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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11:1) 믿음의 현주소

이요나 2007. 6. 28. 16:04

(히브리서11:1) 믿음의 현주소

 

(히11:10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한 것들의 증거니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의 장으로 불리우는 말씀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 사랑의 장과 함께 믿는 자들에게 아주 중요한 믿음의 원리와 각오를 심어 주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사실 이 내용은 우리들의 믿음을 일깨워 주는 매우 중요한 말씀이 되겠습니다.

 

최근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날이 갈수록 종교화 되고 있습니다. 믿음이란 것이 종교의식 속에 가려져 그 실체가 퇴색되어가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의 믿음이 종교적 이슈나 지식에 불과하다면 그리스도교가 다른 종교들과 다를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은 신비의 능력과 은혜와 바랄 수 없는 소망을 전재로 하고 있는 하나님 아들의 유산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은 3단락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먼저 1절부터 12절까지에서는 믿음의 현실에 대하여 증거하고 있으며 13절부터 16절에서는 믿음의 현주소을 증거하고 있으며 17절로 40절에서는 믿음의 실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A. 믿음의 이상

히브리서 기자는 서두에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기록하였습니다. 기자는 먼저 믿음이 주소가 현실적이지 않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복음의 시작이 아주 비현실적인 환경 속에서 이루어 지고 성취되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마리아에게로의 탄생과 성령의 비들기 같이 임하심이라든가 오병이어나 바다 위를 걸으신 것이나 소경을 눈뜨게 하신 것이나 죽은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살리신 것이나 이러한 사실들은 현실적인 질서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믿음이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는 말은 믿음이 비록 세상의 질서 속에 속해 있지 않더라도 이 세상과 공존할 수 있음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의 믿음이 세상의 질서 속에 속한 것이라면 우리도 다른 종교와 다를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세계가 이 세상의 질서를 따르지 않으면서 이 세상의 질서가 공존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지혜로 설명할 수 없는 불가사이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창조주가 창조의 틀 속에 들어 갈 수 없는 것은 창조자는 처음부터 스스로 계신 전능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세상의 질서 속에서 공존할 수 있는 것은 피조물을 창조하신 자가 피조물을 친히 다스릴 수 있기 때문이며 세상의 모든 질서가 그의 뜻 안에서 운행하며 또 그가 친히 피조물 가운데 한 사람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1. 믿음의 정의

기자는 3절에서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기록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믿음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지만 그 믿음의 현주소는 창조하신 세계 속에 나타나는 것임을 증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에 대하여 생각할 때 먼저 알아야 할 것은 믿음의 세계는 이 세상의 질서에 속하지 않았다는 것과  시대와 환경을 떠나서 믿음의 실체는 믿음의 주관자의 뜻을 따라 현실 속에서 성취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믿음의 성취가 이 땅에서가 아닌 다른 세계속에서 성취되는 것이라면 히브리서 기자가 보지 못한 것들의 증거라는 말을 기록하지 않았을 것이며 또한 성경의 역사는 믿음의 증거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이런 관계로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다'라고 기록한 것입니다.

 

 2. 믿음의 출발선

기자는 4절에서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기록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창세기에 나오는 아담의 아들들에 대한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만 기자는 여기서 믿음의 대상과 관계성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은 하나님과 조인된 사람과의 관계성 속에서 먼저 선행되어야 할 조건이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아벨이 '의로운 자'라는 증거를 얻은 것은 그가 하나님께 드린 예물과 관계가 있다고 한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은 행위에 있지 않고 은혜에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변하지 않는 진리입니다. 믿음은 행위에 있지 않고 은혜에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이 은혜로 주어지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흐리신 공로가 선행된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벨은 저주의 땅에 것을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실 것을 아시고 생명의 피로 하나님께 나아갔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생명의 호흡 즉 살아있는 생명의 것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피는 하나님께 속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3. 믿음의 종착역

세번째로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기록하였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여기서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올리워진 에녹을 우리 앞에 증거하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자의 의도는 그가 살아 있는 동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증거를 받은 것에 우리의 시선을 돌리고 있습니다.

 

지금 성경은 믿음의 현실성을 우리에게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말하여 "믿음이 없이는 기쁘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하였습니다.

 

이미 아벨로 하여 친히 거룩한 피의 제사를 드렸으므로 그 희생의 은혜를 입은 자들은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데 그 삶의 목표가 하나님이 계신 것과 상 주시는 자이심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도그마가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B. 믿음의 현실

그러나 문제는 믿음의 세계는 믿음의 완성이 도달하기까지 지켜야할 의의 신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기자는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증거하였습니다.

 

성경은 지금 우리에게 의의 후사에 대한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울 서신에서 누누히 언급된 하나님 나라의 기업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우리에게 주의 강림하심을 기롱하는 자들이 있을 것을 경계하라 하였습니다. 그들은 바로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을 부인한 자들로 멸망의 거짓선생들인 것입니다. 

 

베드로는 주께는 하루가 천년같고 천년이 하루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하며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하는 것처럼 더딘 것이 아니라 하였습니다. 또한 바울은 우리에게 육체의 부활이 없다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들이 될 것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물로 멸망을 당한것처럼 이제 세상은 불로 심판당할 날을 남겨 놓고 있는 것입니다.

 

 1. 믿음의 순종

8절에서 기자는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 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하였습니다.

 

우리가 갈 곳을 알지 못하고 나아간다는 것은 쉽지 않은 결단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눈으로 확인하지 못한 곳을 향하여 오직 믿음으로 나아갔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부르신 자의 명령에 대해 순종이 필요한데 순종은 나를 부르신 자가 누구인 것을 확실히 알 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을 알며 그가 부르신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알아야 한다고 한 것입니다.

 

여기서 경영이라는 말은 본래 건축가나 예술가를 의미합니다. 다시말하여 어떤 일을 창업하여 그 원하는 것을 완성하는 자를 말합니다. 어쩌면 이것은 인류 세계에 아름답게 꽃피울 그리스도의 문화와 예술을 말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2. 믿음의 능력 

히브리기자는 11절에서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앎이라 이러므로 죽은 자와 방불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허다한 별과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하였느니라" 기록하였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4장에서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믿었으니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였다 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온전한 믿음생활을 저해하는 요소는 불가능이라는 불신에서 비롯됩니다.

 

주님은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다고 하셨으며 제자들의 믿음 없음을 책망하셨습니다. 나는 이 말씀을 보며 늘 현실 속에서 자신의 한계를 생각하는 나의 어리석음을 돌이켜 보게 됩니다. 그리고 과연 어떻게 하면 바람을 잠재우고 바다 위를 걸으며 앉은뱅이를 일으킬 수 있는 믿음이 생기는 것일까 생각하게 됩니다.

 

과연 이러한 사실들이 가능한 것인지 아니면 성경에 기록된 역사적인 사실인지...우리가 처해 있는 믿음의 현실은 연약한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도 우리와 같이 위협을 받는 현실로부터 믿음의 증거를 받은 것입니다. 

 

B. 믿음의 현주소(13-16)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땅에서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리운 사람들은 모두 영원한 믿음의 현실을 성취하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한번 죽는 것은 정한 이치라 하였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에게 죽음이라는 것이 없으면 부활이라는 신비의 세계도 체험할 수 없을 것입니다.

 

물론 그리스도의 날을 맞는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죽음을 보지 않고 에녹의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만 우리는 이 땅에서의 영원한 생명을 성취하는 소망을 갖고 다음 세상으로 달려 나가야 할 것입니다,

 

히브리 기자는 "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못하였으되 그것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중거하였으니 이 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을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하였습니다.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기 위하여 죽는 것이 소망이나 너희를 위하 살아 있는 것이 유익이라 하였으며 베드로 사도는 주께서 지시하신 것 같이 나도 이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을 안다 하였습니다.

 

만약 우리가 이 세상을 고집한다면 이 세상의 고난도 함께 고집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이 이미 심판을 받기로 작정이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의의 자녀들이 세상과 함께 심판을 받을 수 없는 것은 주께서 내가 온것은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아들로 하여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함이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을 이룬 후에 약속하신 영원한 기업을 받기 위해 오늘의 고통을 인내하는 것입니다. 히브리 기자는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을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기록하였습니다.

 

 창조자 하나님께서 죄인 된 우리의 하나님이라 일컬음을 부끄러워 하지 않는다는 말씀은 참으로 우리를 만족케 하시는 영광의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미 주께서는 죄인들의 동류라하심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가시관을 쓰셨습니다. 이것은 우리로 영원한 하나님의 기업을 받게하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믿음의 증인들의 진술을 통하여 믿음의 이상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