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7:1)살렘왕 멜기세덱
(히7:1)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임금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
오늘 우리가 살펴 볼 히브리서 7장은 히브리서 중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에 해당하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의 성도들로 하여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능히 이해할 수 있도록 기술되였고 히브리서 기자 또한 충분한 자료들을 인용하여 우리의 사고와 이해를 돕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히브리서를 포함한 성경의 여러 부분을 어렵게 생각하는 것은 성경을 교리적인 측면으로부터 접근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말씀을 담당한 설교자들이 성경 전체의 지식을 합리적으로 터득하지 못한체 신학적인 측면에서 교리적 연구에 치중해 왔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예수께서는 천국의 비밀을 가르치시면서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삼가 주의하라'하셨고 다시 '너희가 어떻게 들을 것인가 삼가 주의하라'하셨습니다. 이것은 성경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를 언급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공부할 히브리서 7장은 신학적 교리의 측면에서 접근할 것이 아니라 설교자가 우리에게 무엇을 권면하려고 하는가에 그 촛점을 두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설교란 회중의 합리적인 이해와 공감이 전재되어야 하기 때문에 설교자가 제시한 증거들이 귀납적으로 증명되지 않으면 않됩니다. 얼마전 저희 교회 청년이 멜기세덱과 예수님에 관한 질문과 관련하여 엘리야와 세례 요한에 관한 역학적 관계를 질문한 일이 있습니다. 그 청년은 멜기세덱과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엘리야와 세례 요한의 이중적 해석에 대한 이해가 쉽지 않았던 것입니다.
나는 청년에게 그 부분을 설명함에 있어 어려웠던 것은 그 청년과 나 사이에 놓인 성경적 지식의 차이도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그 청년과 내가 성경을 대하는 입장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었습니다. 한마디로 그 청년은 닭이 먼저냐 겨란이 먼저냐에 촛점을 두었고 나는 성경의 창조의 질서와 섭리에 해석의 틀을 둔 것입니다.
*히브리인의 성경 사유법
오늘 우리가 히브리서 7장을 효과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히브리 사람들의 성경을 대하는 태도를 먼저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성경을 이해함에 있어 크게 두가지 방법을 통하여 사추(思追)하였는데 먼저는 성경에 기록된 내용을 토대로 이해하는 방법이며 또 다른 하나는 성경이 침묵하고 있는 내용에 대한 침묵적 사추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것도 해석의 한 방법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먼저 히브리인들은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네가지 방법을 적용하였습니다. 그 첫째는 '페사트'(peshat)로서 문자 그대로 해석을 하는 것이고 두번째는 '레마즈'(remaz)로서 영감을 통한 암시적 해석이며 세번째는 '데러쉬'(derush)로서 장시간 검토와 연구를 통해 터득하는 것이며 네번째로 '소드'(sod)로서 비유 속에 감추어진 내면적인 의미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논리학의 4대 법칙
또한 그 당시 헬라 철학자들은 새로운 지식을 확증하기 위해 논리의 네가지 기본적인 틀을 세웠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논리학의 4대원칙이 되었습니다. 먼저 논리학에는 '확인(긍정)의 법칙'이 있습니다. 이것은 '모든 만물의 정체는 그 자체가 증명한다' 논리입니다.
논리학의 두번째 법칙은 '모순(부정)의 법칙'으로 '무엇이든지 자신이 아닌 것은 결코 아니다'라는 논리입니다. 이것은 긍정의 법칙과 반대되는 논증이라 하겠습니다. 세번째 법칙은 '양시양비 불가의 법칙'입니다. '하나가 사실이 아니면 다른 하나는 거짓이다'라는 논리로서 이것은 그림자와 본체를 설명할 때 그림자가 본체를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본체로서 그림자의 허상을 증거하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논리학의 네번째는 '사유의 법칙'입니다. 이것은 모든 결론은 그 결론을 충분히 정당화 시킬만한 근거에 입각해야 하는 법칙입니다. 따라서 누가 어떤 사실을 증명하려면 이 네가지를 모두 충족 시켜야 합니다, 만약 누가 이 네가지 법칙을 충족 시키지 못하였다면 그 논리는 인정을 받을 수 없습니다.
*제사장의 성경적 접근
히브리서 기자는 3장 1절에서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말하였으며 다시 4장 14절에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라고 권면하였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히브리서를 공부하는 우리는 설교자가 히브리서 전체에서 우리에게 이 두가지 주제를 설명하고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예수께서 대제사장이신 것을 증거함에 있어 하나님의 제사장 멜기세덱과 함께 율법으로 세운 제사장의 제도에 이르기까지 많은 자료들을 할애한 것은 우리의 성경적 시야를 넓혀 편협된 신학적 사고로 둔해진 회중들의 인식의 공간을 새롭게 조명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의 듣는 것이 둔함으로 해석하기 어렵다' 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먼저 살펴볼 것은 제사장이란 종교적 용어입니다. 제사장이란 하나님과 인간과 맺은 계약적 관계 가운데 설정된 교량적 역활을 하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의미로 라틴어 제사장(pontifex)은 '다리를 놓는 자'라는 의미가 되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7장에서 성경에 기록된 제사장에 관한 두 가지 사실적 근거를 우리에게 제시하였는데, 먼저 창세기 14장에 언급된 하나님의 제사장 멜기세덱을 소개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속한 분이심을 증거하였고 그 다음은 종교적 제도를 위해 율법으로 세운 이스라엘 백성의 제사장 직분을 통하여 그 속성을 소개하였습니다.
여기서 그가 우리의 대제사장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 창세기 14장에 소개된 하나님의 제사장 멜기세덱과 모세를 통하여 율법의 제도로 세운 제사장직을 대비한 것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두 가지 속성을 먼저 이해 시키려는 의도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위해 설교자는 8장 이후에서 모형론과 본체론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제사장의 어원적 성경해석
히브리서 기자는 7장 서두에서 "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임금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하였습니다. 이것은 6장 마지막 절에서 언급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가셨다' 는 주제를 귀납적으로 증명하기 위한 해석 부분입니다.
그러나 히브리 기자는 2절에서 "아브라함이 일체 십분의 일을 그에게 주니라 그 이름을 번역한 즉 첫째 의의 왕이요 또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증거하여 아브라함 보다 위대한 왕이 있음을 증거하였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멜기세덱의 이름을 번역하여 "그 이름을 번역한즉 첫째 의의 왕이요 또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하였습니다.
여기서 기자는 성경을 사추하는데 있어서 문자적인 해석의 중요성을 우리에게 예시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 아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호칭도 '구원자' 그리고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의미입니다. 천사는 마리아에게 예수라는 이름의 의미를 설명하여 주었습니다.
여기서 '의의 왕'이란 의미는 하나님의 거룩성 즉 신성과 성품을 나타내는 직분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오직 믿음으로 의인이 되었음을 증거합니다. 이것을 이신칭의라 하는데 여기서 의의 표상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한 멜기세덱이란 이름 즉 '의의 왕'이란 이름이 아니고 거룩한 신성을 나태내는 직위를 말한 것입니다.
또한 기자는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라 해석하였습니다. 여기서 살렘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인사의 살롬과 종교적 성지인 예루살렘의 어원으로 '평강'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 평강의 의미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평안으로서 정치적 경제적 안정은 물론 몸과 마음의 안정을 모두 포함하며 하나님의 평강은 택하심과 부르심에 대한 순종과 믿음으로서 얻어집니다,
따라서 의는 거룩한 성품과 신성의 표상으로 그의 부르신 사람들과의 관계성에 미치는 영향이며 평강은 그의 백성들에게 내려 주시는 하나님의 물질적 정신적 축복에 해당하는 것으로 흥미로운 것은 멜기세덱의 이름은 하나님과의 언약적인 관계를 맺은 사람들 사람들 가운데 나타나는 은혜의 근본적 위치를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의 의문은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멜기세덱이 그 당시 현존하던 왕이냐 아니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축복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현신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이 아닌 물질세계의 그 어떤 논리로도 증거할 수 없는 신적요소로서 우리는 믿음의 도그마를 통하여 그 답을 얻을 수 밖에 없습니다.
*침묵적 해석
히브리서 기자는 3절에서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하나님의 제사장으로 있느니라"하였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하여'라 기록된 '방불하여'라는 말은 '복사한 것과 같다' 즉 붕어빵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멜기세덱이 곧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확정적 개념을 가진 우리에게 모순을 제공 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아는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하여 생각할 때 예수께서는 분명한 족보를 갖고 다윗의 자손으로 태어나셨기 때문입니다. 만약 히브리서 기자가 이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제출하지 못하면 그의 논증은 설득력을 갖지 못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부분에 대하여 두가지 측면을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거룩한 의의 표상이요 시작과 끝이요 영원한 생명이며 창조의 근본되신 하나님의 본체라는 하늘의 시각으로 보는 본체론이며, 다른 하나는 구속사적인 하나님의 예정에 의해 이 땅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는 언약적 시각에서 본 형체론 즉 인성론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령의 도움 없이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신학적 논리로서 성경은 우리가 믿음으로 영으로 말미암아 주를 아바 아버지로 부른다 증거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온전히 증거하기 위하여 멜기세덱을 인용한 것입니다.
또 한가지 우리가 이 말씀을 보면서 의아하게 생각할 부분은 바울이 멜기세덱이 아비와 어미가 없으며 시작한 날과 생명의 끝이 없음을 무엇을 갖고 증거한 것이냐는 의문입니다. 저는 앞에서 히브리인들의 성경 사유법에 대해 설명하면서 침묵해석법을 언급하였습니다. 따라서 히브리기자의 이러한 논증은 성경에서 멜기세덱의 족보와 또 그의 출생과 죽음의 기록이 기록되지 않은 데서 해석을 찾아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믿음의 백성에게 있어 하나님의 제사장 멜기세덱의 절대적 지위와 이 땅에 율법으로 제정된 제사장과 모든 예법과 제도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오시기 까지 설정된 하늘의 모형이었으며, 하나님의 예정하심과 언약을 따라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이 되어야 했던 신학적 논증을 살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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