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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2:26)믿음의 실체

이요나 2007. 6. 28. 15:58

(야고보2:26)믿음의 실체

(약2:26)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야고보서 2장 두번째 시간입니다. 우리는 앞에서 믿음의 사람들이 율법을 경홀히 여긴 나머지 주께서 우리로 하여금 믿음의 자녀되게 하신 하나님의 뜻까지도 상실해 가고 있음을 살펴 보았습니다. 또한 이러한 일들은 오늘날에까지 지속되고 있는 사실적인 것이기도 합니다. 이제 오늘은 믿음의 실체에 대하여 살펴 보겠습니다.

야고보는 2장 14절에서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하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야고보는 지금 '행함이 없는 믿음은 구원을 얻지 못한다'고 단정한 것 같아서 바울이 말하는 바 '믿음으로의 구원'에 관한 논리와 대치되는 말씀 같습니다만, 바울은 구원에 이르는 믿음의 원리를 말한 것이고 야고보는 구원의 원리 속에 포함된 믿음생활의 속성에 대하여 언급한 것입니다.

야고보는 15절에서 이를 설명하여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 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하였습니다. 지금 야고보는 믿음생활의 실제적인 속성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는 예배행위에 풍요로움을 누리고 있습니다. 찬양과 기도와 말씀과 봉사의 풍요로움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자유함과 부요함을 풍족하게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의 사랑의 실천이 실제화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실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많은 교회들이 전도와 세계선교 교회성장을 위한 많은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로 우리와 함께 하고 있는 형제들 가운데 어려운 자들을 돕는 일에는 대하여는 매우 인색하기 짝이 없습니다. 성경은 이들을 향하여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하였습니다. 여기서 믿음이 죽었다는 것은 그의 영혼이 구원을 상실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가 갖고 있는 믿음에 생명력을 잃었음을 말한 것입니다.

18절에는 흥미로운 표현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어땋게 보면 믿음과 행함이 서로 다른 조건 속에 있는 것 같이 보이는 말씀입니다만 야고보는 지금 행함을 동반하지 못하고 있는 믿음을 경고한 것입니다.

19절에 야고보는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하였습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에 대한 충만한 지식을 갖고 있습니다. 누가 믿음에 관하여 말하고자 하면 유일하신 하나님에 대한 논리들을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론적인 논리가 아니라 믿음의 실제적인 나타남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
이제 야고보는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 것인줄 알고자 하느냐"말하며 행함 있는 믿음을 구체적으로 증명하기 위하여 몇가지 예증을 성경에서 발췌하였습니다. 먼저 야고보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믿음을 채택하였습니다.

야고보는 먼저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물으며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답하였습니다. 지금 야고보는 이론적인 것을 떠나 믿음의 역사를 언급한 것입니다.

그는 다시 설명하여 "이에 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기록된 순서에 있어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기 전에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나 의인이라 칭함을 받은 아브라함은 하갈과 동침하여 이스마엘을 낳으므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맙니다.

그리고 13년의 세월이 흐른 후에 아브라함은 다시 하나님의 약속하신 말씀을 따라 독자 이삭을 낳았습니다. 그 후에도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를 누이라 속이며 죽음을 모면하였으며 의로운 사람으로서 온전한 �을 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는 100살에 얻은 아들 이삭을 주 앞에 드리므로 믿음의 사람으로 온전한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생명이 하나님께 있음을 알았던 것입니다.

기생 라합의 믿음
두번째로 야고보는 기생 라합의 사건을 인용하여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물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야고보가 증인으로 채택한 온전한 믿음의 증인의 한 사람은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였고 하나는 이방인 중에서 가장 낮은 신분에 있었던 기생 라합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스라엘 사람들로 보면 이방인은 모두 기생 라합과도 같은 존재들입니다. 어쩌면 자칭 의인이라하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모두 기생 라합과 같이 더럽고 추잡한 육체에 거한 사람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기생 라합은 하나님에 대한 소식을 듣고 가나안 땅을 정탐한 종들을 숨김으로 하여 메시아의 족보에 오른 최초의 이방여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믿음의 속성이 이론적인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것이라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끝으로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하였습니다.오늘날 많은 신학자들이 믿음의 원리를 설명하고 증명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그림이 아니라 우리 삶 가운데 역사하는 하나님의 실체인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믿음의 실체들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