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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5:8) 종말을 살아가는 지혜

이요나 2007. 6. 28. 16:00

(야고보5:8) 종말을 살아가는 지혜

(약5:8)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오늘은 야고보서 5장으로 마지막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이제 다음주부터는 베드로서를 공부하게 됩니다. 미국에서 돌아온지 벌써 두달째가 되었습니다. 그동안 정말 참기 어려운 일들이 많이 일어났지만 그래도 야고보서의 강해를 준비하며  많은 인내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제 목회 10년 동안 정말 참을 수 없는 일들이 많았습니다만 최근 두달동안에 나는 내 인생의 가장 큰 고개를 넘는 것 같은 느낌입니다. 이 산을 넘어서 주님을 만났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오늘 우리가 공부할 야고보서 5장에는 종말의 세대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실용적인
  삶의 지침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야보보는 1절과 6절 사이에서 물질관에 대하여 언급하였고 두번째로 종말의 삶의 태도에 대하여 말하였습니다(7-11). 또 12절에는 맹세와 관한 교훈이 기록되었으며 13절로 19절까지는 그리스도인의 고난과 질병의 극복에 관한 교훈이 기록되었고 마지막으로 이단에 빠진 사람들에 대하여 언급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물질관(1-7)
야고보는 서두에서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을 인하여 울고 통곡하라 너희 재물은 �었고 너의 옷은 좀 먹었으며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하였습니다.

야고보가 그리스도인의 종말을 살아가는 지혜를 말하면서 제일 먼저 부자와 재물에 관하여 언급한 것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주님께서도 언급하신 것으로 성경은 말세에 인간들의 삶이 재물과 지대한 관계를 갖고 있을 것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낙타를 타고 바눌 구멍으로 들어가기 보다 힘들다 하셨습니다. 이것은 전혀 불가능한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이 말씀을 생각할 때 물질 문명의 시대에서 재물을 갖지 말라는 가르침은 정말 납득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면 이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빈곤한 생활을 살아야 한다는 결론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물질관입니다. 

주님은
 물질의 중요성을 부정하거나 무시하지는 않았습니다. 원래 창조로부터 이 세상의 모든 물질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 인간을 위해서 준비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땅의 모든 인간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물질구조 속에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재물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들의 목표는 권세와 명예와
 풍요로운 삶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재물이란 세상을 살아가는 도구일 뿐입니다. 성경이 재물은 우상숭배라고 정죄한 것은 재물의 속성을 언급한 것으로 재물이 인간생활에 미치는 영향을 말한 것입니다. 문제는 세상 사람들이 재물을 부귀와 영화를 성취하는 수단과 목적으로 삼는데 있습니다.

믿음의 세계는 물질의 속성과 반비례합니다. 믿음의 세계는 그 능력과 권세의 주권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습니다.
 창조자이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그 모든 것을 아들에게 주시고 그를 우리의 주로 세워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창조로부터 각 사람의 그릇과 삶의 방법에 따라 합당한 은혜로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재물에 대한 경쟁과 싸움은 국가적인 체제로 돌변하였습니다. 고대에는 신적 사고와 왕권이 세상을 지배하였는데 근세에 와서 그 지배 구조는 이념과 물질로 바뀌고 이제는
 경제적 가치가 모든 세상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재물은 물질의 속성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썩을 수 밖에 없고 재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인격은 무너질 수 밖에 없습니다. 야고보가 비금속인
 금과 은이 녹슬었다는 것은 재물의 부패성을 말한 것으로 결국 인생을 멸망으로 이끌어 가게 됩니다.

얼마전 우리는 어느 재벌 후계자의 자살을 목도하였으며 정권이 바뀔 때마다 무수한 사람들이 그와 관련하고 쇠고랑을 차고 말았습니다. 최근 자녀의 공부를 위해 노래방 도우미로 나가 자신의 인격을 내다파는 부정한 모성까지 등장하고 말았습니다.

야고보는 4절에서 "보라 너희 밭에 추수한 품군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지르며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 하였습니다. 부자들은 그 재물을 모으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무고한 희생을 요구하게 됩니다. 최근 전세계에서 일어나는 노사분규를 보십시요. 성경은 이 문제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부자들의 재물관에 대하여 "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연락하여 도살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지게 하였도다 너희가 옳은 자를 정죄하였도다 또 죽였도다 그는 너희에게 대항하지 아니하였느니라"하였습니다. 그 누구도 스스로 영생할 수 없거늘 재물로 하여 스스로 자신의 영혼을 정죄하는 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종말관
야고보는 7절에서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하였습니다. 오늘 이 말씀이 주를 믿는 그리스도인에게 하신 말씀이라고 생각할 때 우리는 스스로 자신을 돌아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교회는 어느시대부터 물질을 추구하는 종교적 행위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우리나라에 개신교가 들어와 평양을 중심으로 부흥운동이 일어날 때만 하여도 물질은 성도의 생활을 돕는 하나님의 은혜속에 속한 것이였습니다.

그런데 얼마전부터 잘 살아보자는 국가정치 구호에 발마추어 축복의 메시지라는 명목으로 교회는 물질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되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축복을 잘 빌어 주고 그에 맞는 설교를 잘하는 목사들은 유명세를 탔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대형교회들의 모습을 보십시요. 과연 그들이 주의 강림하심을 고대하는 교회인지 아니면 이 땅에서 천국을 세우려는 광신도 집단인지 분간을 할 수 없이 되버렸습니다.  야고보는 주를 기다리는 우리를 추수를 위해 인내하는 농부에 비교하였습니다.

농부는 농사를
 자기의 재능에 두지 않습니다. 아무리 좋은 토질과 영농 기술을 갖고 있다고 해고 비가 오지 않던가 태풍이 일면 그 농사는 하루 아침에 망하기 때문입니다. 농사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좋은 환경을 극복할 수 있는 부지런한 노력과 열씸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부지런한 농부는 추수날까지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며 열심을 다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들도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며 은혜 가운데서 최선을 다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또 야고보는 9절에서 '서로 원망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이것은 세상 일에 서로 이해관계가 발생할 수 있음을 언급하신 것입니다. 일에는 분면 시시비비가 따르게 되며 그 결과가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결과에 승복하지 않고 원망하면
 형제를 정죄하게되어 결국 주로부터 심판을 받게 됩니다. 야고보는 계속하여 그는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로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을 삼으라"하였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는 많은 선지자들의 믿음의 고난에 대하여 기록되었습니다. 그들은 사람으로 감당할 수 없는 고난을 인내하고 믿음의 모델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야고보는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자시니라"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통치적 인격이십니다. 많은 고난을 받는 사람들에게는 이 말씀이 쉽게 가슴에 와 닿지 않겠습니다만 성경은 욥의 인내와 그
 결말로 우리에게 예증하고 있습니다.

 조급한 맹세  
12절에는 "내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말고 오직 너희는 그렇다 하는 것은 그렇다하고 아니라 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죄 정함을 면하라"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믿음에 대하여 과대하게 평가하고자 합니다. 그 결과 하나님 앞에서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교만함을 들어내고 맙니다. 쉽게 말하고 쉽게 허물어지고 있습니다. 성경은 모든 정사와 권세와 부귀와 영광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있고
 세우시고 넘어짐이 주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문제와 지혜  
이제 야고보는 그리스도인들의 실용적인 삶의 방법을 언급하여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는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지어다"하였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인생의 삶의 고난과 희비애락의 열쇠가 주께 있음을 언급한 것입니다.

주님은 "너희가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이기였노라" 하셨습니다. 또 제자들에게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리라"(요15:19) 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고난에서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요 주님은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요14:14)하셨습니다.  오늘 야고보도 기도하라고 하였습니다. 고난을 받는 자는 그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주께 있음을 감사하여야 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고난을 해결하기 위하여 자신의 지혜로 해결하려다가 오히려 더 큰 문제에 봉착하고 맙니다.

오늘날 인간에게 있어 가장 큰 문제는 질병의 문제입니다. 인간의 세포지도까지 밝혀낸 의학으로도 아직 질병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최근 우리나라에도 웰빙 바람이 불고
  옳바른 음식물 섭생방법과 운동 생활 등의 대체의학이 붐을 얻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날로 알 수 없는 질병들이 �아져 나와 인간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은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기록하였습니다. 여기서 교회 장로란 주로부터 부름받은 목회자를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축복을 위하여 목사들을 초청하고 기도를 받습니다. 그런데
  깊은 병이 들면 병원을 찾지 목사들을 청하지 않는 것은 흥미로운 일입니다. 야고보는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하라"하였습니다.

저는 얼마전에 통일교도들은 자기 이름으로 기도를 드린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있어 성경은 무슨 관계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믿는다면서도 자기 이름으로 기도를 드리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하지 않고 예수께서 하나님의 독생자로 우리의 죄의 구속을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성경이 말하는 바 이단인 것입니다. 성경이 이미 '주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들을 적그리스도'라 하였기 때문입니다.

또 야고보는 '기름'을 바르며 기도하라 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오리브 기름을 말합니다. 그당시 유대인들은 왕이나 선지자들을 세울 때 머리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세움을 받는 자들의 종교적 의식입니다. 따라서 기름을 바르며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성결한 관계성을 요구한 것이라 보아야 하겠습니다.

이 말씀과 관련하여 15절에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기록되었습니다. 여기서 믿음의 기도란 사역자들의 신실한 믿음 즉 주께서 고치실 것을 믿는 절대 믿음을 말한 것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혹시 저가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한 말씀입니다. 이것은 질병이 죄와 무관치 않다는 말씀입니다. 물론 노환도 있고 전염된 질병도 있겠지만 세상의 모든 운행질서가 하나님 안에 있다고 생각할 때 죄는 질병의 원인이 된다고 보아야 하겠습니다.

마가복음 2장에는 중병병자를 메고 온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원어적 분석으로 보아
 그 사람은 성적 방종으로 얻은 질병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매독은 그 균이 머리에 올라가서 혈관을 마비시켜 수족을 사용하지 못하게 한다고 합니다. 그들은 주께서 능히 고치실 것을 믿고 지붕을 뚫고 주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이것이 절대적 믿음임니다, 주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소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다 하셨습니다.

그때 바리새인들이 주님의 말을 듣고 죄사함이 오직 하나님의 권세이거늘 참으로 참람한 말을 한다고 여겼습니다. 이 때 주님은 죄 사함을 받았다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갖고 가라는 말 중 어느것이 더 안전하냐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그
 죄의 문제가 영혼과 질병의 문제가 되고 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야고보는 "이러므로 너희 죄를 고하여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하였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질병이 걸렸어도 그것이 죄로 말미암은 것임을 깨닫지 못합니다. 모두 음식물로 감염되었던가 다른 사람에게 전염된 것이라 의학적인 변명을 하려합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은 이러한 문제들이 우리의 죄와 관련된 것임 지적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것은 이 말씀이 믿는 그리스도인에게 주신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관계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우리는 예수를 믿을 때 이미 죄가 사함 받았기 때문에 죄인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사실 그 말은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주의 날이 이르기까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범죄를 하고 맙니다. 이미 죄없다하신 의인이 되었는데도 성경이 금한 범죄를 짓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범죄하여 얻은 질병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 죄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하여 주신 은혜일 수도 있습니다. 그로 하여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다고 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의인의 권세를 받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의 죄를 고하여 사함을 받는 것이 매우 중한 것입니다.

17절에는 엘리야의 기도가 예증되었습니다. 그는 우리와 같이 성정이 같은 사람이었으나 그가 기도하니 삼년 육개월 동안 비가 멈추고 다시 기도하니 비를 주고 땅에 열매를 내었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다 아는 일들입니다.

엘리야는 우리와 같이 죄성을 가진 사람이었으나 기도로서 모든 문제를 열고 해결하였습니다. 그는 자기의 육신의 생명의 곤고함에서 스스로 벗어날 수 없음을 탄식하여 스스로 주께 생명을 의탁하고 살아서 하늘에 오른 첫 사람이 되었습니다.

 미혹된 자들의 구원
끝으로 야고보는 우리와 함께 주를 믿다가 미혹하여 진리를 떠난 자들을 돌아서게 하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을 구하러 불 속으로 들어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일은 믿음과 사랑이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주께서는 종말의 날에 미혹하는 자들이 많이 나타날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계시록이 가까워 올 수록 성경은 이들에 대한 경계가 더욱 엄하여 지고 있습니다. 유다는 "어떤 자를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라 또 어떤 자를 그 육체로 더럽힌 옷이라도 싫어하여 두려움으로 긍휼이 여기라"하였습니다.

또 바울은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 이러한 사람은 네가 아는 바와 같이 부패하여서 스스로 정죄할 자로서 죄를 짓느니라"(딛3:10)하였습니다. 오늘날 교회 가운데 정말 잘못된 교훈을 가지고 나오는 사람들이 많습습니다.

그들은 하늘에 들어갈 것을 믿으면서도 도리어 주의 강림하심을 부인하며 자신의 육정을 채우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의 날은 도적처럼 다가 올 것입니다. 나는 이제 그 날을 준비하는 믿음을 갖고자 합니다. 다음주 부터는 베드로전서를 공부할 것입니다. 모두 읽어 오시기 바랍니다. 평안하시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