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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전서3:21) 구원의 표

이요나 2007. 6. 28. 16:22

(베드로전서3:21) 구원의 표

 

(벧전3:21)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찾아 가는 것이라

 

이제 봄기운에 돌기 시작합니다. 환절기에 감기 조심하시고 기도의 생활을 놓지 않으시기를 기원합니다. 오늘은 베드로전서 3장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 볼 베드로 3장에는 삶 속에서의 믿음의 공동체 생활에 관한 권면입니다. 특별히 베드로는 여기서 그리스도인의 관계성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먼저 감사해야 할 일은 기독교는 공동체로 출발했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3장에는 주께서 복음의 나라를 세우시기 위하여 열두사도를 부르실 때 첫번째 목적은 '함께 있기 위함'이라고 기록되었습니다. 공동체는 먼저 관계성으로부터 출발하게 되는데 베드로는 이 부분을 2장에서 도입하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 오셔서 자기 몸으로 제사를 드려 창세전에 예비하신 사람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되돌려 놓았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먼저 예수 그리스도와 양과 목자의 관계가 수립되었고 그는 우리의 감독이 되셨습니다. 여기서 감독이란 수호자라는 의미입니다.

 

* 아내들에게

베드로는 서두에서 "아내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이는 혹 도를 순종치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위를 봄이라"기록하였습니다.

 

믿음의 공동체 생활에 대한  권면은 바울의 서신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만 항상 아내들로 출발하고 있습니다. 하와과 아담보다 먼저 범죄한 것에 비하여 예나 지금이나 믿음 생활은 늘 여자들이 앞서고 있습니다. 여기서 베드로는 아내들의 순복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순전한 복종을 의미합니다. 다시말하여 순수한 감정으로 남편을 섬기라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믿음 생활 가운데서 지혜와 능력을 체험한 여인들이 여인의 입장을 져버리고 남편에 대한 홀대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최근 우리나라의 교회 재적 성도의 분포를 보더라도 남자들보다 자매들의 숫자가 압도적입니다. 또한 교회 안에서의 봉사나 활동에 있어서도 자매들이 압도적입니다.

 

이런 관계로 감성적인 본성을 가진 여인들이 가정일에 소홀하여 한 가정을 이끌어 가는데 불협화음이 발생하기 일수입니다. 최근 미혼인 자매들의 생각 속에도 남자들의 믿음을 우습게 여기고 자신들의 믿임이 결혼할 상대보다 훨등한 것처럼 여겨 혼전부터 혼약자의 기세를 꺽어 놓으려 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믿음생활을 하지 않는 남편에게 있어서 아내의 교만한 생활방법은 결국 그 남편을 구원의 문으로 이끌어내는 데 실패 하고 말아 버리며 믿는 남편과 자식들도 여인의 무지몽매한 종교활동에 질려 믿음에서 떨어져 나가기 일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아내의 이러한 행동 중 가장 큰 문제를  '정결한 행위'에 두었습니다.  아내들이 기도생활과 경건생활을 이유로 남편과의 부부관계를 거부하는 문제가 발생되고 또 외형적인 정결의식으로하여 지극히 평범한 가운데 자유로운 가정생활을 하여야 할 가정이 마치 교회 의식과 같은 엄숙한 분위기로 돌변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3절에서 아내들의 외형적인 꾸밈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교회나가는 것이 마치 사교장처럼 여기는 여인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도 대형교회의 부인회에 가면 마치 팻션 쑈를 하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됩니다. 여기서 '안정한'이란 들뜨지 않은 마음의 평정한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들을 향히여 베드로는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서 값진 것이라"하였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마음에 숨은 사람'이라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주를 향한 마음이나 사역자에 대한 경외의 마음이  외적으로 지나쳐 남편들의 비위를 상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여인들의 믿음의 모델을 구약에서 이끌어 내고 있습니다. 그들을 가리켜 '거룩한 부녀들'이라 기록하였습니다. 베드로는 6절에서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복종한 것같이 너희가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함으로 그의 딸이 되었느니라" 하였습니다.

 

여인들의 담대함이란 남자들도 심짓하게 합니다. 선 즉 사랑을 베푸는 일에 나서는 여인들의 모습은 마치 자식을 생각하는 어미의 마음과도 같이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러한 모든 일에서 사라가 그 남편 아브라함을 주로 섬긴 것처럼 그 경계를 벗어나지 말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남편들에게

이제 사도의 권면은 남편들을 향하고 있습니다. "남편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롯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지식을 따라 아내와 동거하라는 말은 성경의 가르침을 언급한 것입니다. 열성적인 그리스도인들이 그릇된 지식을 갖고 부부생활을 기피하려는 풍조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부부가 기도할 동안은 떨어져 있어도 되나 바로 합방을 하여 사단으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명하였습니다.

 

또한 날이 갈수록 성적타락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그 강도가 심해지고 있습니다. 정치권에서는 성폭행 사건에 연류된 사람들의 명단을 공개하자는 쟁론이 거론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제도적으로만 해결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의로운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먼저 부부간의 아름다운 금실을 유지하여야 할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아내를 연약한 그릇이라 하였습니다. 남자들이 아내에 대한 각별한 배려와 사랑을 하지 않고 밖으로 돌게 되면 감성적인 성격을 가진 여인들은 커다란 상처를 받게 됩니다. 그로하여 결국 가정이 파탄되고 마는 것입니다. 또한 부부금실이 좋아야 남편을 사모하는 마음이 생겨 여인들의 기도가 이어지는 것입니다.

 

* 공동체 생활

베드로는 이제 교회 공동체 생활에 대하여 언급합니다.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체휼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습니다.

 

사도는 여기서 성도의 일치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이 일체이듯이 성도들이 마음을 함께 할 것과 서로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라고 권면하였습니다. 또 외부로부터 오는 비판과 모욕을 감수라하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최근 그리스도인들이 조급하여 조금만 피박이 와도 교회들이 서로 연합하여 세상과 대항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사도는 그들에게 도리어 복을 빌라고 권면하며 그를 위해 우리가 부르심을 입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의 억울함은 어떻게 해결할까요? 그것은 주의 날에 주로부터 오는 영광의 기업이 우리를 위해 예비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루 잘 살자고 평생을 버릴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오늘의 고난은 내일의 복이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10절에서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고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여 이를 좇으라"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시편을 인용한 말씀으로 성경은 성도의 말에 지극한 조심을 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야고보는 혀를 제어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또 혀를 가리켜 온 집을 불태우는 불의의 씨라고 하였습니다. 사실 성도들은 예수를 믿으면서 구변의 은사를 받게 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주신 은사입니다. 그런데 많은 성도들이 그 언변을 사사로운 감정에 사용하여 문제를 유발 시키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또 12절에서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저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낯은 악행하는 자들을 향하시느니라 하였느니라" 기록하였습니다. 오늘과 같이 악이 들끓는 세상 가운데서 의롭게 산다는 것은 불 가운데서 의연한 삶을 사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주의 눈이 고난받는 우리를 향하시고 계심을 생각하면 큰 은혜가 됩니다.

 

*성도의 선행

베드로 사도는  이제 성도의 선행에 대하여 언급하였습니다. 고난 중에 선행을 한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입니다만 지난번 동남 아시아 지역의 쓰나미로하여 전세계가 동참한 것은 참으로 귀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최근 우리 주변의 고난 받는 형제들을 위하여 모금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일은 늘 앞장을 서는 사람들이 외면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 솔선하여 동참하였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이 있는 자니 저희의 두려워함을 두려워 말며 소동치 말고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라"하였습니다.

 

여기서 열심이란 말은 열심 당원과 같은 불같은 열정을 말한 것입니다. 또한 선이란 말은 사랑을 나타내는 행위를 말한 것으로 고난 받는 자들을 도와 줄 때 그로 하여 화를 당할 것과 같은 생각을 갖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당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이 자기에게 화가 미칠 것을 생각하고 외면하였던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선한 양심을 가지라' 하며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보다 나으니라'하였습니다. 어차피 그리스도의 의로말미암아 고난을 받을 것이라면 선한 일로 고난을 받는 것이 복을 쌓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오직 잘 살기를 목적으로 아둥바둥대다가 결국에 이르러서는 일어설 수 없을 정도로 넘어져 버리는 것을 보아 왔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무엇으로 집을 짓던 불로 그 공력을 시험을 받되 불의 시험을 이긴자는 공력에 상을 받을 것이로되 타고 없어지는 자는 자신만 겨우 구원을 얻을 것이라 하였습니다.

 

지난 나의 생활을 돌아 보면 참으로 어리석고 허망한 날이였습니다. 나는  예수를 믿으면서도 성경이 금하는 사업에 손을 대며 그것이 하나님의 복인 것으로 착각했었습니다. 그러나 더 문제는 내 영혼을 인도하는 교회 지도자들이 나의 그러한 잘못된 행위에 대하여 말씀으로 책망하며 권면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모두가 전도라는 명목으로 다가와 헌금에 눈이 벌겋게 되어 내 영혼의 상처는 생각도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옥에 있는 영들

베드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한 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았으니 저가 또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하였습니다.

 

 여기서 옥이란 우리가 알고 있는 지옥(게헨나) 또는 음부(하데스)가 아닙니다. 지옥(게헨나)는 사단과 사단의 추종자들이 최후로 들어 갈 지옥이며 '음부'는 믿지 않는 모든 사람들이 들어갈 땅 속에 있는 음부를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한 '옥'(타르타스/Tartarus)이란 창세기 6장에서 언급된 탁락한 천사들과 그의 후손들이 들어 간 또 다른 지옥을 의미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 옥에 갇힌 자들을 언급하여 "그들은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하였습니다.

 

여기서 "또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셨다"라는 말씀은 오늘날 많은 신학적인 논쟁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주께서 십자가에 죽으셨던 3흘간의 일정을 언급한 것이기도 합니다만 이 말씀은 옥에 있는 영들을 다시 구원하기 위해 복음을 전파하셨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들로서 악행을 하여 특별한 곳에 갇힌 영들에게 그리스도께서 복음을 위해 죽으심으로 승리를 하셨음을 전달하셨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누가는 죽어 음부에 부자와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간 나사로의 비유에서  복음은 이 땅에 살아 있는 동안 모세와 같은 선지자들을 통해서 전달 될 것이라 하셨습니다. 따라서 오늘 베드로 사도가 전하는 이 말씀은 신학적인 논쟁을 일삼을 것이 아니라 베드로 사도가 왜 말씀을 이끌어 내고 있느냐를 발견하여야 할 것입니다.

 

베드로는 지금 이 땅에 임했던 심판을 이끌어 내면서 이 세상에 임할 심판의 날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6장에는 타락한 천사들이 이 땅의 여인들을 자기들이 좋은대로 아내를 삼아 아낙자손들을 낳고 세상은 날이갈수록 패역해졌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 기록된 이 부분을 우리가 어떻게 해석할 것이냐는 아직도 논란의 소지가 있습니다만 어쨋던 그들은 영적 존재들인 것 만은 틀림없습니다.

 

많은 신학자들이 이 부분에 대하여 여러가지 신학적인 의미를 더하려 하고 있습니다만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베드로가 이 말을 인용하고 있는 그 의미를 찾아내야 합니다. 베드로는 지금 고난 받는 그리스도인들의 의인으로서의 올바른 삶의 태도를 언급하였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언급된 말씀은 곧 주의 날을 맞이할 우리의 경계로 한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자들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말한다" 하셨습니다. 또한 죄없이 하심을 받은 의인이라 칭함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믿는 우리는 죽었던 영혼이 살아났고 우리 안에는 하나님의 영이 나와 함께 살아 계시며 나의 영과 혼과 육은 그 영의 능력 가운데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라 한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배필과 한 몸을 이루어야 할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6장에 언급된 하나님의 아들들은 여자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가 좋은대로 아내를 삼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스스로 창조의 질서를 범한 것입니다. 결국 세상은 더할 수 없이 패역하여 결국 그 세상은 물로 심판을 받고 말았습니다.

 

그 당시 의로운 삶을 사는 노아의 집에 은혜를 내려 그에게 방주를 짓게 하시고 구원받을 사람을을 예비케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나이를 120으로 시한을 정하시고 노아로 하여금 120년 동안 배를 짓게 하셨습니다. 노아는 그 방주를 지으며 사람들에게 곧 다가 올 심판의 날을 전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리우는 그들은 노아의 전도를 무시하고 먹고 살고 시집가고 장가들며 세상을 즐겼습니다. 결국 그들은 노아의 가족 8명을 제외하고 모두 멸망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리우는 오늘날 우리의 삶의 태도와 믿음의 상태입니다. 우리도 그들과 같이 복음전함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히브리서 4장에서 애굽에서 나와 광야에서 멸망당한 이스라엘 사람을을 언급하면서 너희 중에 그들과 같이 안식에 들어 가지 못할 자가 있을까 두려워 하라 하였으며 다시 그들이 안식에 들어 가지 못한 것은 그들의 믿음이 말씀과 화합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라 하였습니다.

 

*침례의 의미

이제 끝으로 베드로 사도는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찾아 가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지금 사도는 우리에게 노아 시대의 물 심판을 통하여 이제 곧 다가올  주의 심판의 날을 경계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침례의 의미는 예수께서 십자가의 죽으심과 같이 내가 죽었음과 다시 부활하심으로 내가  다시 살았음을 의미하는 그리스도인의 의식입니다. 주님은 이 침례로서 우리에게 성령의 세례를 약속하셨고 우리는 하나님의 기업을 이어받을 거룩한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이 침례의 의식은 또 다시 종교적 습성으로 전락되고 그리스도의 은혜의 삶을 살아야 할 성도들은 선한 양심을 잃고 다시 세상 사람들 속에 물들어 버리고 있습니다. 그로하여 베드로 사도는 '침례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감사할 것은 우리 안에 성령이 계시어 우리의 허물을 책망하고 우리를 중보하여 멸망치 않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긍휼하신 은혜와 자비입니다. 끝으로 베드로 사도는 "저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능력들이 저에게 순복하느니라"하였습니다.

 

이제 얼마 있으면 곧 오실 주께서 천사장의 호령과 구름같은 천사를 이끌고 이 땅에 임하실 때 그리스도의 인내로 선한 삶을 사는 우리를 끌어 올리시고 그의 말씀을 떠나 멸망의 세계로 달려간 영들을 다시 옥에 가두실 것입니다. 부디 다시 거듭난 심령으로 하늘의 거룩한 영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