 상반된 뜻을 갖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모두 아시는 성령께서 그 마음의 기도를 바르게 중보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기도를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성적으로 해야 할 것은 중언부언하지 말고 정확한 말로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B. 하나님의 목적을 따라 부르심- “그분의 목적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

바울은 28절에서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증거하였다. 여기서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란 ‘하나님의 목적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란 뜻이다. 다시 말하여 구원받은 성도는 모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이며 또한 하나님의 목적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란 말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실인가? 성령의 인도함을 따르지 못하고 육신의 죄의 문제로 탄식하는 연약한 우리가 하나님의 목적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라니 이는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면 여기서 ‘모든 것’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것은 우리 가운데 나타난 일들 곧 35절에서 언급된 환난과 곤고와 핍박과 기근과 적신과 같은 고난의 일을 말한다.  

 

바울은 성령께서 우리에게 모든 일들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이유를 말하여 “하나님이 미리아신 자들로 또한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예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첫태생)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29) 증거하였다. 

 

29절에서 일컫는 자들은 모두 28절의 부르심을 받은 자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인 구원받은 모든 성도들을 뜻한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로서 아들의 형상과 일치되게 하시기 위해 미리 예정한 사람들이다. 더 놀라운 것은 그 이유가 그의 아들되신 예수께서 많은 형제들 중에서 맏아들 곧 첫태생 되게 하려 함이라는 말씀이다. 결국 이 말씀은 앞에서 언급된 하나님의 양자가 되어 아들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유업을 받게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예정이라는 것이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는 바울의 증거이다. 이것은 바로 구원의 속성, 다시 말하여 구원의 예정과 과정을 언급한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조직신학의 토대가 되는 말씀이기도 하다.

 

나는 이 말씀을 들으며 하나님 앞에 그 어떤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내가 잘 아는 나의 존재가 감히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 있어 부르심을 따라 의롭다 하심을 입고 영화의 몸이 될 것이라 하셨으니 말이다. 그러니 우리가 그 앞에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누가 육신을 지음을 원망하며 창조자를 향하여 고개를 들 수 있겠는가? 오직 그만이 존귀와 영광과 감사와 찬양과 경배를 받으실 분이로다. 아멘!

 

II. 그리스도인의 네 가지 확신(31-36)

A. 시험으로부터의 자유 - 하나님이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31)

이제 바울은 우리에게 네 가지 질문을 한다. 먼저 그는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31) 하였다. 우리는 늘 무엇인가가 우리를 공격하고 시험한다고 생각한다. 많은 성도들이 말하기를 하나님이 나를 시험한다, 목사님이 나를 시험한다 말한다. 그런데 사실 시험은 자기 스스로 하는 것이다.

 

사단의 시험은 인간의 출발선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뱀은 하와에게 다가와 하나님께서 동산의 실과를 먹지 말라고 하시더냐고 물었다. 이처럼 사단의 시험은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도전으로 시작된다. 또한 뱀은 하나님의 뜻에 정통하지 못한 하와에게  정녕 죽지 않을 것이다 말하며 네가 하나님처럼 똑똑해질까봐 하신 말씀이다 하고 사람의 마음을 미혹하였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사단의 시험을 받으실 때 기록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갖고 답변하셨다. 예수께서 사십일 금식 후에도 사단의 질문에 기록된 말씀으로 답변하셨다는 것은 성경공부를 충실히 하셨다는 말씀이기도 하다.

 

오늘날 우리를 대적하는 것들은 무엇일까? 먼저 세상이 우리를 대적하며 사단이 우리를 대적하며 또 육체가 우리를 대적한다. 어떤 때는 사단과 세상이 합심하여 우리를 대적할 때가 있고 어떤 때는 사단과 세상은 가만이 있는데 육체가 나를 공격할 때가 있다. 만약 사단이 세상과 함께 우리를 공격할 때 만약 육체까지 합심하여 우리를 공격하면 그것은 정말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아마 우리 사역자들에게 있어 가장 연약한 것은 육체의 공격일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의 육체의 공격을 이기지 못하면 그 다음은 모두 내어 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에 주님은 “기록 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느니라”(마4:3) 하셨다. 이와 같이 우리가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의지하여 성령의 인도함을 받으면 그 시험은 넉넉히 이길 수 있다. 주께서 이미 “너희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하셨기 때문이다.

 

B. 성령의 은사 -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겠느냐(32)

바울의 두번째 질문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겠느뇨?” 하였다. 바울은 여기서 사단이든 세상이든 육체든 우리를 이길 수 없는 근본적인 이유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의 실수는 삶의 기초에 선과 악을 인정하는데 있다. 악에는 악, 선에는 선으로 대항하려는 마음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처세는 아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을 때의 일이다. 믿는 우리의 기초는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graciously-은혜에 속한 것) 인 것이다. 그리고 그 토대는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의 생명의 피로 말미암은 것으로 그 무든 공로와 능력과 권세가 주 예수 그리스도께 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우리는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의 속한 모든 것을 받아 신의 성품에 참예한 자” (벧후1:3,4) 하였다.

 

두 번째 사람들의 살수는 그 관심과 시선이 세상의 것들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재물과 출세에 속한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너희를 위하여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독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마6:19,20) 하였으며 다시 “네 보물이 있는 그 곳에 네 마음도 있느니라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마6:21,22) 하셨다.

 

우리는 계시록에서 각양 보석으로 지어진 성곽을 보게 되며 열두대문이 열두 진주로 되었고 성의 길은 맑은 정금으로 된 것을 본다(계21:19,20,21). 이것은 모두 주의 성도들을 준비해 놓으신 도성의 모습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영적으로 해석하려 애를 쓰는데 영적으로 해석할 이유가 전혀 없다. 그때는 모두 우리가 그리스도와 일치 된 부활의 영체이므로 영적인 해석이 요구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야고보는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 (약2:5) 증거하였다.

 

C. 택하심에 대한 확신 - 누가 능히 하나님이 택한 자들을 송사하리요(33)

바울은 33절에서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하고 세번째 질문을 하였다. 여기서 바울은 택한 자들을 송사할 수 없는 이유를 말하여 ‘의롭다’ 고 답하였다. 이것은 우리가 이미 죄에서 씻음을 받았기 때문에 사단의 빌미를 줄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다윗은 “허물과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시32:1) 증거한 것이다.

 

욥기에는 사단이 의인을 참소하는 내용이 나온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들 앞에 서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욥을 향하여 “어찌 까닭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까 주께서 그와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 울로 두르심이 아닙니까?” 참소하였다. 이와 같이 사단은 아직도 우리를 송사할 구실을 찾고 있다. 바울은 사단이 광명한 얼굴을 하고 우는 자처럼 우리를 찾아 헤멘다고 증거하였다. 그러나 사단을 대적할 무기는 오직 의롭다 하심 에 없다.

 

만약 우리에게서 의롭다하심이 없으면 우리는 다시 사단에게 얽히고 말 것이다. 참소자 사단의 쫓겨남에 대하여 성경은 “내가 또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가로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이루었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 또 여러 형제가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계12:10) 증거하였다.

 

D. 정죄로부터의 담대함 - 누가 우리를 정죄하리요(34)

계속하여 바울은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니 그는 하나님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34)고 질문하였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승리자로 살면서도 늘 정죄에 유혹을 받는다. 사단은 늘 우리의 행위를 공격하여 정죄하고자 애를 쓴다. 그러나 여기서 바울은 사단이 우리를 정죄할 수 없는 이유와 근거를 말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과 영원토록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 분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 주목해야 할 부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적 본분과 위치라고 하겠다. 하나님 뜻에 죽기까지 순종하여 다시 살아나심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증거하셨고 하나님의 우편에 계심으로 영원하신 권세를 증명하셨다. 이것은 법적으로 이미 끝난 문제로서 성경은 이미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롬8:1,2) 기록하였다.

 

우리는 요한복음 8장에 기록된 창녀의 정죄에 대한 이야기를 잘 알고 있다. 하나님의 법대로 산다고 하는 유대인들의 지도자들은 간음한 그 여인을 정죄하여 예수님 앞에 끌고 왔다. 그러나 주님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명하셨다. 결국 그들은 모두 돌아 갔다. 주님은 그녀에게 ‘너를 정죄하는 사람이 있느냐?” 물었다. 그녀는 “없습니다” 하였다.

 

이에 주님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요8:11) 하셨다.  여기서 주님은 사람들 가운데서의 삶의 문제를 언급한 것이다. 그러므로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들은 사람들 가운데서 정죄를 받으면 않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여인이 죄를 범하지 않을 수 없음을 아는 주님은 그녀에게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8:12) 하셨다. 오늘 성경은 다시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정죄를 받지 말아야 할 이유를 말한 것이다.

 

성경이 이미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라”(요1:12,13) 기록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권세자들을 정죄할 자가 누구겠는가?

 

III. 승리의 확신 - 이 모든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긴다(37)

 

A. 사랑의 관계 –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오(35)

끝으로 바울은 그리스도와 성도의 사랑의 관계를 말하여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오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헐벗음)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35,36) 증거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고난받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보게 된다. 이미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라 말하였다. 그러면 이러한 고난의 능력과 인내는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바울은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기느니라”(37) 증거하였다.

 

여러분들이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자녀를 지키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오직 사랑의 힘이다. 또한 가정과 교회와 직장과 국가를 지키는 것도 사랑의 힘이다. 사랑의 힘이 없으면 모든 관계는 무너지고 만다.

 

  B. 그리스도의 중보

혹시 누가 그리스도인의 삶의 기쁨이 교회 봉사에 있다고 한다면 그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아는 사람이다. 또한 누가 그리스도인 삶의 능력이 소망에 있다고 말한다면 그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달은 사람이다. 그가 그리스도의 날을 소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든 능력과 소망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나온 것이다.

 

바울은 끝으로 그리스도인들의 승리의 확신을 증거하여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일이나 장래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38) 선언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아직도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 수 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사단이 너를 밀 까부르듯 하였으나 내가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노라”(눅22:31,32) 하셨다. 이와 같이 주님은 그의 피로 사신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시며 그의 사람들이 모두 넉넉한 믿음으로 그의 영화로운 날에 이르기를 고대하고 있다.

 

만약 당신의 믿음이 그리스도의 사랑에 힘입어 그리스도의 영화로운 날에 이르면 복을 받고 천사의 박수를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육신의 연약함에 이끌려 세상으로 돌아서면 무서운 형벌이 기다리고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를 위해서 당신은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열정의 삶을 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