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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2:8)최고의 법

이요나 2007. 6. 28. 15:57

(약2:8)최고의 법

(약2:8)너희가 만일 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을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오늘은 야고보서 2장입니다. 우리는 앞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시험과 그 목적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의 경건한 믿음생활에 대하여 살펴 보았습니다. 야고보서를 읽을 때 우리가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이 말씀은 특별한 위치에 있는 자들에게만 주신 말씀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나라의 기업을 상속받은 모든 성도들에게 합당한 말씀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2장에서 야고보는 두가지 테마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 첫번째는 네 이웃을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고 하신 주의 말씀을 다시 경계 시킨 것이며 두번째는 믿음 속에 설정된 행함의 속성를 기록하였습니다. 우리가 이 부분을 읽을 때 바울이 말한 믿음으로의 구원에 대한 가르침과 서로 상반된 것이 아닌가 의심을 하게됩니다만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은 구원의 원리를 언급한 것이고 야고보는 믿음의 속성을 언급한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첫번째 테마를 살펴 보겠습니다.

세상의 속성의 연속
야보고는 1절에서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하였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야고보는 도적질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거짓말하지 말라 또는 십일조를 잘 내야한다 봉사를 잘하라 기도를 잘해라와 같은 믿음생활의 조건들을 언급한 것이 아니라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믿는 자들의 신분상의 평등을 언급한 것으로 믿음생활의 기초를 이루는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주를 믿기 전까지 모두 세상 속에 속하여서 세상의 속성 속에서 살던 사람들입니다. 세상의 속성이란 물질주의 속에 설정된 지배 구조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1장에서 주께서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 위에 뛰어나심을 기록하였고 또 다시 골로새서에서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다 그로 말미암았다고 기록하였습니다. 또 사단은 주를 시험하여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하였습니다.

오늘 주의 형제 야고보가 주의 형제 된 그리스도인을 향하여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한 말은 우리 믿음 생활에 있어 가장 근간이 되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믿음의 강령을 말씀하실 때 너희 주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고 두번째로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야고보가 언급한 이 문제는 교회 가운데 나타난 가장 큰 현안으로 그리스도인의 의식을 다시 고취하기 위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발생된 우리의 신분적 위치는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로서 평등과 자유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의 친구라'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독생하신 아들께서 우리의 친구라면 그 안에 있는 우리는 모두 친구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신분적 위치는 믿음의 현실속에 이론적으로 되어 가고 있습니다.

의식전환의 필요성
사도행전 10장에는 베드로가 체험한 환상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욥바에 있을 때 저녁식사가 준비되는 동안 지붕 위에 올라가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환상 중에 여러가지 짐승들이 담긴 보자기가 하늘로부터 내려왔습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그것을 잡아 먹으라 하였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명령은 오랜 유대교의 관습이 아니라도 율법을 중요시 여기던 이스라엘 사람 중의 한 사람이였던 베드로서는 아무리 주님의 명령이라도 감당할 수 없는 말씀이였습니다. 베드로는 내가 더러운 것은 먹을 수 없습니다 답하였고 주님은 하나님이 깨끗게 하신 것을 더럽다 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환상이 세번 연속하여 일어 났고 베드로는 동일한 답변을 하고 있다는 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의식 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고정관렴이 얼마나 강한 것인 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환상을 보이신 것은 사도로 택함을 받은 베드로의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는 인간차별적인 의식을 바꾸기 위해서 입니다. 오늘 우리는 야고보의 가르침 속에서 베드로와 동일한 위치에 있는 우리의 의식을 발견해야 할 것입니다.

물질주의의 확대
야고보는 교회에서 성도들 사이에 나타나는 신분적 차별을 언급하여 "만일 너희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 오고 또 더러운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 올 때에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돌아보아 가뢰되 여기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이르되 너는 거기 섰던지 내 발등상 아래 앉으라 하면 너희끼리 서로 구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하였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그 차별의 원인이 물질적인 것에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일찌기 제자들에게 부자가 천국에 들어 갈 수 없다고 경계하셨습니다. 영생을 소망하는 부자 청년이 주님의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발길을 돌아 선 것은 그가 재물이 많기 때문이였습니다.

우리가 근대 교회사를 돌이켜 보아도 유럽에서의 교회는 귀족 사회를 추구하는 도구로서의 사용되었습니다. 자신들의 부귀와 유익을 위하여 정략적으로 이용 되기도 하고 약탈과 살인 등 인간으로서 행치 못할 일들을 자행하였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오늘날 우리 교회의 실상입니다. 우리나라의 교회를 보더라도 대형교회로 치달을수록 교회의 빈부의 격차가 심해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가르침 중에 가장 큰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과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누가 우리의 이웃인가에 대하여는 성경이 너무 명확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믿음의 원리
5절에서 야고보는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들을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 하셨느냐"묻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믿음과 택하심의 원리를 설명한 것으로 주께서 가난한 자들을 택하신 것은 그를 풍요한 믿음에 거하게 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상속받게 하게 위해서입니다.

야고보는 우리에게 "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괄시하였도다 부자는 너희를 압제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였느냐 저희는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 바 그 아름다운 이름을 훼방하지 아니하느냐"묻고 있습니다. 이것은 재물의 속성을 언급한 것으로 재물로 하여 믿는 자들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이름이 훼손당하고 있음을 말한 것입니다.

저는 가끔 재물에 마음을 둔 사람들과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 중에 많은 목회자들이 재물에 관심을 갖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재물에 대한 성경의 말씀을 말하면서도 그들은 자신들의 언행은 그 말씀에 포함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과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어느새 그의 말에 동화되어 내 거룩한 존재가 부끄러워 질때가 있습니다. 그들과 헤어진 후에야 내가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을 하고 있었는가 생각하곤 합니다.

최고의 법
야고보는 주님의 말씀을 인용하여 "너희가 만일 경에 기록한 대로 네 이웃을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만일 너희가 외모로 사람을취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죄자로 정하리라"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잘못 곡해하면 왜 야고보는 믿음의 형제들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율법을 들어 정죄하려 하는가 의문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바울이 말한 바 믿음과 율법과의 관계적 설명은 구원을 이루는 원리를 설명한 것이지 율법의 부당성을 말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께서도 나는 율법을 페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 시키려 왔다 하셨습니다. 바울도 로마서에서 율법의 신령함을 언급하여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롬7:12)하였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10절에서 자칫 잘못하며 간과하기 쉬운 율법적 우선 순위에 대한 우리의 범죄에 대하여 아주 냉철하게 언급하여 "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가가 되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율법에 대한 형평성을 두고자 하는 사람들의 잘못된 심리를 언급한 것입니다.

율법의 균등
많은 사람들이 어떤 것은 소홀히 해도 죄로 여기지 않고 어떤 일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면 않되는 중한 일로 정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여 그리스도인들의 간음에 대하여는 매우 강한 어조로 책망을 합니다만 담배같은 것은 그리 엄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 하지말라 하셨으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였어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하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잘못된 인용같기도 합니다. 간음을 살인보다 강하게 두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야고보는 지금 율법의 공정성을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이 말 속에는 주께서 말씀하신 간음의 정의 즉 마음으로 간음을 하여도 이미 간음한 것이라는 말씀과 같이 가난한 형제를 멸시하고 돌아 보지 않는 것은 형제를 죽인 것과 같은 맥락에서 살펴 보아야 할 말씀입니다.

중요한 것은 율법의 정죄에서 풀어 지유자가 하게 하신 그리스도의 은혜 가운데서 하나님의 율법에 거치는 자가 되어서는 않된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라도 경홀이 여긴 것이 우리의 발목에 족쇄를 채우게 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않될 것입니다.

성도의 자랑
끝으로 야고보는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없는 심판이 있으니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하였습니다. 여기서 언급된 긍휼이란 하나님의 입장에서 갖는 동정심입니다. 하나님의 동정심은 선과 악을 우선합니다. 그러므로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한다'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명분있는 일들을 찾아서 나섭니다. 교도소에서 일하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서 매월 보조금의 명목으로 많은 돈을 내고 교도소 정신교육 위원들이 되기도 하고 고아원이나 양로원에 돈을 보내면서 미리 보도자료들을 만들기도 합니다. 이런 일들은 긍휼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선한 행위를 하는 자로 보이기 위한 일들입니다. 우리는 긍휼을 베풀 때 왼손이 한 일을 오른 손이 모르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