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강해/야고보서강해

(약1:25) 믿음생활의 완성

이요나 2007. 6. 28. 15:57

(약1:25) 믿음생활의 완성

(약1:25) 자유케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 보고 있는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야고보는 앞에서 우리 삶 가운데 다가오는 환난 즉 온전한 믿음을 지키지 못하도록 다가오는 외적 유혹을 이기기 위하여는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라 하였습니다. 모든 문제를 극복할 무기, 하나님의 지혜는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오늘은 야고보서 1장 두번째 시간입니다. 오늘은 우리의 믿음 생활 가운데 모든 사람들에게 다가오는 시험 중 마음의 시험에 대하여 살펴 보겠습니다.

12절에는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기록되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시험'이란 문맥상 내적인시험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환난과 시험을 받을 때 그것은 내외적으로 동시에 격는 것입니다만 앞에서 언급된 '시험'은 어떤 확정적인 일에 대한 외적 유혹을 언급한 것이고 12절에 언급된 '시험'은 시험을 당한 자들의 심리적 상태 즉 내적 변화에 대한 언급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시험을 참는 자에게 복이 있다는 말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우리가 겪는 '시험이 복이된다'는 이론이 됩니다. 그러나 시험을 당하는 측에서 생각하면 참으로 억울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냥 복을 주시면 될 것을 구태어 이런 시험을 통하여 복을 주시니 야속하기 그지 없습니다.

야고보는 여기서도 '참음'(dokimos)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이 말은 '도키미온'에서 파생된 말로서 금이나 은을 제련할 때 사용하는 말로서 불순물의 제거를 위한 과정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시험이 닥친 것은 나를 온전케 하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다보면 왜 하나님께서는 나를 시험하시는 것일까 생각하게 됩니다. 결국 지금 내가 겪고 있는 환난과 시험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다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이 보편적인 인간의 생각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악에게도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느하시느니라"기록하였습니다.

믿음의 역사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에 기록된 많은 믿음의 조상들을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고난과 시험과 그의 믿음 그리고 야곱의 오랜 인생살이...사사들과 다윗이 겪어야 했던 시련들.. 이 모든 것을 생각할 때 그들이 이겨낸 믿음의 역사들은 결코 작은 시련들이 아님을 알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을 살펴보면 믿음을 지킨 사람들의 고통을 볼 수 있습니다. 또 욥기서를 읽을 때 우리는 이처럼 믿음의 고통이 수반되어야 하는 것이라면 차라리 믿지 않는 것이 더 편하지 않겠는가 생각이됩니다. 최근 저는 아주 위험한 때에 처해 있습니다. 어쩌면 내 믿음 생활 가운데 가장 견디기 힘든 때가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육체적으로 견디기 힘든 것이 아닙니다. 내게 있어 육체적이란 환난은 이미 지나간 일이 되었습니다. 어쩌면 가장 힘든 시험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는 그 시험 가운데서 삼손의 고통을 보았으며 다윗의 애통함을 읽을 수 있었으며 고통하는 롯의 아픔을 겪었습니다.

지금의 나의 고통이란 짜라투스트라의 선과 악의 갈림 길에서 차라리 Limbo의 지옥을 선택한 무의미한 존재가 된 것 같은 백치의 상태에 있는 것 같습니다. 마음 한 구석에서는 욕망이 용솟음치고 있고 한 쪽에서는 무지의 세월이 나를 유혹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 가을이 어서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14절에서 야고보는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습니다. 그것은 스올과도 같고 불랙홀과도 같습니다. 마음의 깊이가 없는 것처럼 욕심의 끝 또한 보이지 않습니다.

은사의 필요성
성경은 우리에게 "내 사랑하는 형제들이 속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 배후에 어떤 존재가 우리의 욕심의 키를 쥐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믿음'을 요구 한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를 지키는 정신적 중심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은 무엇을 바탕으로 하고 있느냐가 중요한 이슈가 됩니다.

성경은 17절에서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야고보는 왜 여기서 은사와 선물을 언급한 것일까요? 이것은 우리의 믿음 가운데 설정된 신적요소를 설명한 것입니다.

만약 믿는 우리들이 믿음생활 가운데서 우리는 유혹하는 시험들 더 나아가 우리 안에 끊임없이 솟아 오르는 욕심을 끊어 낼 수 있다면 신적 지혜라던가 하나님의 능력이라던가 하는 것은 구태어 필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앞에서 말했듯이 '속지말라'라는 말 속에는 인간의 의지를 뛰어 넘는 어떤 존재들이 역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야고보가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 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고 '라고 말한 사용된 '빛'이나 '변함' 그리고 '회전하는 그림자'는 모두 천체의 질서와 변화에 사용하는 단어들입니다. 다시말하면 우리에게 주시는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은 인간의 힘으로 조장된 것이 아니라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설정된 신적요소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신비의 신적질서 가운데 우리를 섭리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야고보는 '그가 그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18)하였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믿음의 요소입니다. 바울은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느니라 하였습니다.

지식자의 속성
이제 야고보는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믿는 자들의 실천 요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속에서 우리를 속이는 그 실체를 끊어내는 비결이라고 하겠습니다. 먼저 야고보는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며 성내기도 더디하라"하였습니다.

지금 야고보는 생소한 지식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보편적인 지식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것은 우리가 다 잘 알고 있으면서도 매사에 실패하기 쉽고 또 실패의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특히 조급한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한국인들에게 있어 '말하기는 더디하고 성내기도 더디하라'는 말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여기서 야고보는 말하는 대상을 가리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라고 말하였습니다. 결국 이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믿는 형제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주를 믿어 하늘로부터 오는 신령한 은사와 많은 선물들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세상 사람들이 터득치 못한 구원의 지식과 소망의 지혜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가 많은 것을 알고 있고 어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지혜가 있다고 할 때 가장 크게 나타나는 것은 사람들 가운데 자신을 나타내기를 좋아 한다는 것입니다. 저도 한때 이러한 교만에 빠진 일이 있습니다. 또한 지금까지 우리 갈보리채플에 헌신코자 찾아 온 수많은 사람들의 실패의 원인이기도 합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일본인들은 참으로 겸손하고 온유한 편입니다. 그들은 목사가 충분히 되고도 남는 자질을 갖었으면서도 늘 겸양의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미국 사람들의 경우 그들은 매우 합리적입니다. 제가 금번 미국 방문 길에서 만난 제임스 목사는 갈보리채플에 헌신하여 7년동안 부목사 생활을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또 내가 아는 샌디에고 마이크 스토니어 목사는 맥킨토시 목사를 17년을 섬겨왔습니다. 그는 늘 겸손한 모습으로 마이크 멕킨토시 목사의 수족이 되고 있었습니다. 히라노 코오이찌 목사에 의하면 7명의 부목사들이 마이크 목사를 배반하고 떠났다고 하였습니다.

더럽고 악한 일
20절에는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하였습니다, 이것은 조급함의 연장과정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남의 말을 듣지 않고 성급히 자기 주장을 피력하다보면 상대에 대한 이해력이 부족하여 상대와 적을 이루기 쉽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의 주장을 피력하고 싶은 욕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조급하고 성내고 하는 일들이 '더럽고 악한 일'들 가운데 있어 영혼을 구원하는 데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21절에는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어버리고 능히 너희 영혼을 구원할 바 마음에 심긴 도를 온유함으로 받으라'하였기 때문입니다.

야고보는 22절 이후에서 매우 강한 어조로 온전한 믿음의 실천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그는 계속하여 '누구든지 도를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사람과 같으니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리거니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 속에서 야고보는 상당히 고조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그는 평범한 성도가 아니라 그 당시 예루살렘 교회를 이끌어 가는 민족적 대표의 위치에 있습니다. 교회에 있어서 그의 위상은 사도행전 15장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온전한 율법
야고보가 이처럼 강경한 어조로 믿음의 도의 실천을 언급한 내용들은 어쩌면 바울의 가르침과 대칭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은 구원의 원리를 설명한 것이고 야고보는 믿는 자의 삶의 태도를 언급한 것입니다. 또한 이것은 믿음의 기업을 상속받을 자들이 당연히 지켜야 할 믿음의 완성에 속한 것입니다.

야고보의 주장은 25절 이후에서 더욱 강경해 지고 있습니다. '자유케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 보고 있는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이라" 아마 이 당시 크리스챤들도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축복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는가 봅니다. 야고보는 행함의 결과를 축복에 촛점을 마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야보고의 논지가 '온전한 율법'에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당시 그리스도인의 복음의 핵심은 은혜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믿음 생활 속에 가장 신학적 논란이 되어 온 율법적 행위에 대한 믿음의 권고는 또 다른 소요의 소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야보고의 논지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바 "내가 율법을 페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는 말씀 가운데서 살펴야 할 부분입니다.

야고보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하였습니다. 여기서 경건은 예배자들의 믿음 상태를 의미합니다. 자기는 온전한 예배자라 하면서 언행이 일치하지 않는다면 그의 예배는 헛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역활
이제 야고보는 믿음의 실천적 방향을 제시하여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라"하였습니다. 야고보는 앞에서 가르침에 대한 온전한 행함을 요구하다가 갑자기 고아와 과부를 돌아 보는 일과 세속에 물들지 않는 믿음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앞에 놓인 사회적 현실을 바라보면 야고보가 왜 이런 말을 하였는가 이해가 됩니다. 지금 사회는 극도로 심각해져가고 있습니다. 전세계 각국 모두가 자국의 경제 문제를 해결해 나가고자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물질 문명이 고도로 발달하고 있는 상황인데도 인류의 최고 문제는 식량의 고갈을 해결하지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IMF를 지낸지 얼마되지 않았는데 국가적 채무는 그 당시보다 몇배로 증가하고 국가 경제는 파탄의 위기에 몰린듯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또 한가지 문제는 인류의 고령화입니다. 오늘 신문을 보니까 우리나라 인구중 3사람 이상이 55세 이상의 노인 한 사람을 봉양해야 한다고 합니다. 어느 지방에서는 돌잔치보다 장례식이 늘어가고 있다고 합니다. 인구의 증가는 없고 의학을 발달로 세상은 고령화 시대로 가고 있습니다.

문제는 경제가 파탄 날 경우 근본적으로 발생되는 것은 고아와 과부들입니다. 즉 보호체계가 무너지고 마는 것입니다. 이미 벌써 무너진 상태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를 교회가 떠맡지 않으면 우리의 믿음은 헛것이라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끝에서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는 믿음생활' 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보나 나은 삶을 추구하며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정말 향상된 삶을 영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의 본질에서 벗어나 세상 사람들 속에서 사치를 누리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누가 크리스챤이고 누가 세상 사람인지 구분을 할 수 없는 시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성경은 야고보를 통하여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방종된 생활을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2장에서 뵙겠습니다.

'신약강해 > 야고보서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야고보 3:17) 성결과 화평의 지혜  (0) 2007.06.28
(야고보2:26)믿음의 실체  (0) 2007.06.28
(약2:8)최고의 법  (0) 2007.06.28
(약1:2) 시험의 기쁨  (0) 2007.06.28
(약1:1) 에클레시아의 근원  (0) 2004.1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