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강해/마태복음강해

(마태복음12: 30) 진정한 그리스도의 동지

이요나 2007. 10. 31. 17:32

(마태복음12: 30) 진정한 그리스도의 동지

 

(마12:30)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우리는 11장에서 하나님의 지혜를 깨닫지 못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순된 신앙생활을 살펴 보았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메시야를 고대하며 이 땅에서의 천년왕국을 꿈꾸면서도 막상 메시야의 사자 세례 요한이 오자 그를 귀신들렸다 배척하였고 또 그가 증거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많은 이적들을 보이셨음에도 그를 구세주로 영접하지 않았다. 그들이 실족환 것은 스스로 마음이 교만해져서 선지자들을 통하여 미리 말씀하신 하나님의 계시를 살펴 보지 않고 자기의 지식을 따라 천국이 올 것이라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들이 심판날에 두로와 시돈과 같을 것이며 소돔땅이 견디기 쉬울 것이라 저주하셨다. 그러나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침노하는 어린 자들에게는 하나님 아버지를 아는 지혜를 허락하셨다.

 

I. 안식일의 주인(1-21)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하시고 (12)

 

A.         안식일의 규례(1-8)

주님은 안식일에 제자들과 함께 들판을 거니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두 성전과 회당을 중심으로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는 것에 비하면 납득하기 힘든 행보였다. 또한 바리새인들이 예수와 그 제자들이 무엇을 하는가 따라 다니며 감시하고 있었던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그들은 제자들이 시장기를 면하기 위해 이삭(킹제임스 성경은 옥수수)을 잘라 비며 낱알을 먹는 것을 보고 예수께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느냐 힐문하였다.

 

이에 예수님은 “다윗이 자기와 그와 함께 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자기나 그 함께 한 자들이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먹지 아니하였느냐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일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3-5) 하셨다.

 

이 말씀은 사무엘상21절에 나오는 말씀으로 다윗이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후에도 교만한 왕 사울에게 쫓기어 도망 다닐 때의 일이다. 다윗은 자기를 따르던 어린 병사들과 도망을 다니다가 놉에 사는 아히멜렉 제사장에게 가서 먹을 것을 청하였을 때 그는 제사장 밖에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받아 굶주림을 면했다. 후일 이 일로 아히멜렉 제사장은 사울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또한 대제사장들은 안식일에 성전 안에서 봉사를 하게 되는데 이것은 사실상 안식일에 일하지 말하는 규정을 깨는 것이다.

 

오늘 예수께서 이와 같은 말씀을 하시는 것은 성경해석상의 문제를 거론 한 것이다. 사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임의로 해석하면서 안식일에 관한 규정들을 임으로 많이 만들어 어떤 경우에는 발을 다친 사람들이 목발도 질 수 없도록 하였고 짐을 질 수 없다는 규정으로 하여 의치까지도 뽑아야 했다. 결국 이러한 잘못된 성경해석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자유를 구속하고 그를 범한 사람들을 정죄하여 죄인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런 오류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세워진 이래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이방인을 위한 초대교회가 안디옥에 개척된 이래 개종한 유대교인들은 줄기차게 모세의 할례를 주창하였다. 어떻게 보면 그들의 주장은 이것이야 말로 성경대로 하는 것이다 라는 괴변이 된다. 지금도 한국교회들은 각 교단의 교리에 따라 잘못된 구원론을 가르치고 있다. 그것은 수백년 전에 미처 깨닫지 못한 성경학자들의 잘못된 가르침을 무조건적으로 따랐기 때문이다.

 

어떤 교회들은 사람이 회개를 하고 죄사함을 받고 용서를 받았으면 영원히 구원받은 것이 되어 어떤 죄를 지어도 다시 회개를 할 필요가 없다고 가르친다. 어떤 교파는 예정된 사람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하며 하나님께 유기된 백성이 있다고 가르친다. 또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사람이 거부할 수 없다는 이상한 교리를 만들어 내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는다.

 

그들을 향하여 주님은 먼저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선포하셨다. 이 말씀은 말라기 3장 1절을 근거로 하신 말씀으로 성전의 주체가 누구임을 말씀하신 것이다. 이다. 이미 성경이 ‘너희의 구하는 바 주가 홀연히 그 전에 임하실 것이라’ 가록하였기 때문이다. 어느 교회를 가면 강단이 마치 하나님이 임재하신 재단처럼 생각하여 목사가 설교를 하러 올라갈 때 신을 벋고 올라간다. 그 목사가 설교 중 방귀가 나오면 어떻게 할 것인지 매우 궁금하다. 그러면서도 감히 강대상에 서서 파렴치한 거짓말들을 천연스럽게 쏟아내는 것은 정말 위선자의 위용이 아닐 수 없다. 나는 그들이 주의 날에 어떤 형벌에 처해질 것인지 잘 알고 있다.

 

계속하여 주님은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7)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호세아 6장의 6절 말씀을 인용하신 것이다. 주님은 이미 앞에서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실 때 그를 비방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동일한 말씀으로 꾸짖으셨다. 바울은 또한 이 말씀을 로마서 11장32절에서 인용하였다.  유대인들이 이처럼 예배에 관하여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주님은 그들에게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말씀하셨다. 여기서 인자란 ‘The Son of God’이다. 보통 사람인 ‘a son of man’ 이 아닌 것이다. 다시 말하여 주님은 여기서 자신이 창조자 되심을 말씀하신 것이다.

 

B. 안식일의 목적(9-13)

주께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 가시니 그곳에 마른 사람이 있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께서 안식일에 사람을 고칠 것이 옳으냐고 물었다. 참으로 이들의 의도가 심히 불경스럽다. 어떻게서든지 안식일의 규정을 범하는 죄를 묻고자 하는 것이다.

 

사실 그들은 안식일에 다리가 부러져도 치료행위를 하지 않았다. 만약 고향에서 누가 상을 당해도 안식일에는 여행을 하지 못하므로 가지 못했다. 만약 커피를 금요일에 준비해 놓지 않으면 커피포트에 스위치를 넣는 조차 하지 못했다. 여인들은 머리에 장식을 하지 못했고 예쁜 액세서리도 짐이 되기 때문에 하지 못했다. 그런 논리라면 어떻게 입에 밥을 넣고 화장실에서 용변을 있는 것인지 궁금하다.

 

이에 주님은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게 빠졌으면 붙잡아 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11,12) 하셨다. 여기서 주님은 안식일을 주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언급하신 것이다.

 

사실 안식일은 십계명에서 규정된 의식법이며 또한 유대인들의 구원의 표적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가장 중요한 날로 규정하고 날을 거룩히 지내기 위한 여러 가지 규정을 제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안식의 개념은 창세기 2장에서 주어진다. 하나님께서 모든 창조의 사역을 마치신 안식하신 것이다. 여기서 안식이란 말은 유대인이 생각하는 의식적인 개념의 안식일 ‘Sabbath’ 아니라 ’(rest)이다. 다시 말하여 안식은 영원한 쉼의 기원인 것이다(20:20). 우리는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계시록에서 날을 맞이하게 것이다. 그러나 날은 안식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할 때부터 그에게 주어질 것이다.

 

주께서 우리에게 안식을 주신 것은 영원한 생명의 개념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여러가지 규정을 만들어 사람들의 자유를 구속하고 생명의 쉼을 억제한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도 주의 날에 생명을 귀히 여기는 선한 일을 마땅히 하여야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요즘도 주일을 유대인의 안식일과 같은 잘못된 개념으로 생각하고 있다. 안식일은 유대인의 율법이다. 이방인에게 허락하신 것이 아니다. 이방인에게 안식의 개념은 영원한 천국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의 날이라고 한다. 주의 주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신 날에 우리는 모여서 주를 찬양하고 주께 기도하며 그의 말씀을 듣는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주일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주일을 안식일처럼 여러가지 규정을 만들어 속박하려 한다. 어떤 교파는 유대인들과 같이 토요일에 예배를 드리며 구약의 율법을 지키려 한다. 이것은 밤과 낮을 동일하게 맞이 하려는 것과 같다. 갓을 쓰고 양복을 입으면 얼마나 우습겠는가? 질서와 균형에 어긋난 것이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사실은 안식일에 선한 일을 행하는 것이 옳은 것처럼 주일은 선한 일을 하여야 것이다. 선한 일이란 바로 생명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전도를 하는 , 사람을 위해 봉사를 하는 , 그러므로 의사가 주일에 봉사하는 것이나 비행기 조정사가 일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돈을 벌기 위해 미용실을 연다든가 식당을 여는 일은 생명을 위한 것이라 없다. 그것은 세상 사람들이 하게 내버려 두고 우리는 차라리 그들에게 가서 머리를 하던가 밥을 먹으며 전도를 하여야 것이다.

 

C. 그리스,도의 사역과 성경의 증거(14-21)

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을 회복시키니 바리새인들은 모여서 예수를 어떻게 죽여야 할까 의논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안식일에 사람을 죽일 궁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의 마음을 이처럼 악하게 된 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사람을 종교적으로 만들 때 악해진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의 사악한 마음을 아시는 예수님은 그곳을 떠나 자기를 따르는 병자들을 고치시며 자신에 대하여 알리지 말라 경계하셨다. 흥미로운 것은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에도 그들에게 대항을 하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바울 또한 유대인들에게 심한 핍박을 받으면서도 그들에게 대항하지 않고 게속하여 다른 지역으로 도망을 가며 전도를 했다. 이 또한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배워야 할 헌신의 자세인 것이다.

 

이미 주님은 제자들을 보내시며 귀신을 쫓고 병을 고치라 하시며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하셨다. 또한 주님은 왼 손이 한 일을 오른 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셨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은 얼마나 많이 자랑하고 있는가? 어느 교회에서 누가 병이라고 고쳤다 하면 그 다음날 신문에 광고를 내어 사람들을 모으기 일 수다.

 

또한 오늘날 이스람교도들이나 회교들을 보라. 자기들을 거스리는 자들은 무참하게 칼로 응징하며 스스로 자살 폭탄이 되어 국가와 민족을 위해 죽는 것이 알라신의 뜻으로 알고 있다. 이처럼 종교는 자기의 신을 위해 사람들의 생명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을 살려주는 영이신 것이다.

 

성경은 예수께서 이처럼 하신 것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미리 말씀과 같이 보라 나의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나의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성령을 줄 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그가 다투지도 아미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또한 이방들이 그 이름을 바라리라(18-21) 기록하신 것을 이루려 함이라 증거하였다.

 

여기서 나의 택한 종이란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의 사역적 의미를 부여한다. 그는 곧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사랑하는 아들이다. 하나님은 그 아들에게 성령으로 기름을 부어 이방에게 심판의 날이 있음을 전하였다. 이것은 복음의 능력이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 곧 거룩한 성령으로 나타나신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를 갖는다는 것은 영적인 관계를 개설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신 것이다.

 

주께서 이 땅에서 하신 사역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행하시는 것이면 능히 거역하는 자들과 다투며 크신 능력을 소문내실 것인데 다투지 않고 들레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주님은 오히려 숨기시고 은밀히 행하셨다. 그는 자랑하는 지혜자들에게 숨기시고 오히려 상한 갈대처럼 연약한 자들과 바람 앞에 흔들려 꺼져가는 생명들을 살리신 것이다. 그리고 이 일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심판날까지 행하실 것이며 이로서 이방들이 구원을 받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발견해야 할 것은 예수께서 인용하신 호세아의 말씀을 통한 하나님의 계시이다. 지금 예수께서는 이미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자신을 통하여 성취되고 있음을 언급하신 것이며 또한 이것은 심판의 날까지 이어질 것이고 그로부터 이방인들이 그의 이름으로 하여 구원을 받으실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여기서 주님은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실제로 살아 계심을 증명하고 계신 것이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은 구약의 말씀을 살펴 그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기 보다는 그 말씀을 인용하여 자기들의 권위를 높이던가 사람들의 정죄하기 위해 이용하였다. 그로하여 사람들은 그들이 저한 율법에 매여 종교적 노예가 되고 만 것이다. 이러한 일들은 오늘날도 비일비재하다.

 

오늘날 많은 목사들이 성경의 말씀을 인용하여 자신의 권위와 교회성장을 위해 사용하고 있다. 그들의 설교를 들으며 정말 적반하장이다. 나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응징이 있을 것이라 믿는다. 그런데도 흥미로운 것은 그들의 말씀을 듣고 아멘 아멘 하며 돈을 싸 들고 따라다니는 성도들이다. 그들은 이미 잘못된 설교에 습관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자신의 목소리를 들레지 않으며 다투지 않으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며 묵묵히 진리를 위해 걸어가신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각 사람의 행위에 대해 심판이 있다는 것이다. 성경은 누구든지 그 이름이 생명책에 녹명되지 못한 사람은 불 못에 던지 우리라 기록하였다(계20:15).

 

I. 성령과 하나님의 나라(22-3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던지 심판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36,37)

 

A. 영적 세계의 질서(22-32)

22절에는 ‘그때 귀신들려 눈 멀고 벙어리 된 자를 데리고 왔거늘 예수께서 고쳐 주시매 그 벙어리가 말하며 보게 된지라” 기록되었다. 이에 사람들이 놀라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하니 바리새인들은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24) 말하였다.

 

참으로 흥미로운 일이다. 군중들은 예수께서 하신 일을 보고 ‘다윗의 자손’ 곧 ‘메시야다!’하고 외쳤는데 종교지도자들은 귀신의 왕 바알세불에게 집혔다고 말한 것이다. 자기들이 하면 하나님의 능력이고 다른 사람이 하면 귀신의 역사라는 말이기도 하다.

 

여기서 ‘다윗의 자손’이란 말은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인자’ 곧 ‘The Son of God’이란 말과 같다. 이 말은 오직 이스라엘 백성들만이 알 수 있는 계시의 말씀인 것이다. 그들은 메시야가 오시면 인간의 모든 죄를 풀어 귀신과 병에서 놓임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라 믿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기다려 왔던 것이다.

 

바리새인들의 완악한 생각을 아시는 예수님은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25) 하셨다. 오늘날 대선정국을 보라 각 정당에서 선출된 후보들이 서로 흠집을 내며 지지멸멸 다투고 있다. 수단과 방법을 모두 동원하여 상대를 모함하고 넘어 뜨려 일어선 자가 승자가 되는 대선구도 속에서 과연 진정한 지도자를 선출할 수 있을 것인지 의아스럽다. 그들의 말을 들어 보면 모두가 다 그 나물에 그 밥이다. 과거 어느 나라던 어느 정당이던 어느 종파던 어느 교단이든 서로 분쟁한 곳은 모두 황폐하게 되었다. 역사가 이를 증명하지 않는가?

 

계속하여 주님은 “사단이 만일 사단을 쫓아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야 저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 또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겠느냐 그러므로 저희가 너희 재판관이 되리라”(26,27) 하셨다.

 

주님의 말씀 속에는 이중적인 효과가 들어 있다. 그 말을 듣는 대상인 바리새인들과 종교지도자들에게는 그들이 각 파벌로 분쟁하고 있는 모순을 책망하신 것이고 또 한 편으로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끌어 갈 그의 제자들에게 경계의 메시지를 전하신 것이다. 다시 말하여 분쟁하는 나라는 멸망할 것이며 결코 저의 나라가 서지 못할 것이라 하신 것이다. 또한 다음 세대는 악한 귀신에게서 놓임을 받은 아들들이 세상을 이끌어 갈 것임을 언급한 것이다.

 

B. 사필귀정(33-37)

계속하여 주님은 나무도 좋고 실과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실과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실과로 나무를 아느니라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33)하셨다. 이 말씀은 콩심은 데 콩나고 팥심은 데 팥난다는 말씀이다. 다시 말하여 사필귀정을 말씀하신 것이다.

 

나는 최근 동성애자들을 상담하면서 이들은 하나님의 유기된 백성이라는 희귀한 괴변을 들었다. 이 말은 이 땅에 소망을 갖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수많은 동성애자들을 모욕하는 말이다. 그들이 만약 자기의 자식이나 형제라면 감히 그런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장담하건데 자기 후손 중에는 동성애자가 없을 것이라는 추정은 절대 하지 못할 것이다. 이 땅에 어느 사람이 자기들 자녀들이 동성애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 부모는 없기 때문이다.

 

나는 이러한 마음을 갖고 있는 그 사람들의 마음이 지극히 악한 것을 안다. 그들은 자기들을 특별한 위치에 놓고 자기를 존중하며 자기 영혼을 찬양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이런 말을 하는 자들은 그들 마음이 악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에 마음에 있는 것을 쏟아내는 것이다. 나는 장차 이들은 주 앞에서 자기들이 입으로 쏟아낸 말들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라 믿는다. 이미 주께서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하셨고 다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라(37) 하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계시록 20장에서 완전한 하늘나라의 목전에서 영혼의 심판을 베푸시는 백보좌 심판을 목격하게 된다. 그날에는 모든 영혼들이 자기의 행위대로 주의 심판을 받고 오직 생명책에 그 이름이 녹명된 사람들만이 주의 위로를 받게 될 것이다(계20:15). 이미 바울은 우리가 다 반듯이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5:10) 증거하였다.   

 

III. 그리스도의 표적과 하나님의 뜻(38-5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39)

 

A. 요나의 표적과 그리스도

이 말씀은 표적을 보여 주기를 원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하신 주의 말씀이다. 여기서 주님은 장차 자신이 스스로 해야할 일들이 무엇인가를 암묵적으로 계시하신 것이다. 먼저 주님은 그들에게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하셨다. 악이란 앞에서 언급하셨듯이 주의 말씀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지 않고 사람을 정죄하는 자들의 악심을 뜻한다. 또한 음란이란 성적으로 부도덕적인 것을 뜻하지만 여기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상의 것을 받아드리는 영적행위들을 뜻한다.

 

요즘 우리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친다는 명분과 전도를 명분으로 하여 알파 전도 프로그램 또는 관상기도와 같은 가당치도 않은 것들을 끌어 드리고 있다. 이 모든 것은 이방종교에서 파생된 것으로 결국 귀신놀음들이다. 한 마디로 귀신을 불러들여 사람들의 마음을 미혹시키려는 종교적 간음이다. 주님은 이러한 악과 음란으로부터 주의 백성들을 구하는 길은 오직 십자가의 죽으심 밖에 없다고 하신 것이다.

 

주님은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하셨다. 어떤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들어 성경에도 오류가 있다고 말한다. 그들은 주님의 부활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날로부터 사흘이 되려면 목요일에 죽으셨어야 하는데 십자가의 죽음은 금요일이라 말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날은 목요일이다. 여기서 사흘이란 하루 24시간의 개념이 아니라 해를 기준으로 해서 사흘인 것이다.

 

B. 심판 때

주님은 심판 때에 느니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려니와 요나보다 큰 이가 여기에 있으며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한계성을 초월하고 있음을 전제로 하고 이 말씀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주께서 요나의 니느웨 전도를 인용하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 이후에 발생될 복음전도의 체계를 언급하신 것이다.

 

다시 말하여 지금까지는 하나님의 은혜가 택하신 백성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국한 되었었지만 이들의 악하고 음란으로 말미암아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의 죄를 위해 죽으실 것과 또 부활하여 주를 찾는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실 것이며, 그 후로는 회개한 이방인들이 일어나 도리여 악하고 음란에 물든 백성을 구원하실 것임을 말씀하신 것이다. 지금 이미 우리는 그 시대에 살고 있지 않은가?

 

주님은 계속하여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끝에서 왔음이어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42) 하셨다. 이 또한 우리에게 중요한 뜻을 전달해 주는 계시의 메시지이다. 앞에서는 복음의 전도를 말씀하신 것이고 다음은 지식의 시대의 필요성을 의미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주께서 사흘만에 부활하신 후 그의 택하신 종들을 통하여 전세계의 이방인들에게 전파되었다. 그들은 또한 아직도 깨닫지 못한 유대인들을 향하여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수많은 교회들이 또 잘못된 속성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전도라는 미명아래 하나님의 지혜의 말씀을 도외시 하고 만 것이다. 이것은 결국 유대인들의 전철을 다시 밟는 것과 같다.

 

주께서 요나 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솔로몬 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다 하신 말씀은 우리가 어떤 경우에도 복음의 지혜를 상실해서는 않된다는 말씀이다. 다시 말하여 그 어떤 경우에는 또 다른 것이 마음을 빼앗겨 악을 쌓고 또 다른 것에 미혹되어 복음의 진실을 왜곡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신 것이다. 오늘날 주를 영접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잘못된 교리와 이단적 사설에 그 마음이 빼앗겨 이방종교적 행위를 답습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이 말씀은 벌써 우리 앞에 서 계셨음을 볼 수 있다.

 

C. 완전한 주의 백성

이에 주님은 비유를 들어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말하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소제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와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43-45)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참으로 우리를 슬프게 하는 메시지다. 물론 이 말씀은 메시야의 표적을 바라고 나아 온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그리고 그들을 따르는 사악한 무리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그러나 이 메시지는 어느새 오늘날 이 말씀을 듣는 우리 앞에 성큼 나타나 있지 않은가? 이미 수많은 무리들이 표적을 바라고 주를 믿으려 하고 있지 않은가? 얼마나 많은 적그리스도들이 일어나 표적을 일으켜 사람들의 마음을 미혹하고 있는가?

 

여기서 주님은 우리에게 우리가 죄의 사함을 받고 우리 안에서 우리를 주장하던 악한 귀신들을 쫓아 내었다면 이제 그 집 주인이 온전히 바뀌어야 할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주님은 이미 앞에서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29) 하셨다. 이 말씀은 우리 안에 악한 귀신이 역사하고 있음을 말씀하신 것이고 그를 쫓아내는 것은 귀신으로 할 수 없고 귀신을 멸할 권세자라야 할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사실 우리는 주를 믿지 않던 시절에 세상신들이 우리 안에 들어와 주인행세를 하고 있었다. 그 세상 신이란 자기들의 논리와 이론을 가지고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육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 무엇이라도 행하게 한다. 그러한 악하고 더러운 영들에게 사로잡혀 우리는 인생을 허비해왔고 소망없이 살아 왔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그 악한 세상의 영들에게서 나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 하나님의 신이 우리 안에 있는 악하고 더러운 영들을 쫓아내신 것이다.

 

그러면 이제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가? 우리 안에는 우리를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도록 이끌어갈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서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으로 충만케 하여야 한다. 바울은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엡4:13) 증거하였으며 다시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엡4:14) 증거하였다.

 

만약 당신이 주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으나 그 아들의 믿음의 지식을 터득하지 못한다면 당신을 사로잡고 있었던 악한 영들은 더욱 악한 영들을 데리고 들어와 당신을 주관할 것이다. 오늘날 우리들 가운데 믿는 형제자매들 중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단과 사설에 얽매어 고통을 받고 있는가? 이들은 모두 메시야의 표적에 이끌려 나아간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베드로 사도는 우리에게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이라(벧후1:3) 증거하였다.

 

46절에는 흥미로운 내용이 소개되었다. 주께서 무리에서 말씀하실 때 사람들이 주께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섰습니다 하고 전하였다. 마가복음을 보면 주의 가족들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주께서 바알세불에게 지폈다는 소문을 듣고 걱정이 되어 찾아 나선 것이라 기록되었다.

 

이 말씀을 들은 주님은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이냐 하시며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르치며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50) 하셨다. 어떻게 보면 참으로 냉정하기 그지없는 말씀이다. 그 모친과 동생들이 얼마나 민망했을까 싶다. 그러나 여기서 주께서 하신 말씀은 진정한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의심없이 주의 말씀에 동참해야 함을 언급한 것이다.

 

이미 주님은 나와 함께 하지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30) 하셨다. 이 말씀은 천국복음은 어느 중간 지점에 서 있을 수 없음을 의미한 것이다. 분명한 믿음의 선택의 필요성을 말씀하신 것이다. 오늘날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순종하는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과연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않고 성경의 가르치신 말씀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천국을 소망하는 주의 백성이 얼마나 있을 것인가? 모두가 떠날지라도 오직 주의 말씀을 사모하여 나를 따를 하나님의 사람들은 과연 이 땅에 없는 것일까? 오 주여 나는 묵묵히 주를 바라겠습니다. 주의 날이 속히 오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