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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9:30) 하나님의 주권과 성경말씀

이요나 2007. 9. 18. 12:50

(로마서9:30) 하나님의 주권과 성경말씀

(롬9:30)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오늘부터 우리가 공부할 로마서 9장부터 11장까지는 하나님의 주권에 관한 말씀이다. 바울은 이 부분을 변증함에 하나님께서 친히 택하신 이스라엘 민족을 증거로 제시하였다. 사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은 우리 교회사 속에서 커다란 딜레마 중에 하나이다.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부르신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영광을 이 땅에 실행하기 위해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을 배척하였고 또 십자가에 죽도록 내어 주었기 때문이다.

 

그로하여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멸망을 받았고 수천년 동안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누려 온 이스라엘의 영광은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한 이방인에게 옮겨져 그리스도의 교회는 찬란한 꽃을 피우게 되었다. 그러나 새롭게 주의 백성이 된 우리는 이러한 역사적 딜레마 속에서 하나님의 택하심과 그의 공의에 대하여 의문을 갖게 된다. 바울은 이러한 하나님의 주권과 선택 가운데 펼쳐진 하나님의 공의를 다루고 있다.

 

I. 이스라엘의 딜레마(1-13)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6)

A.     이스라엘의 영광

“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5)

 

바울은 9장 서두에서 자신도 유대인 중의 한 사람으로 하나님의 양자됨에서 끊어냄을 받은 이스라엘의 아픔을 고백하며 차라리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 안에서 끊어질 지라도  골육의 친척인 이스라엘 민족의 영광이 부활되기를 기원하고 있다.

 

어쩌면 이러한 아픔은 교회의 영광을 목전에 두고 환난의 고통으로 들어 가야 할 우리 형제자매된 주의 백성들을 바라보는 우리의 근심과 고통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 교회 가운데 이러한 고통을 느끼며 이를 위하여 성령의 탄식으로 중보할 주의 백성들이 얼마나 있을까 싶다.

 

바울은 하나님의 택하신 이스라엘의 영광을 말하여 “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 저희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라고 증거하였다. 여기서 바울은 먼저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의 이스라엘의 특권을 말하여 양자됨을 언급하였다. 이 영광은 하나님께서 친히 부르신 아브라함에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리라"(창12:2a) 하신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출발하였다. 하나님의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은 장차 이 땅에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메시야를 예비하기 위한 의로운 민족을 일으키기 위함이었다.

 

그로부터 하나님은 택하신 아브라함의 자녀들을 친 자식처럼 돌보시며 양육하셨으며, 또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너로 인하여 땅의 모든 족속이 축복을 받으리라"(창12:3b) 말씀하셨으므로 이미 하나님의 예정 속에는 이방인들까지 포함된 것이었다.

 

성경은 이스라엘의 양자됨에 대하여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출4:22) 기록하였으며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는 그들을 향하여 우매 무지한 백성아 여호와께서 이같이 보답하느냐 그는 너를 얻으신 너의 아버지가 아니시냐 너를 지으시고 너를 세우셨도다(신32:6) 책망하였으며 하나님은 예언자 호세아를 통하여 이스라엘의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 내었거늘..(호11:1)이라고 그의 고통을 토하셨다.

 

또한 하나님은 그의 영광은 이스라엘에 두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백 삼십 년 간 애굽의 종살이에서 구속하여 내실 때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 속에 함께 하여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 기둥으로 인도하셨으며(출13:22). 하나님의 영광은 모세를 부르신 거룩한 산에 가득히 임하셨고, 또 백성들 중에 세우신 하나님의 성막에 가득 찼었으며(출29:43) 솔로몬이 성전을 지었을 때 영광의 하나님은 그들의 예배하는 곳에 친히 임하셨다(왕상8:10-11). 이처럼 현존하신 하나님의 현존하심의 영광은 오직 이스라엘 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다.

 

또한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여러 번 언약을 세우셨다. 아브라함을 부르심으로 세우신 언약은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이끌어 내신 후 모세에게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잘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출19:5,6) 말씀하심으로 그의 언약은 이스라엘 민족의 공동체 언약으로 발전되었으며 그의 언약 위에 그 백성들이 지켜 나갈 율법을 주셨다. 그로 하여 하나님은 모름지기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셨고 이스라엘은 영광의 하나님께 예배를 통하여 그의 백성 됨을 증명했다.

 

끝으로 바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세우신 약속을 언급하였다. 흥미로운 것은 하나님의 약속들은 아직도 유효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열방으로 흩어진 이스라엘 민족을 다시 부르실 것을 말씀하여 내가 그들을 만민 중에서 끌어내며 열방 중에서 모아 그 본토로 데리고 가서 이스라엘 산 위에와 시냇가에와 그 땅 모든 거주지에서 먹이되 좋은 꼴로 먹이고 그 우리를 이스라엘 높은 산 위에 두리니 그것들이 거기서 좋은 우리에 누어 있으며 이스라엘 산위에서 살진 꼴을 먹으리라(겔34:13) 하셨다.  

 

그리고 오늘날 전세계는 유대인들이 그들의 땅으로 돌아온 것을 알고 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기를 "이스라엘이 움이 돋고 꽃이 필 것이라. 그들이 그 결실로 지면에 채우리로다" (사27:6) 하신 말씀처럼 이스라엘은 사막의 땅을 개발하여 세계에서 세번째로 큰 과일 수출국이 되었으며 꽃 수출 또한 이스라엘의 주된 산업이 되어 미리 말씀하신 "꽃이 피고 움이 돋는" 하나님 말씀이 그대로 성취되었다.

 

계속하여 바울은 “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라 아멘”(5) 증거하였다. 이 짧은 말씀 안에 우리는 이스라엘의 찬란한 영광을 보게 된다. 어떤 성경은 이를 ’그는 만물 위에 계시니 영원토록 하나님을 송축할지어다’(RSV)고 번역하여 그리스도의 신성을 약화하였다. 이것은 잘못된 번역으로 바울은 그의 서신 여러 곳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찬양하여 그가 만물 위에 계신 창조자되심을 증거하였다.

 

B.     이스라엘의 주권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라 명년 이 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9)

 

지금까지의 이스라엘의 영광에 관한 증거를 하던 바울은 갑자기 말을 바꾸어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9:6)라고 증거하였다. 이것은 한마디로 하나님의 예정은 그의 말씀과 함께 하고 있으며 그의 말씀은 폐하여진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 것이다.

 

바울은 먼저 이스라엘의 영광과 관련된 예정섭리를 설명하기 위하여 이스라엘 곧 야곱에게서 난 후손들이 모두 진정한 이스라엘이 아니다 말하여 이미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나타난 성경적 증거를 통하여 하나님의 부르심과 택하심의 원리를 설명하였다.

 

사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이삭의 아들 야곱과 에서는 쌍동이었다. 먼저 태어난 에서는 털이 많고 몸이 붉어 에서라는 이름이 주어져 후일 에돔족속의 조상이 되었다. 이에 비해 동생 야곱은 그가 태어날 때 에서의 발 뒤꿈치를 잡았으므로, 그의 이름을 "야곱"이라고 지었다. 이 말은 "속이는 자" 혹은 "찬탈자"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중동의 역사에 의하면 맏아들인 에서가 장자권을 물려받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야곱은 에서가 사냥에서 돌아와 심히 배고픈 때를 이용하여 팟죽 한 그릇에 장자귄의 명분을 빼앗았다. 그 후 이삭이 하나님으로부터의 영적 축복을 에서에게 주고자 생각했을 때, 야곱은 그의 어미 리브가의 도움을 받아 눈먼 아버지를 속이고 그의 형에게 주고자 했던 하나님의 축복을 가로챘다.

이에 에서는 야곱이 자기에게 돌아 올 하나님의 축복을 가로챈 것을 알고 그를 죽이려고 했고 이삭과 리브가는 야곱의 생명을 위해 야곱을 아람에 살고 있는 외삼촌에게 도망시켰다.그후 많은 자식과 재산을 얻은 야곱은 그곳에서 얻은 아내들과 자식 그리고 재산을 이끌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 가기로 결정을 하고 출발을 하였으나 그의 앞에 에서가 많은 군대를 이끌고 온다고 하는 소식을 듣고 그는 가족을 앞서 보내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얍복강에 홀로 남아 생명을 위해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그날 밤에 주의 천사가 야곱 앞에 나타나 씨름을 하게 되었는데 야곱이 얼마나 완강하였던지 천사가 야곱의 엉치뼈를 쳐 환도뼈가 위골시켰다. 그런 중에도 야곱은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라고 부르짖었다. 이에 천사는 그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물었습니다. 야곱은 그에게 나는 발 뒤꿈치를 잡은 사기꾼이요"라고 말했다. 이에 천사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하리라"(창 32:24-28) 하였다. 이로서 야곱은 이스라엘 곧 "하나님과 겨루어 이김"이란 새 이름을 받게 되었다.

 

바울이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라고 한 말을 다른 말로 말하자면 야곱의 후손 모두가 다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것은 아니다라고 말한 것이다. 다시 말하여 여기서 바울은 그가 하나님에 의해 지배를 받지 않으면 진정한 이스라엘이 아니다 라고 말한 것이다. 오늘 우리 "크리스챤"도 이와 비슷한 상황에 있다. 모든 사람이 진실하게 그리스도를 크리스챤이라고 불리우는 것은 아닌 것이기 때문이다.

 

계속하여 바울은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 하셨으니(7) 라고 증거했다. 오늘날 아랍 자손의 조상이 된 이스마엘은 이삭과 같이 아브라함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유업으로 받지 못했다. 그래서 모든 아브라함의 자손이 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은 아닌 것이다.

 

하나님께선 사라를 통하여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약속하시면서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창17:16a) 하셨다. 그러나 그때 아브라함은 그의 육신적으로 얻은 이스마엘을 받아 주시길 원하여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서 살기를 원하나이다"(창17:18)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요청을 단호하게 거절하셨다. 그러므로 이스마엘은 육신적인 사람을 대표하고 이삭은 영적인 사람을 대표가 되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 "이라고 말씀하셨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이스마엘을 아브라함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주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 교회에 어떻게 적용되야 할까요? 만약 당신이 하나님을 돕기 위하여 당신의 생각을 따라 힘써 봉사를 한다면 그 봉사는 결국 아브라함이 이스라엘을 낳은 것과 같은 것이다. 많은 목사들이 교회를 세울 때 성령의 인도함을 따르지 않고 마케팅과 캠페인을 통하여 개척하고 있다. 그 결과 수많은 교회들이 무리한 건축으로 재정에 어려워져 교회를 닫게 되며 커다란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이러한 노력들은 모두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깨닫지 못하고 육신적인 방법을 통하여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성취하려 했던 것과 같은 것이다. 그 결과 아직도 이스라엘은 아랍민족들의 핍박을 받고 있으며 이 지구상에는 전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계속하여 바울은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라 명년 이 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라(8,9) 증거하였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하신 말씀이 성취되는 원리를 설명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며 적용하는 방법을 터득하게 된다.

 

C.     선택의 주권

이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는데(10)

 

바울은 이를 설명하여 이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는데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10-12)라고 증거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아들인 이삭과 이스마엘을 구별하셨듯이 이삭의 아들들인 야곱과 에서에게도 구분을 지으신 것을 설명한 것이다. 하나님은 사기꾼과 같은 야곱을 받으셨고 그를 통하여 약속과 메시야가 오실 것이라고 하셨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에서는 미워하셨고, 그의 자손들이 민족으로서 끊어질 것에 대하여 예언하였다(창36:9; 옵9-10)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셨다 하심과 같으니라(13)는 말씀은 참으로 이해하기 쉽지 않은 말씀이다. 이 말씀은 야곱과 에서가 나기도 전에 야곱은 받으시고 다른 하나는 미워하셨다 하셨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간의 구원을 사람의 행위에 두지 않으시고 전지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선택에 두셨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그가 원하는 자를 부르시고 택시는 것이다.

 

나는 솔직히 말해 내가 선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를 택하셨다고 말할 수 없다. 나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아는 바와 같이 방탕하고 패역하였으며 음행이 물든 사람이었다. 내가 하나님께서 나를 택하심에 대하여 말할 수 있는 오직 하나님만 아는 비밀에 속한 하나님의 주권에 기초했다는 사실이다. 나는 오직 하나님께서 나를 택하셨다는 그 사실에 감격 하고 목숨을 다해 나의 주 하나님께 감사할 뿐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야곱과 에서가 태어나기도 전에 야곱을 선택하셨다. 그들이 아직 태 속에 있을 때 하나님은 그 어미 리브가에게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고 하셨다(창25:23b,롬9:12).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이 태어나기 전에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태도와 반응을 알고 계셨다는 것이 된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야곱은 영적인 사람, 에서는 육적인 사람이 될 것을 미리 아셨기 때문에 그의 뜻대로 선택을 하신 것이다.

 

II. 하나님의 결정과 공의(14-18)

그러므로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16)

 

14절에서 바울은 우리에게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14)반문하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선택권에 대한 시비를 언급한 것이다. 사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불평을 하고 있다. 나 역시 철없던 시절 부모를 원망하며 나를 왜 이런 모양으로 낳으셨느냐 불평을 하기도 했다. 이처럼 철딱서니 없는 우리 어머니의 가슴은 숯검정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창조자이신 하나님 앞에 이러한 논리로 종주먹을 휘두르는 것은 지극히 위험한 일이다. 인간은 극한 한계 속에 있어 무한의 세계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예정을 우리는 이해할 수도 알 수도 없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명쾌한 답변은 우리가 친히 하늘에 오르는 날에 한점의 의혹도 없이 명확히 알게 될 것이다. 그러하여 성경은 우리가 거울을 보듯이 알게 될 것이라 증거하였다. 이와 같이 인간은 그 누가 아무리 지혜자라 하더라도 인간의 이성으로 하나님이나 혹은 그가 하시 하나님의 일을 결코 알 수 없다.

 

바울이 말한 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14)라는 질문은 하나님을 모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된 질문이 되겠지만 하나님은 결코 불의하지 않다. 그는 공의의 근본이시며 그의 선택은 완전하고 의로우시다. 그는 원하는 자에게 그의 사랑과 은혜를 베푸시며 그는 그렇게 하실 권리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께서 나를 선택하셨다는 그 이유만으로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할 따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당신이 하나님을 선택하기를 원치 않는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은가?그리고서도 당신은 하나님께서 나를 선택하지 않았노라 하고 비난할 수 있는가? 이제 당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의 보내신 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그 길만이 하나님께서 당신이 태어나기 전에 택하셨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유일한 길이 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주여주여 하는 자마다 결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부르심에 대한 우리의 답변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 되어야 한다는 믿음의 책임과 의무가 주어졌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내가 에서는 미워하였다" 는 말씀에 대해 우리는 혼란을 일으키게 된다. 또한 "내가 야곱은 사랑하였다" 는 말씀 또한 이해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우리가 생각하건데 야곱은 사랑을 받을 만한 자가 못되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의 매력은 털이 넉넉하고 붉은 몸으로 사냥을 즐기는 호탕한 남자 에서에게 한 표를 던지기를 원한다. 그에게서는 남자다운 냄새가 풍기기 때문이다. 아마 이삭도 그러했을 것이다.

 

나는 때때로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에 대하여 혼란을 갖는다. 나를 살펴 보았을 때 나 자신은 이 세상에서 가장 추악한 인간인 것을 내 스스로 알기 때문이다. 이처럼 나는 결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가 못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선택하신 것은 이미 주께서 야곱을 사랑하시고 선택하신 하나님의 주권 속에 내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역사적 사실이 없다면 나는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택하셨다는 근거를 댈 수가 없을 것이다.

 

바울은 이미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3)라고 증거하였다. 따라서 만약 하나님 의로운 분이시면 든 사람들을 멸하셔야 할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이 땅의 모든 인류를 멸하신다 해도 그 누구도 하나님을 비난할 수 없다. 그의 의는 아무도 도전할 수 없는 완전함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멸망받기 합당한 우리를 택하신 일에 대하여 사람들은 하나님을 불의 하시다고 비난하는 것일까?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이성적인 판단을 결코 이해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고차원의 수준에서 생각하시고 일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사야는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사40:13,롬11:34) 질문하였다. 그러함에도 인간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 세계를 움직이시나에 대해 토론하기를 즐긴다. 참으로 어리석은 짓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아직도 피조물 된 인간이 하나님을 도울 수 있고 또 그분을 충고할 수 있다는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의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고 내 길은 너희 길과 다르니라.주님의 말이니라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사55:8-9) 말씀하셨다.

 

바울은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이 여길 자를 긍휼이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15) 라고 증거하였다. 이것은 그분은 자신의 의지와 결정으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우리에게 있어 문제는 누구는 긍휼이 여기고 누구에게는 분노로 대하시는데 있다. 그러나 설혹 그가 그렇게 하신다고 해도 피조물은 우리는 항변할 이유가 없다. 그는 그의 의 가운데 일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이니라(16) 증거하였다. 오직 나는 하나님의 은혜가 내게 미친 그 사실에 감사하고 기뻐해야 할 것이다. 나의 원함과 노력으로 비롯된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것이라는 말은 내가 아무리 힘을 다해 주를 위해 열심히 일한다 해도 그의 베푸시는 은혜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III. 하나님의 예정과 목적(19-29)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사 필하시고 끝내시라 하셨느니라(28)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다 하셨으니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팍하게 하시느니라. 혹 네가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 하시느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 하리니(17-19)

 

이 말씀은 한치의 변명의 틈을 우리에게 허락치 않는다. 참으로 냉혹하고 철저한 자기 중심적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여야 할 말씀은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라는 구절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는 어떤 일을 행하실 때 미리 말씀을 하셨다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께서 말씀을 미리 하지 않으시고 일을 행하신다 해도 우리가 항변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은 한번 말씀하시고 다시 말씀하신다고 기록하였으며 이와 같이 하나님은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선지자를 통하여 미리 말씀하셨다.

 

우리의 강팍함에 대하여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를 이렇게 만드셨다면 어떻게 하나님께서는 나의 존재를 나무라실 수 있는 것일까 반문하게 된다. 다시 말하여 하나님께서 강팍하게 하셨으니 내가 강팍할 수 밖에 없지 않느냐 하는 논리가 성립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주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는데 왜 바로가 자기의 악을 책임져야 하느냐고 묻겠지만 그렇다 해도 누가 하나님의 뜻을 감히 거역할 수 있겠느냐? 반문한 것이다.

 

출애굽기에는 "주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팍하게 하셨다"고 기록되었다. 여기서 "강팍하다" 는 히브리어의 뜻은 "견고하게 하다"는 뜻이다. 사실 하나님은 바로 왕 자신의 악한 결정을 굳힌 것이지 하나님께서 그의 결정을 지으신 것은 아니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께 대하여 당신의 마음을 굳게 정하여 악을 행하기로 결정한다면 하나님은 당신의 결정을 견고하게 하실 것이다. 이 일을 두고 혹시 불공평 해요 라고 말할 것이 아니라 그분 앞에 나아가 겸손하게 나를 깨뜨리시고 내 마음을 바꿔 주세요 라고 청해야 할 것이다.

 

불공평하다고 외치는 사람들을 향하여 바울은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20a) 라고 반문하였다. 이 말은 네가 도대체 누구이길래 창조자 되신 하나님과 논쟁을 하려 하느냐고 말한 것이다.  

 

바울은 계속하여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뇨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20b,21) 이것은 토기장이가 그릇을 만드는 비유를 통해 창조자 하나님께서 인간을 다스리시는 섭리를 설명한 것이다. 토기장이는 회전틀에 진흙을 놓고 절반을 잘라내어 그 절반으로는 아름다운 꽃병을 만들고 그 나머지 반으로는 요강을 만든다 할 때 누가 토기장이에게 당신에게 누가 그런 권리를 주었습니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람도 임의로 무엇을 만들 수 있거늘 창조자이시며 자신의 결정대로 세상을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께서 임으로 결정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사실은 이러한 주권에 대해 의문을 품는 당신이 불공평한 사람인 것이다. .

 

사람이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 도전하는 것은 매우 두려운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사실 곧 하나님께 속한 진리의 교리를 모른다면 어리석게도 그를 향해 도전을 서슴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전적으로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만약 우리에게 진리의 지식이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반항하는 자가 되고 말 것이다. "나를 이처럼 쓸모 없는 존재로 만들 수 있습니까? 하고 하늘을 향해 주먹질을 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은혜를 입어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해 최상의 것을 선택하신다는 것을 안다면 당신은 순한 양이 되어 나 자신을 토기장이 되신 그분께 맡기게 될 것이다.

 

토기장이는 그가 진흙 한 덩이로 무엇을 만들기 전에 자신이 무엇을 만들 것인지 알고 있다. 그러므로 진흙은 자기자신을 토기장이의 손에 맡길 때, 토기장이의 의도를 발견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의 뜻에 나를 맡기고 그의 말씀에 순종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도 내 생애 가운데서 어떻게 역사하시며 나로 무엇이 되게 하시는가에 대한 개념을 갖게 된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발견하게 되는 지름길이다.

 

게속하여 바울은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여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하리요(22,23) 라고 증거하였다.

 

사실 하나님은 바로에게 많이 참으셨다. 그는 바로의 비난과 강팍함을 참으시고 세상으로 하여금 반항에 대한 하나님의 참으심과 그의 진노가 어떠하신가를 보게 하셨다. 또한 모세를 통하여 장차 이스라엘이 누릴 영광을 사람들로 알게 하셨다. 이 두 가지 성경적 사실은 하나님을 대한 모든 사람들에게 보이신 하나님의 예증인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그의 자비하심을 당신에게 베푸시길 원하신다. 그는 준비하시고, 만드시며, 그의 사랑의 면전에서 그가 원하시는 대로 영광에 합당하게 하신다. 볼은 코트 안에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의 자비를 주시며 당신은 그것을 받아 드릴 수도 거부할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당신의 반론과 항변에 앞서 이러한 모순된이론을 극복하기 하기 위해서는 두가지 진리 곧, 하나님 주권에 대한 인간의 책임된 균형을 지킬 필요가 있다. 우리는 두번째 진리 즉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인간의 책임을 10장에서 자세히 살펴 보게 된다.

 

이제 바울은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본론을 말하여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 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24) 기록하였다. 지금까지 바울은 이방인으로 하나님의 백성된 우리에게도 동일한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가 유대인과 동등하게 주어졌음을 설명한 것이다.

 

바울은 이 진리의 근거를 설명하기 위해 호세아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저희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름을 얻으리라 함과 같으니라(25,26) 고 성경의 기록된 말씀을 증거로 제시하였다. 앞에서 거론한 바와 같이 하나님은 그가 하시고자 하는 모든 일들을 선지자들을 통해서 미리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는 계속하여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 자손이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 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27)라 하신 성경적 근거를 우리에게 제시하였다. 이것은 유대인이 구원의 보증을 갖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의 모든 자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증거한 것이다.

 

바울은 여기서 우리에게 흥미로운 내용을 전달하고 있다.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사 필하시고 끝내시리라 하셨느니라.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시지 않으셨더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리라(28,29).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사 필하시고 끝내시리라는 말씀은 이사야 10장 23절의 말씀이지만 여기서 바울의 의도는 우리로 장차 완성될 예언의 말씀을 주목하여 그 결정의 날들을 미리 바라보게 한 것이다.

 

IV. 믿음에서 난 의(30-33)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33)

 

계속하여 바울은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의의 법을 좇아 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딛혔느니라(28-32).

 

이 말씀은 당신은 무엇을 생각하게 하는가? 바울이 지금 당신에게 고작 이스라엘의 역사를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창세기로 돌아가 구원의 초심에 서서 하나님의 말씀이 과연 어느 때 어느 시를 말하고 있는 것인가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바울은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고전10:11) 경계한 것이다.

 

사실 유대인에게 있어 예수는 "거침 돌" 이었다.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따르기에는 조상대대로 지켜 온 율법의 사상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절대적 신앙이었다. 아무도 율법의 의를 완전히 이룰 수 없다는 역사적 현실 속에서도 그들은 그 굴레를 벗어날 수 없었고 오직 율법을 지킴으로서 하나님의 의를 달성할 수 있다는 신념을 버릴 수 없었다.

 

베드로가 "왜 우리 조상들도 메지 못한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행15:10)고 말한 것처럼 율법은 그들에게 있어 최고의 이상이었으며 최고의 선이었다. 그 이상의 선도 그 이상의 이념도 그 이상의 믿음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오직 믿음으로 의인이 된다는 새로운 논리는 결코 받아 드릴 수 없는 거침 돌일 수 밖에 없었다.

 

9장 마지막 부분에서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말합니다. 모세의 율법을 모르는 자라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를 발견한다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통한 의를 계속적으로 찾음으로 그것을 얻지 못하고 말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인이 의를 인정 받는다는 것은 얼마나 영광스런 일일까요?

 

바울은 자신의 유대인인 된 우월감에 대하여 "나도 육체를 신뢰할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니 내가 팔일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빌3:4-6) 증거하였다. 이것이 유대인의 자존심이 세상을 뛰어넘게 하는 힘이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는 진리는 넘지 못할 산처럼 높았던 것이다. 그 이유는 그들의 믿음이 말씀에 의존하지 않고 행위에 있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 진리를 깨달은 후에야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빌7-9) 는 고백을 하게 된다.

 

바울은 끝으로 기록된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33, 사28:16)는 말씀으로 9장을 마무리 하였다. 이것은 이사야 선지자가 주께서 오시기전 600년 전에 미리 전한 말씀이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 율법에 의존하였지만 그들은 결국 넘어지고 말았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를 깨달을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미 자신이 하실 일들을 그들의 선지자들을 통해 모두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오늘 다시 바울이 이 말씀을 우리에게 전하는 의도는 무엇일까? 오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의로운 자녀가 된 당신이 다시 유대인과 똑같은 일들을 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의 믿음이 미리 말씀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높은 건물 안에 세워진 교회를 향에 절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당신은 2000년 동안 유대인들 넘어뜨리게 거침돌이 된 주의 말씀들을 살펴 볼 차례다. 이 구원의 원리는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진리임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기록된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33, 사28:16) 하신 주의 경고를 마음 깊이 두고 깨달음을 갖게 되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