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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1:2) 시험의 기쁨

이요나 2007. 6. 28. 15:56

(약1:2) 시험의 기쁨

(야고보1:2)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오늘은 야고보서 두번째 시간입니다. 설교를 들으시는 분들은 함께 듣게 되겠지만 텍스트는 너무 긴 내용인 관계로 몇 단락으로 나누어서 강해를 할까 합니다. 갈보리채플 제2도약의 첫발을 내밀면서 제가 야고보서를 택한 이유는 오늘 나와 함께 갈보리채플 사역에 동참하신 여러분들이 모두 시험 가운데서 연단을 받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는 야고보서는 신약 속의 잠언이며 연단 가운데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주의 권면입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여러분들이 힘을 얻을 수 있고 또 오늘의 환난을 이겨 낼 수 있다면 여러분들은 그리스도의 은혜와 평강을 입은 자들입니다.

주의 형제이며 종이된 야고보는 초대교회의 지도자로서 전세계 가운데 흩어져 있는 열두지파에게 격려와 위로와 권면의 메시지를 전하였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흩어져 있는 열두지파란 꼭 유대인들이라고만 생각해서는 않될 것입니다.

지금 주의 종 야고보가 말하는 전세계 가운데 흩어진 열두지파 즉 '디아스포라'라는 의미는 '에클레시아' 즉 교회의 모체로서 그 당시 예루살렘에 밀어 닥친 정치적, 환경적(기근) 환난 때문에 수많은 초대교회 성도들이 고국을 등지고 이방으로 흩어져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전 세계 속으로 들어가 우선 그곳에 있는 유대인들을 만나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개척하기에 이르렀기 때문에 여기서 말하는 '디아스포라'는 '에클레시아'로 편천되어 가는 과정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누가 형제인가?
먼저 야고보는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2절) 하였습니다. 여기서 형제라는 호칭은 오늘날까지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공식적인 호칭이 되었지만 아주 특별한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형제란 본래 한 어버이로부터 피와 살을 나누어 받은 혈육의 관계를 갖어야 하며 또 조상으로부터의 가계를 이어 받아야 합니다. 조상의 가계를 이어받는다는 것은 각 조상들의 명예와 영광을 이어 받는다는 의미가 됩니다. 따라서 그 혈통을 중요시하는 가문에서는 족보를 귀하게 여겨왔고 특히 하나님의 택한 백성 이스라엘의 열두지파들은 자신의 가계를 매우 중요시 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형제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우리는 서로 국가도 다르고 민족 또한 다르고 부모 형제도 다른 입장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말하는 형제의 의미를 우리도 함께 이어 받을 수 있는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이 진리는 변하지 않는 성경적 진리입니다.

기업을 이어 갈 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형제라고 부르는 것은 피와 살을 나눈 형제의 의식을 갗주었기 때문이며 그로서 한 아버지 즉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우리와 한 형제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나라의 기업을 함께 이어받았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6장에는 오병이어의 기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께서는 이 때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어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요6:56-57) 하셨습니다.

또 주님은 마지막 성찬상에서 떡을 떼어 주시며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기념하라"하시고 식후에 잔을 들어 축사하신 후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눅22:19-20)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살고 피를 함께 먹고 마시는 우리는 이미 그의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요1:12)를 얻었고 또 그의 은혜로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유심히 살펴 보아야 할 말씀은 주께서 말씀하신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하셨을 때 너희'가 과연 누구인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롬8:17)하였고 다시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하였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한 바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란 의미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 동참한 사람들이 모두 주의 형제가 될 것이지만 그는 특별히 맏아들에 촛점을 마추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미리 아신 자들로 형제 가운데 후사를 이어갈 맏아들이 되게 하셨음을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온전한 기쁨
주의 형제 야고보는 여러가지 시험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의 산넘어 산이요 강건너 강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믿음을 산에 비하였고 교회를 강에 비유하였는가 봅니다. 저는 서울 갈보리채플을 개척하면서 정말 견딜 수 없는 아품과 눌림을 겪어 왔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으로 갈보리채플 안에서 같이 형제된 형제로부터의 무시와 기근으로부터의 고통 그리고 내적인 눌림은 차라리 세상살이로 오는 고통이었다면 능히 견디기 쉬웠을 것입니다. 세상적인 일들은 세상적인 방법으로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야고보서에서 말하는 '시험'은 킹제임스에서는 '유혹'에 해당하는 말로 번역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는 세상으로 부터 받는 유혹이 아니라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한 유혹' 즉 그 시험이 내 스스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나를 부르시고 내 삶의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분에 의하여 준비된 환경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분명한 목적이 있는 것이고 그 문제에는 확실한 답이 있는 것입니다. 다만 그 문제에 대한 답을 내 스스로 풀 수 없다는 것이며 나로서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그 문제 속으로 나를 유혹하신 분에 의하여 온전한 목표가 달성될 때까지 온전한 인내를 이룰 뿐이라는 것입니다.

온전한 인내
야고보는 3절에서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기록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를 부르신 주로부터 오는 시험은 오직 믿음이라는 도그마로 견디어 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믿음의 도그마가 은이나 금을 만들어 내는 연금술과 같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시련이란 단어는 가장 좋은 은을 얻어내기 위하여 풀무불에 일곱번 제련하는 과정을 언급한 것입니다. 그러는 동안 불순물은 모두 제거되고 100%의 순전한 은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또한 여기서 '안다'라는 단어는 부부가 서로를 알듯이 믿음의 사람들은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다시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4절) 하였습니다. 여기서 '인내'(휘포모네)란 어떤 환난과 고통에 대하여 참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 문제에 환난을 극복하고 이겨내는 능력이 포함된 말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휘포모네'라는 단어는 '아래에 머물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인내를 온전히 이룬다는 것은 그 문제의 상황이 어디로부터 온 것인가를 아는 믿는 자들은 그 주어진 상황을 도피하던가 세상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려 하지 말고 그 환경을 허락하신 주의 뜻이 무엇인가 생각하며 오로지 믿음 안에서 그 의 뜻과 계획을 이루기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주님은 물론 우리의 그러한 상황이 오지 않도록 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여러가지 시험을 허락하고 계십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사단이 밀까브르듯 너를 청구하였으나 내가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다'하셨습니다. 우리가 왜 주께서 사단이 나를 청구하도록 내어버려 두셨을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만약 이것을 해결해 주면 우리의 믿음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우리가 자녀들에게 스스로 자신 앞에 있는 일들을 해나갈 수 있도록 지켜 보듯이 주님은 우리 앞에 닥친 문제들을 우리가 믿음으로 극복해 나가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4장을 보면 주님과 함께 탄 배에 폭풍이 불어 왔습니다. 그때 주님은 제자들에게 믿음이 없는 자들아 왜 두려워 하느냐 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두려움은 그들이 믿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와 자신들과의 관계 그리고 그 분의 능력을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만약 그분에 대한 확실한 믿음과 확신이 있다면 결코 걱정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설혹 우리가 그 시련을 이기지못하여 죽는다고 합시다, 그러나 죽은 자 가운데서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의 능력은 또 그 아들을 믿는 우리를 살리실 것이며 우리는 이미 주의 은혜로 영원히 죽지 않는 영생에 이르는 생명을 받은 자들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시 말라 공중의 나는 새들을 보라 창고에 거두지도 않아도 산다 말씀하시며 너희는 그것들 보다 귀하지 안느냐 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존재가 어떤 위치에 있는가를 깨우치신 말씀입니다.

완벽한 자를 만들기 위하여
여기서 '온전하고'라는 말은 기정적인 목표에 대하여 완전하다는 말이며, '구비하여'란 모든 부분에서 왁벽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즉 하나님 앞에 선 제사장의 자질과 위치를 말합니다. 다시말하면 인간의 미숙함이나 부족함이 없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또 여기서 '부족함(레이페스다이)이 없게'라는 의미는 군대가 투쟁을 포기하였을 때에는 목표에 도달하지 못한 상태일 때 사용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허락된 시험은 능력면에서든지 또 자질면으로든 어떤 면에서든지 절대로 부족한 상태가 되지 않기 위하여 허락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욥의 고난과 인내를 공부하였습니다. 욥의 고난은 그를 위한 것이라기 보다 그리스도안에 예정된 주의 형제들이 견디어야 할 인내를 언급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지식을 갖고 있을 때 결코 두려워 하지 않을 것이며 능히 이길 힘을 주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기뻐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방법
그러면 우리 삶 속에 다가온 시험들 즉 우리의 온전한 믿음 생활을 방해하는 세력들을 어떻게 극복하여야 할까요? 이에대하여 야고보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이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하였습니다.

여기서 '지혜'란 헬라철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어떤 사물에 대한 인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문제에 대하여 취할 수 있는 행하는 합당한 신적 자질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론적이고 추상적이고 지혜가 아니라 실제적이고 합리적인 지혜인 것입니다.

극복의 대상-누구든지
야고보의 권면 중에서 흥미로운 것은 '누구든지' '모든 사람'이라는 구절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지혜의 평등함을 언급한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과 하나님과의 다른 점입니다. 인간은 자기 자식이라 할지라도 편견을 버릴 수 없습니다. 자기와의 관계적 신뢰에서 더욱 가까워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물은 주를 믿는 모든 자에게 공평하십니다.

극복의 조건-믿음
야고보는 계속하여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하였습니다. 여기서 믿음이란 단어는 가장 합리적이고 효과적인 말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받을 수 있는 단 하나의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는 말은 우리에게 커다란 용기와 위로를 주는 말입니다. 이 말씀 가운데는 의심할 수 있도록 그 시기가 오래 걸릴 수 있음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고난이란 참으로 인간을 참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믿음에서 떨어져 나가 자신의 방법으로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애를 쓰곤 합니다.

하나님의 섭리
야고보는 9절에서 아주 흥미로운 말을 하고 있습니다,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우리는 이 내용을 읽으며 왜 이런 말이 여기에 나와야할까 의아스럽기까지 합니다.

이 말은 앞에서 잠간 언급한 하나님의 공평하심을 실행하는 하나님의 원리 즉 세상을 운향하시는 하나님의 질서를 언급한 것입니다. 이 땅에 많은 사람들이 한 세상 살아가면서 팔자타령을 하게 됩니다. 대대로 이어지는 고관대작이나 재벌들을 볼 때 빈곤한 생활을 면치 못하는 서민들은 사람의 팔자가 태어날때부터 정해진다고 생각합니다.

11절에는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우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기록되었습니다. 성경기자들은 인생의 부귀영화를 자고나면 지어버리는 풀의 꽃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전도서를 보면 인생의 무상함을 알 수 있습니다.

최근 재벌들이 살얼음판을 살고 있습니다. 수십년 동안 한국경제를 일으키며 전 세계 가운데서 그 위상을 날리던 재벌들이 자살을 하고 어느 때 무너질까 두려워 노심초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하나같이 상상할 수 없는 재물을 걸머지고 그것을 지키려고 안간 힘을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해는 곧 지게 마련인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우리 삶 가운데 다가오는 환난과 시험을 이기는 방법을 공부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모든 환난보더 우리를 견디지 못하게 하는 시험이 무엇인가를 살펴 보고 그것을 이길 수 있는 힘과 방법이 무엇인가를 공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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