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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4:3) 믿음의 실체

이요나 2007. 6. 27. 11:38

(로마서4:3) 믿음의 실체

(롬4: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바 죄었느니라

 

오늘 우리의 로마서 여행은 1장에서 믿음을 자랑하는 교회의 모순과 복음의 진리를 벗어난 사람들의 악하고 더러운 행위에 대하여 공부하였다. 성경은 인간의 악하고 더러운 행위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욕정에 내어버려 두었기 때문이라고 증거하고 있다.

 

또한 우리는 2장에서 각 사람들의 행위를 따라 판단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에 대하여 살펴 보았다. 성경은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롬2:7),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혼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라 기록하였다. 이것은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거처야 할 그리스도의 심판대이다(계20장 참조). 

 

3장은 하나님 앞에 죄인 된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구원에 이르는 하나님의 의의 기준에 대하여 기록하였다. 하나님은 미리 주신 율법을 통하여 죄인 된 인간의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셨고, 율법 외에 하나님의 의를 세우셨는데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는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이제 우리는 4장에서 하나님의 의에 이르는 믿음의 실체에 대하여 공부하게 된다. 그를 위해 바울은 성경의 역사 속에서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를 성취한 두 증인 곧 아브라함과 다윗을 우리에게 모델로 세웠다.

 

I. 의의 모델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2)

 

A.     아브라함의 의

로마서 4장에서 바울은 하나님은 믿음을 통해서 의를 확립하셨다고 말하였다. 하나님의 의는 율법을 표면적으로 복종하는 것에 의한 것이 아닌 오직 믿음의 법에 의해 성취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에 의한 의는 사람의 유익을 위한 것처럼 어떠한 자랑도 허락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에 의한 것이다. 따라서 나의 구원은 곧 내 안에 이루어놓으신 하나님의 역사이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다. 나는 그분의 역사를 확실히 믿는다. 하나님은 마치 예수님의 의를 내 자신의 것처럼 계산하신다.

 

4장에서 또 바울이 강조하는 것은 믿음에 의한 의로움이 하나님에게는 전혀 새로운 개념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 그는 하나님께서 모세의 율법을 주시기 훨씬 이전에 유대민족의 아버지인 아브라함과 믿음의 법을 확립하셨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4:1) 당신은 유대인들의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믿음과 의로움에 관해서 무엇을 깨달았는가? 바울은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4:2-3) 증거하였다.

 

만약 아브라함이 바벨론 부근에 있었던 고향을 떠나서 스스로 약속의 땅을 찾아 나섰거나 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에 복종하였기 때문에 의롭게 되었다면 그는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여겼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나는 하나님을 따르기 위해 아비의 집을 떠나, 나의 아들까지도 바쳤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정말 의로운 사람입니다"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자신의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지 않고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았다. 이와 같이 당신의 구원에 있어서도 믿음으로 인해 의에 이루는 규칙은 똑같이 적용된다. 만약 우리의 의가 행위로써라면 우리 자신에게 영광이 돌려지기 때문에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게 되어버리는 셈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갈 6:14) 하였다. 이와 같이 우리의 자랑할 것은 오직 십자가의 구속뿐이다. 예수께서도 제자들에게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하라"(눅17:10) 말씀하셨다.

 

물론 나의 구원에 관해서는 마땅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되겠지만 사실 우리의 육신은 자신이 영광을 취하기를 좋아한다. 자신의 구원에 대한 자신의 명성을(credit) 내세우기를 좋아하며 또 계속 나타내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을 향하여 "내 안 어디엔가 분명 선한 것이 있을 것입니다" 말할 때 하나님은 내 코가 납작해지도록 하실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의 육신 속에는 자랑할 것이 결코 아무것도 없다.

 

바울은 이 사실에 대하여 7장에서도.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롬 7:18) 증거하였다. 만약 당신이 아직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셨다면 언젠가는 반드시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당신의 육신을 십자가에 못박기를 원하고 계신다. 그래야만 하나님께서 당신의 썩어 없어질 육신을 영원히 썩어지지 않을 몸으로 바꿔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게 하실 것이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고전 15:53) 기록하였다.

 

우리는 자신의 육신에 아무 선한 것이 없는 줄을 뻔히 알면서도 우리는 주님께 "주님 이번 문제는 반드시 제가 해내고 말겠습니다고 자주 큰소리를 친다. 주님 저에게 한번 기회를 주십시오. 실수하지 않고 잘 해낼 것을 약속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실수하지 않고 성실하게 잘 해내겠다는 나의 모든 약속은 번번이 거짓말이 되고 만다. 그 이유는 죄 가운데 거하는 어리석은 자신의 육신을 신뢰하였기 때문이다.

 

나의 자랑과 신뢰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며 또한 나를 위해 완성해놓으신 그분의 구속의 은혜뿐이다. 믿음에 의한 의는 우리에게 있어서 매우 새로운 개념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자주 그리스도인으로서 해야 되는 것들과 해서는 안되는 것들을 정하여 놓고 스스로자신의 의를 달성하려고 시도한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자기 스스로가 종교적 율법을 만드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자신이 만든 율법을 지킬 수 없어 계속 수정하던가 다른 율법을 다시 만들어 종국에 가서는 지켜야 할 목록이 너무 많아져서 아무것도 지킬 수 없게 되어버린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의의 법을 믿음에 두셨을까? 그 방법만이 내가 비록 실수가 많고 악한 인간일지라도 하나님께서 나와의 관계를 변함없이 계속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세의 율법은 사람의 행위의 순종이었기 때문에 의에 이르게 할 수 없었다.

 

성경은 "사람이 의를 행하면 그로 인하여 살리라"(레 18:5) 기록하였다. 율법의 완성 여부는 사람이 지킴으로 결정되는데, 인간의 육신은 연약하여 하나님께서 정하신 율법을 그 누구도 성취할 수 없다. 그러므로 사실 율법이 실패한 것이 아니고 그것을 지켜야 할 사람이 실패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의의 법의 기준을 믿음으로 정하신 것이다.

 

이 은혜의 새 언약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지키신 그의 신실하심에 기본을 두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믿음만으로 하나님의 의를 완전하게 성취할 수 있다. 내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정당화하려던 것을 포기하고 단번에 성취된 믿음의 도로 하나님이 안식하시는 곳에 들어 갈 수 있는 것이다(히브리서 4장 참조).

 

바울은 4절에서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라고 증거하였다. 만약 사람의 의가 그의 행위로 말미암은 것으로 계산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에게 구원의 상급을 빚진 셈이 된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집집마다 방문해서 증거를 하는 것으로 의로워진다고들 믿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믿음을 떠나 율법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며, 하나님으로 하여금 빚쟁이가 되게 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절대자로 누구의 도움도 필요하지 않는다.

 

우리가 일을 하면 고용주로부터 돈을 받게 된다. 우리는 그것을 은혜라 말하지 않는다. 그러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의는 선물이기 때문에 받을 만한 자격이나 어떤 대가가 요구되지 않는다. 이것을 우리는 은혜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은혜는 결코 내 힘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선물로 받는 것이다.  바울은 너희가 그 인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4:8,9) 증거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는 완전한 것이다.

 

계속하여 바울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4:5) 증거하였다. 어떻게 보면 이 말씀은 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말라는 말씀과 충돌되는 것 같지만 그런 뜻이 아니다. 우리는 주의 날이 오기까지 땀흘리며 일하여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이것은 우리가 땀을 흘려 일하는 것으로 거룩하게 될 수 없다는 뜻이다.

 

초대교회 이후 몇 세기 동안 교회를 통해 내려온 저주 중에 하나가 '너는 더욱 거룩해 지기위해 노력해야 한다 것이었다. 그들은 믿는 자들에게 다가와  "형제여, 나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의 은밀한 것들에 대해서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하고 말하며 스스로 더욱 거룩한 것처럼 우쭐거린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저주 받을 자들의 누룩이다.

 

사람의 행위는 의로움에 티끌만큼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인간에게로 돌리셔서, 인간의 어리석음을 깨우치신다. 성경은 이미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골 2:9-10)라고 증거하였다.

 

사람들은 자주, 하나님으로부터 상급을 받기 위해 섬겨야 되는 것처럼 설교자로부터 재촉을 받는다. "만약 너희가 10명의 아이들을 주일 학교에 데리고 오면 맛있는 초콜릿을 줄께"말한다. 그러나 그 모든 행함과 상급에 대한 개념은 육에 속한 것이지 영적인 것이 아니다.

 

어떤 목사들이 육적인 동기를 강조함으로써 교인들에게 경쟁의식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사람이 죽도록 전도를 했을지라도 그의 육적인 동기에 대한 보답은, 스스로 영광스럽게 생각하는 것과 사람들의 박수갈채일 뿐이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성도의 열심의 동기는 오직 하나님의 위대하신 사랑에 있어야 한다.

 

B. 다윗의 의

바울은 이제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은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그 불법을 사하심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7,8) 증거하였다.

 

흥미로운 것은 아브라함의 의를 논할 때에는 죄가 언급되지 않았었는데 믿음으로 말미암은 아브라함의 의에 속한 행복과 관련하여서는 불법의 사하심과 죄의 가리움이 언급된 것이다. 인간이 죄를 떠나서 살 수 없다 할 때 인간의 삶은 죄의 고통의 연속이다. 그러므로 어느 시인은 인생은 고해바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내가 어떤 행위로도 벗어 버릴 수 없는 불법을 용서받고 또 우리가 행한 모든 죄를 가리움 받았다면 이 얼마나 큰 행복인가? 이 복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복인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 말씀을 잘못 이해하여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함을 받았으니 설혹 삶 속에서 어떤 죄를 다시 범하였다 하드라도 두려워할 것 없다 말하여 다윗이 밧세바를 범한 죄를 인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성경이 이미 다윗의 죄를 고하였으므로 그 일이 죄인 것을 아는 우리가 같은 죄를 범하면 그것은 다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로 끌어 올리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명하는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히10:26,27) 기록하였다.

 

II. 믿음의 목적(13-16)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후사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13)

 

A.     세상의 후사(13)

그러면 아브라함과 같이 믿음을 말미암은 의의 최종 목표는 무엇인가? 믿음의 의인들이 도달할 최고의 상급은 무엇인가? 바울은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후사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4:13a)라고 말하였다. 후사란 상속자로서 이 것은 아브라함에게 너와 너희 후손에게 열방을 주리라 하신 언약이다.

 

사실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후사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다(4:13a) 아브라함은 모세의 율법이 주어지기 400년 전에 살았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율법이 존재하지도 않을 때였으므로 그의 의가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은 것은 확실하다.

 

그는 계속하여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후사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폐하여졌느니라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13b-15) 기록하였다. 사람이 존재하지도 않는 율법을 어길 수는 없다. 그래서 인간은 율법이 주어질 때까지는 존재하지 않는 율법을 범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이 언약을 받은 아브라함의 후손 곧 이스라엘은 아직 한번도 이 세상의 후사가 된 일이 없었다. 이스라엘의 영광은 다윗왕 때가 가장 떨쳤으나 고작 중동 땅이지 온 세상을 모두 지배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열방은 너와 너의 자손에게 주리라 하셨다. 물론 이 언약은 아브라함의 씨 곧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될 메시야 언약이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언약의 이중성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말씀들을 꼭 상징적으로만 풀어서는 안된다. 하나님께서 열방을 이스라엘에 주시겠다고 하셨으므로 그것은 이스라엘이 존재하는 이 땅에서나 하늘에서는 모두 성취 되어야 한다.

 

성경은 천년왕국의 때를 말하여. 저희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으니 저희가 땅에서 왕노릇하리로다(계5:10) 기록하였다. 이것은 하늘에 오른 성도들이 이 땅에서 받을 영광의 복에 관한 말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실 때 그와 함께 이 땅에 거하여 천년동안 왕노릇 하게 될 것이다.

 

또한 천사는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리라(계20:24) 증거하였다. 따라서 천년왕국은 이 땅에서 펼쳐지는 그리스도의 왕국인 것이다. 나는 이 때 내가 맡을 역할이 무엇인지 생각만 하여도 가슴이 벅차다.

 

그 다음은 어떻게 되는가? 성경은 천년왕국 이후에 처음 하늘과 땅이 없어지고 하늘에서 새 예루살렘이 내려 올 것이 기록되었다. 이때의 일을 말하여 천사는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노릇하리로다(계22:5) 증거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후사들이 받은 영광은 영원무궁한 것이다. 그러니 겨우 한 시절 잘먹고 살겠다고 하나님의 후사의 영광을 포기하겠는가? 결코 그럴 수는 없다.

 

B.     은혜에 속한 후사(16)

계속하여 바울은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4:16a) 증거하였다. 흥미롭게도 이스라엘만큼 고난을 받은 민족도 없다. 하나님의 택하심의 은혜를 받은 민족이라 보기에는 너무 많은 고난과 희생을 치루었다.

 

그러나 그들은 세상의 후사가 되리라는 언약을 바라보고 살고 있다. 과연 이 언약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성경은 언약을 바라보는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의 믿음에 대하여 아브라함이 부르심을 받았을 때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히11:8),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 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히11:9),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히11:10) 기록하였다.

 

여기서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이 바라본 장막은 사실 이 땅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믿음은 땅에 속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 가운데 거하신 하늘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는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을 받으심을 부끄러워 하지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11:16) 기록하였다.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에게 속한 것이다. 그러면 아브라함의 믿음을 따라 하나님의 의를 받은 우리들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바울은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 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16) 증거하였다.

 

아브라함은 그 조상의 아버지가 아닌 영적 아버지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는 하나님을 믿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인이라 칭함을 받는 모든 사람들의 아버지이다. 그러므로 주께서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17) 하신 것이다.

 

바울은 장차 우리가 받을 그리스도의 유업을 말하여 자녀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롬8:17) 하였고 다시 참으면 함께 왕노릇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딤후2:12) 하였다. 이와 같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아브라함과 같은 하나님의 은혜의 후사인 것이다.

 

III. 믿음의 주체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 바 하나님이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17)

 

A.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18-21)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의를 입어 하나님의 복을 받은 후사들이 되기 위해 우리는 어떠한 믿음을 가져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공부할 차례다. 어떤 사람들은 로마서 1장의 의인을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을 오해하여 내가 주를 믿었으니 어떻게 살던지 의인이다 라고 생각한다. 그런 사람은 아직 믿음으로 믿음에 이른다는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다.

 

성경이 말하는 의인이란 죄의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의를 성취한 사람으로서 거룩한 하나님의 품성의 사람을 말한다. 그의 삶은 누룩이 없는 하얀 가루와 같고 빛과 같아야 하며 육신의 소욕을 떠나 오직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의인된 우리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의를 성취하는 믿음을 공부할 필요가 있다.

 

바울은 17절에서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 바 하나님이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17) 기록하였다. 여기서 우리가 발견해야 할 것은 하나님에 대한 아브라함의 바른 견해다.

오늘날 성도들의 문제는 성경에 대한 바른 지식을 터득하지 못하여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이로서 이단에 빠지기도 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하여 바른 견해를 갖는다는 것은 그가 성경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느냐에 있다. 이것은 우리가 차를 몰고 어디를 갈 때에 가장 빠른 길을 찾아 주는 지도와도 같아서 만약 우리가 하나님에 대하여 바른 지식을 갖지 못하면 그만큼 천국행은 고달퍼 지게 된다. 이것이 믿음의 경륜이라 하겠다.

 

바울은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이심을 알고 있었다고 증거하였다. 이것은 생명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고 천지만물의 모든 존재와 상황과 시간과 공간의 운행에 관한 주권을 하나님께서 주관하고 계심을 알고 있는 것이다.

 

성경의 시작은 창조로부터 시작된다. 창조란 무에서 유를 이루는 것으로 어떤 존재나 물체를 그의 뜻과 계획 안에서 만드시고 지으신 것을 말한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생명과 물체는 그분으로 말미암고 그의 뜻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오늘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운행하심을 깨닫지 못하여 자기 의식과 생활 존재 속에서 그 삶의 지혜를 찾고자 한다. 우리는 가끔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을 스스로 제한 할 때가 있다. 우리가 병에 걸리면 이 병은 하나님이 고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이 고칠 수 있는 것이다 생각하여 암에 걸리면 먼저 하나님 앞에 고하기보다는 의사에게 맡기는 실수를 한다.

 

또한 사업 중에 돈이 필요할 때 우리는 그 액수에 따라 어느 정도 되는 것은 하나님께 기도하고 수십억에 달하는 것 같으면 애당초 포기하고 기도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다.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을 낳고서야 이 진리를 깨닫게 된다.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낳은 것은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손이 되리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아브라함의 믿음의 구심점은 하나님의 말씀에 있었다. 바울은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 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18) 기록하였다. 그는 결코 예언자나 목사의 말에 두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그가 부르신 영광의 땅으로 들어 왔고 그의 말씀을 따라 후사를 약속 받았다.

 

오늘날 우리 성도들의 문제는 성경 말씀에 귀를 기울이기 보다 목사에 말에 귀를 기울인다. 눈에 보이는 것만 보는 것이다. 그들의 영이 하나님의 존재를 감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성경은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기록되었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의 실체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예수께서도 내 교훈은 아버지 하나님께 보고 들은 것이라 하셨다.  그러면 아브라함의 믿음의 열쇠는 무엇인가? 이제 우리는 지금부터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한 4가지의 해답을 보기로 하자. 곧 니5) . ) sness)

 

B. 믿음의 네 가지 열쇠

바울은 먼저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4:19) 기록하였다. 육신의 한계와 상황을 무시한 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의 첫번째 해답이다. 사람들은 문제에 당면할 때 자신의 힘으로 해결하려 한다.

 

그러면서도 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전혀 보이지 않는 듯하면 우리는 "내가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데 하나님인들 무슨 방법이 있을라구"하며 포기해 버린다. 그리고 종종 자신의 생각을 따라 그럴 듯한 해결책을 생각해놓고 내 계획의 해결 방법대로 하나님이 따라주십사 하고 간구한다.

 

이러한 우리의 기도는 간구하는 기도라기 보다는 지휘하는 기도라고 할 수 있다. 물론 하나님은 때로 이러한 기도에도 응답을 해주기도 하지만 때론 나의 지휘를 거부하기도 하신다. 사람들이 스스로 지휘자가 되려고 하는 것은 인간의 평가나 실험실의 분석을 신뢰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백세에 아들을 주시리라 하신 약속은 인간으로서는 결코 불가능한 일이다. 이미 사래의 태가 닫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자신의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믿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때, 그분에게는 어렵다거나 한계라는 말이 있을 수 없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열왕기하 7장에는 흥미로운 내용이 나온다. 앗시리아인 군대가 사마리아 왕을 포위했을 때, 그들은 양식의 공급이 모두 끊어지고 소망을 잃어버린 상태가 되었다. 사람들은 굶주림에 지쳐 죽어갔고, 자식들을 삶아 먹을 정도로 최악의 상태에까지 이르렀다. 당나귀 머리 하나가 80세겔(은 2파운드)에 팔렸다.

 

그런데 왕과 그의 장관들이 선지자 엘리사의 집을 방문했을 때, 엘리사는 상황이 완전히 뒤바꿔질 것을 약속했다. "내일 이맘때에는 사마리아 성문에서 고운 가루 한 스아에 한 세겔을 하고 보리 두 스아에 한 세겔을 하리라" 하였다. 요새말로 고운가루 한 부대에 1000원이란 말과 같다.

 

그때 왕의 한 장관이 "엘리사, 여호와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런 일이 있겠는가?" 했다. 이에 선지자 엘리사는 "네가 내가 말한 것을 네 눈으로 보리라. 그러나 너는 그것을 먹지는 못하리라"고 하였다. 결국 그는 그 기적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

 

이와 같이 사람들은 자신이 처한 당시의 환경과 상황을 중시하기 때문에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리게 된다. 이것은 하나님을 인간의 수준으로 끌어 내리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하여 바른 지식을 갖고 있지 못한 사람이며 결국 이 사람은 성경공부 결핍증 환자에 해당한다. 다시 말하여 날날이 신자인 것이다. 또한 이것은 불신에서 오는 자만이다. 이러한 자만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축복을 당신에게서 빼앗아가 버릴 뿐이다.

 

자주 우리는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만한 가능성을 찾는다. "만약 하나님께서 하늘의 창고의 문을 여신다면..." 그러나 하나님의 가능성을 꼭 알아야 될 필요는 없다. 우리에게 오직 필요한 것은 주님을 믿고 신뢰하는 것뿐이며 그 분은 자기를 찾는 사람에게 상주시기를 원하신다.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한 두 번째 열쇠는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의심에 동요되지 않은 것이다. 바울은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4:20a)라고 증거하였다. 우리는 우리의 불신앙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얼마나 자주 의심하는가? 때때로 하나님의 약속은 현실로 이루어지기에 너무 과분한 것일 때가 있다. 우리는 성경에서 아브라함이나 엘리야나 바울에게 베풀어주신 그 은혜들은 믿어지지만, 나에게는 그러한 은혜를 베풀어주실 것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때가 있다.

 

성경은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벧후 1:4a)라고 기록했다. 또한 바울은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 4:19)선언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이 너무 광대해서 내게는 그 약속이 성취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은 가질 필요가 없다. 그 약속은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고 그 약속을 성취하실 분도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의 세번째 믿음의 열쇠는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4:20b)라고 증거하였다.  아브라함의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그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고 그는 하나님 께 세세무궁토록 영광을 돌렸다(4:20). 그는 사라가 임신을 하기 전부터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아들에 대해 감사하며 찬양을 드렸다. 여러분은 어느 것이 나은가? 과연 하나님께서 약속을 이행하실 수 있는가 의심하는 것과 하나님께서는 능히 이루실꺼야 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 나는 계속 주를 찬양할 것이다.

 

우리는 하박국에서 흥미로운 말씀을 발견하게 된다. 그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패역함을 목도한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께 더 이상 내게 아무 것도 보여 주지 마십시요. 사람들이 이처럼 패역한 일을 하고 있는데도 하나님께서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계시지 않습니까? 하였다. 이때 하나님께서 내가 한 일을 행할 것이나 네가 믿지 못할 것이다 하셨다. 이에 하박국은 내가 노력해 보겠습니다 대답하자 하나님은 내가 바벨론 사람들을 불러서 이스라엘의 버르장머리를 고쳐 주겠다 하셨다.

 

이 말을 들은 하박국은 기가 막혀서 하나님 도대체 지금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까? 그 놈들은 우리보다 더 악한 놈들 아닙니까?하고 항변하였다. 이때 하나님은 거 봐라 이놈아! 네가 믿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느냐? 하셨다. 이에 하박국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는지 보기로 작정하고 높은 망대에 올라가 팔짱을 끼고 앉았다. 그때 하나님께서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말씀하셨다.

 

이 말씀을 들은 하박국은 하나님께 내가 환난 가운데서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계속하여 주십시요. 그러나 주의 자비를 잊지 마십시요 하고 기도하였다.

 

우리는 하박국 마지막 장에서 흥미로운 말을 보게 된다. 하박국은 비록 무화과 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기뻐하리라 노래하였다. 참으로 하박국 선지자는 어리아이처럼 천진난만한 사람이었다.

 

여기서 즐거워한다라는 말은 히브리인에게 큰 의미가 있다. 이 말은 내가 계속해서 즐거움을 유지하겠다라는 뜻이다. 또한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기뻐하리라에서 히브라말 기쁨(joy)라는 말은 계속해서 뛰고 일어서고 앉으며 기쁨을 유지한다 뜻이다. 어떻게 보면 하박국은 미친 사람처럼 느껴진다. 농사가 실패하고 가축들도 다 죽어 먹을 식량이 없는데도 그 상황에서 이리저리 뛰어 다니며 기뻐서 날뛸 수 있으니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을 배울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바로 내가 알지 못하는 데서 모든 것을 창출해 내시는 생명의 근원을 갖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을 믿는데 그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하박국처럼 기뻐해야 할 것이다.

 

믿음이 견고해진다는 것은 어떤 일이 있어도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이 말씀을 볼 때마다 감격하게 된다. 내가 하나님에 대하여 강한 믿음을 갖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나는 일본에서 돌아와 12년동안 갈보리채플 개척사역을 하였지만 정말 부끄럽기 짝이 없다. 물론 나는 갈보리채플의 부흥의 책임이 하나님께 있다고 생각지 않는다. 내가 능력이 없고 또한 믿음이 부족하였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실패자라고 생각했고 한국을 떠나는 것이 갈보리채플 사역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 생각했다.

 

사실 내가 그 당시 서울을 떠나려고 했던 것은 경제적인 문제도 있었다. 교회의 재정을 더 이상 내가 감당할 수 없었고 교회와 관련된 은행채무를 더 이상 감당할 수도 또 연장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구든 은행 채무를 감당할 사람이면 모든 것을 일임하고 나는 삼십육계 줄행당을 칠 각오였다. 그래서 일본이든 미국이든 중국이던 밥을 먹여 줄 곳을 찾아 나섰고 그러는 동안 후임자가 나타나기도 했다.

 

그러나 막상 후임자에게 일임하고 일본으로 중국으로 그리고 미국으로 달려 갔으나 나는 가는 곳마다 고라의 지진을 만나고 요나의 태풍을 만나 결국 되돌아 오고 말았다. 나는 가는 곳마다 참으로 기이한 일들을 만났다. 사람들은 나를 따르고 내가 그곳에서 교회를 개척하기를 원하는데 하나님이 못하게 하시는 것이 눈에 보였다. 다 된밥에 코를 빠트리기도 하고 멍석을 깔면 재를 뿌리셨다.

 

할 수 없이 보따리를 챙겨 서울로 돌아 올 수 밖에 없었고 마지막 길로 택한 중국으로 무작정 들어가기로 작정했다. 그런데 후임자와의 생각지 않은 충돌로 후임자는 떠나고 나는 원위치로 돌아 와 내 스스로 은행채무를 감당해야만 했다. 사람들 앞에 내 꼴만 우습게 되고 만 것이다.

 

그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한 나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산지사방으로 후임자를 찾으려 발벗고 나섰다. 내 기도는 주님 내가 먹고 살자고 하는 것도 아니고 이를 남기려고 하는 것도 아니니 제발 은행 기일 안에 이것을 맡을 사람을 보매 주세요 하고 울부짖었다. 그러던 중 인수할 마음이 있는 사람이 찾아 오면 어린 아이처럼 좋아하며 날뛰다가 또 무산 되면 하나님께 매달렸다.

 

어느날 상당히 저명한 목사를 만났다. 그는 유명 법무 법인을 운영하는 변호사로서 나름대로 명성을 갖고 있는 목사였다. 그 목사는 나를 만나자 마자 한남동 채플을 문화교육관으로 인수하겠다 말하며 은행 채무를 변제하겠다고 호언장담했다. 나는 기뻐서 어쩔줄 몰랐다. 이제는 외국으로 갈 필요도 없이 준비된 교회에 들어가 그 교회의 교육목사가 되면 내 생활까지 모두 해결되니 정말 하나님의 일하심이 그림 같이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은 내 뒤에서 내 꼴을 지켜 보시며 웃고 계셨다.

 

그런데 은행 마감기일에 되자 그 교회 부목사가 와서 교회 운영위원회의 반대로 인수할 수 없다는 통보를 해 왔다. 참으로 기절할 일이었다. 더 이상 피할 곳도 없고 도망할 구석조차 없어졌다. 그 변호사 목사가 괘씸하기도 하고 기만을 당한 것 같아 도저히 참을 수 없었지만 고명하신 변호사를 내가 감히 어쩌랴! 내겐 항변할만한 입도 없었다. 패장은 말이 없다는 말이 실감났다.

 

그때서야 나는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주님 좋습니다. 여기 임대 보증금 1천만원이 있고 내 통장에 3백만원이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돈이 되는 것은 무엇이고 다 팔아 은행 빛을 갚겠습니다. 그 후에 일은 나도 모르겠습니다. 주님 뜻대로 하여 주십시요 울부짖었다. 주님은 그때서야 너는 나의 약속을 벌써 잊었느냐. 내가 일본에서 너의 기도를 듣고 너를 악에서 구원하여 내 종으로 삼아 한국에 보내면서 네가 내 일을 하리라 하였고 그러나 먼저 네가 내 뜻을 깨우쳐야 할 것이다 말하지 않았더냐? 그런데 네가 네 마음대로 때려치고 도망을 하려 하느냐? 네가 노점상을 차려 놓았던 것이냐? 책망하셨다.

 

정말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어디 쥐구멍이라도 들어 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지구가 멎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주님이 빨리 오셨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는 하루가 정말 천년과도 같이 길게 느껴졌다. 그러나 더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그런데 주님은 내가 생각할 수도 없는 방법으로 은행 채무를 정리 하셨다. 나는 아직 주께서 보내신 천사의 얼굴을 알지 못한다. 그리고 지금까지 하나님은 한번도 임대료를 밀리지 않으셨다. 정말 이것은 우리 교회의 기적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나는 내가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인가 만을 생각하기로 했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네번째 열쇠는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4:21) 이다. 당신이 믿고 있는 하나님은 과연 위대하신 분인가? 당신은 얼마나 그분의 전능하심을 믿는가? 때로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은 우리의 상상력에 의한 산출물에 불과하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주시기엔 하나님이 너무 무력하다고 믿어버릴 때가 많다.

 

그러나 성경에는 우주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손길에 대한 묘사가 많이 기록되었다. 그 속에 나타나신 하나님은 영원하시며 전능하시다. 온 우주를 그의 손의 뼘으로 재시는 분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능력을 말하여 '열방은 통의 한 방울 물 같고 저울의 적은 티끌 같으며 섬들은 떠오르는 먼지 같습니다'(사 40:12, 15) 하였다. 바울은 우리에게 주 하나님을 가리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엡3:20)라고 소개하였다.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가 지키는 것이 아니다. 그 약속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며 또 그 어떤 상황이 되던지 그 약속을 실행하실 분은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어떤 약속이라도 그가 능히 이루실 것이라는 확신을 갖어야 한다.

 

어떤 교회들은 이제 곧 일어날 7년 대환난에 앞서 그의 교회를 들어 올리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하여 의심한다. 나는 그들은 결코 들림을 받지 못할 것이라 생각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예수께서 재림하여 이 땅에 천년왕국을 세우시고 우리와 함께 왕노릇하실 것이라는 것에 의심을 갖는다. 그래서 그들은 무천년주의라는 교리를 만들어 천년왕국은 상징적이라 말한다. 참으로 한심한 사람들이다.

 

이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그것은 바로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듣지도 깨닫지도 못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갖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 그리고 우리에게 향하신 약속들의 실체를 발견할 수 있다면 당신은 하박국처럼 춤을 추게 될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언제까지도 변함없이 자신의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의롭다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성경에 기록한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거룩한 성도로서 하나님의 의를 성취해 가야 할 것이다.

 

사랑하는 주님 당신의 이름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당신의 뜻은 너무 깊고 광대하여 우리가 감히 알 수 없으며 깨닫지 못하나이다. 그러나 주님 우리의 범죄함으로 내어주심이 되셨고 우리의 의로움을 위하여 다시 살아 나셨으니 세세토록 우리와 함께 사셔서 하나님의 복을 이루소서. 내가 주의 부름을 받겠나이다. 아멘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