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강해/잠언서 강해

(잠언22:20) 선택의 지혜

이요나 2007. 6. 1. 17:10

(잠언22:20) 선택의 지혜

 

(잠22:20) 너로 진리의 확실한 말씀을 깨닫게 하며 또 너를 보내는 자에게 진리의 말씀으로 화답하게 하려 함이 아니냐

 

인간은 한 세상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눈만 뜨면 어떤 것을 해야 옳은 것일까? 하는 고민에 빠진다. 이 모든 것이 인간의 조상 아담이 선과 악을 선택한 때문일 것이다. 차라리 그가 지식을 주는 나무의 열매를 선택하였다면 우리는 종일 영혼과 마음에 지식을 쌓을 것들을 향해 분주했을 것이다.

 

오늘 잠언기자는 우리에게 선택의 중요성을 언급하고 있다. 그는 서두에서 많은 재물보다 명예를 택하라(1) 말하고 뒤에서 네 귀를 기울여 지혜있는 말씀을 들으며 내 지식에 마음을 둘지어다(17) 이로 보건데 인생은 결국 돈을 택할 것인가? 명예를 택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지식을 택할 것인가? 하는 고민에 봉착해 있는 것이 틀림없다.

 

I. 슬기로운 선택(1-16)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응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4)

 

A.     여호와의 은총(1-4) 

잠언 기자는 1절에서 많은 재물보다 명예를 택할 것이요 은이나 금보다 은총을 더욱 택할지어다 기록하였다. 솔로몬이야 부귀와 영화를 다 걸머지고 그 위에 하나님의 지혜까지 다 받았으니 속절없는 인간의 속내를 이해하지 못한 것 같다. 어찌 배부른 자가 배고픈 자의 마음을 알겠으며 등따슨 자가 언발의 동동거림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내 어제 한 것 배 고픔에 시달려 깊숙히 패인 눈망울로 한술 밥을 동냥하였다 해도 이제 등따슨 아랫묵에 누어 베토벤의 음향에 취해 있거늘 지난 일들이 오늘의 나를 어찌 깨우치랴! 아서라 인생의 길면 구십이라도 등따슨 날이 몇날이겠는냐? 고통없는 잠이 몇날이겠느냐? 네 호흡이 창자에서 만족할 때 너는 길게 누어 일장춘몽을 그리거라.

 

경이 말하되 많은 재물보다 라 하였은즉 적은 재물은 가능한 것일까? 그러나 적은 재물마저 없는 신세들은 재물이란 말조차 호강에 겹다. 그러나 경이 말하여 명예를 택하라 하였으니 불초한 자에게도 명예를 취할 기회가 있는 것인지 살펴 보아야겠다. 돈도 없으니 명예라도 얻으라는 말같기도 하여 언감생시 불초한 민생이 엄두도 내지 못할 두 가지 선택이지만 어차피 두 가지 몫에서 하나를 택하되 명예를 택하랍시니 그의 말씀을 은총으로 깨달아야 할 밖에 없지 않는가? 그러나 내가 어디서 명예를 만날 수 있을지 새벽 길 눈이 어둡기만 하다.

 

그는 계속하여 빈부가 섞여 살거니와 무릇 그들을 지으신 이는 여호와시니라 기록하였다. 이 말씀은 빈부가 모두 팔자소관이란 것인지 빈부가 선택의 홍복이라는 것인지 말에 부자는 하늘이 내고 뒤가 째지게 가난한 자는 팔자라면 하늘이 평평한 것이 아니라 높은 자에게는 낮고 낮은 자에게는 높고 깊은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주께서 다 지으신 것이라 했으니 누가 감히 항명하겠는가? 그의 처분만 바랄 밖에

 

3절에 슬기로운 자는 재앙을 보면 숨어 피하여도 어리석은 자들은 나아가다가 해를 받느니라 기록되었다. 오호라 여기에 비결이 있는 것 같다. 인생의 홍복이 재앙을 만나느냐 숨어 피하느냐에 있단 말이 아닌가? 우리말에 재수없는 놈은 앞으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는 말이 있다. 오늘날 돈 많은 교회는 하는 일마다 복이 되어 들어 오고 반 홉도 못되는 교회는 하는 일마다 코피가 깨진다. 그래도 주께서 해와 재앙을 피하는 것이 슬기로움에 있다 하셨으니 결국 재앙을 만난 놈이 미련한 놈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누릴 홍복의 말씀이 있다.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응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4). 다른 것이야 삶의 조건과 상황에 의해 임의로 택하기 쉽지 않은 것이라 해도 이 말씀이야 말로 꿩도 잡고 매도 잡는 방법이 아닌가 싶다. 겸손이야 절제로서 자신을 억제하고 온유한 심령이 나타나도록 하면 될 것이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그의 말씀에 순종하여 삶 속에서 그와 동행하며 모든 일에서 그의 존재를 인정하면 되는 것이 아닌가? 이로서 재물과 영광과 생명을 모두 잡을 수 있다니 부귀영화를 위한 인간의 번민이 더 이상 무용하다.

 

B.     질서의 토대5-8)

그러나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이것은 이론이 아니고 생활이기 때문이다. 이론만으로 완전해 질 수 있다면 율법으로 모든 것을 완성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롬113) 하였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는 이론을 현실로 이끌어 낼 수 있는 것일까? 잠언 기자는 먼저 마땅히 행할 길을 어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서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6) 하였다. 우리 말에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라는 말이 있으며 또한 잘 될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말이 있다. 이 모두가 장래의 사람됨됨이는 어려서부터 결정된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이미 자기 형상과 모양대로 지으셨다. 그러나 인간을 창조하시며 생육하고 번성하라, 땅에 충만하라 하셨다. 여기서 생육이란 낳고 가르침을 말한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을 받았으나 인간은 육체의 한계를 갖고 시간과 공간 속을 지나가게 된 생령인지라 그 삶의 과정마다 스스로 통과할 지혜가 필요했던 것이다. 더욱이 빈부가 더불어 섞여 살아야 하며 선과 악이 공존하는 속에 살아야 하므로 어차피 선과 악을 선택한 인간은 그 좋은 것을 선택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가르침 속에서 성장되어야 한다.

 

잠언기자는 두번째로 부자는 가난한 자를 주관하고 빚진 자는 채주의 종이 되느니라(7) 하였다. 이것은 경제학적 지배의 질서를 말한 것이다. 다시 말하여 인간이 살아가야 할 세상의 토대가 물질 주도의 세상임을 언급한 것이다. 그러므로 삶의 경쟁은 치열할 수 밖에 없고 인간은 그 어려서부터 삶의 경계와 지혜를 얻어야 승리자가 될 수 있다.

 

하나님이 세우신 또 다른 질서는 심은 대로 거두는 법칙이다. 악을 뿌리는 자는 재앙을 거두리니 그 분노의 기세가 쇠하리라(8) 하였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말이다. 오늘날 사람들이 악에 빠지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욕정이고 두번째는 재물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도 음란한 세대와 물질에 빠진 세대를 책망하셨다.

 

 

C.     인간의 책임(9-16)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법칙 안에서 하나님의 은총을 받기 위해서는 인간이 필히 행하여야 할 책임이 있다. 잠언기자는 먼저 선한 눈을 가진 자는 복을 받으리니 이는 양식을 가난한 자에게 줌이니라(9) 하였다. 우리는 선한 것에 대한 기준을 정립할 필요가 있다. 원래 선이란 하나님의 공의에 속한 것이다. 이 선한 하나님의 성품이 죄에 빠진 인간에게 나타나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너희도 거저 주어라 하셨다.

 

최근 재벌들이 수천억을 사회에 내어 놓겠다고 공헌을 하였다. 그런데 이들의 사회 공헌은 이유가 있다. 자신들의 부정 축재가 들어나 법으로 제재를 받게 되니 돈을 내어 놓아 민심을 잠재우고 형무소행을 면하려 하는 것이다. 그러나 평생 노점으로 모든 쌈짓돈을 털어 대학교 장학금으로 내어 놓은 어느 할머니의 손길은 참으로 아름답다. 이런 아름다운 마음들이 있어 아직 세상은 넉넉해진다.

 

두번째 요구되는 것은 역시 겸손이다. 그는 거만한 자를 쫓아내면 다툼이 쉬고 싸움과 수욕이 그치느니라(10) 기록하였다. 세상에서 다툼이 일어나는 것은 거만한 자가 일어서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여 자신의 의를 드러내려 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최근 노무현 대통령이 다시 기자실 통폐합이란 특단의 조치를 들고 일어나 세상이 발칵 뒤집혀졌다. 물론 지나친 언론의 관행도 있겠지만 빈대 잡으려고 초가삼간을 다 태울 수는 없는 것이다. 여기서 수욕은 불명예를 말한다.

 

계속하여 잠언기자는 마음의 정결을 사모하는 자의 입술에는 덕이 있음으로 임금이 그의 친구가 되느니라 기록하였다. 덕이란 세상에 미치는 넉넉함을 말한다. 그러므로 덕은 욕심을 끊어낸 정결한 마음 속에서 창출된다. 우리가 마음의 욕심과 욕정을 끊어내면 마음이 정결해져 온유한 심령과 선한 마음이 살아나는 것이다. 그러니 덕에는 지식이 필요하다. 지식이 없는 덕은 은혜를 베풀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지식 있는 자를 그 눈으로 지키시나 궤사한 자의 말은 폐하게 하느니라(12) 하셨다.

 

우리가 여호와의 지식을 얻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부지런해야 한다. 여기서 부지런 함이란 진리에 이르는 지식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게으른 자들은 사자가 밖에 있은즉 내가 나가면 거리에서 찢기겠다 한다 오늘날 많은 교회가 이단을 두려워하며 하나님의 지식을 얻으려 믿음의 모험을 하지 않는다. 주어진 테두리에 쭈그리고 앉아서 도토리 키재기를 하고 있다. 계시록은 떠들쳐 보지도 못하고 울타리 안에서 다람쥐 채 바퀴 돌 듯 전전긍긍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 음녀의 입 깊은 함정에 빠져 있는 것이다. 잘못된 교리 곧 미처 깨닫지 못한 지식들을 최고의 지식이라 하며 그 지식을 세운 자들을 우상으로 섬기며 그들의 교리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어린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 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쫓아내리라(15) 기록하였다. 바울은 히브리 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히5:13,14) 하였다.   

 

II. 지혜자의 말씀(17-29)

너는 귀를 기울여 지혜 있는 자의 말씀을 들으며 내 지식에 마음을 둘지어다(17)

 

A.     여호와의 지식의 목적

이제 우리는 온전한 삶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살펴 보자. 잠언기자는 먼저 너는 귀를 기울여 지혜 있는 자의 말씀을 들으며 내 지식에 마음을 둘지어다 이것을 네게 보전하며 네 입술에 있게 함이 아름다우니라(17,18) 기록하였다. 우리가 하나님의 지식의 말씀을 듣고 마음에 두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악한 세상에서 지혜로운 삶을 살기 위함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라 말하면서 과연 하나님의 말씀에 얼마나 귀를 기울이고 있는가? 혹시 귀가 가려워 나를 기쁘게 하는 말을 듣고 있는 것이 아닌가 모르겠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무엇을 들을 것인가 스스로 삼가하라(막4:23) 하셨고 다시 하나님의 아들이심에도 나의 교훈은 내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것이라 하시며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요7:17) 하셨다. 그러므로 믿는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되 그의 지식을 마음에 담아야 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주를 믿으며 오직 주의 뜻을 행하기 위해 산다고 한다. 그런데 그들의 삶을 보면 그들의 믿음의 삶은 아직 초보여서 다른 이로부터 무엇을 다시 배워야 할 것 같다. 그러므로 바울은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히5:12) 하였다.

 

그는 하나님을 뜻을 전하여 내가 너로 여호와를 의뢰케하게 하려 하여 이것을 노늘 특별히 알게 하였노니(19) 하였다. 우리가 누구를 의뢰한다는 것은 그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요구한다. 다시 말하여 여호와를 의뢰한다는 것은 여호와께서 어떤 분이시며 앞으로의 계획이 무엇이며 또 나와의 관계와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 때에 우리는 그에게 내 인생 모든 것을 의뢰하고 생명 또한 맡길 수 있다.

 

B.     말씀의 교제

그는 계속하여 내가 모략과 지식의 아름다운 것을 기록하여 너로 진리의 확실한 말씀을 깨닫게 하며 또 너를 보내는 자에게 진리의 말씀으로 화답게 하려 함이 아니냐(20-11) 기록하였다. 성경의 구조는 참으로 흥미롭다.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는 글임에도 꼭 가르치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주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의 주인과 스승이다 하셨다.

 

또 주님은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말하여 제자가 스승보다 클 수는 없으나 노력하면 스승만큼 될 수 있다하셨다. 참으로 큰 은혜가 아닐 수 없다. 여기서 스승만큼 된다는 것은 지위가 아니라 지식의 수준을 언급한 것이다. 그러므로 주께 말씀을 받은 제자들은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아 그 지식의 말씀을 깨달아 교회에 전한 것이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하셨다.

 

또한 사도요한은 그의 서신에서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와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자니라(요한1서 1:1-2) 하였고 다시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요일1:3) 하였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모두가 하나의 지식으로 이루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도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14:20) 하신 것이다.

 

끝으로 그는 약한 자를 약하다고 탈취하지 말며 곤고한 자를 성문에서 압제하지 말라 하였고 다시 너는 사람으로 더불어 손을 잡지 말며 남의 빚에 보증이 되지 말라 하였다. 제자 된 우리가 가장 고통스런 것은 먹고 살아가는 문제다. 그런고로 교회는 과부의 재산을 삼키며 성도들을 율법으로 굴복 시키려 한다. 또한 가난을 넘어서려고 잘못된 이웃과 손을 잡는다.

오늘날 우리나라 교회는 예배가 모두 동일하게 되고 말았다. 새벽예배, 철야예배, 헌신예배, 찬양예배, 모두가 남들이 하면 따라한다. 갑자기 누가 성령운동이라 말하며 바람을 일으키면 나도 질세라 성령바람을 일으키고 누가 코메디로 히트를치랴하면 앞을 다투어 코메디안이 되려 한다. 그러나 성경은  네 선조의 세운 옛 지계석을 옮기지 말라 옛지계석이란 소유의 경계선을 의미한다.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말씀의 선을 넘어서는 않된다. 근실히 주의 말씀을 따라 주의 성도를 섬기면 합의하신 날에 우리는 왕 앞에 서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