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강해/마태복음강해

(마태복음11:25) “천국을 아는 지혜”

이요나 2007. 10. 23. 15:10

(마태복음11:25) 천국을 아는 지혜

(마11:6)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6)

 

우리는 마태복음 10장에서 주의 부름을 받은 복음의 제자로서 지켜야 할 수칙에 대하여 살펴 보았다. 이제 우리는 11장을 통해서 또 다른 세계의 출범과 함께 발생되는 영적 도전과 천국시민으로의 초청에 응답할 수 있는 지혜와 그 결과에 대하여 공부하게 된다.

 

I. 메시야에 대한 이해(1-6)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6)

 

A. 세상은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하고 있다

주님은 6절에서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셨다. 이 말씀은 메시야의 사자 세례 요한의 질문을 답하시면서 하신 말씀이다. 만약 이 말씀이 오늘 당신에게 주어진 것이라면 당신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만약 당신이 평안한 얼굴로 여유 있는 표정을 짓고 있다면 주님은 당신을 즐겨 받으실 것이다. 그러나 만약 아직도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분명한 입장을 취하지 못하고 있다면 주님은 안타까운 눈으로 당신을 바라 보고 계실 것이다.

 

지금 우리는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신지 이미 2000년의 세월이 지난 시점에 살고 있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주께서 말씀하신 그 결과의 날이 우리 앞으로 달려 오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그날이 내게 있어 심판의 날이냐 아니면 평안의 날이냐 둘 뿐인 것이다.

 

우리는 성경이 이미 완성된 시대에 살고 있다. 세례 요한이나 제자들처럼 아직 미완성의 단계가 아닌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완성되었고 성경은 더 이상 고칠 수 없도록 봉인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인간은 전쟁과 질병과 삶의 고통 가운데 신음하며 두려움에 떨고 있으며 세상은 날이 갈수록 더욱 음행이나 여러가지 죄악들로 더러워져 가고 있으며 그 속에서 크리스챤들도 유혹을 받고 있다.

 

오늘날 우리 교회의 문제는 많은 교회들이 하나님의 심판과 세상의 멸망할 것을 믿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 지구상에서의 파라다이스를 꿈꾸며 지상 낙원을 세우기 위해 복음을 전도를 해야 한다고 외치고 있다. 이미 베드로 사도는 우리 중에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말하고 있다”(벧후3:4)고 증거하였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세상은 불로 멸망을 당하기 위해 놓여 있고 구원받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안식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복음의 메시지이다.

 

B. 세례 요한의 신념은 왜 흔들렸는가?(2-3)

어느날 세례 요한은 그의 제자들을 보내어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합니까?(3)하고 물어왔다. 이미 그리스도의 사역이 시작되었는데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별도의 구성원을 갖고 있다는 것이 기이하다. 세례 요한이 증거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앞에 보내신 메시야인 것을 증거하는 일인데 말이다. 세례 요한의 증거로 수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주께 돌아 왔지만 그의 제자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 것은 베드로의 동생 요한과 야고보의 동생 요한 뿐이다(요1:35-39).

 

요한은 사람들에게 증거하기를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게 나타내려 함이니라(요1:31) 하였고 계속하여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요1:33-34) 하였다.

 

요한은 예수께서 자기 앞으로 나아와 세례를 받으려 하실 때 내가 당신에게 나아가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마3:14) 하였다. 이 때 주님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마3:15) 하셨고 침례를 받으시자 성령이 비둘기처럼 임하며 하늘로부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3:17) 는 소리를 들었다.

 

그런데 옥에 갇힌 세례 요한이 그의 제자들을 보내어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합니까?(3) 하고 다시 확인을 하는 것은 참으로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새에 믿음이 떨어진 것일까 아니면 시새 말처럼 그 마음이 마귀에게 사로잡힌 것일까?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세례 요한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야의 사자라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세례 요한은 네가 그리스도냐, 엘리야냐, 아니면 그 선지자냐 하고 물어 왔을 때 요한은 단호히 나는 메시야가 아니다, 엘리야가 아니다 나는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요1:20) 고 증거했다. 그의 말과 같이 세례 요한은 엘리야의 환생이 아니라 이미 성경이 기록된 바와 같이 사가랴의 아들로 태어난 세례 요한으로서 엘리야의 심령으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 온 메시야의 사자인 것이다.

 

성경은 이 일을 증거하여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예비할 것이요 또 너희의 구하는 바 주가 홀연히 그 전에 임하리니 곧 너희의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할 것이라(말3:1) 하였고 다시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말4:5) 라고 기록하였다.

 

  C. 봉함된 성경적 계시

그러면 왜 세례 요한은 이 시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다시 의문을 갖게 된 것일까?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아직 그 당시는 천국에 대한 성경의 메시지가 완성되지 않은 때라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메시야 곧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에 관한 확실한 증거의 메시지를 갖고 있고 또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의 인도하심과 가르침으로 성경에 계시된 메시야 왕국을 예측하고 또 소망할 수 있지만 완성되지 않은 구약의 말씀만을 가지고서는 메시야 왕국의 실현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실존하신대도 로마의 지배와 제사장들의 집권을 볼 때 세례 요한으로서는 천국에 대해 명확한 이해를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세례 요한이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의심하던가 부인한 것은 아니다. 그는 메시야의 사자로 보냄을 받았고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알고 있었다. 다만 그는 메시야 왕국 곧 주의 통치에 대하여 물어 온 것이다.

 

그 당시는 메시야의 초림과 재림으로 구분하여 생각할 수 없었던 때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메시야가 오시면 곧 이스라엘이 회복되고 열방의 통치자 국가가 될 것으로 알고 있었다. 또한 그때까지는 메시야에 대한 성경적 계시도 봉해진 묵시였다.  

 

이사야 선지자는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데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을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사6:9,10)고 증거하였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예정하신 날이 이르기까지 그 마음이 미혹될 것을 예고한 것이다. 다니엘 선지자에게도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단12:4)는 묵시가 주어졌다.

 

또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라도 아직 도래하지 않은 일들을 말하여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 비취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 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 먼저 알 것은 이것이니 경의 모든 말씀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벧후1:19,20) 증거하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천국에 대하여 친히 말씀하셨고 또 그의 보내신 사도들을 통해 성령으로 하신 말씀을 듣는 우리도 아직 메시야의 천국에 대하여 미혹을 받는 일이 비일비재한데 묵시의 봉해진 시대를 살고 있던 세례 요한의 시대를 살고 있던 사람들의 답답함이야 오죽 하였을까 싶다.

 

D. 세례 요한에 대한 예수님의 증거

주님은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게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어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하라”(5) 하셨다. 이 말씀은 이사야서 35장 4절로 6절에 기록된 말씀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겁내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는 굳세게 하라 두려워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수하시며 보복하여 주실 것이라 그가 오사 구하시리라 하라 그 때에 소경이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다’ 하였다. 아마 세례 요한은 주께서 하신 말씀을 들으며 이사야서의 말씀을 묵상하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천국의 주인임을 확신하고 기뻐하였을 것이다.

 

흥미롭게도 누가복음에서 주님은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에게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눅4:18,19)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이사야서 61장 1절로 2절 말씀 곧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사61:2)를 인용하신 것인데 주님은 여기서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생략하셨다. 이것은 후일 주께서 재림하실 때에 성취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주님의 초림은 은혜의 해를 전파하기 위한 것이다.

 

계속하여 예수님은 무리를 향하여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6)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실족이란 덫에 빠지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하여 메시야에 대한 계시에 대한 온전한 이해를 언급한 것이다.  우리가 계시의 말씀을 온전히 이해하려면 성경 말씀에 대한 현실적 갭을 넘어야 한다. 그것은 오직 택하신 자에게 주신 은혜로서 성령의 깨닫게 하심을 따라 가르침을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베드로 사도는 “우리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벧후3:16) 증거하였다.

 

II. 지혜의 투쟁 - 천국의 침노(7-19)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모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12)

 

A. 세례 요한과 천국인의 위치

예수님은 세례 요한에 대한 이해를 깨우치기 위하여 무리에게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물으셨다. 이미 그들은 세례 요한에게 나아가 자기의 죄를 자복하고 침례를 받은 자들이다. 그런데도 아무런 힘없이 옥에 갇혀 있는 세례 요한을 볼 때 그들의 믿음은 한없이 나약해 질 수 밖에 없다.

 

나는 오늘날 나를 따르는 서울 갈보리채플 성도들을 보며 정말 고맙게 생각을 하고 있다. 수년간 아무리 애를 써도 성장하지 못하는 교회를 보면서도 묵묵히 나를 따라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주기 때문이다. 이미 실족하여 우리 교회를 떠난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주님은 그들에게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이냐? 선지자를 보러 나갔더냐?’ 물으셨다. 흥미롭게도 여기서 사용된 ‘부드럽다’ (말라코이스)는 말은 고린도전서 6장 9절의 ‘탬색’과 동의어로서 몸을 파는 ‘남창’을 뜻한다. 주님은 “옳도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니라”(9) 하시며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요한 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11) 하셨다.

 

우리가 생각할 때 사실 세례 요한은 그 사역 면에서 구약의 다른 선지자들보다 훨씬 크다고 느끼지 못한다. 주께서 그카 크다고 한 것은 앞서간 선지자들은 그들이 증거하며 보고자 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고 죽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 앞에 와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는 세례 요한의 영광이야 말로 무엇으로도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하셨다. 이것은 그리스도로 인하여 죄 사함과 함께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게 되기 때문이다. 이들은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을 선물로 받은 자들이기 때문이다.

 

주님은 계속하여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12) 하셨다. 침노라는 것은 전쟁 용어로서 무력을 사용하여 강력하게 돌파하는 행위를 말한다. 바울은 우리에게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접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엡6:11) 하였다. 이처럼 천국입성을 위해서는 극한 영적전쟁이 필요한 것이다. 이를 위해 주의 성령이 함께 하시는 것이다.

 

이어서 주님은 “모든 선지자와 및 율법의 예언한 것이 요한의 때이니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 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하셨다. 주님은 여기서 또 다른 시대로의 출발을 언급하신 것이다. 다시 말하여 복음으로의 은혜 시대를 말씀하신 것이다. 구약 말라기 선지자가 예고 했듯이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앞서 은혜를 예고한 것이다.

B. 진리의 실증의 역행과 순행(15-19)

여기서 주님은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시며 흥미로운 비유를 말씀하셨다. “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꼬 비유컨데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동무를 불러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17) 하셨다. 이것은 아이들이 혼례행사나 장례행사와 같은 연극을 서로 미리 정한 배역대로 행하지 않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그러나 +아이들이 자신들의 배역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은 대본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 우리가 어떤 연극을 정해진 배역이 있으며 배역을 맡은 사람들은 이유없이 배역의 역할을 충실히 담당해야만 한다. 이와 같이 세례 요한은 맡은 메시야의 사자의 역할을 충실히 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무대에 있는 사람들이 같은 배역의 역할을 기록한 대본을 갖고 있지 않다면 그들은 마치 장터의 어린이들처럼 너의 배역이 그러냐 우리는 이런 배역을 해야 하느냐 하고 투정을 버리며 판을 밖에 없을 것이다.

 

여기서 피리를 부는 역할은 세례 요한이다.  세례 요한은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3:29) 증거하였다.  또한 곡을 하는 사람은 주님이시다. 주님은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자기를 보고 눈물을 흘리는 여인들을 돌아 보시며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23:28) 하셨다. 지금 주님은 이제 닥칠 환난을 예고하며 그들이 모두 신랑을 맞는 피리소리에 맞춰 춤을 추기를 바라신 것이다.

 

주님은 계속하여 요한은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저희가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18,19) 하셨다. 사람들이 세례 요한에 대하여 이러한 평가를 하는 것은 그들이 성경의 말씀을 살펴 보지 않고 자신들의 가치기준으로 요한을 대하였기 때문이다.

 

만일 그들이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살펴 보고 세례 요한을 통해서 나타나는 사실들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나는 일들을 통해 그가 성경이 말한 그인 것을 있었을 것이다. 주님은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면 교훈이 하나님께로 왔는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7:17) 하셨고 또한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의 판단으로 판단하라” (7:24) 말씀하셨다.

 

우리 성경의 19절의 지혜는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킹제임스 성경은 그러나 지혜는 자녀들로 인하여 의롭다고 인정을 받느니라”(19b) 번역하였다. 우리가 어느 것을 받는 것이 합당한 것인가 생각하기 전에 가지 번역을 함께 생각하여 지혜는 사람이 행한 일을 통하여 자녀들에 의해서 확증되어야 한다는 것임을 있다.

 

인간은 모두 역사 속에서 살아 간다. 시대마다 지도자들에 대한 성과는 그들이 행한 일의 결과를 통해서  나타난다. 그러나 어떤 일들은 교묘하여서 당시에는 행한 결과가 좋은 같아도 후대를 통하여 살펴 보면 그들이 행한 일들은 역사의 판단을 받을 밖에 없는 일도 있다. 그러므로 행한 결과가 후대에 이르기까지 변함없이 칭송을 받을 있어야 선한 지혜라고 있다.

 

 

III. 그리스도의 초청 – “내게로 오라” (20-30)

그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25)

 

A. 심판의 이유

주님은 자신이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고을이 회개하지 않으므로 책망하여 “화있을진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진저 벳세대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하였다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21) 하셨다. 벳세다는 베드로와 안드레와 빌립의 고향으로 예수께서 권능을 많이 행하신 곳이다.

주께서 그곳을 두로와 시돈에 비유하신 것은 매우 흥미롭다. 시돈과 두로는 역사적으로 우상숭배가 강렬하던 도시이기 때문이다. 아마 고라신과 벳세다 지역 사람들의 마음 속에 우상의 사상이 뿌리 깊게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계속하여 주님은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 행하였더면 성이 오늘까지 있었으이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날에 소돔 땅에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23,24) 하셨다. 소돔성은 세속적인 도시로서 음란과 물질주의에 빠져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아 불로 심판을 받은 도시다.

 

사실 가버나움은 예수께서 자기의 동내로 삼으신 도시로서 갈릴리 일대에 가장 발달된 곳이었다. 세관과 로마군영과 그리고 회당이 있어 종교적, 정치적, 경제적 중심 도시였다. 주님은 이곳에 머무시면서 그래도 사람들이 다른 지역 사람들보다 깨어나고 넉넉한 사람들이라서 주님을 영접할 것이라 생각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숱한 이적들과 많은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강하게 배척하였다. 그것은 그들이 교만했기 때문이다.

 

B. 아버지의 예정섭리

이에 예수께서는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25,26) 하셨다. 흥미로운 것은 말씀이 무엇에 대한 대답이라는 것이다(25a). 말씀은 예수님을 거역하는 도시 사람들을 바라 보시며 탄식하시는 것일지도 모른다.

 

천지의 주재란 우주만물의 주인을 뜻한다. 다시 말하여 만물의 창조하신 주권자 하나님을 뜻한다. 또한 어린 아이란 갓난 아이를 뜻한다. 따라서 스스로 지혜롭다 하고 슬기 있는 사람들은 교만하여 자기들의 보고 느낀 잣대로 판단하지만 아이들은 마음이 순수하여 양심이 이끄는 대로 나아 온다는 말씀이다. 어린 아이들은 눈에 보기 좋은 것을 따라 기뻐하고 슬퍼하기 때문이다.

 

계속하여 주님은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27) 하셨다. 천지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의 지혜를 누가 있겠는가? 오직 아들을 아실 있는 분은 하나님 뿐이시다. 그러면 우리가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의 비밀을 어떻게 있을까?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권세로서 주님은 아들과 아들의 계시를 받는 들이 있다고 하였다.

 

   C. 그리스도의 권세 택하심

여기서 아들의 계시란 무엇일까? 메시야에 대한 성경적 묵시를 뜻한다. 바울은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는 안에서 우리에게 거져 주시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1:4-6) 하였으며 나아가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1:17-19) 증거하였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택하심을 받은 자의 은혜가 얼마나 막중한 것인지를 있다.

 

 

D. 초청의 대상자

18절에서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하리라하셨다. 여기서 수고하고 짐진 자들은 과연 누구인가? 이들은 앞에서 언급된 어린 아이들 아들과 아들의 계시를 받는 자들이다. 비록 세상 가운데서 손가락질을 받을지라도 앞에 택함을 받은 자들로서 천국에 들어 가기 위하여 투쟁을 하는 자들이다. 자신들이 걸머진 인생의 짊과 내적인 눌림을 벗어버리기 위해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 보고 천국에 들어가기를 소망하는 자들이다.

 

여기서 수고라는 헬라어   코피아오’(kopiao) 내적 탈진을 의미한다.  신약에는 단어가 26 사용되었는데 이것은 견딜 없는 어떤 내적 눌림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노력을 뜻한다.  ’(phortizo) 외적은 무게로 물리적인 고통을 뜻한다. 아마 이러한 고통은 받아 사람만이 있을 것이다. 만약 당신이 벗어 없는 어떤 굴레 속에서 자신에게 맡겨진 삶의 조건을 이끌어 가려면 당신은 마음의 굴레를 벗어내려는 수고와 무거운 짐에서 놓임을 받고자 울부짖게 것이다. 나는 젊어서 나도 어쩔 없는 굴레를 쓰고 오랜세월을 울부짖었었다. 멍에를 벗어 버리기 위해 인생을 모두 수고하였다, 지금도 우리 중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멍에를 쓰고 죄의 무게로 인하여 울부짖고 있다.

 

주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멍에는 쉽고 짐은 가벼움이라하셨다. 여기서 주님은 자기의 멍에를 메고 배우라 하셨다. 그것은 바로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배우는 것이다.

 

여기서 온유는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한 품성이다.. 주님은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 하셨다. 또한 겸손은 섬기는 자의 마음 바탕을 뜻한다. 이것이 없으면 교만한 자가 되고 마는 것이다. 따라서 온유한 마음과 겸손한 마음이 주님의 멍에인 것이다. 주님은 멍에를 지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멍에는 가는 소의 목에 얹고 쟁기나 마차를 끌게 하는 도구이다. 멍에는 균형이 바로 잡혀 있어야만 무거운 것이라고 쉽게 끓고 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단과 잘못된 가르침에 치중되어 목에 얹혀진 멍에의 균형이 맞지 않아 믿음 생활에서 떨어져 마음이 강팍해지고 교만해진 생활을 하는가?  그들은 그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하고 달려가지만 결국 얼마 가지 못하여 지쳐 넘어지고 만다.

 

또한 예수님은 자기의 짐을 지라고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짐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십자가라 주님은 이미 우리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온유와 겸손의 멍에를 메고 밭을 가는 법을 배워야 것이다. 그것이 바로 주께서 우리에게 지우신 예수 그리스도의 짐인 것이다..

 

우리가 주의 뜻을 거역하고 교만하면 내 죄악의 멍에를 그 손으로 묶고 얽어 내 목에 올리사 내 힘을 피곤케 하였음이여 내가 당할 수 없는 자의 손에 주께서 나를 붙이셨도다 (애1:14) 기록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즐겨 주의 짐을 지면 성경은 사람이 젊었을 때에 멍에를 매는 것이 좋으니 혼자 앉아서 잠잠할 것은 주께서 그것을 메우셨음이라 (애3:27) 증거하였다.