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언24:12) 하나님의 판단 기준
(잠24:12) “네가 말하기를 나는 그것을 알지 못하노라 할지라도 마음을 저울질 하시는 이가 어찌 통찰하지 못하시겠으며 네 영혼을 지키시는 이가 어찌 알지 못하시겠느냐 그가 각 사람의 행위대로 보응하시리라”
“지혜 있는 자는 강하고 지식 있는 자는 힘을 더하나니”(5)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그 심판이 자신의 삶의 방법과 직결되어 있다고 생각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교를 만들고 종교의 힘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려 한다. 그러나 종교의 힘으로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영혼을 지키지 못한다.
하나님은 사람들 앞에 두 가지 심판대를 준비해 두셨는데 먼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행함에 따란 상급을 주기 위한 심판대다. 성경은 “우리가 더 반듯이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5:10) 기록하였다. 또 다른 심판대는 백보좌 심판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모든 죽음으로부터 풀려 나온 영혼들이 심판을 받게 되는데 이 때에도 자기의 행위에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는다(계20:12).
이것은 7년 대환난 후 그리스도의 성도들이 천년왕국에 들어가기 위해 첫째부활을 한 이후에 펼쳐질 영혼의 마지막 심판이다. 우리는 모두 첫째부활에 참여하여 이 땅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천년동안 왕노릇하기를 원하지만 만약 당신이 불순종의 죄로 사망을 하였다면 불행히도 당신의 영혼은 이곳에 도달하여야 사망에서 풀려 날 수 있다. 그러나 만약 당신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았다면 당신은 영혼은 게헨나 지옥 불못으로 떨어지게 된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판단의 기준에 대하여 살펴 보기로 하자.
A. 악인의 형통(1-2)
솔로몬은 서두에서 “너는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며 그와 함께 있기도 원하지 말지어다”(1) 기록하였다. 우리는 각양각색의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우리 주변에는 선한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악한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세상에는 악한 사람들이 보란듯이 잘 살고 있다. 그런 것을 볼 때 나름대로 의로운 삶을 살고자 하는 우리는 속이 뒤틀린다.
우리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우리의 인생 자체를 현실세계로만 놓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믿지 않는 사람들은 죽어서 천당엘 가는 것을 믿느니 짧고 굴게 살기를 원한다. 그러나 만약 그가 성경 전체에 기록된 영혼의 도표를 볼 수 있다면 그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크게 후회할 것이다.
우리가 악한 사람들의 형통함을 보고 부러워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들의 마음이 강포하여 남을 해칠 말을 일삼기 때문이다. 오늘날 악한 일을 행하는 사람들을 보라. 그들은 자신의 부귀영화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결국 남을 모함하고 저주하기를 주저않는다(2).
또 이들은 사특하고 악을 행하기를 힘쓰며 미련하여 그 생각하는 것이 죄다. 만약 당신 주변에 이런 사람들을 보지 않는다면 당신은 복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혹시라도 그들과 어울릴 때에 그들의 악행을 모른척하고 그들의 형통함을 부러워한다면 이미 당신은 그 사람에게 동조되어 마음이 거만해 진 것이다. 성경은 “네가 만일 환난날에 낙담하면 네 힘이 미약함을 보임이니라”(10) 기록하였다.
우리가 한 세상 살면서 가장 위험한 때는 시험을 당할 때 믿음이 연약하여 그 마음이 죄인의 편으로 서게 되는 것이다. 성경은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히10:38) 하였고 다시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히10:39) 기록하였다.
B. 하나님의 집(3-5)
솔로몬은 말의 방향을 바꾸어 “집은 지혜로 말미암아 건축되고 명철로 말미암아 견고히 되며 또 방들은 지식으로 말미암아 각종 귀하고 아름다운 보배로 채우게 되느니라”(3,4) 하였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집이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집이지만 사실은 우리의 믿음의 집이라 하겠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집에는 거할 것이 많다 하시며 내가 너희를 위해 처소를 예비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14:2,3)하시며 보혜사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실 것을 약속하셨다(요14:16). 이 때 주님은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요14:6) 하셨고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라”(요14:16) 명하셨다. 이 말씀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많은 지혜가 필요한 부분이다.
우리의 믿음이 지혜로 건축되어야 할 것은 우리의 믿음은 세상 가운데서 많은 훼방을 받기 때문이다. 지혜로 믿음의 시험을 이길 수 있고 또 분별력으로 믿음의 시련을 이기고 견고한 집을 지을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믿음의 모양은 있는데 경건한 생활을 하지 못한다. 이것은 그들이 믿음의 형식에 치우쳐 그들의 믿음은 종교행위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또 방들은 지식으로 말미암아 각종 귀하고 아름다운 보배로 채우게 되느니라”(4)는 말은 매우 흥미롭다. 이 보배들은 사실 우리 믿음의 삶을 영위하는 지혜들로서 이것은 지식으로 가득 차 있다. 어떤 목사들은 성도들에게 너무 많이 알려고 하지 말라고 말한다. 그것은 자신들이 너무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많은 믿음의 사람들의 이야기들로 기록되었는데 이 믿음의 이야기 속에는 각종 귀하고 아름다운 보배들로 가득하다. 이것은 곧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문이기도 하다.
C. 승리의 토대(6-10)
솔로몬은 7절에서 “너는 모략으로 싸우라 승리는 모사가 많음에 있느니라” 기록하였다. 모략은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한 숨은 계략이고 모사는 상담자 곧 조언자를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주께서 승천하시면서 왜 우리에게 보혜사 성령을 보내셨는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보혜사란 ‘파라클로토스’라는 말로서 상담자, 대변인이란 뜻이다(요14:16).
그러나 성경은 ‘지혜는 너무 높아서 미련한 자는 미치지 못할 것’(7) 기록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의 성문에서 입을 열지 못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성도의 믿음에 관하여 설교를 하고 있다. 그러나 만약 그들이 하나님의 지식을 얻지 못하였다면 그들은 말할 자격이 없는 자들이다. 그들의 입은 사특하고 미련하여 죄를 범하며 사람들 앞에 거만하다. 주님은 사람들 앞에 서기 좋아하는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의 거만함과 사특한 죄상들을 밝히 말씀하셨다.
여기서 문제는 성도들의 연약함이다. 악한 자들의 형통함과 또 자신들의 힘든 믿음생활에 지쳐 낙담하고 실족하고 만다. 이들은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여 시험을 받을 때 넘어진 자들이다(막4:17 참조). 이미 성경은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에 참은 것을 생각하라 혹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고 혹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로 사귀는 자 되었으니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히10:32-35) 기록하였다.
D. 믿음의 시련과 영혼의 심판(11-12)
여기서 성경은 우리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전한다. “너는 사망으로 끌려 가는 자를 건져 주며 살륙 당하게 된 자를 구원하지 아니치 말라”(11). 여기서 사망으로 끌려 가는 자는 누구를 말한 것인가? 성경은 이 사망과 관련하여 많은 내용을 기록하였다. 이 부분의 핵심은 로마서 5장과 6장이며 그 결말은 계시록 20장이다.
바울은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자의 표상이라”(롬5:14) 하였고 다시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로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롬6:12,13b) 하였으며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6:23) 하였다.
그러므로 만약 누가 주를 믿은 후 범죄에 빠졌다면 그에게 사망의 법이 적용되지 않겠는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성경이 이미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에 짐짓 죄를 범한 즉 다시 속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으로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니라”(히10:26,27) 기록하였다.
솔로몬은 12절에서 하나님의 판단 기준을 언급하여 “네가 말하기를 나는 그것을 알지 못하노라 할지라도 마음을 저울질하시는 이가 어찌 통찰하지 못하겠으며 내 영혼을 지키시는 이가 어찌 알지 못하시겠느냐 그가 각 사람의 행위대로 보응하시리라”
우리는 가끔 자신이 아는 것을 모른 척 할 때가 있다. 죄에 대하여는 더욱 그렇다. 죄를 지으면 하나님께 심판을 받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스스로 눈감아 모른 척 하며 또 적당히 얼버무린다. 그러므로 성경은 ‘적당한 말로 대답하는 것은 입맞춤과 같다’(26) 한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이미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며’(롬2:11) 그의 판단은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신다’(롬2:6) 기록하였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의 판단이시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변명할 수 없다. 모든 것이 자신의 혼의 기록부 원장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지울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회개하여 죄사함을 받는 길이다. 사람은 이 때를 상실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II. 믿음생활의 지혜(13-22)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려지느니라”(16)
A. 여호와와의 관계
13절에서 솔로몬은 “내 아들아 꿀을 먹으라 이것이 좋으니라 송이 꿀을 먹으라 이것이 네 입에 다니라” 하였다. 또한 시편기자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규례는 확실하여 다 의로우니 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시19:9,10) 하였다. 꿀은 입에 단 것이다. 더욱이 송이 꿀이란 부족하지 않고 충분하여 만족하다.
이것은 우리의 영혼을 만족시키는 하나님의 말씀을 언급한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기는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여기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궁극적으로 우리의 믿음을 강하게 하여 우리의 영혼으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함이다.
그러므로 솔로몬은 “지혜가 네 영혼에게 이와 같은 줄을 알라 이것을 얻으면 정녕히 네 장래가 있겠고 네 소망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14) 하였다. 그리스도인의 장래와 소망인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며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다. 바울은 누가 보이는 것을 소망하겠느냐 하였다. 우리는 하늘에 있는 도성 곧 하나님의 자녀들이 거할 영생의 집이다. 이를 위하여 우리는 이 땅에서의 풍족함을 버리고 오직 내 영혼을 만족시킬 송이꿀에 만족하는 것이다.
우리는 때때로 우리의 영은 현실과 관련되어 있어서 세상의 것을 중히 여기고 악한 자들의 형통함에 실족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얻은 선물로서 ‘의인은 일곱번 넘어져도 다시 일어난다’(16) 그러나 악인은 그들을 위해 예비된 재앙의 날에 멸망을 받는다.
B. 삶의 관계
성경은 우리에게 “네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말며 그가 엎드려질 때에 마음에 기뻐하지 말라”(17) 하였다. 바울은 선 줄로 아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하였다. 그 이유는 우리 모두가 다 연약한 자로서 우리의 구원이 우리의 행위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의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아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엡2:3-5) 증거하였다.
계속하여 그는 “너는 행악자의 득의함을 인하여 분을 품지 말며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라”(19) 하였다. 사람의 마음이 묘해서 남이 잘되면 배가 아파합니다. 참으로 고약한 심보가 아닐 수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속한 것이 아니요 원수 갚는 것이 하나님께 있다고 하셨다. 성경에 기록하신 말씀처럼 “행악자는 장래가 없고 악인의 등불은 꺼지리라” 하였으니 우리가 그들로 하여 분노하는 것이 무익한 것이다. 우리가 분을 내면 결국 사단이 웃을 것이다. 사단은 광명한 천사의 얼굴로 우리 중에서 애찬을 나누고 있기 때문이다.
계속하여 솔로몬은 “내 아들아 여호와 왕을 경외하고 반역자로 더불어 사귀지 말라”(21) 하였다. 인간의 마음 속에는 반역의 피가 흐르고 있다. 어느 시대 어느 왕조를 보건데 반역의 역사는 강물처럼 흐르고 있다. 이것은 사단은 처음부터 반역의 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의인은 주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반역을 힘쓰는 자들과 사귀지 말아야 할 것이다
바울은 종말에 대적하는 자 곧 불법의 사람이 일어날 것을 말하며 배도가 일어날 것을 경고하였다. 여기서 배도란 믿음의 교리를 떠나 배교를 나타내는 말로서 무리로서 군대를 일으켜 왕을 배반한 것을 말한다(딤전2:3). 이미 우리는 배교의 무리가 많은 교회들을 미혹하고 있는 것을 본다.
III. 제자의 지혜(23-34)
“네 일을 밖에서 다스리며 밭에서 예비하고 그 후에 네 집을 세울지니라”(27)
A. 악인의 경계
23절 서두에는 “이것도 지혜로운 자의 말씀이라”기록하였다. 어쩌면 이 내용들은 편집할 때 여기에 붙여 넣은 것이라 생각된다. 솔로몬은 3천 잠언을 말하였다 한다. 그러므로 내관들이 다 기록하였을 것이지만 후세에 전해지는 동안 많이 유실되었을 것이다.
솔로몬은 “재판할 때 낯을 보아주는 것이 옳지 못하다” 하였으며 또한 “무릇 악인더러 옳다 하는 자는 백성에게 저주를 받을 것이요 국민에게 미움을 받으려니와 오직 그를 견책하는 자는 기쁨을 얻을 것이요 또 좋은 복을 받을 것이라”(23-25) 기록하였다.
오늘 나는 조선일보에 ‘대통령께 올리는 차자(箚子)”라는 용기 있는 자의 책망의 글을 읽었다. ‘차자’(箚子)란 신하가 임금에게 올리는 간략한 상소문으로서 서울대학교 송호근 교수가 공개적으로 노무현 대통령을 책망하는 글이다. 이러한 시국에 메스컴을 통하여 대통령의 잘못을 책망한 송교수의 용기와 의지에 박수를 보낸다. 아직 이 나라에 이러한 충정어린 민초가 살아 있어 우리의 장래는 소망이 있다.
얼마전 노무현 대통령은 자신을 추종하는 무리의 포럼에서 한나라당의 대선 주자들과 또 열린 우리당을 떠난 사람들의 정책과 자질을 싸 잡어 비난했다. 누가 봐도 현직 대통령으로 해서는 않될 말을 쏟아 냈다. 이에 대해 한나라당의 고발을 받은 중앙 선거관리 위원회에서 ‘공무원의 선거 중립의무’를 위반했다는 판결 하루 만에 원광대 특강에서 선관위 결정을 공개적으로 비난하며 대선주자들을 비아냥 거렸다.
정말 우리는 이런 대통령을 둔 것이 적이 실망스럽고, 향후 대립할 정치적 향보와 국정의 문제가 지극히 걱정스럽다. 이런 난감한 말들을 쏟아 낼 때마다 국민들은 차라리 이 나라를 등지고 할 수만 있다면 이민이라도 가고 싶어진다. 이러한 격없는 말들을 듣는 것은 북한의 김정일 위원장이 쏟아낸 무지막지한 말보다 더욱 비참하다. 전입가경이란 말을 써야 할지 인격무재라는 말을 써야 할지 혼란스럽다.
원래 초록은 동색이며 악한 자의 무리는 자신들이 악한 자들인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선과 악,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공정한 판결은 재판자의 몫이다. 오늘날과 같이 선과 악이 혼돈되어 선을 악하다 하고 악을 선하다 하는 세상에서 공정한 판결을 보기란 쉽지 않지만 성경은 분 그 결과가 어떻게 나타날 것인가를 분명히 기록하였다. 한마디로 ‘백성에게 저주를 받고 국민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라’는 것이다.
우리 국민은 그동안 독재와 정권 독식의 만행에서 등을 돌리고 서민을 위한 정부라는 깃발을 세운 민주당과 열린 우리당에게 두 번에 걸쳐 정권을 위임하였다. 확실한 것은 그들은 선대정권이 하지 못했던 일들 곧 과거사청산, 재벌정책 등에서 과감한 개혁을 해왔다. 그러나 그들의 잣대는 공정을 잃고 표류하기 시작했고 국민들은 평강과 위로를 받지 못하고 도리어 많은 상처를 받았다. 그들의 시작은 새롭고 거창하여 국민들의 지지를 이끌어 내었으나 그들의 마음은 진실되지 못했고 또 성실하지 못했다.
그들은 민족통일이라는 명목을 들어 수천년 동안 유유히 바다로 흐르는 물을 막아 산으로 물길을 내려 했으며, 지난 과거의 잘못을 용납하려 하려 하지 않고 하늘을 대신하여 심판자로 군림하고자 했다. 그들은 방향을 잃은 화살처럼 무지의 분노를 동서남북으로 쏘아댔고, 책망의 기회를 상실하여 급기야 이성을 잃은 방관자처럼 서로 자충우돌하고 말았다.
성경은 “적당한 말로 대답함은 입맞춤과 같으니라”(26) 하였다. 얼마전 나는 대선주자 중 하나님의 백성 곧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의 입에서 나온 적당한 말을 보았다. 그들은 절간에 가서도 절을 하고 또 그 손을 들어 교회에서 기도를 한다. 그들은 동성애와 낙태를 말함에 있어 성경의 가르침을 말하지 않고 적당한 말로 사람들의 얼굴에 입맞춤을 한다. 참으로 이들의 캠프에는 하나님의 선지자가 없단 말인가? 다윗을 책망한 나단은 어디에 있으며, 패역한 벨사살 왕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풀어 주의 뜻을 전한 다니엘의 영혼은 이 땅에 더 없는가?
성경은 분명하게 “인자야 내가 너로 이스라엘 족속의 파숫군을 삼음이 이와 같으니라 그런즉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에게 경고할지어다”(겔33:7) 하였고 다시 “가령 내가 악인에게 이르기를 악인아 너는 정녕 죽으리라 하였다 하지 네가 그 악인에게 말로 경고하여 그 길에서 떠나게 아니하면 그 악인은 자기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 피를 네 손에서 찾으리라’(겔33:8) 하였다. 정치를 바로잡겠다고 앞장선 목사들이 그리 많거든 어찌 그 입들은 바른말 한마디 못하는지 그들은 오직 크고 아름다운 교회를 짓기에 여념이 없는 것일까?
B. 대인관계
오늘 성경은 “너는 네 일을 밖에서 다스리며 밭에서 예비하고 그 후에 네 집을 세울지니라”(27) 명하고 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집을 짓기 위해서는 세상에서 빛과 소금처럼 나타나야 하며, 그 심령이 추수를 소망한 자와 같이 하늘의 보화를 얻기 위해 자기 모든 것을 다 팔라는 뜻이다. 예수께서는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 것과 옛 것을 그 곳간에서 내어 오는 집 주인과 같으니라”(52) 하셨다. 예비되지 않은 것을 어떻게 내어 놓고 알지 못하는 것을 어찌 내어 놀 수 있겠는가?
끝으로 솔로몬은 까닭없이 네 이웃을 쳐서 증인이 되지 말며 네 입술로 속이지 말라 하였다. 이는 자기 잘못을 덮기 위해 다른 사람을 볼모로 삼지 말라는 뜻이다. 주님 바리새인들에게 ‘너희는 지식의 열쇠를 갖고도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다른 사람도 들어가지 못하게 한다. 하시며 너희가 사람을 구하기 위해 바다를 다니다가 한 사람을 만나면 너희보다 더 악하게 만든다 하셨습니다.
그는 계속하여 ‘너는 그가 내게 행한대로 갚겠다 하지 말라’ 하였다. 주님도 우리에게 왼뺨을 때리면 오른 뺨도 돌려대며 누가 오리를 가겠다 하면 십리를 동행하라 하였다. 이것은 교회가 세상 사람들과 같은 생활을 하지 말하는 것이다. 참으로 쉽지 않은 일이지만 천년왕국이 보장된 영혼들이 잠시 겪어야 할 고난이라면 인내로서 즐겁게 가야 할 것이다.
C. 게으른 자의 교훈(30-34)
끝으로 솔로몬은 게으른 자의 밭과 지혜없는 자의 포도원을 살펴 보고 배우라고 권면하였다. 이 말씀은 복음의 일꾼들이 복음의 진리를 얻기 위해 멈추지 말라는 훈계다. 주님은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요 또 더 받으리니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막4:22,23) 하셨다. 오늘 이 말씀들이 우리에게 무엇을 전하는 것인지 당신의 영혼이 깨닫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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