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강해/야고보서강해

(야고보 3:17) 성결과 화평의 지혜

이요나 2007. 6. 28. 15:59

(야고보 3:17) 성결과 화평의 지혜


(약3:17)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야고보는 3장에서 두 가지 주재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지도자로서 자신의 말들에 대한 책임에 대하여(1-12), 또 다른 하나는 세상적인 지혜와 하늘로부터 오는 지혜에 대해서입니다.

 야고보는 1절에서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고 경계하였습니다. 여기서 선생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목사나 교사의 직분을 가진 자들을 말한 것으로 교회를 이끌고 나갈 영적 지도자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당시는 예루살렘의 박해 이후 수많은 사람들이 이방지역으로 나아가 
순회 전도자, 교사로 생활을 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이 모두 초대교회로부터 어떤 검증을 받은 사람들도 아니었고 또 그런 제도적인 장치도 없었던 때입니다.

그때는 바리새인들이나 제사장들 중에서도 초대교회에 합류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행15:5) 그들이 예수를 영접한 것은 어쩌면
 사도들을 통하여 나타난 이적들과 또 수천 명의 신도들이 교회로 확산되고 있어서 종교적 대세를 따른 사람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원래 유대교의 지도자들로서 나름대로 구약의 율법적 지식을 알고 있었고 믿음의 외형적 모습을 갖추고 나름대로 인맥을 갖고 있어서 초대교회에서 존경을 받고자 애를 썼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안디옥이나 이방교회를 순회하면서 자신들이 예루살렘의 초대교회의 일원인 것처럼 내세워 성도들을 가르치려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15장에는 안디옥에 내려온 유대인들로 인하여 발생된 문제점에 대하여 기록되어 있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예루살렘교회의 박해로 인하여 발생된 이방교회의 전초지로서
 바나바가 개척하여 바울을 데려 옴으로 교세가 왕성해져 많은 교사들과 예언자들이 모였고 그곳에서 처음으로 크리스천이라는  칭호가 생겨났습니다.

성경에는
유대에서 내려온 형제들이 안디옥 교회에 이르러 경에 기록된 바와 같이 모세의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할 것'(행15:1)이라 가르쳤다 기록되었습니다. 이것은 그동안 바울이 가르친 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상반되는 교리로서 안디옥 교회에서는 큰 소요가 일어 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이 일로 안디옥 교회는 바울과 바나바를 예루살렘 공회로 파송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들어가 이방교회의 활동을 보고하자 공회에서도 구원에 관한 문제로 큰 논쟁이 일어났습니다.  믿는 서기관과 제사장 출신들이 일어나 모세의 율법을 변론했고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주께서 이방인의 복음을 위하여 너희 중에서 나를 택하였다 말하여 그리스도의 택하심에 따른 사도권을 주장하였습니다.

 

베드로의 변증 후에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 곧 이 글의 저자 야고보가 일어나 그 당시 유대인과 이방인간의 마찰이 될 소지였던 이방인들의 거룩하지 못한 생활풍습 즉 우상과 음행과 피를 멀리하라는 공문을 채택하는 것으로 사건을 종결하였습니다.

이제 우리가 앞으로 공부를 하게 되겠습니다만 요한서신이나 베드로서 그리고 유다서 등은 모두 그 당시 교회에 혼란을 일으켰던 영지주의자들과 유대주의자들의 잘못된 가르침에 대한 경계의 가르침이 서신서의 주제를
  이루고 있습니다.  

 말의 실수
야고보는 먼저 말의 실수에 대하여 언급하여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를 씌우리라"하였습니다. 
나는 이 부분을 읽을 때마다 나를 비롯한 복음 사역자들의 가장 큰 실수는 모두 그 입에서 나오는 말에 있음을 실감합니다. 여기서 실수란 유혹 가운데로 미끄러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야고보가 말하는 말의 실수란 선생 된 교회의 지도자들의 가르침을 언급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들을 세우실 때 각양 각색의 은사를 주셨습니다만 복음사역에 가장 필요한 은사는 성경의 가르침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택하신 자들에게 언변의 재능을 주셨습니다.
 
고린도 교회를 보면 학벌과 문벌이 없는 그들에게 구변(口辯)을 주셨음이 기록되었습니다(고전1:5).  

 
말이란 참으로 묘하여서  어떨 때에는 사람을 위로하고 용기를 주어 정신적인
 힘을 주기도 합니다만, 경우에 따라서는 사람을 낙심케 하고 좌절시키며 분노와 시기를 일으키게 합니다. 또 말이란 화살과 같아서 말하는 사람의 목표를 향하여 사정없이 달려가며, 한번 쏟아내면 쏟아진 물처럼 주어 담지 못하고 결과와 책임만이 남게 됩니다.

 
최근에는 상당히 조심을 하고 있는 듯 합니다만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 된 이후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차마 대통령의 체면은 고사하고 정적들의 가슴을 파헤쳐서 결국 탄핵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국을 재창출하려는 술수였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만 우리가 북한과 같은 사회주의자들의 말들을 들으면 등골이 오싹해져 옵니다.  또한 요즘 언론에 나타나는 각 정당과 시민단체들의 언행을 보면 정말 이성을 잃은 망아지들과 같습니다. 정말 우리나라의 장래가 심히 걱정스럽습니다.


 (馬)과 배(船)
 
야고보는  혀를 다스림의 중요성을 언급하여 "우가 말을 순종케 하려고 그 입에 재갈 먹여 온 몸을 어거하며라고 기록하였습니다. 말은 총탄이 쏟아지는 전쟁터에서도 질주하여 달립니다. 성난 말은 그 누구도 제어할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혀는 제어할 수 없는 성난 말과도 같습니다. 그로하여 시편기자는 "너희는 무지한 말이나 노새같이 되지 말지어다 그것들은 자갈과 굴레로 단속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가까이 오지 아니하리로다"(시32:9)하였습니다. 

계속하여 그는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 사공의 뜻대로 운전하나니"라고 말하였습니다.  야고보가 사역자의 인생항로를 전쟁터를 달려가는 말과 폭풍을 돌진해 나가는 배에 비유한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입니다. 그러나 만약 폭풍 속의 배에 키가 고장 났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 배는 장래를 보장할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사람의 혀는 그 사람의 인생항로는 결정합니다. 이것은 아주 적절한 비유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학문을 배우지 못한 야고보가 이처럼 고품격의 문장을 쓴 것은 실로 경이롭기까지 합니다.


불의의 세계

또한 야고보는 우리의 혀를 불과 불의의 세계에 비유하였습니다. "혀는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라는 것이 지옥불에서 나느니라"   불이란 한번 붙으면  모든 것을 송두리째 태워버리며  한번 붙은 불길은 막을 길이 없어서 비참한 결말을  맞고야 맙니다.

 여기서 사용된  '불의의 세계'라고 사용된 세계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그 하나는 '장식'을 의미하며 또 몰락을 향해 달려가는 '악한 세상'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혀는 무엇인가 자기를 위장하고 아름답게 꾸미려는 속성과 타는 불길과 같이 멸망을 향해 달려가는 악의 속성을 같고 있음을 말한 것입니다.

 혀는 자신의 의사를 주장하고 반영하는데 사용하는 무기입니다.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자기를 나타내는 절대수단입니다. 선하고 아름다운 말로 서로에게 유익한 말로 관계를 이루어야 하는데 불과 같이 불의의 세계의 지배를 받고 있음을 설명한 것입니다.
 

 야고보는 
인간은 자신의
 혀를 능히 길들일 수 없다고 단언하였습니다. 세상의 모든 짐승과 새와 벌레와 해물은 다 길들일 수 있지만 혀는 길들일 사람이 없고 쉬지 않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하다 하였습니다.

 저는 일본에 있을 때 돼지마을을 방문한 일이 있습니다. 그곳은 돼지를 훈련하여 여러 가지 묘기를 보여 주는 곳으로 일본에서 유명한 관광촌을 이루고 있습니다. 돼지들이 공을 굴리고 외나무 다리를 타고 인간의 몸을 뛰어넘고 공놀이를 하는 둥 정말 돼지라 할 수 없는 묘기가 속출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혀는 길들여 지지 않습니다.

 찬송과 저주

사실 우리의 문제는 
한 입으로 찬양을 하고 같은 입으로 저주를 한다는데 있습니다. 야고보는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도다"  야고보는 여기서 인간의 존엄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가 비록 아직은 더러운 모습을 하고 있어도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위대한 존재입니다.

 야고보는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물과 쓴 물을 내겠느냐' 말 하였습니다. 참으로 아주 적절한 비유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선한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우리가 어찌 저주의 말과 선한 말을 함께 담을 수 있느냐 한 것입니다.

 또 그는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냐 이와 같이 짠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한다'하였습니다. 지금 야고보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질서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짠물과 단물을 같이 내고 있고 찬송과 저주를 한 입에 담고 있습니다.

 
하늘로 오는 지혜
 
야고보는 13절에서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뇨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하였습니다. 결국 인간은 그 누구도 혀를 다스리지 못하여 그 누가 지혜와 총명을 가졌다 하드라도 실패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지혜의 온유함'이란 말은 해석하기에 매우 어렵습니다. 여기서 말한 지혜는 
헬라어 '소포스'로서 만물의 질서와 이치를 밝히는 학문적 지혜를 말합니다. 오늘날 인간의 지혜는 헬라시대의 철학을 뛰어넘지 못하고 아직도 그 시대 석학들이 연구해 놓은 토대를 중심으로 발전시키고 연구하고 있습니다. 이미 그 시대에 진리는 없다고 판결을 받았는대도 말입니다.

또 여기서 '온유함'이란 어쩜 바보와 같은 의미가 될 수 있습니다. 사실은 '잘 익은 포도주 항아리' 벽에 잘 박힌 못', 또는 '금방 사용할 수 있는 기름 항아리'에 해당합니다만 세상 사람들의 지혜가 미처 이런 상태에 도달하지 못하였음 간접적으로 시사한 것입니다.

만약 이처럼 그들의 지혜가 완벽하다면
 
그들의 삶이 선한 행실로 나타나야 하는데 그 반대로 그들의 삶이 시기와 질투와 다툼으로 번져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완벽하면 그 누구도 나를 넘어설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불안전할 때에는 나를 넘어서려는 자와 다툴 수 밖에 없습니다.

 야고보는 그들을 향하여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스려 거짓하지 말라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니'라 기록하였습니다. 

야고보는 세상의 지혜의 속성을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기와 질투와 자랑이 마음 속으로부터 솟아 올라 불처럼 세상을 태워버리는 것입니다. 세상적이고 육신적이고 마귀적이라는 말은 실로 두렵기까지 합니다. 그처럼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는 지혜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세상을 요란스럽고 악한 일들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최근 우리나라에는
 
각양각색의 시민단체들이 많이 생겨났습니다. 그들은 각 분야별로 전문성을 가진 단체로서 그들의 정강은 모두 국민과 사회를 위한 봉사단체들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그들이 모두 연합하여 자신들의 이권을 따라 국가의 안위에까지 손을 대려고 있습니다. 정부는 이들을 부추겨 집권당의 정책을 합리화 하는데 이용하고 있습니다.

 성결과 화평
이제
 야고보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지혜를 언급하여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을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니니라"하였습니다.

야고보는 하늘로부터 온 지혜의 첫째를 '성결'에 두었습니다. 여기서 성결이란 거룩한 하나님의 품성을 따른
 
영과 육의 정결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은혜에 속한 것으로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성 속에서 나타나는 그리스도인의 인격입니다.

두번째로 '화평과 양순과 긍휼'은 인간관계에서 나타나는 그리스도인의 인격을 말한 것입니다. 주님은 율법의 강령을 말하여 '첫째는 이것이니 주 여호와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함이요 둘 째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여 우리가 주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가 되었다면 우리의 모든 삶에서 선한 그리스도의 인격이 나타나야 함을 언급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행함은 세상의 지혜와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지혜에 있음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바울사도는 나의 전도함이 말과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성령의 나타나심에 있다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먼저 자기의 혀를 잘 다스려 세상의 지혜로 자랑하지 말고 오직 위로부터 내려오는 하나님의 진리를 말하여 그리스도의 사랑을 완성하여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