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적상담

관상기도의 실체

이요나 2007. 9. 24. 10:35

 오늘날 슬며시 고개를 들고 있는 “관상기도”란 도대체 무엇인가? 관상기도하면 누구나 처음부터 무슨 말인지 아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 이것이 중국에서 온 말인지 아니면 순수한 한국말인지 어리둥절하다.

왜냐하면 “관상”이란 말이 성경에 없기 때문이다. “관상”이라는 단어가 기독교에 처음 등장한 말이기 때
문이다. 관상이 이단이냐 아니냐 하는 것을 논하기 전에 왜 21세기에 들어 와서 성경에도 없는 말을 사용
했는지 모르겠다. 그것도 성경이 근 2000년간 존재해 왔음에도 성경에 없던 단어를 사용해서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하며, 또 “묵상”이라는 말이 성경에 이미 있어 온지도 근 2000년이나 되었는데 왜 그런 친밀한 말을 안 쓰고 구태여 안 쓰던 말 그것도 중국말 같은 말을 써야 하는지 매우 의아스럽다.

 

기도라면 “묵상”이라는 성경적인 말도 있지 않은가? 왜 “묵상”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관상이라는 말을 썼는지, 다른 말을 썼을 때는 틀림없이 무엇인지 이유가 있지 않겠는가? 

예수님의 제자들이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예수님께 나왔을 때 예수님은 관상기도에  관해 언급하신 적이 없었다. 대신에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 . .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마 6:9-13)

신비주의는 그것이 기독교의 신비주의가 됐던 아니던 그 중심에는 상상 혹은 명상(imagination,
contemplation)이 있다. 관상기도(Contemplative prayer) 혹은 센터링 또는 호흡기도(Centering
prayer, Breath prayer)는 지금 복음적 교회에서 급속도로 호기심을 자아내고 인기를 끌고 있는 하나의
운동이 되어가고 있고 큰 인기를 타고 있다. 그래서 이것이 무엇인가를 성경적으로 알아두어야 한다. 따
라서 우리는 성경에 있고 또 하나님이 하라고 말씀하시며 요구하시는 보통 기도/묵상을 성경에서는 전혀
언급이 없는 관상기도와 확실히 구분해 둘 필요가 있다.

기도는 하나님과 교통하는 우리의 방법이다. 주님은 기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그리고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주시는 이런 말씀을 조심스럽게 묵상해야 한다.(시 4:4; 119:15 등)이런 기도는 합리적이
라야 하고, 지성적이라야 하고, 우리의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말로 해야 한다.

 

또 우리는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하며 이런 기도를 할 때 우리의 구할 바를 분명히 말씀드려야 한다.(살전 5:17) 기도할 때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그의 속성에 대해서 하나님을 찬미해야 하며 우리의 죄를 고백해야 한다. 횡설수설하거나 분별없는 말이나 우물 주물 하는 말로 기도하는 것은 성경적이 아니다. 따라서 관상기도는 분명히 성경적이 아니다.

그러면 관상기도란 무엇인가? 성경자구 사전에도 “관상”과 가까운 말은 없다. 그런데 왜 사람들이 성경
을 제쳐놓고 인간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다른 곳에서 찾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
다. 분명히 모든 삶의 문제에 대한 해답이 성경에 있다고 하셨는데 왜 성경은 연구하지 않고 사방만 두리
번두리번 하면서 다른 곳에서 해답을 찾으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명심해야 한다: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 . . 사랑을 공급하라.”(벧후 1:3-7)

관상기도는 “분리 혹은 떨어지는 것”으로 시작한다. Richard Foster는 그의 “Celebration of
Discipline"의 1978년 초판(p. 15)에서 “기독교의 묵상은 채우기 위해서 마음을 비우는 것”이라고 말했다.
무엇으로 채우는 것이라고는 말을 하지 않는다. 동방종교에서도 우주(우주의 마음)와 하나가 되기 위해
마음을 비운다고 말을 한다. 그리고 기독교에 들어온 “관상기도”에서도 하나님과 하나가 되기 위해서 자
기의 마음을 비운다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Foster는 Theophan the Recluse의 말을 인용했다: “내려가
는 것은 마음(mind)과 그의 마음(heart)을 가지고 내려가서 거기서 우리 안에 항상 계시고 모두가 보는
주님 얼굴 앞에 서 있는 것(p. 19)이다”

신비주의자들이 잘 쓰는 말은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 묵상기도(contemplative prayer)를 통해서 가
능하게 되며 또 그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은 항상 우리 안에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Avila의 성 Teresa
도 “혼자 자리를 잡고 있으면 저절로 하나님 위에 자리를 잡게 된다”고 말했다.(Ibid. 9. 96) 또 “침묵”이라
는 것도 관상기도의 특징 중의 하나라고 말했다. Catherine de Haeck Dolherty도 “내 안에 있는 모든 것
은 침묵이다 . . . 나는 하나님의 침묵 속에 잠기고 있다”고 말했다.(Ibid. 102) 이래서 신비주의자들에게
는 관상/침묵이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그런데 이것이 돌연 기독교 속으로 슬며시 뛰어 들어온 것이다.

오늘 날의 세계는 인간 역사에서 중요한 시점에 와 있다. 과학과 기술이 기적적으로 발달해서 우주시대
를 가져왔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지금 급속도로 폭발하고 있는 오컬트의 일대 폭발이 우리 눈앞에서 일
어나고 있는 것을 보면서도 그것에 위기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지금의 추세로 보면 무엇인가 역사적으
로 매우 심각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지금까지는 제 3국에서만 하고 있던 원시적인 오컬트
의 관행이 전 세계적으로 수천만 사람들에 의해서 받아드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성”에서 “신비”로 대집단이 세계관을 옮긴 것이 아마도 1920-1930 대의 일이었을 것이다. 이때의 세계
관의 변화가 독일로 하여금 “나치”를 수용하게 했다. 그래서 어떤 역사학자들은 Hitler를 “오컬트 메시아”
라고 부르기도 했었다.

현대의 마술(sorcery)의 부활은 예술과, 심리학과, 의술과, 교육과, 군대와, 사업과, 음악과, 특히 아이들
의 TV 만화에서부터 주요 영화에게까지 크게 유행하고 있다. 인간의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과학이 찾아
줄 수 있을 것이라는 낙관적 희망은 모두가 착각임이 증명되었다.

그러면 관상기도는 어떻게 하는 것인가? 그 기법은 다른 동방종교의 기법과 똑 같다. 즉 우리가 TV나
yoga에서 보는 것과 똑 같다. James Sundquist의 Who's Driving the Purpose Driven Church? p. 166에서 그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예수님이나 하나님 같은 단어 하나를 택한다. 그리고 그것을 관상기도의 초점으로 삼는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그 말을 조용히 일정한 시간(약 20분간)동안 그것이 내가 숨을 쉬면서 자동적으로 나오게 될 때까지 반복한다. 숨을 쉬는 것 같이 자동적으로 나올 때까지 한다.”

그래서 이 두 기도의 열쇠는 “말”을 택하는 것이 열쇠이다. 그것이 바로 주문에 나오는 진언(mantra)이
다. 이 외에도 Foster는 눈을 감고, 자세를 바로 하고, 두 발을 바닥에 잘 놓고, 손을 무릎에 올려놓고,

손바닥은 위를 보게 하고, 필요하면 예수님이나 아름다운 나무나 경치 등의 그림을 생각하라고 했다.

이런 자세로 주문을 반복하면 마음이 비워진다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적인가? 

레 19:31에서 하나님은 이미 이런 자들에 대해서 언급하고 경고하신바 있다: “너희는 신접(神接)한 자(者)와 박수를 믿지 말며 그들을 추종(追從)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2006년 두란노 큐티사역축제의 교안을 보아도 하나님과 만나는 기도로 “관상기도”를 소개하고

있는데 성경에서 가르치는 기도와 신약성경에서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에는 언급이 안 된 것을

“하나님과 만나는 방법으로의 기도”라고 소개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이것은 마치

성경에 있는 개념을 심리학의 말로 바꾸어 성경의 치유방법을 심리학화했던 심리이설의 방법과 같다.

 그래서 이들은 “다른 복음”과 “다른 예수”를 전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 그 교재의 제1과에서 배경으로 소개한 처음 나온 말이 성경말씀이 아니고 위에서 소개한 신비주의자

Richard Foster의 글을 소개하고 있다. 즉 관상기도는 성경을 토대로 한 것이 아니라 Foster의 말을 토대

로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 내에서도 이제는 신앙이 같은 사람을 찾기가 힘들어지고 있다. 교파의 벽이 무너져 가고

있는 것이다. 같은 교파내에서도 교리가 서로 다르다. 이제는 교회가 기독교의 교리를 초월해서 무슨

사회단체 같이 내용은 서로 달라도 하나가 되려는 운동의 기미가 보인다. 이것이 새로 등장하는 교회

(emergent, emerging church)의 모습 같지 보이지 않는가?

이제는 정말 사람들이 두 그룹으로 나뉘어져가고 있는 것이 보인다. 넓은 문으로 가는 자와 좁은 문으로

가는 자들이다, 우리는 바리세인이라고, 혹은 사랑이 없는 자라는 비난과 핍박을 받아도 주님께서 말씀

하신 “진리의 파수꾼”이 되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진리의 파수꾼”으로서 십자가를 지고 진리를 굳게

지키고 믿음을 지켜온 순교자들이 간 “그 길”을 우리도 갈 각오를 가지고 믿음을 부여잡고 주님을 따라가

는 “파수꾼”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글은 성경적 상담 싸이트에 올라온 동역자의 글은 퍼온 것입니다..이 글을 읽으시는 성도님들께서는 관상기도에 대한 실체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그리고 이러한 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교회의 성도들은 속히 그곳에서 나오시기를 권면합니다.

 

이것은 고도의 심리적 최면술이 내제되어 있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악한 영들에게 마음을 송두리채 빼앗기게 됩니다. 이처럼 우리가 사는 시대에 악한 영들이 우는 사자처럼 활동하고 있습니다. 부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서 강건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