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전5:10) 최후 승리
(벧전5:10)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간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
이제 베드로전서 마지막장이 되겠습니다. 베르로전서를 보면서 새삼스러워지는 것은 고난받는 예수 그리스도인으로 서의 삶의 자세에 대한 우리의 생각입니다. 최근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어지는 축복에 대하여 많은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교회 지도자들이 교회의 부흥과 맞물려 그러한 개념의 메시지를 갖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물론 성경은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의 축복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축복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물질적인 것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가운데서 누리는 평강을 말한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먹고 마시고 입을 것에 관한 것에 대해 언급하시며 너희는 공중의 새보다 귀한 존재들이라 하셨습니다.
베드로사도의 편지에는 두가지의 사상이 흐르고 있습니다. 그 하나는 고난받는 그리스도인의 당연성이고 또 다른 하나는 장차 그리스도인이 참여할 영광의 날에 대한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베드로 사도는 우리에게 제일 먼저 순종을 언급하였습니다.(참조 1:2, 2:8, 3:1,6, 4:17, 5:2, 5)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주의할 것은 순종이란 말씀이 누구에게 해당하는 말씀인가입니다. 많은 교회 지도자들이 성도들에게 순종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순종은 인간에 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비록 종이 상전에게 또 아내가 남편에게 젊은이들이 장로들에게 순종하라 하였지만 그 머리들이 모두 주님께 순종을 전재하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 말하는 순종은 모두 하나님을 향한 순종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오늘 5장 1절에는 "너희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예할 자로라"하였습니다.
베드로사도는 여기서도 그리스도인이 갖어야할 두가지 사상을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바로 고난과 영광입니다. 이것은 마치 한켤레의 고무신과도 같은 것으로 서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만약 어느 성도가 고난없이 영광에 참여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면 그는 믿음의 본질을 아직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며 그의 앞날에는 틀림없이 고난이 도사리고 있는 것입니다. 고난은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할 사람들을 위하여 준비하신 축복의 징검다리인 것입니다.
여기서 장로란 연장자를 의미하는 말로 그 당시 중동지역 각 나라에서 체택되고 있었던 사회체제였습니다. 더우기 이스라엘 민족에 있어서 장로의 직분은 율법으로 정한 70인 장로 체제 속에서 각 지파의 대표요 민족 공동체의 대표로서 하나님 앞에 부름받은 직위였습니다,
주님의 때에도 장로들을 주측이 되어 서기관들과 함께 대적하였습니다.이러한 장로의 직제가 초대교회에도 자연스럽게 도입되어 성도들을 다스릴 입장에 있는 목사나 교사나 교회의 원로들을 장로라 호칭하였습니다. 교회와 사회의 지도자 모두를 지칭한 것이라 보아야 할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먼저 자신이 장로의 위치에 있음을 언급하였습니다. 물론 그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부름을 받은 사도들 중에 특별한 위치에 있는 지도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초대교회 속에서 함께 동역하는 모든 지도자들을 가리쳐 나와 함께 된 장로라 하였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1절에서 이처럼 스스로 자신을 나추는 이유는 초대교회 속에 장로라 불림을 받는 지도자들에게 나타나는 여러가지 잘못된 일들을 지적하고 권면하기 위한 것입니다. 사실 그 또한 실수가 많은 사람으로 오늘날 이러한 권면을 하는 위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사도는 2절에서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무리를 치되 부득이 함을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말고 오직 양무리의 본이 되라"하였습니다.
여기서 '맡기운 자'라는 말은 제비로 뽑힘을 받은 자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즉 추첨에 의한 것을 의미합니다. 이 단어는 사실 베드로의 주장에 의해 제비를 뽑아 사도가 된 맛디아의 사건에서 볼 수 있으며 또 주님의 세마포를 갖기 위해 제비를 뽑았던 로마병정들의 태도에도 사용되었습니다. 그와 같이 자신들은 믿는 자들 속에서 복음을 위해 선임된 자라는 의미입니다.
베드로의 권면 속에 제일 먼저 대두되고 있는 말은 '부득이함'입니다. 이것은 어쩔 수 없이 해야하는 태도 즉 의무감에서 하는 사역적 태도를 언급한 것입니다. 사실은 하고 싶지 않은데 자신에게 붙어 있는 직분 때문에 억지로 해야한다는 태도를 말한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사람들 앞에 나서기를 힘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선택을 받은 후에는 그 직무를 담당하는 태도가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하는 듯한 입장에 서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박수는 받고 싶고 자신이 해야할 힘든 일들은 하기 싫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복음사역의 직분에 대하여"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라"(고전9:16)하였습니다.
베드로가 두번째 언급한 말은 '더러운 이를 취하지 말라'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가르침 속에 흐르고 있는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제물에 대한 경계를 하시며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 하였습니다. 바울은 재물은 우상숭배라까지 경계하였습니다.
또한 주님은 요한복음 10장에서 참 목자에 대한 말씀을 하시며 양을 먹을 거리로 삼는 자들은 삯군을 경계하시며 참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려야 할 것이라 말씀 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요한복음 10장을 읽을 때 주의하여할 것은 양을 노략하는 삯군과 양의 생명의 지키는 참목자에 대한 교훈입니다. 이것은 교회 가운데 나타날 삯군들을 경계로 하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3번째 권면은 '양무리의 본'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잡히시기 전날 수건을 두르시고 손수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며 내가 주인과 스승으로 너희의 발을 씻겼은 즉 너희도 서로 본이되라 하셨습니다. 이 말은 5절의 '허리를 동이라'라는 말 속에 그 의미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어쩌면 베드로는 지금 이말을 하면서 그 당시의 일들을 기억하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베드로는 5절에서 젊은 자들에게 장로들에게 순복하라 가르치고 있습니다. 최근 우리나라에 일어나는 현상은 개혁을 부르짖으며 나타나는 젊은 세력들의 무례함입니다. 선배와 후배와의 경계가 없어지고 담임과 부사역자간의 존경도 사라지고 있습니다.
어느 교회에서는 전임 목사가 은퇴하면서 세운 후임자가 전임자의 비리 사실들을 폭로하고 있고 요즘 한국교회는 온통 원로목사들과의 전쟁으로 세상을 부끄럽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 사도는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고 더러운 이를 취하지 말라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젊은 자들이란 비단 나이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목회와 믿음생활의 경륜을 언급한 것입니다. 물론 젊은이들이 신사고적 생각과 또 새로운 학문을 터득하여 장로들보다 더 좋은 아이디어를 갖고 있을 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복음 사역은 자기 스스로가 하는 일이 아니라 택하심과 부르심에 의한 것이라 할 때 나의 의견과 능력은 그리 중한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순종의 종으로 말하자면 아브라함과 모세를 꼽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부르심과 그의 사역 속에서 많은 실수를 하였습니다. 성경은 그들의 실수를 모두 적나하게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실수에 대하여 엄한 경계를 더하셨지만 그 실수로 하여 온전한 길을 가도록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스라엘을 통하여 뼈저린 아품을 겪어야 했고 모세는 결국 가나안 땅을 들어 가지 못하고 여호수아 후계자를 세워야 했습니다. 만약 이러한 일들에 대하여 아들된 이삭이 아비를 대적할 수 없고 여호수아가 모세를 책망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들의 실수에 대한 책망과 판단은 그를 부르신 주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베드로 사도는 교회 지도자들에게 사역의 태도에 대하여 몇가지 최종적인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먼저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하였습니다. 이것은 자신이 한 일들 가운데 나타는 능력을 믿고 까불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모든 일들은 우리가 한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역사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큰 아들에게 어떤 일의 책임권을 주고 그에 합당한 권세를 주었다고 하십시다, 그런데 아들이 그 권세를 이용해서 합당치 못한 일들을 하였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마 바로 그 직무를 거두어 버리고 그를 책망할 것입니다.
이 말씀 속에는 부름받은 복음 사역자들의 마음 속에서 높아지고 있는 욕망이 끊임없이 역사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만약 이러한 욕망이 없다면 사역의 열정도 없었을 것입니다. 모세는 애굽의 왕자로 부족할 것이 없는 지식과 능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자신이 유대인 것을 알고 스스로 그의 형제된 유대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힘을 쓰다가 결국 형제들에 의하여 외면을 당하고 살인자가 되어 미디안 광야로 도망을 했어야 했습니다. 또한 야곱의 사랑을 등에 없고 자신의 위치를 자랑하던 요셉은 형들에 의해 애굽의 종으로 팔려야 했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바울이 자신의 직무와 다른 유대인 사역에 앞장서려고 예언자들의 권고를 무시하고 죽기 살기로 예루살렘에 올라갔던 일들이 기록되었습니다. 그는 과거 자신과 함께 예수를 핍박하던 사람들에게 자기의 변화된 모습을 증거하여 그들을 모두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이 불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옥에 잡혀서 로마로 끌려 가야하는 죄수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들은 모두 실패를 경험한 후에야 주의 능력에 순복하여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종이라 불리웠습니다. 이러한 성경의 기록들은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 것일까요? 부르신 자들 속에 역사하는 하나님의 능력 가운데 높아지려는 인간된 욕망이 하나님의 일들에 커다란 장애가 되고 있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한 것입니다.
베드로의 두번째 권면은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버려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시편 55편22절의 말씀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염려함으로 머리 한카락도 검개하지 못하며 한치의 키도 성장할 수 없다 하셨습니다.
많은 원로 지도자들이 나 아니면 이 일을 할 수 없다 혹은 누가 나보다 더 잘 할 수 있겠느냐 하는 생각을 합니다. 요즘 우리나라 대형 교회에서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사역이 주님의 계획이며 그를 능히 이루실 분도 주님이라 생각할 때 우리의 걱정과 염려는 무익할 뿐입니다.
세번째로 베드로 사도는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러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하였습니다. 여기서 대적하라는 적과 한치의 양보도 없이 대립된 상태를 말합니다. 사실 우리의 전쟁은 혈과 육에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온전한 구원을 막는 사단과의 전쟁인 것입니다.
우리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세상에 일에 빠져 있는 동안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사단의 올무에 자신도 모르게 발목을 잡히고 마는 것입니다. 욥과 같은 의로운 사람에게도 사단은 그 흠집을 착기 위해 하나님께 참소하였습니다. 원래 사단이란 '고발자, 참소자'를 의미합니다. 사단은 모세의 시체를 갖고도 천사장과 다툼을 버리고 있습니다.
그러면 인간이 우리가 어떻게 영적인 존재 사단을 대적할 수 있을까요? 먼저 그가 우리 생활 가운데로 들어 오지 못하도록 근신하여 깨어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근신은 육신적인 생각들에 대한 경계 다시 말하여 정신적인 문제이며 깨어 있는 것은 실제적인 육체적 행동입니다. 세상에 빠져 들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든 일에서 자신을 돌아 보고 절제하며 성급하지 않으면 사단은 절대로 나를 이용하지 못할 것입니다.
사단을 대적하는 또한 방법에 대하여 베드로는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하였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모든 성도들이 당하는 공통된 핍박을 언급한 것으로 사단을 대적하는 방법이 인간적인 생각과 방법이 되어서는 않된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굳게하라는 말은 군사적 용어로서 빈틈없이 철저한 믿음을 말한 것입니다.
주님은 마가복음 9장에서 귀신들린 아비에게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다 하셨습니다. 또한 주께서 제자들에게 형제가 하루 일곱번이라도 범죄하고 회개하여 돌아 오면 너희는 용서하라 하셨을 때 제자들은 우리에게 믿음을 더해 주소서 하였습니다. 이것은 믿음의 주체가 그리스도께 있음을 의미한 말씀입니다.
또 창세기 15장는 아브라함이 인간의 생각과 한계를 떠나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듣고 믿음에 그를 의로 여기셨다 기록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이유없이 믿는 믿음입니다. 따라서 믿음을 굳게하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과 관계가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이 되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하였고 다시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이것을 의에게 의로 여기셨다 하였습니다(롬4:18-22).
우리가 성경을 보건데 의인 중이 의인인 욥과 다니엘과 세례요한을 보십시요. 우리 중에 그들보다 의롭다고 자청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받은 고난을 생각할 때 오늘날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고난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셨으며 베드로에게 사단이 너를 밀까부르듯이 청구하였으나 내가 너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라 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당할 고난을 위해 십자가 위에서 최후의 승리를 이루셨고 또 부활의 능력으로 하늘에 오르사 지금도 보좌 위에서 중보하고 있는 것입니다.
끝으로 베드로는 고난 받은 그리스도인들을 위하여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간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하였습니다.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고난받은 우리의 이름이 이미 영광 중에 들어 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이름이 그의 생명책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고난 속에서 영원히 멸망을 받는 것이라면 속이 그 고난에서 벗어 나와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능히 그 고난에서 우리를 온전케하고 굳게 하고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실 능력이 있다면 우리는 그를 믿고 고난에 순종해야 할 것입니다.
베드로는 "권력이 세세토록 그에게 있을지어다 아멘"하였습니다. 이 말씀 속에서 우리가 다시생각해야 할 것은 우리를 지배하는 권세와 세상을 지키는 권능이 주 예수 그리스도께 있음을 확신해야 할 것입니다. 눈앞에 보이는 것만을 급급하여 조급하고 성급히 달려간다면 우리는 결국 실패자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권세에 의지하여 모든 고난 속에서 참고 인내하며 양무리를 돌본다면 주께서 우리를 영광에 들이시고 우리를 높이실 것입니다.
끝으로 베드로 사도는 이름도 없이 고난에 참여한 동역자 실루아노와 마가의 이름으로 문안을 하였습니다. 이들은 사도도 아니며 그렇다고 교회에서 높임을 받는 사람들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마땅히 교회에서 존경받을 만한 장로들이었지만 이방 가운데서 수많은 핍박과 고난을 받으면서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유대인 성도들에게 이처럼 권면을 하면서 가장 커다란 고난에 동참하고 있는 바벨론에 있는 교회들에게 문안하라 하였습니다. 아마 베드로는 바울을 비롯한 많은 동역자들의 고난을 생각하며 그리스도의 은혜가 함께 하기를 기도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여러분 오늘날 당신은 어떤 고난에 처해 있습니까? 혹시 당신의 잘못된 행위로 인한 고난에 처한 것입니까 아니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받는 고난입니까? 우리가 세상의 더러움에 빠져 고난을 받는 것이라면 얼마나 부끄러운 사람이 되겠습니까? 성경은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이 있다 하였습니다. 우리 모두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성도들이 되십시다. 다음주 고난 주일에는 베드로후서에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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