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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7:4)십일조의 증거

이요나 2007. 6. 28. 16:07

(히브리서7:4)십일조의 증거

 

(히7:4)이 사람이 어떻게 높은 것을 생각하라 조상 아브라함이 노략물 중 좋은 것으로 십분의 일을 저에게주었느니라

 

우리는 앞에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전리품에서 십분의 일을 받고 아브라함을 축복한 살렘 왕 멜기세덱에대하여 살펴 보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멜기세덱이 그당이 가나안 땅의 실존인물이냐 아니냐에 대한 논쟁이 아니라 멜기세덱이 어떤 사람이였는가에 대한 지혜를 얻어야 할 것입니다.

 

바울은 흥미롭게도 7장에서 멜기세댁의 위대함을 설명하며 아브라함이 그에게 드린 십분의 일을 주제로 삼은 것입니다. 바울은 증거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높은 것을 생각하라 조상 아브라함이 노략물 중에 좋은 것으로 십분의 일을 저에게 주었느니라"하였습니다.

 

*아브라함과 레위의 관계

계속하여 바울은 "또한 십분의 일을 받은 레위도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십분의 일을 바쳤다 할 수 있나니 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아직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니라"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사실 오늘을 사는 우리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라 생각하여야 합니다.

 

바울은 로마서 아브라함이 믿으니 그를 의로 여기셨으며 그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라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라 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저희에게 당한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고전10:1-11 참조)하였습니다.

 

바울이 믿음의 조상들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대제사장 멜기섹덱에게 십분의 일을 드렸다는 말을 누누히 강조하고 있는 것은 오늘날 이 말씀을 듣는 우리에게 좀 어색한 기분이 들게 합니다. 또한 이 내용들은 믿지 않는 자들은 도대체 하나님은 왜 돈을 좋아 하느냐는 항변의 자료가 되기도 합니다.

 

*아브라함과의 거래

여기서 우리는 십일조에 대한 의미를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솔직히 말하여 아브라함과 멜기세덱의 거래의 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을 승리로 이끈 하나님을 찬양하며 아브라함이 탈취한 승리의 노략물 중 가장 좋은 것으로 십분의 일을 받고 그를 축복하였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승리가 인간의 힘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에 있었음을 증거하는 증거물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집에서 길리운 하인들 318명으로 그 당시 가나안의 아홉 왕들을 지배하고 있는 그돌라오멜 왕을 쳐부셨던 것입니다. 그돌라오멜은 자기를 배반한 소돔과 고모라의 다섯 왕국의 연합군을 멸하고  다시 가나안의 패권을 쥐고 있었던 그 누구도 대적할 수 없는 그 당시 최고의 권력자로 군림하였던 왕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승리는 자신의 능력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자기 혈육의 생명을 구원하려는 의로운 마음과 오직 의인의 길을 축복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승리였던 것입니다. 그 전리품들이 그 중거였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여 당신의 능력이 나와 함게 하였던 증거가 여기 있으니 영광을 받으라는 믿음의 증거입니다.

 

*승리의 주체와 주권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인이란 칭호를 얻은 아브라함이 그를 대적하는 세력으로부터 지키시는 능력과 권세가 하나님께 있음을 증거한 것이 십일조인 것입니다. 오늘날 당신의 손을 통하여 들여지는 십일조가 그리스도 앞에 있다면 당신은 이 세상을 그리스도의 힘과 능력을 살아 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 가운데서 당신의 생명이 존재하고 있는 것은 그의 능력이 함께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최근 젊은이들 가운데 십일조에 대한 관심이 식어져 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꼭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려야 축복을 받을 수 있느냐 하나님은 돈을 좋아하시냐 결국 그동은 교회가 받고 또 목사가 사용하는 것이 아니냐 라고 말하기까지 합니다.

 

이러한 논쟁을 하는 사람들은 먼저 자신과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다시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다시말해서 나의 믿음이 어디에 있는가에 부터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러한 생각을 하는 것은 자신의 구원에 관한 문제에서부터 잘못된 지식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여서 구원 그 자체는 영혼에 관한 것으로서 우리가 죽은 후에 있을 일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성경은 믿음의 결국은 영혼의 구원에 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 믿음의 종착지를 설명한 것이지 우리의 믿음 생활의 무효성을 언급한 것은 아닙니다.

 

만약 어떤 이들이 말하는 것처럼 우리의 구원이 영혼에 관한 것뿐이라면 우리가 구태어 고난에 동참할 필요도 없고 세상 사는 동안 적당히 살아가도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인된 우리의 주체를 송두리채 부인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의 구원은 믿음이 선행되어야 할 것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의인이 그 의로움을 상실하면 이미 그는 더이상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목적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은 우리의 온전한 영과 혼과 몸이 그리스도의 영광에 이르는 것입니다. 이미 모든 죄에서 구속함을 얻어  의인이 된 우리는 세상의 세력이 아닌 그리스도의 권세에 있는 것이며 그 능력은 그리스도를 주로 믿는 믿음 가운데 역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세상에서 구별되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 성령의 능력으로 정당하고 의로운 삶을 살고 있느냐는 것이지 교회를 나가는 것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의로운 그리스도인으로 사단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넉넉히 살아가는 힘은 나의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고 의인의 믿음 속에 역사하는 하나님의 능력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세상은 믿는 우리로 하여 그 믿음에서 나와 세상의 모습 속에서 살아가도록 유혹합니다. 그 도구가 물질이며 육신의 욕망이며 성적인 유혹인 것입니다. 그러나  나와 나의 가족을 참소하며 해치는 사단의 권세에서 거룩한 의인의 믿음을 상실하지 않고 인내로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간다면 당신은 세상을 지배하는 권력를 무너 뜨리고  하나님 앞에 그 증거를 갖고 나갈 전리품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드릴 것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의 결국 의로운 믿음의 사람으로 살아가지 못하고 있음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직 담대한 믿음으로 당당히 세상과 맞서서 싸워 나가는 사람이라면 그는 전쟁에서 승리하고 그 전리품의 좋은 것을 주 앞에 드리는 당당한 믿음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주님은 이러한 사람을 기뻐하시며 축복하실 것입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오늘날 누구로 인하여 구원에 이르렀으며 우리가 믿는 바가 어디에 있으며 또한 우리의 믿음의 결국은 어디에 있는가에 대한 변론은 사실 무익한 것입니다. 바울이 오늘 이처럼 강경한 어조로 구약에 기록된 사실들을 열거하여 증거하는 것은 우리 중에 예수 그리스도보다 다른 것을 더 앞세우고자 하는 풍조가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디 당신의 손에 드릴 것이 있게 하십시요, 당신의 의로운 믿음 안에 풍족한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하실 것입니다. 주께 드리는 십일조는 세상을 의롭게 살아간 당신의 믿음의 증거입니다. 의롭지 못한 재물은 당신에게 커다란 고난의 씨가 될 것입니다.

 

베드로는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이 있다 하였고 다시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데 악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보다 나으리라 하였습니다. 믿음의 당신 가운데 주 예수 그리스도의 권력이 세세무궁토록 함께 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