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적상담

왜 심리적상담은 안되나?

이요나 2007. 5. 9. 11:53

왜 심리적상담은 안되나?


인간은
  나면서 부터 죄인이다. 그래서 그 본성이 죄성의 자기(self) 중심이기 때문에 평생 대 소간의 삶의 문제로 엮어져 인생을 살아간다. 이것은 인생이 자기세상마귀에 대해서 싸워가는 싸움의 여정임을 알리는 말이다. 신앙은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선물이지만 신앙생활은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삶의 교본인 성경에 따라 각자가 자기 지로 선택하며 싸워나가는 삶이다. 이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엡 6:12)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이런 이유 때문에 예수 믿고 구원받은 후에는 엡 6:12-13에서 명령 하신대로
자기세상마귀
와 싸우면서 살기 위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성령안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의만을 구하면서 살라고 명령하셨다. 그리고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고 말씀하셨다.

이런 전쟁은 한 평생 누구나 계속 해야 하는 전쟁이다. 그래서 우리는 구원받은 순간부터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이 전쟁을 해야 한다. 왜 상담은 성경으로만 해야하는가? 우리의 싸움이 자기세상마귀에 대한 싸움이다. 우리의 모든 삶의 문제가 마음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고 하셨다(마 15:18-20; 마 7:21-23).

그런데 마음을 변화시키는 것은 오직 성경에 있는 삶의 원리대로 사는 삶을 배워서
하나님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어야만 가능하다(벧후 1:3-4). 그래서 상담은 성경으로만 해야 마음이 변화되고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어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 하나님의 거룩함을 입게 된다.

우리는 이와 같이 악과 죄로 오염된 세상에서 살고 있다. 사람이 하나님의 계명대로만 살게 되면 삶의 문제가 생길 수가 없다. 즉 삶의 문제란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 살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결과이다. 하나님의 원리대로 살지 않고 다른 인간의 원리에 따라 살면 그것은 사람의 정신적 및 영적 삶에게 오염물질이 될 수밖에 없다. 인간의 영적 생활에 해로울 수밖에 없다. 그래서 예수님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요 7:37)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인간이 영적으로 오염되지 않은 진리의 물을 마시지 못해 매우 목마른 상태에서 살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생명과 정신적-정서적 건강에 굶주리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생수의 강을 찾지 않고 오염된 물들을 찾아 헤맨다.  
인간들이 찾아 헤매는 네 가지의 오염된 물이 있으니 이를 심리요법(psychotherapy)의 네 가지 주요 모델이라고 한다.

첫 번째의 오염된 물은 Sigmund Freud(1856-1939)의 심리분석(psychoanalytic) 모델이요, 두 번째 오염된 물은 행동주의적 모델이요, 세 번째의 오염된 물은 인간을 인본주의적으로 보는 모델이며, 네 번째의 오염된 물은 인간에 관한 실존주의적(existential)이고 초 인간적(transpersonal) 모델이다.
  이 모델은 인간의 깊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내적 경험 속에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모델로서 성경의 하나님께 돌아오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라고 가르치는 모델은 아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요 7:37-38)고 외치셨는가? 인간은 온갖 오염으로 목말라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또 "내가 곧 생명의 떡이요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 6:35)고 하셨던 것이다.

왜 교회가 메말라 있는가? 왜 교회가 심리학의 이런 네 가지 오염된 물에 엄몰되어 숨을 못 쉬고 허덕이고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보며, 그것을 믿으며, 그 말씀을 먹고 그 말씀 데로 순종하며 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음식은 보는 것만으로는 배부르지 않고 우리의 육체에 영양과 힘을 주지 못한다. 설교도 듣는 것만으로, 또 성경도 보는 것만으로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지 못한다. 말씀은 먹고 순종해야 우리에게 생명이 된다.

인간의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은 전부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딤후 3:16-17)고 하셨다. 또 성경대로 행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도록 해주시고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할 수 있도록 해주신다 (벧후 1:2-4)고 하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마 7:24-27)고 하신 것이다.

기독교 심리학자들이란 심리학의 오염된 물과 성경을 혼합해서 마시게 하는 사람들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이런 오염된 물 즉 심리이설(psychoheresy)이 교회에 들어와 교회를 오염시키고 있음을 우리는 깨닫고 이를 경계해야 한다. 이런 심리이설들이 이미 모든 교인들의 사회생활을 통하여 그들을 오염시키고 있다. 그리고 또 교회의 모든 활동에 침투하고 있으며, 주일학교에도 침투하고 있고, 이런 심리이설이 모르는 사이에 이미 강단에도 침투하고 있다. 이런 심리이설들이 교회에서 수용하고 성행시키고 있는 AA 모임 즉 12단계 요법과 내적치유 세미나를 통해 교회를 휩쓸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전체가 벌서 심리적인 사회가 되어버렸음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많은 복음적 보수 신학교들이 변질되어 심리학을 전공하게 하는 학과들을 두고 있으며 사회 전체가 온갖 심리적 어휘를 생활 용어로 사용하고 있고 심리적 요소들을 사실로 받아드리고 있다. 자존심이나, 가치관이나, 의식, 무의식 등의 심리적 철학이나 기법들을 국민학교와 중고등학교의 교과과정에 포함시켜 가르치고 있지 않은가?  

 

오늘날 교육심리학이 John Dewey와 다른 인본주의 자들에 의해 얼마나 많은 영향을 받고 있는가?  얼마나 많은 교인들이 TV와 라디오를 통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매일 심리학적 교육을 받고 있는가?  교회가 이런 오염된 물을 식별하는 것은 시급한 일이다.  이런 물은 마시면 죽는 물이다.  

목사들이나 교인들이 다같이 이런 이설에 빠지지 말고 눈을 떠야 한다. 오염된 물은 보암직도 하고 마시고 싶어 보이나 마시면 필경은 죽는 물이다. "마라 "의 쓴 물을 하나님이 지정하신 나무로 달게 한 것같이 우리도 심리이설로 편만된 광야와 같은 이 세상에서 오염된 물을 볼 때마다 하나님이 정하신 나무인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으로 정화해서 마심으로 오염에서 보호받아야 하고 또 우리의 생활과 우리의 교회를 깨끗하게 보존할 수 있어야 한다.

왜 성경으로만 상담을 해야 하는가? 성경만이 삶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1970년대에 미국에서 전국적으로 유행했던 말이 있었는데 그것은
스트리킹(streaking)이라는 말이었다. 이것은 운동경기 때에 어떤 사람이 마스크를 쓰고 얼굴만을 가리고 몸은 벌거벗은 채 운동장을 달리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매우 불경스러운 일이었지만 스릴(thrill)을 구하는 사람들이 했던 값싼 행동이었다.

그런데 지금 많은 기독교인들이 영적으로 스릴만을 구하는 사람이 너무나 많은 것 같다. 그들이 입고 있는 갑주란 고작 구원의 투구만을 쓰고 있는 경우가 많다. 구원의 투구를 제외하고는 마치 벌거벗은 어치(jaybird)와 같은 모습으로 영적으로는 벌거벗은 상태이다. 투구만을 쓰고 있어 기독교인임을 보여주는 것 같지만 영적으로는
스트리킹
을 하고 있는 것만 같다. 모든 성도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있어야 한다. 왜? 신앙생활은 전투하는 생활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전도나 상담이나 심령을 구하는 특수 영적 사역을 하는 주의 종들이야말로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삶의 문제가 있을 때 우리는 누구에게 달려가는가? 삶의 문제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말씀 외에는 해답이 없다. 심리이설자들도 문제에 대한 연구나, 해설이나, 설명을 어느 정도는 정확하게 할 수 있다 해도 그 해결 방법만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에서만 정확히 찾아야 한다. 이는 성경은 우리에게 생명을 다시 줄 수 있는 유일한 생명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 속에서 아픔이 있을 때 사람들은 여러 가지로 조언을 한다. "이렇게 해보세요", "저렇게 해보세요"라고 한다. 부모에게 상처를 받았는데 분을 억제하고 있다면 "혼자 방에 가서 베개를 부모라고 생각하고 그 베개에게 당신의 분을 쏟아 버리라"고 하기도 한다. 또 "부모가 당신을 거절했다고 생각하면 다시 엄마 뱃속으로 가서 그 때부터 기억되는 모든 것을 상상으로 회생해 보라"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가 받는 상담이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보아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그 상담은 언제나 정확한 성경적상담이 아니다. 상담자가 아무리 사랑스럽고 인기가 있거나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이라도, 또 지금까지 여러 사람을 도왔다 하드라도 그 상담만은 비 성경적이라고 단정해버려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에서 모든 직분자나 성도들이 다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그 말씀이 항상 우리 안에서 풍성히 거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비성경적인 말이나 행동에서 자신을 보호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성경이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를 항상 검토해 보아야 하고 또 열심을 다해 말씀을 공부하며 행해야 한다.

삶의 문제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만 하면 못 고칠 것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한번 고침을 받으면 다시는 고통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 어떤 일을 당해도 그것을 성경적으로 다룰 능력이 생겨 언제나 승리할 수 있다는 말이다. 결과적으로 모든 것이 합동해서 유익하게 된다는 말이다. 고로 우리는 대 의사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우리를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필요한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신실하게 사는 것뿐이다. 그리고 믿음이 없으면 믿음을 갖도록 하나님께 기도할 것뿐이고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신대로 주님의 말씀을 행하면 된다. 이것이 상담을 성경적으로만 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이다.

남편이 혼외정사를 가져 정신이 혼란해진 여인이 있었다. 이 부인은 충격을 받고 정신과 의사를 찾아갔는데 그에게서 치료를 받으려면 2년이 걸릴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성경적상담자는 그 여인을 쳐다보면서 어떻게 남편이 사랑하던 아내를 그리 쉽게 버리고 다른 여자를 사랑할 수 있을까 하며 속으로 몹시 안타까워했다. 그리고 "당신은 치유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치유는 과정이므로 지금부터 서서히 나타납니다"라고 말을 해 주었다. 그리고 말씀이 그의 속에 들어가면 피상담자의 믿음이 따를 것이라는 말도 해주었다. 또 치유가 된다 해도 시련도 계속 따라온다는 말도 해주었다. 그래서 꾸준히 기도도 열심히 하라고 일러주었다.

이 여인은 그 날 배운 말씀으로 힘을 얻어 무릎을 꿇고 예레미야와 같이 치료하시는 하나님 여호와 라파의 이름을 불렀다: "여호와여 주는 나의 찬송이시오니 나를 고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낫겠나이다. 나를 구원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구원을 얻으리이다(렘 17:14). 그리고 자기 문제에 대해 하나님의 관점과 소망을 갖는 것을 배우고 계속 말씀대로 사는 훈련을 받으니 이 여인은 얼마 후 고침을 받았다.

하나님의 말씀이 치유할 수 있는 것은 1)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말과 다르고, 2)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고, 3)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서 역사하시고 그대로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씀을 믿음으로 받고 행하면 치료가 되지 않을 수 없다. 내 문제가 어떻든, 내가 어떠한 위기에 처해 있든 말씀은 내가 그것을 행하기만 하면 꼭 나를 치료하신다. 왜? 하나님은 그의 말씀을 보내어 그를 사랑하는 자를 고치시고 위경에서 그를 건지시기 때문이다. (시 107:20).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을 위해서는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루게 해주신다. 이는 하나님은 우리의 대 구속자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과거를 속량해 주시고 그것을 우리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는 일에 사용해 주신다.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이고 항구적이고 우리를 변화시켜 주시는 사랑이다. 십자가와 말씀은 우리의 길리앗이고, 우리의 도피성이고, 치유의 장소이다.

 

하나님만이 그의 말씀을 가지고 우리의 모든 욕구를 채워주시고, 우리의 모든 상처를 고쳐주시고, 우리의 생명과 겅건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실 수 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1) 모든 문제에 대해 하나님의 관점과 소망을 가져야 하며, 2) 말씀을 행하므로 자신의 행위(생각, 말, 행동)를 바르게 하고, 3)그것이 습관이 되도록 날마다 말씀을 행하는 생활을 해야 한다. 이렇게 되면 변화는 보장된 축복이다.

오늘의 기독교 사회가 바로 이런 것을 등한히 하고 있다. 우리는 치유가 필요하다. 그런데 하나님께 가서 구하지 않고 인간의 심리학, 인간의 철학, 인본적으로 변형된 기독교에게 가서 구걸을 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형편이다.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과 같이 모든 것을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샘물을 버리고 인간의 이성과, 인간의 방법과, 인간의 모략을 담은 물통을 좇아가고 있다. 물통은 인간이 그 속에 집어넣은 것만을 줄 수 있다. 그래서 물통은 인간의 방법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샘물은 무한한 생명의 물의 원천이다.

예레미야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물을 담지 못할 깨진 물통에서 물을 얻으려고 하나님의 생명수를 버렸었다. 오늘 날 많은 사람들이 삶의 문제를 위해서 똑 같이 생명수를 버리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인간의 철학, 상담, 지혜를 따라가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치료하시기 원하신다. 우리는 주님이 주신 피난처인 그의 말씀으로 달려가 믿음으로 순종만 하면 어떤 문제도 치유를 받을 수 있는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