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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전서2:9) 왕같은 제사장

이요나 2007. 6. 28. 16:23

(베드로전서2:9) 왕같은 제사장

 

(벧전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인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는 앞에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주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믿음의 결국은 영혼의 구원이라' 말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택함을 받은 거룩한 자녀로서 하나님의 기업을 받기까지 온전히 순종하라 권면하며 그 방법으로 항상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라고 하였습니다.

 

오늘은 베드로전서 2장입니다. 2장에는 베드로 사도만이 사용하는 특별한 언어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바로 산돌'이라는 단어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구약 시편118편과 이사야 28장 16절을 인용하여 오늘도 우리 가운데 살아계신 주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1장 서두에서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그러므로'라는 말은 1장의 전체적인 주제를 언급한 것으로 새로운 내용을 전개하는 접속사입니다. 또한 여기서 '버리라'는 헬라어는 '옷을 벗다(laying aside) 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이 말은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에게 유혹을 당할 때 옷을 벗어버린 말에서 유래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의 의미는 우리의 인격적인 변화를 요구하는 말씀입니다. 사실 우리는 악독과 궤휼로 가득차던 속된 사람들이었습니다. 나만 놓고 생각해보드라도 인생이 이처럼 더럽고 추잡할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거룩한 자녀의 형상을 본받고 있습니다만 이 땅의 모든 인간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더럽고 악한 심령을 갖고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그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햐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저희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롬3:10-18)기록하였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2절에서 갓난 아이들과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하였습니다. 여기서  베드로 사도는 성도의 성장을 어린아이를 양육하는  일에 비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신령한 젖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온전한 구원에 이르는 길은 하나님의 말씀 밖에 없기 때문에 어린아이와 같이 그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가 어린아이를 생각할 때 정말 천사가 따로 없습니다.  어린아이들은 어미의 사랑의 젖을 먹고 무럭무럭 자라게 됩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말과 세상을 배우는 동안 점점 그 인격은 천사의 틀에서 벗어나고 맙니다.

 

바울은 히브리서에서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벌써 선생이 되었어야 할텐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먹을 자가 되었도다"하였습니다.

 

바울의 염려는 성장하지 않는 성도들에게 촛점을 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베드로 사도는 성장하지못한 그 원인은 바로 구원과 관계 된 것으로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먹지 못하고 자랐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말씀은 우리 교회들이 다시한번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말씀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예수를 믿음으로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 아이들입니다. 그런데도 오늘날의 문제는 오랜세월 교회생활 속에서도 성도들이 성장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성도들을 향하여 '너희를 기를 때에 신령한 자들과 같이 할 수 없어서 어린아이들과 같이 젖으로 하였다' 하였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모두 다시 태어난 어린 아이들인 것입니다. 모두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먹고 자라야 할 하나님의 자녀인 것입니다. 베드로는 3절에서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하였습니다.

 

*산돌되신 머릿돌

베드로 사도는 4절에서 사람들에게 버림받고 하나님의 택하심으로 산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지금 우리의 상태를 역설법으로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두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자 하여 산돌이신 하나님을 저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께서 하루는 요즘 미국에서 들어와 분당 수지 인근에서 히트를 치고 있다는 목사님의 설교 테이프를 들려 주었습니다. 참으로 고운 목소리와 인물이 출중한 사십대 중반의 목사로서  많은 미사려구를 사용하며 말끝마다 영어를 사용하는데 그가 사용하는 영어와 미사려구는 도대체 왜 사용하는 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그의 설교를 듣고 있는 사람들은 아멘 아멘을 하며  마치 그를 자기 신랑처럼 바라 보고 있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5절에서 "너희도 산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하였습니다. 여기서 신령한 집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여거서 베드로는 성도들이 모두 친히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제사장이 되기를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께서 십자가 위에 고난을 받으실 때 예루살렘의 성전의 지성소를 가린 휘장이 둘로 쪼개진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당시까지 성도들이 하나님께 나아가려면 아론지손 중에서 택함을 받은 제사장이 짐승의 피를 갖고 들어 가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의 대제사장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으로 산제사를 드려 단번에 우리의 죄를 소멸하셨기 때문에 더이상 지성소를 가리는 휘장은 필요없게 된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친히 하나님 아버지 앞에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6절에는 "경에 기록되었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였으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이 말씀은 이사야 28장 16절 말씀을 인용한 것으로 여기서 모퉁이 돌이란 집을 지을 때 그 집을 지탱해 주는 기초 춧춧돌을 말합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 한 것으로 예수께서 이 땅에 세워진 하나님의 집의 머리돌 즉 추춧돌이심을 언급한 것입니다.  바울은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지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엡2:20) 증거하였습니다.

 

이제 베드로 사도는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또한 비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 하니라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저희를 이렇게 정한 것이라"

 

이 말씀은 선택의 주권이 각 사람에게 있음을 의미한 것입니다. 이 상황은 마치 요철(凹凸)과 같아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부딪히는 돌이나 거치는 돌이라도 우리에게는 구원의 반석이 되신 것입니다.  여기서 부딪히는 돌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고 대적하는 자들을 의미하며 '거치는 반석'이란 그의 말씀으로 시험을 받아 넘어지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거룩한 나라 왕같은 제사장

베드로 사도는 9절에서 "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인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기록 하였습니다.

 

물론 이 말씀은 유대인에게 한 말씀입니다만 지금 이글의 수신자는 우리와 같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선택하여 믿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따라서 베드로는 유대인들이 생각하고 있는 제사장이라는 입장을 재조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에게 나아가던가 또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은 제사장이 있어야 한다는 의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율법의 가르침이였고 또 그들은 대제사장의 예배 인도로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의 대제사장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지성소로 들어 갈 수 있도록 휘장을 갈라 주셨으므로 우리는 모두 제사장과 같이 하나님이 계신 지성소 즉 보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이제 더이상 밖에서 죄에 두려워하며 대제사장의 중보를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모두가 제사장이 된 것입니다.

 

베드로는 우리를 제사장으로 삼으신 것은 '빛 가운데로 들어 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증언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복음전도자의 역활을 말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원래부터 이방을 비추는 하나님의 빛이였습니다. 따라서 믿는 우리는 세상을 비추는 빛인 것입니다.

 

10절에는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기록되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로 얼마나 긍지를 갖게 하는 말씀입니까? 바울은 보라 너희가 새 것이 되었도가 하였습니다.

 

* 제사장의 삶의 도리(11-17)

이제 베드로 사도는 택함 받은 제사장으로서 살아가는 삶의 도리를 설명하여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하였습니다. 먼저 주를 믿는 우리는 모두 이 땅의 나그네됨을 알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세상은 이제 잠시 후면 사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살 것이기 때문입니다.

 

두번째로 베드로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하였습니다. 참으로 이것은 매우 쉽지 않은 일입니다. 인간은 모두 그 육체된 본성의 욕정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우기 세상은 날이갈수록 우리의 육체를 향하여 달려 오고 있어 우리가 잠시 눈을 감은 사이에 우리의 육체는 죄 속으로 빠져 들고 맙니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우리의 육체의 정욕과 우리의 영혼과의 문제가 직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주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때에 우리 안에 그의 거룩한 성령을 주셔서 이제 우리 자신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이 계신 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너희는 음행을 피하라 하였고 너희의 몸은  거룩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산 하나님의 성전이라 하였습니다. 또한 바울은 모든 죄는 몸밖에 있으나 음행은 몸 안에서 짓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육체대로 살면 죽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우리를 제사장으로 세우신 일에 대하여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 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하였습니다.

 

오늘날 성도들의 문제는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로서 선한 생활을 하지 못한다는데 있습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매주 교회에 나아가 기도하며 주를 찬양하며 예베를 드리고 있습니다만 그들이 세상 가운데 빛이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은 그들이 세상사람들과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이 주의 영광의 날에 그 앞에 나아갈 것을 믿고 있다면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다 반듯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아가 선악간에 행한 일을 판단 받는다 기록하였습니다. 지금 우리 성도들은 이 문제에 대하여 고민하고 지금으로부터 무엇을 다시할 것인가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세상의 제도에 대하여(13-17)

이제 베드로 사도는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에 대하여 권면합니다. 베드로가 지금 이러한 말을 우리에게 하는 이유는 그리스도인들의 세상사는 모습이 그만큼 잘못되어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위하여 순복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혹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상하기 위하여 그의 보낸 방백에게 하라"하였습니다.

 

이러한 내용들은 이미 바울 사도를 통하여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바울은 모든 권세에게 복종하라 하였습니다. 이것은 잘못하면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권세에 대하여 그 세상의 속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대항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말씀은 세상에 임할 박해를 염두에 둔 것이라 생각합니다.

 

오늘날 터키나 북유럽과 소련 그리고 중국이나 북한 동포들을 생각하면 처음 그들은 우리와 같이 자유롭게 예수를 믿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민족들이 자유를 버리고 체제의 이념을 선택함으로 이제는 예수를 믿지 못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당시 로마는 그리스도인들을 심히 박해했습니다.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사람들처럼 살아 갈 수 없는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한 때에 잘못하면 그리스도인들이 떼를 지어 대항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세상의 제도에 순복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생명이 오직 주께 있기 때문입니다.

 

두번째로 "자유하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우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하였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자유함에 대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라는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자유에 대하여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악을 행하는 것도 자유라 말하고 더러운 일도 자유라고 말합니다. 요즘 우리나라에도 시대적 역행을 하는 사례가 일어나고 있는 가운데 자유를 외치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유가 아니라 망종이며 자유의  훼방인 것입니다.

 

세번째로 베드로는 '뭇 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 하며 왕을 공경하라'하였습니다. 그 당시 네로 황제는 그리스도인들을 무참히 죽였습니다. 이제 그리스도인들을 마음놓고 살아 갈 곳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성경은 왕을 공경하라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 왕의 권세를 주께서 다스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모든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 기록하였습니다.

 

 * 그리스도인의 생활질서(18-25)

네번째로 베드로 사도는 범사에 주인에게 순복하고 까다로운 자에게도 그리하라 하였습니다. 그당시는 로마시민 보다 노예가 더 많던 시절입니다. 더구나 성도들의 많은 사람들이 노예 출신이였습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노사간의 균형이 무너진 것입니다. 물론 사주들의 지나친 횡포도 있지만 그렇다고 오늘날처럼 노사분규가 일어난다면 결국은 소경 제 닭 잡아 먹기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애메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우니라"하였습니다. 참으로 얼마나 숭고한 말씀입니까? 우리가 죄를 짓고 매를 맞아도 참아야 하는데 선한 일을 하다가 매를 맞는다면 하나님 앞에 얼마나 떳떳하겠습니까?

 

끝으로 베드로 사도는 주께서 죄없으신 분으로 죄인이되어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신 것은 우리에게 본이 되어 우리로 그를 따라 오게 하심이라 증거하며 "조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며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기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며"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주께서 잡히시던 날 베드로는 말고의 귀를 베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칼을 거두게 하시고 그의 귀를 고쳐 주셨습니다. 주께서 받으신 고난은 그것을 피하실 능력이 없으셨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제  위대한 증거로 우리를 깨우칩니다. "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칙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하였습니다.

 

먼저 그의 죽으심은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심입니다. 이것은 더이상 죄에 속하지 않고 우리의 신분이 의인으로 전환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또한 그가 채칙을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얻었다 하였습니다. 이것은 우리 영혼의 모든 질고와 고통이 해결된 것을 말합니다. 이제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은 자가 되어 우리는 그의 평안에 거하게 된 것입니다.

 

베드로는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되신 이에게 돌아 왔느니라"하였습니다. 양은 좋은 꼴과 물을 먹이고 짐승으로부터 지켜 줄 참 목자가 필요합니다. 양들은 스스로 살아 갈 수 없는 가축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영혼을 지키는 목자 안에 있음을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그 누구도 우리를 그의 손에서 빼앗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감독되신 이에게 돌아 왔다'는 말씀은 다시한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자유는 그의 감독 안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길잃은 양으로 목자를 만난 것이지 아직도 우리는 그의 보살핌 속에 있는 양들인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감독이 필요합니다. 아직도 우리를 헤치려는 영혼의 파괴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