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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4:5) 크리스챤의 생활의식 회복

이요나 2007. 6. 28. 15:59

(야고보4:5) 크리스챤의 생활의식 회복

(약4:5)너희가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시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뇨

야고보서 4장 서두에는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너희 중'이라는 관계 대명사를 주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야고보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스라엘의 지체들에게 이 편지를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야고보는 싸움과 다툼의 원인이 정욕에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정욕이란 성적 욕망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지나친 비약 같습니다만 이것은 모두 다툼의 최종적 목적을 말한 것으로 정욕 속에 깃들인 영적인 문제를 언급한 것입니다. 

본래 인간에게 있어 욕정이란
  없었던 것입니다.  인간에게 주신 성적 욕구는 욕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생육하고 번성하기 위한 하나님 계획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하늘로부터 온 거룩한 선물입니다. 그러나 인간 속에 죄가 들어 오면서 하나님의 성적 축복은 정욕적 욕구로 바뀌고 말았고 타락한 천사들에 의해 지배받게 된 것입니다.

  1. 크리스챤의 잘못된 의식
 성경에는 인간의 욕정과 관련된 사건들이 이상하리만큼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창세기 6장에서 '하나님의 아들들'(타락한 천사)이 이 땅에 내려와 여자의 아름다움을 보고 아내로 취했던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로하여 세상은 타락하고 페괴해져서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했습니다. 

 또한 우리는 창세기 19장에서 소돔과 고모라의 성적 타락 현실을 보게됩니다. 소돔 사람들은  현지 답사를 나온 하나님의 사자들까지 강간하고자 하였습니다. 이와같이 욕정은 타락한 영적존재들에 의하여 인간을 다스리는 도구로 사용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사사기 14장에 기록된 삼손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삼손은 태어남으로부터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선택된 나실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삼손은 기생 데릴라를 향한 욕정을 절제하지 못하여 하나님의 권능을 상실하고 두 눈마저 뽑혀버렸습니다.

 야고보는 2절에서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며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여기서 인간의 욕정을 성취하기 위하여 살인과 시기가 일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사기 19장에는 미스바 맹세의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레위사람이 벧엘에서 기생 첩을 얻어 돌아 오는 길에 강도를 만난 사건입니다. 그 당시 레위인은 하나님의 일을 위해 열두지파 중에서 특별하게 선택된 지파였습니다. 그런데 레위인이 기생첩을 얻고도 부족하여 도망한 첩을 찾아 나섰다는 일은 참으로 우리를 놀라게 하고 있습니다. 

그 레위인은 도망간 기생첩을 찾아 데려 오는 길에 날이 어두어 베냐민의 마을에 묵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배냐민 지파 사람들이 몰려와 기생첩을 끌어내어 밤이 맞도록 강간하여 죽게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레위사람이 첩의 시신을 토막내어 열두지파에 보내었습니다. 이것으로 베냐민 지파는 이스라엘 각 지파의 분노를 사 멸절의 위기에 처했습니다.(삭19-21장) 

이러한 성경의 기록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택함과 소명을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지금  나는 오늘날의 한국 교회 지도자들의 성적 현실을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교회에 음풍이 불기 시작한 것은 매우 오래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주권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얻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근원과 그 목적에 대한 말씀으로 그리스도인들의 잘못된 삶의 태도와 방법을 언급한 것입니다.

 크리스챤은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믿음으로 성취된 영원한 생명의 세상에 들어 간 사람입니다. 따라서 믿는 사람들의 주권은 주인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갖고 있으시며 우리의 삶은 그 속에서 영광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잠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이 세상으로부터 현실적 핍박과 영적 압박을 받는 것은 당연한 영적 현실이지만 세상의 질서와 지배 구조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온전한 삶의 능력은  주인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기도의 원리를 상실하고 있습니다. 마치 기도란 문제가 생길 때에만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기도란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와 능력을 체험하는 도구로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영광을 발견하는 길입니다.  

물론 전지하신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하기 전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만 기도란 우리의 구원자이시며 주인되심을 증명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승인 인장과 같은 것입니다. 주님은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요14:13)하셨습니다. 

   세속적인 속성
 4절에는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그든지 세상과 벗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는 것이니라"기록되었습니다. 날이 갈수록 세상은 여성들의 시대로 변천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특히 교회에서의 활동은 여성들의 독무대같아집니다.

 바울은 하와가 먼저 범죄한 사실을 지적하였으며 하나님 나라의 영적 질서에 대하여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라'하였습니다. 또 주님은 롯을 처를 기억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세상과 벗되기 쉬운 여인들의 감정적이고 성적 속성을 경계한 것입니다.

 성경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가리켜 하나님의 벗이라는 칭호를 얻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또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의 친구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믿음의 사람들은  세상의 속성에서 벗어나 성경에 기록된 말씀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하나님과 벗하여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재발견
야고보는 5절에서 "너희가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뇨"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령에 대한 바른 인식을 갖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창조자이신 거룩하신 신성이라도 그는  우리 앞에 인격으로 오셨습니다. 인격이란 함께 먹고 말하고 교제하며 인간과 동일한 성품적 요소를 갖춘 것을 말합니다.  그와 같이 주께서 우리에게 의탁하신 성령도  우리 안에서 인격신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에게는 거룩하신 신성을 따라 사랑과 공평으로 우리를 대하시지만 그에게는 자비와 인내와 긍휼하심과 온유하심의 인격으로 우리는 대하시며 진노와 탄식으로 악을 경계하시며 책망과 위로와 권면으로 우리를 가르치시고 계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잠시 그리스도인의 신적요소에 대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영적영역
야고보서 4장에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근원에 대하여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다시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하는 기본적인 문제에 대한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의미를 좀 다른 각도에서 생각할 때 이해가 됩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구요,

 먼저 우리는 주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속에 살아 있는 신적 이방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외면적으로 볼 때에는 세상 사람들이나 똑 같은 삶을 살아가는 것 같지만 내면적으로는 그렇지 않다는 말입니다.

 믿음의 세계는 오직 그 믿음이라는 도그마 속에 또 다른 세계가 이 세상 가운데 설정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그 세계를 감지할 수 없는 것은 믿음의 세계가 이 세상과 똑 같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운행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구약에서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신적요소 속에 살아가는 천사들을 만나는 장면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지금 우리가 생각할 때 그러한 일들은 모두 설화와 같은 일이라 여겨집니다만 불과 이천년전 전에 가장 큰 신적요소가  세상의 현실 가운데 나타났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독생하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태어나신 것입니다.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는 말씀은 참으로 기이한 일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신이신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서 인격으로 역사하심을 증명하는 말씀입니다. 여러분들의 사랑하는 사람이 나보다 다른 사람을 좋아한다고 할 때 여러분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세상과 벗하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가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6절에서 야고보는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셨느니라"기록하였습니다.
 범죄한 자에게 큰 은혜를 내린다는 것은 그의  은혜가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독생자이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산제사가 전재되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다만 우리의 겸손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자신을 깨닫고 겸손하게 무릎을 꿇을 때 하나님께서는 더욱 크신 은혜를 내리시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의 은혜에 대하여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롬5:8)기록하였으며 또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롬6:1) 물었습니다.

  영적각성
이제 야고보는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하였습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인간의 욕정 속에 역사하는 그 배후의 존재가 누구인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적 타락 즉 음란과 음행은 모두 영적인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나 걱정할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겸손하여 하나님의 자녀의 자리로 내려가 주의 이름을 부르면
  하늘과 땅의 권세자이신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임하는 것입니다. 이미 세상의 임금 마귀는 십자가에서 멸망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미 그리스도인에게 역사할 수 있는 권세를 박탈당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을 가까히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된 신분으로 그의 은혜를 입지 못함은 세상을 벗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범죄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야고보는 계속하여 "죄인들아 손을 깨끗히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 하였습니다.

여기서 죄인이란 하나님의 곁을 떠나버린 사람들을 말한 것입니다. 처음부터 믿지 않은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지만 하나님을
 떠나서 세상과 벗하여 정욕대로 살아가는 사람들도 포함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경이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 기록하였기 때문입니다. 

 성결한 삶
성결은 거룩한 하나님과의 관계성 속에 요구되는 거룩한 영혼과 깨끗한 마음과 정결한 육신을 모두 말한 것입니다. 물론 영적 간음을 경계한 것이지만 우리의 몸의 정결 또한 요구하는 것입니다. 또한  두 마음이란 세상적인 마음과 하나님을 향한 마음을 말한 것입니다. 바울은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속에 있는 죄의 법 알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으로 보는도다'(롬7:22-23)고 한탄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어찌 빛과 어둠이 함께 하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함께 하겠느냐 하였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말씀이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고후6:14)과 함께 기록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멍에란 결혼관계를 언급한 것이라 할 때 그리스도인의 성결한 생활이 얼마니 중요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야고보는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하였습니다. 지금 성경은 하나님을 떠나 세상과 벗한 범죄자들에게 임한 일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벌써 그들 앞에 고통의 세월이
 나타나 있습니다. 야고보는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깨서 너희를 높히시리라"하였습니다. 이제 우리는  주 앞에서 낮아져야 합니다. 아직 그의 은혜의 시간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2. 이웃사랑의 의무

지금까지 야고보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성결된 삶을 언급하였습니다. 이제 그는 우리에게 우리의 이웃에 관한 의무를 말하였습니다. "형제들아 피차에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자로다"하였습니다.

성경의 주재는 첫째가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이며 둘째가 이웃과의 사랑의 관계입니다. 예수께서는 이 두 가지가 율법과 예언자들의 강령이라
  하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판단은 먼저 하나님 앞에 성결한 영혼과 정결한 몸이며 두번째는 이웃사랑입니다.

우리가 이웃사랑을 온전히 행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비방과 판단에 있습니다. 우리의 눈이 자신을 보지 못하는 고로 우리 앞에 두신 하나님의 형상인 이웃을 비방하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비판하는 그것으로 네가 비판을 받으리라 하셨습니다.

여고보는 "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하나이시니 능히 구원하시기도 하시며 멸하시기도 하시느니라 네가 누구관대 이웃을 판단하느냐"하였습니다. 바울은 나를 너희에게 낮추실까 두려워 한다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의 모든 주권은 우리의 구원자이시며 주인이신 그리스도에게 있는 것입니다.

 3. 그리스도인의 의식전환

야고보는 13절에서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년을 유하며 장사를 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모르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종말의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의식전환을 위한 말씀입니다. 다시말하여
 "그리스도인의 삶의 우선순위가 무엇인가?"  라는 가르침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도회지나 외국으로 나아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사람은 나서 서울로 보내고 말은 제주도로 보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우선 순위가 이익에 있다는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상 사람들과 다를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의 삶의 궁국적인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누릴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허탄한 것을 찾아 방황하고 있습니다.

야고보는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하고 이것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 너희가 허탄한 것을 자랑을 하니 이러한 자랑은 악한 것이라"하였습니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의식들을 갖고 있습니다. 주님의 뜻을 구하며 또 욕심을 따라 세상으로 나아가고 있으니 말입니다.

성경은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하였습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 인생의 우선순위가 무엇인가 생각할 때입니다. 만약 당신이 이 말씀을 읽고도 세상의 이익을 향하여 달려 나간다면 당신은 결국 이웃을 판단하고 비방하여야 하며 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지 못하고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